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공지영
ǻ
분도출판사
   
16800
2014�� 11��



책 소개

 

그날 이후로 나의 삶은 아마도 영원히 바뀌어 버렸다!

작가 공지영의 영적 고백록.

 

13년 만에 출간되는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그 두 번째 이야기. 수도원 기행 첫 권에서 작가는 18년 만에 교회와 신앙 그리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 달간의 유럽 수도원 기행을 통해 자신과 인간, 신에 대한 성찰을 담담히 풀어낸 바 있다. 그녀의 수도원 기행 두 번째 이야기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13년의 부침과 여러 사건을 통해 그녀의 신앙과 하느님 체험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이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공지영과는 다른 공지영임을 당당하게 혹은 당돌하게선언한다. 이 책 속에는 젊은 나이에 이미 괄목할 만한 문학적 성취와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라 작고 가녀린 한 여인이 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유럽의 수도원을 배경으로 수도원의 기도와 노동이 주는 의미, 씨줄날줄로 얽힌 사연, 저자를 변화시킨 각별한 인연들을 비롯해 그녀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 공지영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도가니』『즐거운 나의 집』『사랑 후에 오는 것들』『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봉순이 언니』『착한 여자』『고등어』『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시작등을 썼고, 소설집 인간에 대한 예의』『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별들의 들판, 산문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르포르타주 의자놀이, 앤솔로지 사랑은 상처를 허락하는 것이다등을 썼다. 21세기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가톨릭문학상, 2011년 월간 문학사상에 발표한 맨발로 글목을 돌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차례

수도원 기행 2를 펴내며

들어가는 글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그는 그냥 여기가 좋다고 했어요. 조용히 있는 게 좋다고. - 뉴튼 세인트 폴 수도원

그분이 내게 허락하신 일 - 상트 오틸리엔 대수도원

조용하고 친절하며 따뜻했고 그리고 단순했다. - 뮌스터슈바르차흐 수도원

마리아야, 괜찮다. 다 괜찮아. - 쾰른 카디날 슐테 하우스

다만 당신과 함께 걷게 해 주십시오. - 파리 기적의 메달 성당

내 머리칼 하나 건드릴 힘이 네게는 없다. - 몬테카시노 수도원

왜 이 동굴, 왜 이 광야였을까? - 수비아코 수도원

사막으로 가서 나와 함께 있자. - 카말돌리회 산 안토니오 수녀원

그 사막, 그 침묵의 절정 - 카말돌리 수도원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 아빌라

 

나가는 글

후기

참고한 책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봉순이 언니』를 끝으로 칠 년 동안 글을 쓰지 못한 때가 있었다. 어린 시절도 아니고 나이 마흔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마다 소주 한 병을 탁자 위에 놓고 달랑 한 채 되는 이 집을 팔아서 시골로 가고, 남은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 이런 되지 않는 셈을 했던 것은 이제는 내게 주어졌던 재능이 내 손을 떠나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왜관수도원을 찾아간 이유는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쓰기 위해서였다. 십여 년 전쯤인가 송봉모 신부님의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한국전쟁 중 미국의 어떤 배가 미국이 철수하는 흥남 부두에서 인민군과 중공군에 쫓기는 피난민들을 구출한다. 그가 배 한 척에 태워 구출한 인원은 만사천여 명. 그것은 기네스북에 기록될 만큼 많은 인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배는 화물선이었고 정원은 열두 명이었다. 이건 세계 항해사에 기록될 만한 기적이었다. 그 선장은 전쟁이 끝난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51년 후인 2001년 어느 날 왜관의 수도원으로 제의가 들어왔다. 노후한 미국의 수도원을 인수해 달라고 말이다. 일단 탐사차 거기 도착한 수사들은 한 늙은 수사님이 한국 수사들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그를 만났다. 노(老)수사는 한국전쟁 이후 종적을 감추었던 바로 그 선장이었다. 늙어 병든 그가 바로 한국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뜻한 바 있어 처음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왜관에서 파견된 수사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이틀 후 선장 출신의 수사는 숨을 거두었다. 마치 그 이야기를 하려고 살아 있기라도 했었다는 듯이.


이야기는 참으로 드라마틱했다. 인터넷으로 레너드 라루(Leonard LaRue)라는 선장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정말 놀라운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그 모티브를 마음의 파일 하나에 저장했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방문했다.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이라는 책을 썼고 또 많은 수도원을 다녀 보았지만 실은 한국의 남자 수도원 방문은 거의 처음이었고 아는 분도 없었다. 트위터를 통해 공지를 하고 세 다리쯤 건너 건너 겨우 인영균 클레멘스 신부님을 소개받았다.


수도원은 고요했다. 인영균 신부님은 나를 손님의 집 입구로 데려가 열쇠를 하나 건네주시며 가서 쉬고 있으면 저녁 때 다른 신부님이 전화를 하실 거라 말씀해주셨다. 방에는 침대와 책상이 전부였다. 와이파이는 물론 되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내가 왜 『높고 푸른 사다리』를 쓰려고 하는지. 마음속에 있던 여러 개의 소설 파일 중 왜 하필 지금 이것이 싹을 내밀려고 하는지. 그 씨앗이 발아하는 객관적 조건이 무엇인지. 그러자 눈물이 차오르는 대신 풍선처럼 뺨이 부풀어 올랐다. 나는 허름한 손님의 집 벽에 달린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왜입니까? 주님, 대체 왜죠? 왜? 나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나는 망신을 당했고 상처를 입었고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내게 돌아온 것은 멸시와 배반과 수치 그리고 통렬한 외로움입니다. 주님, 나는 도저히 당신을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러셨나요? 대체 왜요!”


그 무렵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이토록 나쁠 수 없는 일만 내게 닥쳐왔다. 태풍으로 치면 초대형급들 서너 개가 몰려오는 형국이었다. 시작은 외부에서 왔다. 『의자놀이』와 관련해 소동에 휘말렸고, 믿었던 선배에게 돈 문제로 피소를 당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좀 울었어야 했다. 그러나 매사에 너무 결백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나를 더 뻣뻣하게 했다. 내 영혼이 발가벗겨지고 모욕당하고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라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연이어 덮쳐 온 시련에 여지없이 쓰러졌고 양심과 복수로 이를 갈았다.


전화벨이 울렸다. 고진석 이사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신부님이 수도원 안내를 해 주신다고 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왜관 본원에만 70명의 수사님들이 사시는 수도원의 규모는 아주 컸다. 뉴튼, 서울, 부산, 화순, 금남 그리고 지금은 독립한 요셉 수도원까지 모두 여섯 개의 분원을 둔 수도원으로, 왜관수도원이 속해 있는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에서도 규모로 1, 2위를 다투는 큰 수도원이다. 정식 명칭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성 마오로 플라치도 수도원’이지만 그냥 ‘왜관수도원’으로, 혹은 한자의 음을 빌려 ‘분도(芬道)수도원’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성 베네딕도회는 이탈리아 누르시아(Nursia) 출신의 베네딕도 성인이 저술한 『수도 규칙(Regula Benedicti)』에 따라 수도 생활에 전념하는데, 근대 이후 설립된 대부분의 수도회와는 달리 베네딕도회는 어떤 특별한 창립 목적이 없다. 굳이 하나를 들자면 일정한 장소에 정주(定住)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가 목적이라고 할까.


수도원에서의 일상은 하루 다섯 차례의 기도와 오전․오후 노동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도는 모든 수도 생활의 중심이다. 노동은 수도공동체의 자급자족을 위한 것일 따름이다. 결국 밥그릇을 좌지우지하는 이에게 인간이 예속당한다고 할 때 탁발과 다른 점이 이 지점인 것 같다. 당당하되 겸손하게 가난할 수 있는 것이며, 수도원의 살림살이를 외부 사람들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게 되어 언제나 떳떳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절대적 조건이 바로 이 노동인 것 같았다.


이곳을 드나들면서 나는 베네딕도회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정말 얇은 규칙서 한 권을 쥐여 주고 극단적인 고행을 지향하지 않지만 절제가 규칙이라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용어로 써 있었다. [예를 들어, 당가 수사(수도원 재정 담당 수사)의 자격에 대해 다른 여러 좋은 말을 한 다음 “많이 먹지 않는 사람”(『수도 규칙』31,1) 혹은 식탐이 없는 사람(『베네딕도 이야기』)이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 ‘술을 절제해야 한다’는 말 대신 “하루에 한 ‘헤미나’의 포도주”(『수도 규칙』40,3)를 마셔도 된다고 한다. 한 헤미나는 0.3리터에서 0.5리터 정도로 그리 적은 양은 아니다.] 알면 알수록 베네딕도 성인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놀라웠다. 나는 그가 인간을 꿰뚫어 보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베네딕도 성인이 유럽의 수호자로 선포된 것도 당연하게 느껴졌다. 결국 그리스도교의 수도원에서 유럽의 거의 모든 문화가 만들어지고 보존되고 전파되었으니까. 그의 규칙서가 결국 유럽 문화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며 천오백 년이 지나도록 규칙서는 힘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구체성의 힘 그리고 중용의 힘, 너무 강요하지도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길을 제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도란 일생을 가는 길, 장자(莊子)의 말처럼 “발돋움으로는 결코 오래 서 있을 수 없는 법”이니까.


왜 이 동굴, 왜 이 광야였을까? - 수비아코 수도원</P>골짜기는 깊었고 좁고 구불거리는 길들이 빗속에서 운전하는 모니카 씨를 힘들게 했다. 우리는 좁은 산길을 여러 개 돌아 수비아코 수도원(Monasteri Benedettini di Subiaco)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가을 저녁, 어둑한 수비아코 수도원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까 몬테카시노의 화려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수도원 입구의 성물방에는 노(老)수사님이 계셨다. 모니카 씨와 안면이 있는지 반가운 인사를 하신다. “수사님, 추워용. 커피 좀 주세용.” 모니카 씨가 막내 동생, 아니 막내 조카 같은 말투로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그 노수사님의 얼굴을 스쳐 가는 난처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모니카 씨가 무어라 말을 주고받더니 어두운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커피가 없다네요. 떨어진 지 오래되었고, 커피머신도 고장난 지 두 달인데 기사가 고치러 오질 않아서 커피가 없대요.” 이탈리아 사람들이 커피와 얼마나 가까이 사는지 아는 그녀로서는 나보다 충격이 더한 것 같았다.&


문득 나는 수비아코가 이런 곳이구나 실감했다. 모니카 씨 말로는 몬테카시노 같은 수도원은 국가가 관리하는 수도원이지만 수비아코는 베네딕도 성인 이래 그냥 가난한 수도원이라고 했다. 우리는 성당 입구로 들어섰다. 원래는 동굴이었던 것을 그 위에 건물을 세우고 수도원을 세운 것이라 구조는 꼬불꼬불했다. 하지만 내가 본 어떤 수도원보다 특이했다. 성인이 기도하던 동굴로 내려가던 길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초상도 있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신보다 800년이나 앞서 산 베네딕도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이곳에 왔던 기록이 그림으로도 남아 있었다. 그림 속의 프란치스코도 새파랗게 젊었다.


480년 누르시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베네딕도는 유모와 함께 공부하러 로마로 갔다가 학업을 포기하고 이리로 왔다고 한다. 그의 바람은 단 하나. 하느님을 찾는 삶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산골짜기, 이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 동굴 속에 몸을 숨긴다. 수비아코. 세상의 모든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태어난 곳이 베네딕도 성인이 은거하던 동굴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했다. 마치 하느님이 배려하신 이 둥그런 자궁 같은 동굴에서 세상 모든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잉태되었다는 것도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목숨을, 그러니까 산짐승과 자연재해, 산적 등의 모든 위험을 각오하고 이 동굴로 들어서던 그의 모습을. 환영 속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에 몸부림치며 가시덤불에 뒹굴던 모습을. 로마노 수사가 내려주는 아주 적은 양의 빵만으로 살며 종일 하느님을 생각하던 그를, 그는 대체 이 동굴에서 무엇을 찾았던 것일까? 하느님이라면 이미 저잣거리에, 이미 그가 다녀온 로마에 가득가득 계시지 않았던가 말이다. 왜 이 동굴이었을까? 왜 이 사막, 이 광야였을까?


그리고 스콜라스티카 성녀가 있다. 베네딕도 성인과 이란성 쌍둥이였던 그녀는 오빠를 따라 수녀가 된다. 스콜라스티카가 일 년에 한 번 오빠를 만나러 오면 오빠는 수도원 땅에 속해 있는 곳까지 내려가서 여동생을 만나곤 했다고 한다. 두 분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스콜라스티카가 오빠를 잡았다.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그러나 제자들과 함께 그녀를 만나러 왔던 베네딕도는 가야 한다고 일어섰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이었다. 오빠의 거절하는 말을 듣자 스콜라스티카는 합장한 손을 식탁 위에 얹고는 그 손에 머리를 수그린 채로 전능하신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스콜라스티카가 식탁에서 머리를 들자, 엄청난 힘의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내리쏟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베네딕도는 결국 그 밤길을 떠나지 못하고 스콜라스티카와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이 두 남매가 살아서 만난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날이 마지막인 것을 알았기에 스콜라스티카의 기도는 더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그의 영적 동반자였던 클라라와 담화를 나누고 프란치스코가 떠나려 하자 안타까운 클라라가 묻는다. “우린 언제 다시 만나죠?” 그러자 프란치스코가 대답한다. “아마도 내년 봄 장미가 필 때쯤.” 그때는 한겨울이었다고 한다. 너무 먼 기약을 하는 프란치스코를 두고 클라라가 기도를 한다. 그러자 갑자기 주변에 장미가 피어났다.


아무래도 하느님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편인 것 같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씀하신 “사랑하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라”라는 말도 있다. 내가 존경하는 카를로 카레토 수사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뿐이다. 만약 바울로 수사가 사막 한가운데서 죽기를 선택한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한 구실이 된다. 돈 보스코와 코톨렌고가 학교와 병원을 세운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그것으로 구실이 된다. 성 토마스가 일생을 책과 더불어 지낸 것이 사랑 때문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차원이라는 문제만이 남는다. - 『사막에서의 편지』 중에서


그렇다. 만일 잡는 것도 사랑이고 규율을 지키러 떠나는 것도 사랑이며 헤어지려는 것도 사랑이고 빨리 다시 만나고 싶은 것도 사랑이라면 하느님은 그중 더 간절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니까. 그리고 사랑은 사랑을 알아보며 큰 사랑은 작은 사랑들을 돌보니까.


다시 수도원 성물방으로 나왔다. 벌써 문 닫을 시간이라며 노수사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고는 모니카 씨에게 물었다. “서울 가서 이제 여기 살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이 그러던데 정말이야?” 모니카 씨가 그렇다고, 이제 학위도 마쳤고 한국에 가야 한다고 대답하자 노수사님의 눈 아래 그늘이 확 짙어졌다. 수사님은 늙고 마른 손바닥을 모니카 씨에게 내밀었다. 그 마른 손바닥 위에는 작은 베네딕도 메달이 놓여 있었다. 모니카 씨는 노수사님을 꼭 포옹하며 “이탈리아 오면 꼭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커피머신 고쳐놔요” 하고 말했다. 비는 거셌고 우리는 노수사님이 오래 손을 흔드는 걸 뒤로 하며 수비아코를 내려왔다. 모니카 씨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안다. 하느님을 찾는 삶이라는 것이 슬픔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헤어짐이 슬프지 않다고 강변하며 목석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수행이 깊어 갈수록 사랑도 깊어 가고 그러니까 아마도 더 많이 슬프고 더 많이 아플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제일 아픈 분은 아마도 하느님이실 거라는 것을. 그분보다 더 사랑하는 분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_ 아빌라

마드리드에서 비행기를 내려 아빌라(Ávila)로 가는 기차를 탔다. 스페인의 기차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포르투갈에서 자동차로 서해안을 따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갔던 기억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아빌라로 가는 풍경은 드넓고 황량하고 스산했다. 막상 아빌라 역에 도착했을 때는 규모가 생각보다 아주 작아 깜짝 놀랐다. 주일이어서 모든 레스토랑과 슈퍼마켓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호텔은 아빌라 주교좌성당 바로 앞, 그러니까 코앞이었다. 내 방 창으로 성당 지붕이 보였으니까.


나는 자려고 낯선 침대에 누웠다. 차가운 시트를 뒤집어쓰고 있는데 “삶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구절을 떠올리자마자, 그리고 이것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Teresa de Ávila)가 했던 유명한 말 중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 내자마자 내 입은 신음소리를 토해 냈다. 이해받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이 구절을 떠올리려고 이곳까지 찾아온 것 같았다. “그렇단다, 마리아야.” 꼭 성녀가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요. 데레사 성녀님, 이제는 저도 조금은 안답니다. 삶이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는 것을요.” 삶이 그렇다.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더 서성일 것도 더 붙박이려 집착할 것도 없다. 더 가진다는 것은 심지어 어리석다. 참으로 어떻게 죽는가가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였다. 어떻게 잠드는가가 결국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가를 말해 주듯이.


이렇게 중세의 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나로서도 처음이었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을 먹고 나는 산책을 나섰다. 시퍼런 시월의 하늘이 환한 베이지와 회색빛을 섞어 놓은 듯한 화강암의 성곽 위로 펼쳐지고 있었다. 누군가 말한 대로 아빌라는 ‘돌과 성인들의 도시!’였다.


중세 이후 부패할 대로 부패한 가톨릭. 이미 독일에서는 그 부패에 견디지 못한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선언했던 시대에 그녀는 여기 살았다. 독일이 그 지경인데 스페인인들 좋은 가톨릭이 지배하고 있었겠는가? 스물한 살에 수도원에 입회했으나 응접실에서 친구들과 방문객들과 웃고 떠들며 이십여 년을 보낸 후, 마흔이 넘어서야 하느님께 향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의 평균 연령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 늦은 나이에도 새로이 기도 생활에 정진했다는 것은 실은 생애 내내 그런 갈망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고, 그 갈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어쨌든 붙들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될 것이다.


더욱 놀랍게도 그녀는 장장 쉰둘의 나이에 (부끄럽게도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나이와 같다. 당시 평균 나이를 생각할 때 지금으로 치면 아흔 살쯤이 아닐까? 이분 때문에 나는 핑계를 대기도 힘들다) 스페인 각지를 돌며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다. 열다섯 개의 새로운 수도원을 세운 것이다. 그 여정이 십오 년 동안 1만 6백 7십 킬로미터였다고 하니 여자가, 그것도 수녀가, 그것도 늙은 여자 수도자가 제대로 된 길도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그런 장정(長程)을 한다는 것은 거의 신비에 가까운 일이다.


일단 그녀가 마음을 먹자 놀랍게도 악착같은 반대의 무리들이 안에서 밖에서, 사방에서 들끓으며 그녀를 방해한다.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는 남자 수도자들의 활극으로도 발전했다. 그녀의 수도원장 취임을 막기 위해 물리력을 동원했다니 정말 우스꽝스럽고 무섭다. 그뿐이 나이었다. 동료 수녀들까지 ‘마귀가 들렸다’라며 못마땅해했다. 시기와 험담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제 이 도시는 온통 데레사의 상징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온 나라에서 ‘더럽게 억세고 재수 없다’는 욕을 먹고 나아가 교황청 대사에게까지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던, 그러나 아랑곳없이 예수님만 바라보고, 변두리의 수녀원 속으로 들어간 한 여자가 몇백 년 동안 고향을 먹여 살린다. 진정 이 도시의 수호성녀다.


왜 서럽지 않았을까? 왜 힘겹지 않았을까?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그리하지 않았다. 왜였을까? 교정 사목을 하시는 신부님이 사형수들과 함께하는 미사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예수님은, 그러니까 그 생애 전체를 그냥 ‘하느님의 뜻이 뭔가’ 그 생각만 하고 가신 거죠. ‘저 애가 어떻게 생각할까? 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바리사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저 무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군중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가 아니었고 말이죠.”

이 성녀와 영혼의 짝을 이루었다고 말해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요한 성인에게 묻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성인이 예수님을 한두 번 체험한 것도 아니고, 또 이번에는 특별히 ‘너의 공로를 보아 다 들어주겠다’고 말씀하신 시점이라고 한다. 이게 중요하다.) “얘야, 무엇을 주랴?” 그러자 성인이 대답한다. “멸시와 모욕이요.”


그때,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책을 든 손에서 힘이 주르르 빠져나가 책을 떨어뜨릴 뻔했으며, 동시에 입에서는 큰 소리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못 본 걸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잊으려 해도 그 구절이 몇 년 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정말 내가 작은 모욕이라도 당할 때면 그 구절이 이상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이제 아빌라의 성녀의 발자취를 따르며 나는 그분의 말을 떠올렸다. 그러자 이 두 분이 정말 무서웠다. 이 두 분은 무섭도록 하느님을 사랑하고 무섭도록 진리만을 따랐으며 무섭도록 그리스도의 길을 가셨다. 그래, 실은 이렇게 지독스레 무서운 사람들이 아니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나는 성 밖으로 시린 하늘이 펼쳐지는 아빌라의 한 귀퉁이에 앉아 휴대전화로 성경을 열었다. 시편 51편을 읽기에 좋은 가을날이었다.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당신의 면전에서 날 내치지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얼을 거두지 마옵소서.

하느님, 나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 『시편과 아가』 중에서


그날 오후 『높고 푸른 사다리』 교정본이 메일로 도착했다. 나는 오후 내내 호텔 방에 앉아 교정을 보고 후기를 썼다. 다음 날이 아빌라의 데레사 축일. 어제와 달리 도시는 설레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민속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하고 악대들이 음을 맞추는 소리가 성당 앞 광장에서 들려왔다. 호텔 앞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엘리베이터마다 관광객들의 짐으로 가득 찼다.


가끔씩 일어나 창밖으로 그들의 춤과 노래를 훔쳐보며 나는 후기를 썼다. 후기를 마치고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 우연인데 밖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이제 모든 우연은 섭리였다. 여기까지 온 내가 후기를 다 쓸 때까지 기다려주신 아빌라의 데레사님께 내 맘대로 막 감사를 드렸다. 모든 것을 마친 후 턱 밑으로 차오르는 이것은 기쁨이겠지 싶었다. 책 한 권을 이렇게 타국에서 끝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런 날은 보통은 좋은 친구 두엇을 불러 삼겹살 파티를 하거나 좋은 회에 청주를 마셨는데 오늘은 온전히 혼자였다. 노트북이 가리키는 한국 시간은 새벽 4시 18분. 다행히도 내게는 포도주 반 병과 비스킷과 물, 약간의 하몽(스페인식 햄) 조각 그리고 사과가 있었다. 나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며 남은 잔을 들었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