■ 책 소개
언론인 전호림이 기록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냉철하게 바라본 세상 이야기
이 책의 저자 전호림은 매일경제신문에서 20여 년간 기자로 일한 타고난 글쟁이다. 「매경이코노미」 국장으로 있던 3년 반 동안 매주 쓴 칼럼 중에서 호평받은 작품만을 모아 출간했다. 에세이와 칼럼 형식을 번갈아가며 썼기 때문에 책 전반부와 후반부에서 각기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전반부에는 진한 사람 냄새가 난다. 허기로 남은 보리밭의 추억, 더운 여름 밤 다디달게 먹었던 수박 화채, 적막한 산사에서 얻은 깨달음을 읽고 있자면 그 시절 기억이 손에 잡힐 듯 떠오른다. 후반부에는 본격적으로 사회에 대한 쓴소리를 했다. 인재가 전부인 나라, 그나마도 허리가 끊어진 이 작은 국토는 아웅다웅 말다툼하기에 바쁘다. 저자는 이를 참지 못해 개인, 기업, 정부에 조목조목 "이래서 되겠느냐"며 날카로운 펜을 들이댔다
■ 저자 전호림
매일경제신문사 국제부·산업부·사회부를 거쳐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유통부장·중소기업부장·과학기술부장과 매경이코노미(주간지) 국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매경출판 대표로 재직 중이다. 한국외대와 일본 히토츠바시대(석사과정)에서 수학했다. 지은 책으로는 『디지털 정복자 삼성전자(공저)』『호랑이 발톱을 세워라(공저)』가 있다. 경상북도 어느 시골에서 태어나 엄격한 유교문화 속에서 자랐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와 ‘얍삽하게 살지 않기’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 차례
책을 펴내며
1. 아름다운 시절에
그때 그 어스름, 밥 먹어라 | 뻥튀기 할배 | 호롱불 | 그리워라, 뒤뜰 있는 집 | 설, 고향집, 어머니… | 보리밭, 농밀한 허기로의 추억 | 인생의 본을 떠준 선생님 | 깨끼 한복의 여인 | 그 여름 서울서 온 뽀얀 아이 | 수박화채가 있는 밤 | 사람 한평생이 뭐든가 | 북한산 자락에서 겪은 한밤의 시간여행 | 늘인국, 어머니의 마술 | 동심, 그 티 없이 맑은 세상 | 한 송이 국화꽃을…
2. 사람 사는 풍경
저마다의 은교 | 홀로 떠나는 여행 | 어떤 사랑 | 어느 50대 부부의 별거記 | 아내의 병가 | 두 아들의 죽음 |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 | 아버지 수난시대 | 7월 땡볕 사람 사는 풍경 | 지도를 보면 행복이 펼쳐진다 | 화려한 도시의 이방인 | 부부간의 의리 | 납량특집-본인장례식 | 몸살 | 황금들녘에서 돌아본 우리 삶 | 한 해가 가고 온다는 것
3.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크게 한번 떠나자 | 욕망의 추상화, 욕망의 살균 | 덜 독한 사회로 | 행복의 조건 | 5월 사과 꽃이 스산해 보이는 건 | 치매의 공포 | 지포라이터 콤플렉스 | 맑고 향기롭게 살기 | 우리는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가 | 박사 값 추락의 속사정 | 베이비붐 세대의 쓸쓸한 퇴장 | 빈 의자 | 분배, 그 마법의 영역 | 초대받지 않은 손님, 장수(長壽)| 독백하는 삶 | 카르페 디엠!
4. 기업, 나라의 살림밑천
기업, 망하려거든 오만해라 | 실패하는 경영자 유형 |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 비정규직 방치하면 나라 망한다 | 일본 TV의 몰락…영원한 승자는 없다 | 기업 전성기가 짧아지는 이유 | 삼성전자 실적 쇼크의 이면 | 속도의 마법 | 맛있는 빵집은 가라? | 이케아에 혼쭐나는 가구업계 | 목 넘김이 좋다고? | 기업의 별, 인생의 빛나는 별 | 층간소음, 왜 아래층 사람만 처벌하나 | 도자기 왕국 명성 되찾은 열정 부부 | 신하의 공(功)이 주군을 능멸하면 | 디테일 부재의 오브제들 | 새로운 영웅이 필요하다
5. 국가란 모름지기…
작은 나라가 사는 길 | 진정성, 어떻게 더 보여주나 | 노벨상을 기다리며 | 국가적 힐링이 필요하다 | 경쟁 없는 사회, 줄 안 서는 사회 | 모름지기 대통령의 인사라면 |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선구자 | 위안부 독배 든 아베 | 매뉴얼사회, 임기응변사회 | 고유문화 말살하는 도로명 주소 | 허상을 쫓는 사람들 | 골든타임 지나고 있나 | 1900년대 우리들 모습 | 비정상의 정상화 | 통일되면 가고픈 곳 많아도 | 나쁜 역사는 망각을 먹고 자란다 | 시간의 마법 | 20대엔 뭘 해야 할까 | 착각하는 한국인 | 국사를 제대로 못 가르치니
시간의 뒤뜰을 거닐다
PART 1. 아름다운 시절에
그리워라, 뒤뜰 있는 집
우리는 나무로 얼개를 만들고 흙으로 벽을, 돌로 구들을, 짚이나 기와로 지붕을 이었으니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의 성질을 크게 바꾸지 않고 지은 집에서 살아 온 셈이다. 수천 년을 이렇게 살아온 이 땅의 사람들이 반세기 전부터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갇히게 됐다. 피부가 가렵고 코가 맹맹하고 머리가 띵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요즘 옛집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이루기도 한다. 흙집 짓는 모임, 기와집 짓는 학교도 여기저기 생겨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우리의 마음이 콘크리트 덩어리에 본격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빵틀에서 찍어낸 듯한 도시의 주거공간에서 살면서 해가 갈수록 그리움이 커지는 것은 뒤안(뒤뜰) 있는 집이다. 동화책이나 만화책은 언감생심이고 교과서 외에 읽을거리라곤 전과(全課)나 수련장이 전부였던 시절 뒤뜰은 동화책 수백 권이 꽂힌 창작의 공간이었다.
학교를 파하고 왔는데 어른들은 들일 나가고 없다. 혼자 뒤뜰 감나무 밑에 거적을 깔고 엎드려 숙제를 한다. 재미없으면 혼자서 구슬치기를 하고, 빈 지게에 올라타고 "이랴! 다그닥 다그닥" 한바탕 말 타기를 한다. 쟁기를 끌어내선 소도 매달지 않은 채 "이랴! 이랴! 어허 이놈의 소가~!" 하고 빈집이 떠나갈 듯 아버지처럼 고함도 질러본다. 그것마저 시큰둥해지면 반듯이 누워 깍지 낀 손바닥 위에 뒤통수를 올려놓고 하늘을 쳐다본다. 구름 사이로 건듯건듯 따가운 해가 지나간다. 하늘은 상상의 도화지, 공상의 이야기책이 되어 천 가지 그림, 만 가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다 살포시 잠이 들었는데 어느새 돌아왔는지 "이놈의 자슥이 공부는 안 하고!" 불호령이 떨어진다.
뒤뜰과 함께 꼭 살고 싶은 곳은 처마가 긴 집이다. 처마가 길면 비가 와도 뚝담이 젖지 않는다. 뚝담 위에 비료 포대기를 깔아놓고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 콩죽 끓듯 삐쭉삐쭉 마당에 쏟아지는 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요즘 말로 힐링이다.
경상북도에서 정낭이라고 부르는 변소는 어릴 적 달걀귀신이 무서워 밤중엔 가지도 못하던 곳이지만 지금은 푸근한 기억을 재생해주는 치유의 공간이다. 그 한적한 나만의 공간에 앉으면 머리부터 맑아진다. 정랑 아래서 올라오는 냄새는 어느새 어머니 밥 짓는 냄새와 동격일 정도로 구수해졌다. 옛 장면이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새록새록 살아난다. 그 누추한 공간이 그렇게 느껴지는 건, 물 떠난 물고기처럼 우리가 본래 살던 모습에서 그만큼 유리된 채 살아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서울은 이제 몇몇 동네를 빼고는 어느 못사는 서양 나라의 모습쯤으로 완벽하게 바뀌었다. 그만큼 우리의 주거형태가 우리를 만들어낸 뿌리와 근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얘기다. 오늘 문득 옛집이 그리워지는 건 물길을 거슬러 오를 때가 된 연어처럼 회귀본능이 발동했기 때문일까.
PART 2. 사람 사는 풍경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
나는 연말이면 휴대폰 연락처를 정리한다. 하나씩 넘기며 더하고 지우는 작업을 하다 보면 용케 이름은 남아 있는데 얼굴이 안 떠오르는 사람도 있고, 꽤 친한 사이지만 오랫동안 연락을 못하고 지내는 이도 있다. 확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연락처를 삭제하고 추가하는 작업은 큰 마음공부가 된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이름을 지울 때는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고 잠시 숙연해진다. 그런 명단이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것에서 알게 된다. 깊어서 유속을 느끼지 못하는 강물처럼 세월 역시 유장하지만, 살처럼 빠르게 지나고 있다는 것을. 바로 몇 달 전까지 함께 밥 먹고 거닐던 망자를 지워야 할 때는 기분이 묘해진다. 나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폰에서 지워질 것이다.
더 심란한 것은 살아 있는 사람 이름을 지울 때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 번호를 지우고 있는가? 머리가 자동으로 계산해서 지워라 남겨라 손 끝에 명령을 내리지만 왜 삭제하느냐고 정색하고 되물으면 설명이 궁해진다.
정리하는 대상에는 생돈을 떼였거나 보증을 서주었다가 집을 날리게 한 사람도 들어 있다. 자신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안기고 야반도주해 버린, 그래서 두고두고 고통을 주는 철천지원수의 번호는 절대 못 지운다고 한다. 행여 그 귀신(?)을 찾아낼 단서라도 될까 싶어서 놔둔다는 것이다. 괜한 짓인 줄 알면서도 1년에 몇 번씩 번호를 눌러선 기어이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거나……" 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서야 끊는다. 미워서 지워야 할 이름, 미우니까 못 지우는 이름이 있고, 좋아서 남겨야 할 이름, 좋으니까 저장하지 못하는 번호가 있다.
친구를 사귐에 있어 나에게 득이 될지 손이 될지를 먼저 따지면 소인배라고 어릴 적부터 귀가 따갑게 들으며 자랐다. 세상 모든 사람이 돈 많은 이, 권력 가진 이, 잘생긴 이만 찾아다니면 세상은 얼마나 팍팍하고 흉측한 모습이 될까.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거기에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焉)는 말처럼, 부족한 사람에게서도 배울 게 있는 법이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이라는 책을 쓴 곤도 마리에는 버릴 물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근거로 그 물건에 마음이 설레는지를 보라고 조언한다. 나는 누구에겐가 설레는 사람이었던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안도현 시인의 시처럼 자신은 뜨겁게 살지 못한 인생이면서 상대방이 뜨겁기를 바라는 것은 염치없다. 모든 사랑이 다 뜨거울 수 없듯이 모든 인생이 어찌 다 설렐 수가 있을까?
부부간의 의리
"우리 집사람이 저러고 있는 지 3년도 넘었어. 그래도 내가 홀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지."
올해 예순여섯인 K씨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한 말이다. 그의 집은 행세깨나 하는 가문이었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가세가 좀 기울긴 했지만, 여전히 지방 명문가였다. K씨는 서울로 유학 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무역회사에 다니던 중 지금의 아내와 중매로 결혼했다. 스물넷의 아내는 학업을 마치고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내의 부모님은 좋은 혼처 자리가 났다며 떼밀 듯이 딸을 결혼시켰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K씨는 서울 하숙집으로 복귀하고 아내는 시댁이 있는 시골로 내려갔다. 가문의 법도와 위세에 눌려 감히 간다, 못 간다 말할 엄두도 못 낸 채.
그때까지 단 하루도 같이 살아본 적이 없는 시댁 식구 여덟(시부모와 시누이 다섯, 시동생 하나)을 건사하는 고단한 사람이 시작됐다. 그녀는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엄격한 시집살이를 강요당했다. 농사일과 길쌈은 물론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다. 덩그러니 큰집은 밤이 되면 괴괴하고 무서웠다. 어둠과 적막 속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네온사인 환한 서울의 밤거리를 그리워했다. 처음엔 일주일에 한 번씩 내려오던 남편도 고도성장기 조국의 수출역군이 되어 나중엔 한 달에 한 번 오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시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내는 대소변을 받아 내며 3년을 병구완했다. 법도대로 삼년상을 치르고 나자 이번엔 시어머니가 자리보전을 했다. 또다시 3년을 수발했다. 그녀의 청춘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시어머니 상까지 치르고 부부가 합류했을 때 여자 나이 서른다섯을 지나고 있었다. "꽃다운 청춘은 흔적도 없고 햇볕에 거무스름하게 그을린 시골 아낙 하나가 낯설어진 서울의 어느 모퉁이를 서성이고 있더라"고 아내가 자신을 묘사했을 때 K씨도 함께 울었노라고 했다.
그 긴 세월, 낯선 땅에서 고아 아닌 고아로 산 그의 아내가 몇 년 전 쓰러졌다. 붉디붉은 청춘을 고옥(古屋)에 갇혀 삭혀버린 그녀. 아이들 시집 장가보낸 뒤로는 인생이 허망하다며 숱한 날밤을 괴로워했던 그녀였다. 그러다 젊은 시절 못 했던 걸 하겠다며 문학강좌를 나간다, 꽃꽂이를 배운다, 동창들과 해외여행을 간다, 조금은 인생을 즐기나 싶었는데 저리되고 만 것이다.
그 아내를 남편은 지금 지극정성으로 병구완하고 있다. 갈 때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이야깃거리를 준비한다. 옛날 사진도 가져가고, 떨어져 살던 시절 주고받은 편지도 읽어준다. 하염없이 흐르는 아내의 눈물에 K씨 가슴도 녹아내린다.
"자식들 출가했으니 이제 맘껏 여행도 다니고 재미있게 살아보자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그의 말에 미안함과 애틋함이 진하게 묻어났다. 요즘 그는 친구들과의 왁자한 모임을 자제한다. 진짜로 인생을 즐겨야 할 아내가 저러고 있는데 혼자 웃고 떠드는 건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걸 아내에 대한 의리라고 그는 말했다.
아내에 대한 의리라……. 말은 맞는지 몰라도 어쩐지 씁쓸하다. 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두 사람은 피 끓던 시절 알콩달콩 사랑을 나눌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어쩌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원초적 사람이 아예 저축되어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남녀는 처음엔 사랑으로 산다. 사랑이 식으면 정으로 산다. 운우(雲雨)가 고갈돼 고목처럼 무덤덤해지면 그땐 의리로 산다. 가문과 부모에게 청춘을 바친 아내에 대한 의리라지만 부부에겐 의리보다 사랑이 낫다. 그 말을 듣는 내 가슴도 아프고 시렸다.
PART 3.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행복의 조건
114에 전화를 걸면 대뜸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고 예쁜 목소리가 응대한다. 전화번호 하나 물으려고 한 것밖에 없는데 얼굴도 모르는 여자한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아진다.
사랑은 이처럼 묘약이고 영약이다. 사랑한다는 말에 진짜 사랑이 안 들어 있더라도 엔도르핀을 돌게 하는 마력이 있다. 주체할 수 없이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 몸에선 엔도르핀보다 4,000배나 강한 다이돌핀이라는 호르몬이 나와 통증을 제어하고 면역력을 끌어올린다고 한다. 사랑하면 예뻐질 뿐 아니라 고통도 줄어든다는 것이 과학으로 증명된 것이다.
멜로드라마의 대사 같지만,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에는 사랑만 갖고선 부족하다. 행복에도 일종의 공통분모가 있어서, 이 조건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일정 부분인 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 베이비붐 세대인 50대 남자의 자살률이 급증하는 건 행복의 필수 영양소인 이 부분이 비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정치가 벤저민 프랭클린은 행복의 조건으로 의식주의 구비를 맨 먼저 꼽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만족하지 않은 자,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 욕망의 분모를 매일매일 키워가는 사람에게는 분자에 어떤 금은보화를 올려놓더라도 늘 모자라는 진분수이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홀쭉하다. 타인과의 비교, 시기심 그리고 욕망의 도깨비불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행복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라는 얘기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은 한국인들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먹는다고 분석했다. 이렇게 더 많이라는 무한탐욕의 삼색실로 꼬아가는 행복은 종내 육체와 정신을 파탄에 이르게 할 수밖에 없다.
유럽 천문대는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슈퍼지구 16개를 발견했다고 2012년 발표했다. 그런데 이것이 지구에서 36광년이나 떨어져 있다고 한다. 굳이 계산하면 9조 6,400억 km다. 이 무지막지하고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인간 세상이란 한낱 티끌이다. 중국 시인 백거이의 시구처럼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두고 다투겠는가(蝸牛角上爭何事).
나는 꽃이에요
잎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솔방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게 보냈어요
그래도 난 잃은 건 하나도 없어요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거예요
가을이 오면
- <가을이 오면> 김용택
김용택 시인이 노래했듯이 제가 진 것을 아낌없이 서로 나누는 사회, 그것이 결국 플러스 섬이 되는 사회, 그것이 가장 행복한 사회 아닐까?
PART 4. 기업, 나라의 살림밑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물이 깊으면 검푸르다. 그걸 보고 있으면 섬뜩할 때가 있다. 2011년 10월 6일 타계한 스티브 잡스의 말도 검푸르러 무서울 때가 있었다. 그의 말은 날이 퍼렇게 서 있어서 작두 위를 걷는 듯한 내공을 느끼게 했다. 그중 하나가 디자인에 관한 생각이다. "사람들은 디자인이라고 하면 어떻게 보이느냐를 의미하는 겉치레로 생각하지만 실은 디자인이란 어떻게 작동(기능)하느냐의 문제다."
이처럼 그는 디자인을 화장발 잘 받는 여인의 얼굴쯤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외관의 근사함에만 현혹되면 오리지널과 흡사하게 만든 중국산 짝퉁도 멋진 디자인의 범주에 속할 수 있다. 아이폰이 처음 나왔을 때의 충격은 유려한 디자인에서라기보다 내부 작동원리의 독창성과 기능의 의외성 때문이었다. 디자인의 본질을 꿰뚫어본 그의 말은 창작의 현장에서 뒹굴고 절차탁마(切磋琢磨)라며 체화한 것이다. 마치 땀방울이 몸속에서 송글송글 돋아나듯 작동이 충만해서 겉으로 넘쳐 나오는 현상이거나, 내공이 주체를 못 하고 밖으로 번져 나온 것이 그가 말하는 디자인일 성싶다.
우리의 정수리를 치는 그의 또 다른 언어는 단순함에 대한 고갈이다. "단순함은 복잡함보다 더 어렵다. 생각을 단순화하고 명료하게 다듬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번 그런 단계에 도달하면 산도 움직일 수 있다."
마치 장자의 우화와 같은 말이다. 소는 한 장의 가죽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다. 소의 배를 가르고 속에 든 것을 모두 끄집어낸 뒤 다시 집어넣어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려면 처음보다 두 배의 가죽이 있어야 할지 모른다. 복잡함의 단순화는 이럴 때 요구된다.
소가 하나의 생명체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구성요소들을 통합하고 압축하고 취사(取捨)하는 과정과, 여러 신체기능들을 녹여서 다시 빚어내는 생명의 재창조적 단순화가 없으면 원래 크기, 원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사물의 거죽에서 뼛속까지 연결되는 일련의 작동원리와 기능을 완전히 분석하고 파악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처럼 궁극의 단순화와 바위를 뚫는 집중력을 갖췄기에 산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의 작동(산업의 줄기를 바꾸고 시대의 획을 긋는)이 가능했던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등진 당일 삼성전자와 LG전자 주가가 급등했다. 그야말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들었다 놨다 한 사건이었다. 적장(敵將)의 죽음이 아군의 평온을 담보하는 현실이라……. 왠지 불안하고 꺼림칙한 현상이었다.
이런 종속성을 벗어나는 길은 아류의 길을 탈피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미국과 유럽에서만 1만 수천 건의 이동통신 관련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애플은 그 수가 삼성의 10분의 1이다. 얼핏 삼성의 대단한 특허 파워에 놀라게 되지만, 시각을 바꾸면 1만여 병사가 1,000여 명 특공대를 못 당한 셈이 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것이다.
그럼, 애플은 삼성의 10% 병력으로 어떻게 그런 전과를 올렸을까? 잡스의 컨버전스에 대한 집착, 소프트웨어에 대한 탐욕(?)이 원동력이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70%의 수익을 보장한 것이 그것을 웅변한다. 그의 사전엔 허우대(하드웨어)만 멀쩡하다는 말이 없다. 트랜스포머처럼 멋진 허우대를 가졌다면 당연히 스마트하게 작동하는 영혼(소프트웨어)도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제품의 생산에서 판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 부가가치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짚어내고, 그 공과를 착오 없이 인정하고 배분해줬다. 애플에 영양가 있는 소프트웨어가 구름처럼 모이게 하는 작동원리다.
비정규직 방치하면 나라 망한다
경제활동인구 2,500만 명. 그중 600만 명이 비정규직이다. 800만 명을 넘는다는 얘기도 있다. 과거엔 여성이나 노년층, 장애인들의 일자리로만 여겨졌던 비정규직이 이제 대졸 이상 고학력자들까지 빨아들이면서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건 2030이다. 이들은 대개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다. 아버지 세대는 퇴출 행렬에 들어섰고, 아들 세대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있다. 김화수 잡코리아 사장은 "한번 비정규직이라는 트랙에 올라타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며 안타까워했다.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국가조직은 대체로 리더가 10%, 리더의 명을 받아 조직을 끌고 가는 실행부대 격인 차상위급이 20~30%, 나머지는 현장에 배치돼야 한다. 기업이나 군대조직도 비슷비슷하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대학졸업자가 80%에 육박한다. 너도나도 지휘봉만 잡겠다고 나서는 형국이니 머리만 큰 기형이 돼버린 것이다. 사회는 이미 이 많은 대졸자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설령 대졸자 전원이 서울대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그중 누군가는 현장으로 가야 하게 돼 있다.
또 하나, 일자리가 늘지 않는 구조가 이미 고착화됐다. 국민소득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자리는 늘지 않고 있다. 있는 일자리도 정규직이 나가면 비정규직으로 대체되는 사례가 허다하다. 비정규직 스펙도 정규직 못지않게 우수할 뿐만 아니라 정규직은 일단 채용하면 필요할 때 자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국은 이미 대부분 산업에서 대형투자를 끝냈다. 거대 산업을 일으킬 분야가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IT의 등장은 설상가상으로 일자리를 줄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입력하는 사람만 있으면 중간과정은 컴퓨터가 처리해주기 때문에 결과를 판단하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 입구와 출구만 있고 속은 빈 깡통 모양의 고용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비정규직은 달콤하다. 그러나 비정규직이 일정 수준 이상 되는 조직은 활력이 없다. 구성원들이 근성이나 애착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에 대한 로열티도 소속감도 없다. "현장에 위험물이 방치돼 있어도 내 회사가 아니라고 생각해선지 남의 일 보듯 지나치더라"고 어느 중소기업 경영자는 말했다. 그런 조직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제품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기업들은 양질의 전력, 잘 닦인 물류망, 우수한 협력업체, 고학력의 노동력, 제품을 사주는 소비자, 주권을 지켜주는 국가 덕분에 물건을 팔고 이익을 남긴다. 그렇다면, 기업이 스펙 멀쩡한 젊은이를 정규직 임금의 절반만 주고 쓰는 건 사회와 국가를 배반하는 행위다.
이들, 한창 일하고 인생이 즐거워야 할 세대를 팽개쳐놓고 사회가 건강할 리 없다. 사회통합도 공염불이다. 2030 젊은이는 묻는다. "한미 FTA를 하면 우리한테 뭐가 좋은가요?"라고. 삼성, 현대차가 돈을 많이 벌고 그 직원들은 월급이 올라갈지 모르지만 국외자에겐 이득도 없을뿐더러 아무런 감동도 못 준다. 어디가 잘못됐건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는데 왜곡이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뒤틀어진 소득배분 시스템을 방치하고, 국가의 희망이어야 할 젊은이를 무직자로 놔둔다면 대한민국에 미래는 없다.
논란이 되고 있는 퍼주기 식 복지 포퓰리즘은 물론 안 된다. 그렇지만 국가를 이어갈 다음 세대가 일자리를 달라는데도 주지 못하는 사회, 가정을 꾸려갈 수준의 임금을 못주는 사회는 심각하다. 이건 국가 존립에 관한 문제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다. 한쪽은 일에 치이고 한쪽은 일자리가 없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는가. 기업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중구조를 방치하고 노동개혁을 게을리 하면 우리도 일본처럼 비정규직 천지가 될 것이다.
일본은 전체 근로자의 38%가 비정규직이다. 기업들은 정규직이 그만두면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그들의 임금은 어림잡아 정규직의 60%선. 국가 전체로 보면 소비여력이 있을 리 없다. 물건을 사주지 않으니 상품가격을 내리게 되고 그런 시간이 길어지다 장기침체에 빠져들었다. 우리도 이대로 가면 똑같은 재앙을 만날 것이다. 이미 그런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PART 5. 국가란 모름지기……
고유문화 말살하는 도로명 주소
도로명 주소가 도입된 지 1년이 지났다. 17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4,000억 원이 들어갔다는 새 주소 체계다. 이를 사용하는 국민은 2015년 1월 기준 70%에 달한다고 정부는 주장한다. 멀쩡하게 잘 쓰던 주소 체계를 왜 바꿨을까? 정부는 일제가 만든 지번체계가 현실에 맞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러나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국민이 많다. 정부는 국민들이 동의를 해서 시작했다고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잘 모르고 있었다. 국민투표를 해서 국민의 뜻을 확인한 것도 아니다. 살기 바쁜 국민들이야 정부가 나서서 한다고 하니까 그냥 두고 봤을 뿐이다. 세종시가 설마 하는 새 옮겨 갔듯이 새 주소체계도 그런 측면이 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시행에 들어가니 국민들이 안되겠다 싶어서 헌법소원까지 낸 것이다.
정부 주장과는 달리 도로명 주소 시행 이후에도 상당한 국민들이 옛 주소를 그대로 쓰고 있다. 일제의 잔재라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이 이유라면 웬만한 정부 부처명과 우리가 일상생활에 쓰는 국어의 상당 부분을 바꿔야 한다. 일제가 만든 것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서울의 동 이름만 해도 당장 명동(明洞)이니 신촌(新村)이니 하는 것부터 바꿔야 한다. 역사의 거리 인사동도 일제가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다.
어떻게 보면 도로명 주소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이다. 수천 년간 지속돼 온 유서 깊은 이름도 있고 역사의 변곡점마다 붙여져 역사 자체가 된 이름도 있다. 그런 동 이름이 죄다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정부는 새 주소가 싫어서 바꾸고 싶다면 주민의 2분의 1 이상 동의를 얻어서 고칠 수 있다고 한다. 국민이 왜 그런 수고를 해야 하는가? 정부가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강제로 시행한 정책에 대해 국민 에너지를 그렇게 뺏어도 되는 것인가? 정부는 한국인이 현실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아파트 이름도 빼버렸다. 그것이 얼마나 큰 혼란을 주는지 모른다. 국민의 교감 없이 추진된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다.
우리 문화는 거리를 따라 생성된 것이 아니다. 동 단위, 마을 단위로 발전해왔다. 온갖 이야깃거리도 그 안에서 생겨났다. 김삿갓 방랑기는 전라도 어느 고을, 경상도 어느 마을을 따라 전개된다. 선(線)이 아니라 면(面)의 개념이다. 유럽은 처음부터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미국 또한 인디언을 쫓아내고 마음대로 줄을 그어 주소를 만들었다. 각 문화는 제 나름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25-11 한진해운빌딩은 서울 영등포구 국제금융로 2길 25로 바뀌었다. 여의도동이라고 주석을 달지 않고 국제금융로라고 하면 과연 몇 사람이나 알아볼 수 있을까? 그뿐 아니라 역사적 지명인 여의도는 사라진다. 여의도는 나의 섬 너의 섬이라고 부른 데서 나왔다는 설부터 너른 섬 또는 너도 섬이냐?는 뜻까지 설이 다양하다. 어느 쪽이든 일제가 비행장을 지었고, 1922년 한국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이 모국 방문 비행을 하기도 한, 우리의 삶이 녹아 있고 이야기가 숨 쉬는 공간은 잊히게 된다.
여의도가 국제금융가라 그런 이름을 지었다면 앞으로 지명을 수시로 바꿔야 할지 모른다. 새 주소를 보면 LCD로, 부품 모듈화 산업로, 스포츠로 같은 생소하고 즉흥적인 것들이 많다. 이런 식이면 30년, 50년 지나 해당 산업이 쇠퇴하고 식당이 들어서면 먹자로가 되고, 자전거산업 클러스터가 들어서면 자전거로가 돼야 할지 모른다.
정부는 기존 주소체계가 복잡하고 효율이 떨어져 1996년부터 이 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1996년 당시는 스마트폰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웬만한 국민은 거의 다 갖고 있어서 아무리 국토의 구석에 꼭꼭 숨겨놔도 내비게이션과 지도가 내장된 스마트폰만 있으면 찾아낸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국민 세금을 축내면서 굳이 추진하려는 걸까? 이미 수천억 원을 썼기 때문에 중단할 수 없다면 20조 원을 쓰고도 큰 후유증을 남긴 4대강 사례를 참고하기 바란다. 인천 월미도 모노레일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1,000억 원 가까이 쓴 모노레일은 결국 철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만두는 게 낫다는 얘기다. 전국의 몇몇 지자체는 주민의 뜻을 확인하지 않고 추진했다가 적자를 낸 사업에 대해서 소송을 당하고 있다. 어떤 곳은 사업을 추진한 관계자에 대해서도 형사고발과 함께 민사책임까지 물을 태세다. 중단해도 아무 불편이 없는 새 주소체계를 극구 추진하다 나중에 국민에게서 비슷한 소송을 안 당한다는 보장이 있을까?
박근혜 정부의 지상과제는 창조경제를 진작하자는 것이다. 창조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수호지』, 『겐지모노가타리』,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는 모두 마을과, 마을이 연계된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새 주소체계를 도입하면 사라질 이름이 전국에 4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서울 사람들도 유서 깊고 정겨운 이름들, 이를테면 싸리골, 청량리, 오금동 같은 지명이 사라진다고 우려한다. 그 많은 이야기의 보고를 마치 불도저로 밀어버리듯이 하는 건 문화 말살 행위가 아닌가?
정부는 수년 전에도 일제가 도입한 도량형을 글로벌 기준에 맞춘다면서 국민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싹 바꿨다. 그 결과 32평 하면 딱 떠오르던 공간 개념에 혼란이 생겼다. 정작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하는 미국은 여전히 골프엔 야드, 거리엔 마일, 휘발유엔 갤런을 쓴다. 영국도 파운드를 쓰고 일본은 여전히 넓이를 재는 데 다다미 몇 장을 쓰고 평(坪)을 쓴다. 지금은 개발연대가 아니다. 이미 국민의 지식수준이나 생각의 깊이가 정부를 능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제도를 바꾸면서 왜 일반 국민의 뜻을 물어보지 않는가? 민간보다 결코 더 우수하지 않은 그들이 그렇게 독단적일 수 있는 권리는 대체 누가 부여한 것인가?
인간은 태어나 자라면서 그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유해야 할 인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새겨나간다. 그렇게 새겨진 것들이 세월과 함께 설화가 되고 때론 전설이 된다. 그것이 모티브가 되어서 시, 소설, 드라마가 되고 문화콘텐츠가 된다. 누가 알겠는가? 『해리 포터』를 능가할 대작이 이 땅에서 나올지.
국민을 무시한 새 주소 체계는 국민을 불편하게 할 뿐 아니라 무한한 상상의 샘물을 묻어버리는 실패작이다. 그러니 하루빨리 옛 주소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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