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머스 Famous

   
테드 스미스(역: 김현성)
ǻ
매직하우스
   
15800
2015�� 01��



책 소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인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인가?

 

테드 스미스 에세이. 2012, 2013, 2014년 한국프로야구에서 선수들 못지않은 뉴스를 생산하고 야구 보는 재미를 더욱 높인 사람, 바로 캐나다인으로 넥센 야구에 미친 테드 스미스이다. 2013년 테드 스미스는 넥센의 홈경기뿐만 아니라 원정 경기까지 모든 경기를 관람했다. 그냥 관람한 것이 아니라 북치고 꽹과리 치며 관중석의 분위기를 장악하면서 관람했다.

 

이 책은 테드가 바라본 한국 야구의 모습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거침없이 도전하는 테드의 이야기를 통해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고 잘 할 수 있는 일, 돈이 되는 일에 모든 것을 걸게 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지금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위하여 당장 도전해보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저자 테드 스미스

캐나다 알버타주 캘거리 출생. 테드는 윌리엄 애버하트 고등학교 재학 중에 농구와 트랙 선수로 활동했고,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시절엔 학교를 대표해 응원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맥길대학교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였고 동아시아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했다. 맥길대학교 재학시절엔 응원 동아리 파이트 밴드를 조직하여 응원단장으로 대학시절 내내 활동했다. 현재 201194일엔 대전 한밭 경기장에서 프로야구팀 넥센 히어로즈 응원단장으로서 공중파 방송에 첫 출현하게 된다.

 

역자 김현성

, 번역 프래랜서이며 야구 스카우트로도 근무하고 있다. 2013년에는 WBC에서 통역으로 활동했고, 현재 국내 야구를 외국인들에게 소개하는 블로그(baseballinkorea.com)도 운영하고 있다.

 

차례

프롤로그 : 전 국민이 너를 알아!

 

1: 대한민국

2: 라이세움

3: 미국의 위대한 게임

4: 서울의 영웅들

5: 테드찡

6: 예전의 나

7: 500번의 투구

8: 후 아이 엠

9: 해빙

10: 생애 최고의 여름

연장 11: 또다시 가을은 오고

연장 12: 올인

연장 13: 이렇게 끝이야?

 

작가후기




페이머스 Famous

전 국민이 너를 알아!

2013년 3월 2일, 대만 타이중시 탄즈구 리츤호텔

전화를 받은 건 밤 11시 반 경이었다. 서울에 있는 조동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하고 말을 하기도 전에 동기는 “Dude!”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 졸업반일 때 몬트리올에서 만났으니, 동기를 안 지는 어언 4년이 됐다. 당시에는 영어를 거의 못하던 동기에게 dude라는 말을 가르쳐 준 게 나였다. “Dude, 중계방송에 네가 나왔어! 아나운서들도 네 얘기를 하고! 전 국민이 너를 알아!”


“전 국민이?”


‘그럴 리가…’ 하고 생각했다. 한국은 인구가 5천만에다 산업화를 졸업한 나라다. 대개 애국심이 강하고 관람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국가대표팀이 경기를 할 때마다 시청률은 동 시간대 최고를 기록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 국민이라고?동기는 과장을 하는 게 분명했다. 기껏해야 천만 명 정도겠지.


“몇 회에 내가 나왔는데?” 내가 되물었다. 7회 이후라면 다들 채널을 돌렸을 터였다. 3월 2일에 한국은 201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첫 경기에서 네덜란드에 영패를 당했던 것이다.


“기억 안나, 근데 dude… 너 진짜 유명하다고.” 동기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문득 그 말뜻이 이해가 됐다. 내가? 유명해? 그럴 수도 있겠지. 그저 예전에 비해서는 조금 더 유명한 정도랄까.


그 날 내가 북을 들고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박수갈채를 받기는 했다. 뉴스 카메라와 리포터들은 ‘넥통령’과 인터뷰를 하려고 줄을 섰고, 몇 십 명의 야구팬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유니폼을 입고 야구 경기장에 입장할 때면 꼭 어느 정도의 반응이 뒤따라왔다.


혹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나는 야구 선수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야구를 해 본 적도 없다. 야구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면 기껏해야 회사 사람들과 했던 소프트볼 정도지, 다시 말하자면 선수도, 스카우트도, 기자도 아니다. 나는 응원단장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응원단장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 테지만 한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응원단장이란, 동아시아 스포츠 문화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일종의 전문직이다. 응원단장은 응원을 이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치어리더이지만, 일반적인 치어리더보다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진행자, 연설자, 싱어송라이터, 댄서, 드러머,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합쳐 놓은 자리인 것이다. 응원단장은 관중의 열정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면서, 관중이 본디 가지고 있는 힘에 모양을, 형상을, 더 높은 이상을 부여해야 한다. 제각기 다른 소리를 하나로 모은다는 점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응원단장은 사실 돈을 받는 직업이다. 하지만 내 경우는 직업이 아니다. 나는 아마추어니까. 아니, 그보다는 응원단장 트레이닝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사로 있는 곳인 서울의 신생 팀인 넥센 히어로즈를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이다. 내가 넥센을 위해 튀는 짓거리를 하고 다닌 탓에 한구그이 야구 커뮤니티 내에서는 말이 많았다. 요란한 의상을 입고, 원정 경이게 가서 무시무시한 홈 팬들과 맞서고, 각종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를 짊어지고 나타나는 등 말이다. 이따금씩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원정 경기에 가 보니 내가 유일한 넥센 팬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대만에서도 그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3년 3월 6일, 대만 타오위안현 타오위안국제공항

다음날은 잔뜩 흐리고 비가 왔지만, 대만으로 출발했던 날보다는 따뜻했기에 안양천에서 산책을 감행하기로 했다. 아파트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나서는데,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던 웬 중년의 아저씨가 길을 막았다. 시간은 아침 열 시 반쯤이었다. “어이 거기 너!” 아저씨는 느닷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걔 아니냐? 그 뭐야, 넥통령 걔?”


나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 네… 전데요. 왜요?”


“전번에 너 티비에서 봤다. 대만에 간 거. 너 짜식 잘했어. 그 놈들이 실망을 시켜서 그렇지. 너는 임마 좋은 놈이야. 니가 비록 겉은 백인이지만 속은 한국인인 거 다 알아.” 아저씨 딴에는 칭찬을 한 것이었으리라. “여기 앉아라, 같이 술이나 마시자.”


안될 거 뭐 있나.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나는 그 아저씨와, 아저씨의 다혈질 친구들과 함께 한 시간 정도 술을 마셨다. 나는 원래 모르는 사람들과 종종 술을 마시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날 아침이 특별했던 이유는, 유니폼을 입지 않았는데도 누가 나를 알아봐 준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나는 옷을 입고 안 입고에 따라 자아가 두 개로 분열된 상태였다. 그 자아는 슈퍼맨과 클라크 켄트같이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이였는데, 이제야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사람들은 진짜 나를 알아주었다.


그로부터 몇 주간, 더 많은 신문 기사며 방송이 쏟아지자, 내 이름도 덩달아 블로그와 인터넷 채팅방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진실은 물론 각종 추측도 쏟아졌다. 어딜 가든지, 사복 차림의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3월 중순에는 3일 내내 밥값도 음료수 값도 낼 필요가 없던 날들도 있었다. 어떤 식장이나 카페, 바를 가더라도 사람들은 나를 티비에서 봤다며 기꺼이 내 몫까지 내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런 일들은 한국을 떠나서도 계속되었다. 도쿄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나를 아는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25일에는 한국의 내 아파트로 돌아와, 기적 같은 티비 출연 요청이나 책 계약을 기다렸다. 당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뭐 어쨌든 동기의 말은 옳았다. 내가 유명하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대한민국

1회초

2008년 8월 22일, 중국 베이징 우커송야구장</P>7회 말. 올림픽 4강전의 점수는 2대2를 기록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극동의 두 강국은 비록 유전적, 언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피로 얼룩진 지난 400년간의 반목으로 인해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였다. 2대2의 동점 상황은 두 나라간의 갈증을 제대로 나타내는 듯 했다. 일본의 구원 투수 이와세 히토키는 김현수를 삼진시키고, 이용규가 1루에 남았다. 1사 1루 상황에서 이승엽이 타석에 섰다. 지구 반대편, 아직 8월 21일인 캘거리에서 나는 소파에 앉아 생중계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이승엽은 단번에 두 개의 스트라이크를 쳤다. 이와세가 다시 공을 던졌고, 이승엽은 파울을 치고는 플레이트에서 물러섰다. 아나운서들은 예선전과 비교해서 이승엽의 기록이 실망스럽다는 얘기를 하는 참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승엽은 엄지손가락 부상을 입은 채 0.136의 타율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결정적인 투구였다.


공을 치는 것만 보고도 홈런이라는 감이 올 때가 있다. 그런 감은 오지 않는 타격이었다. 공은 높이 솟았고,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이나바 아츠노리가 펜스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관중석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우렁찬 함성으로 변했다. 공이 그의 바로 위 외야석에 떨어지는 순간, 이나바는 포기한 듯 팔을 내렸다.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32살의 이승엽이 입을 헤 벌리고 어리버리한 웃음을 띤 채, 만세를 부르며 베이스를 도는 모습은 마치 엄마를 쫓아가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 장면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플레이트에서 이용규와 양 손으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더그아웃에서는 잃어버렸던 형제를 찾은 것 마냥 환대를 받는 동안 표출된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보고, 나는 한국인의 정이란 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정은 가족 간의 유대와 같은 것인데, 커뮤니티 전체로까지 아주 자연스럽게 퍼져나간다. 크건 작건, 목적이나 경험을 공유하는 어떤 단체에나 정이 존재한다. 아무튼 이것이 무엇이든 간에, 티비를 통해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정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경기를 놓칠 수 없었다.


4강전이 끝나고 결승전이 시작하기까지의 28시간 동안 사실 나는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섰다. 이제 맥길대학교에서 졸업반이 될 참이었는데, 지난 몇 달 간 수강신청과 졸업 여부를 묻는 이메일을 줄곧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강이 1주일 남짓 남은 이 시점에 마지못해 수업 시간표를 짜기 시작했다. 그제야 깨달은 암담한 사실은, 모든 수업을 다 들어도 졸업하기에 3학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나는 1학년 때 한 번 낙제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코웃음을 쳤지만 3년 후 이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하지만 학교를 한 학기 더 다녔다가는 졸업 후 계획이 모두 뒤틀릴 터였다. 다행이 맥길에는 보통의 3학점짜리 수업과는 다르게, 주 5일 수업에 학기 당 4.5학점을 받을 수 있는 집중 어학 코스가 있었다. 1년짜리 집중 코스에 다른 수업 네 개를 들으면, 딱 3학점을 더 채워 제때 졸업을 하고 어른들의 세계로 갈 수가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무슨 수업을 골라야 하나? 시간표에도 들어맞으면서, 전공 요건도 충족시키는 수업은 한국어와 스페인어뿐이었다. 때마침 올림픽 금메달 전에서는 한국과 쿠바가 맞붙는 상황이라, 나는 아주 단순한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이 이기면 한국어 수업을, 쿠바가 이기면 스페인어 수업을 듣기로. 그리고 이승엽은 또 한 건 했다.


1회에 좌측으로 날린 2점 홈런은 그대로 쿠바 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나에게 새로운 영웅이 생김과 동시에 고민 역시 해결되었다. 그 주 주말에 나는 학교가 있는 몬트리올로 떠났고, 한국어 수업 첫 시간에 한국 이름을 정하게 되었다. 수업을 같이 들은 친구들은 여전히 나를 이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다. 승엽 스미스.



서울의 영웅들

4회초

2011년 4월 3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잠실야구장

2011 롯데카드 프로야구가 개막하던 주 주말, 두산 베어스는 라이벌인 LG 트윈스와 맞붙을 예정이었다. 이직 팀을 정하지 않은 나는 참관만 하러 갔다. 프로 야구 팀이 3개나 있는 도시에 온 덕에, 응원할 팀을 실제로 고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야구는 보통 민주화 된 나라에서 하는 스포츠니까 모드들 이론적으로는 응원할 팀을 고를 수 있는 게 맞겠지만, 그런 식으로라면 카톨릭의 자유 의지와 개신교 칼뱅주의의 예정설 간의 논쟁 역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라야 한다.


이 말인즉 스포츠 팀이란 대개 사람이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 사람이 태어난 장소, 아니면 그 부모가 누구인지에 따라서 말이다. 물론 운명을 거스르며, 자신에게 부여된 팀을 응원하기를 거부하는 반동분자들도 있다. 스포츠 팬으로서 나는 이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지만, 합당한 이유가 있는 탈선이라면 용서할 것이다.


나는 기왕 서울에 살게 됐고 최소한 1년은 여기 있을 테니, 응원할 팀이 있는 편이 좋았다. 서울에는 한 개가 아니라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 넥센 히어로즈라는 세 개의 야구팀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나는 아무 팀이나 고를 수 있었다. 제일 강한 팀을 골라 드디어 플레이오프에서도 응원을 하든지, 내 옷들과 제일 어울리는 유니폼이 있는 팀을 골라서 야구장에서 스타일을 뽐내든지, 치어리더가 가장 예쁜 팀, 응원가기 좋은 팀 등 멋대로의 이유를 갖다 붙이면 그만이고, 그럴 자격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원칙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지. 나의 다른 원칙들과는 달리 스포츠 원칙만큼은 아주 확고해서, 절대 예외가 없고 타협이 불가능하다. 마음을 정하기에 앞서 각각의 팀 경기에 몇 번 가서, 홈 응원석에 앉아 분위기를 본 다음, 느낌이 오는 팀을 응원하리라 마음먹었다. 스포츠 팬들이 원래 직감을 잘 따르는 편이다. 말이 안 될 지라도 이게 우리의 방식이다. 이거다! 싶은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거다. 왜 그 팀을 응원하게 됐는지 나중에 누가 물으면, 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생기기를 말이다. 그 순간은 8월 중순에야 찾아오게 되지만 내 마음은 그 전에 정해진지 오래였다. 이상하게도 결국 그렇게 된 계기는 야구 실력도, 유니폼도, 치어리더도, 응원가도 아닌, 바로 날씨였다.


2011년 4월 5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목동야구장

지난 이틀이 너무 더웠던 탓에 나는 코트를 집에 두고 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초봄에 이미 오후 기온은 17도를 찍었고,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었다. 5시 반에 일을 마무리하고 경기를 보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넥센이 홈 경기장인 목동에서 두산과 붙는다는데 1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에 일하던 중 구단에 대해 검색을 좀 해봤다. 서울 히어로즈 베이스볼 클럽은 2008년에 창단했으나, 팀의 비공식 역사는 리그가 창설된 198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변신을 거듭하며 필드를 누볐다. 구단주가 이렇게 여러 번 바뀐 것으로부터 짐작할 수 있을 테지만, 인천에 연고를 두던 시절에는 지지리도 못하는 팀이었다. 첫 10시즌 동안 다섯 번 꼴찌를 했고, 1985년에는 자그마치 18연패라는 리그 기록을 달성했다.


그 후로도 성적은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1996년 현대 그룹이 팀을 인수하면서 바야흐로 유니콘 시대가 막을 올린다. 현대 유니콘스는 1998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하고, 팀은 인천에서 수원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들은 계속해서 2000, 2003, 2004년에 챔피언십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홈구장의 경기 당 평균 관객은 3,000명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2007년, 결국 지난 10년 간 가장 성공한 팀이 해체되어 팔려가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여기서 개인 투자자들이 팀의 잔해를 사들여 서울 목동에 새 클럽을 차린 것이다. 우리 히어로즈라는 이름을 달고 첫 두 시즌을 보낸 뒤, 그 다음 2010 시즌부터 넥센 타이어를 타이틀 스폰서를 하여 팀은 지금의 모습이 됐다. 과거의 충실한 팬층은 고스란히 목동으로 데려왔지만, 히어로즈는 유니콘스라는 이름과 역사, 그리고 찬란했던 성적마저도 수원에 두고 온 듯 했다.


그때까지도, 올해는 다를 거라는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히어로즈는 문학야구장에서 치른 첫 원정 경기에서 SK에게 참패를 당했고, 목동에서의 첫 홈 경기에 모습을 보인 팬도 고작 몇 백 명이 다였다. 홈 팬들보다 두산 팬들이 세 배는 숫자도 많고 목소리도 큰 걸 보고 나도 경기장을 가로질러 두산 쪽에 앉을까 살짝 생각했지만, 결국 3루 측 내 자리를 지켰다.


2회가 시작할 즈음 이미 해는 지고 기온은 7도 아래로 떨어졌다. 의자에 앉아 이를 부딪치며 덜덜 떠느라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 상황에서 집에 갔겠지만, 나는 스포츠 게임에 관해서만은 거의 강박증이 있다. 티켓을 사서 들어온 이상, 결과를 보기 전까지는 경기장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공수를 교체하는 동안 뭐라도 걸칠만 한 옷을 사러 나갔다.


이곳에서 파는 유일한 겉옷은 히어로즈 공식 팀 재킷이었다. 폴리에스테르 재질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자태에 밤색 가슴팍에 흰 소매로 된 80년대 투톤 버튼업 스타일. 완전 마음에 들었다. 넥센이 2회에 공격으로 나올 때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상당히 흥미로운 경기였다. 내가 이틀 전에 잠실에서 보았던 일방적인 경기가 아니었다. 곧이어 6회말 장영석의 출루, 대주자 김민우는 상대팀 실책으로 3루까지 진루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종욱의 타구가 우중간으로 떠올라 김민우는 곧장 태그업에 성공한다. 최종 스코어 4대3 넥센의 승리였다.


매우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경기장을 나섰다. 모기 물린 데가 더 이상 가렵지 않을 때나, 점심을 굶은 다음 푸짐한 저녁을 먹을 때처럼 말이다. 신길 집에 돌아와서 새 재킷을 옷장에 고이 걸고, 침대에 앉아 한동안 재킷을 바라보다 생각이 들었다. 이걸 갖고 있으면서 넥센 팬이 아니라면 심히 멍청해 보일 텐데. 아무래도 조만간 목동에 다시 가야겠군.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