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언니의 독설』의 저자 김미경의 첫 번째 에세이
『언니의 독설』에서 직설적이고 때로는 솔직한 직설적 화법으로 여성들에게 ‘독설’을 전파했다면, 『살아 있는 뜨거움』에서는 "운명"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독자와 소통하고자 한다. 저자 자신의 성찰과 사색, 세상에 대한 고찰 등 저자 자신의 경험과 결합되어 진정성 어린 메시지를 던진다.
살아 있는 뜨거움
삶이 나를 밀어간다
멀리 떨어질수록 잘 보인다
지난 2013년 3월, 수많은 이들이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메시지들은 거의 다 놀라울 정도로 지혜로웠다. 그중에는 고등학교 3학년 한나의 메시지도 있었다. 한나는 마치 기도라도 하듯 매일 나에게 트윗으로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셨으니 이번 기회에 푹 쉬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요. 이 또한 지나갈 겁니다.
선생님 괜찮아요, 다 잘될 거예요.
이제 더 단단해지셨으니 다음 강의가 너무 기대돼요.
아이의 글을 읽으며 놀랐다. 어쩜, 이제 열여덟 살밖에 안 된 고등학생의 입에서 주지스님 같은 말이 술술 나올까.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운명을 현명한 스승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걸까. 지난 20년간 남의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했던 나도 내 문제를 해석하느라 이렇게 힘든데……. 내 운명의 분수령을 넘느라 온힘을 다해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내 문제 앞에서 나는 그토록 헤매고 있는데 정작 내 주변사람들은 단박에 깨닫고 해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렇게 지혜로운 이들에게 그동안 쓸데없는 잔소리를 해왔구나. 처음으로 내 일에 대한 회의가 들 정도였다.
그런데 며칠 동안 나를 들여다보면서 알게 됐다. 원래 사람은 사소한 것조차 자기 문제가 되면 순간적으로 짓눌린다는 것을. 돌멩이만한 무게에도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것과 나의 거리는 너무 가까우니까.
얼마 전 우리 직원 중 한 명이 실연을 당했다. 나이 들어 만난 연하의 남자였는데 알콩달콩 연애하나 싶더니 1년도 못 가 헤어진 것이다. 주변에서 다들 심심한 위로를 표하는데 제일 격하게(?) 충고하는 직원이 하나 있었다.
"더 좋은 남자 만나려고 헤어진 거야. 차라리 잘됐어. 이참에 살도 빼고 더 예뻐져!"
그 모습을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이보세요, 당신은 3년 전에 남자랑 헤어졌다고 울고불고 일주일 굶으셨거든요. 그래도 쟤는 남자랑 헤어졌다고 밥은 안 굶잖아요.
우리는 곧잘 자신의 문제에는 유치원생처럼 굴다가도 남의 문제는 주지스님처럼 말한다. 자신의 문제는 작은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지면서 남의 문제는 산맥이라 할지라도 거뜬히 넘는다. 남의 일이라서 쉽게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다. 한 발짝 물러서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사람들의 물음에 답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멀리 떨어질수록 잘 보이는 법이다.
인생은 짬짜면이다
지금 봐도 인생을 바꾼 결정치고는 내용이 꽤나 한심하다. 이게 내 일이야라는 확신, 심장의 떨림 같은 건 별로 없었다. 그냥 다른 일보다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피아노 학원은 더 이상 싫었을 뿐이다.
이렇게 선택의 재료가 허술하다 보니 나 역시 때때로 흔들렸고 가끔씩 헷갈렸다. 한번은 헤드헌터를 통해 대기업 연수원 부원장 자리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는 내가 시간당 5만 원을 받던 강사 시절이라 한동안 고민에 휩싸이기도 했다. 기업 강사로 매일 전국을 돌다 보니 책상에 앉아 월급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유혹이었으니까.
가끔씩 강사라는 직업이 정말 지긋지긋해지면 혼자 딴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가 이거 말고 디자이너 했어도 참 잘했을 텐데. 워낙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옷 만드는 것을 보면서 자라서인지 재봉은 지금도 자신 있다. 큰애 여덟 살 때까지 옷은 내가 직접 다 해서 입힐 정도였다. 어떤 날은 내가 만든 중국 꽃빵에 혼자 흥분해 요리사가 되어 멀리 떠나기도 했다. 요리를 했어도 정말 잘했을 거야, 아무렴.
어떤 선택이든 처음부터 100퍼센트 확신을 갖고 시작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애초에 그렇게 생겨 먹질 않았다. 이게 맞나 언제나 불안하고, 아니다 싶으면 후회하고, 다른 길은 없을까 늘 찾게 돼 있다. 인륜지대사라는 결혼도 마찬가지다. 집을 살 때도, 주식에 투자할 때도, 심지어 중국집에 들어가 메뉴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언제나 이 질문 앞에서 깊은 번뇌에 빠진다.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분명히 짜장면을 먹겠다고 들어갔는데 옆 테이블 짬뽕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면 슬며시 불안해진다. 내 선택이 잘못됐으면 어쩌지? 고민 끝에 짬뽕으로 바꾸면 이번엔 친구의 짜장면이 그렇게 맛있어 보일 수 없다. 젠장, 그냥 짜장면 시킬걸. 그래서 만들어진 게 바로 짬짜면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오죽이나 많았으면……. 그렇다면 짬짜면은 과연 선택의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을까? 막상 짬짜면을 주문하고 나면 이번에는 새우볶음밥이 눈에 밟힌다. 망했어, 괜히 짬짜면은 시켜가지고.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도 고민하는 게 사람이다. 점심 메뉴 하나 고르기도 이리 쉽지 않은데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야 오죽할까. 내 선택에 100퍼센트 확신을 갖고 100퍼센트 만족하는 경우는 원래 드물다. 모든 선택에는 짬짜면의 갈등, 짬짜면의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한다. 오늘 내가 선택만 잘하면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라고 믿는다. 반대로 선택을 잘못하면 인생이 꼬일 거라고 지레 겁을 먹는다. 어느 쪽이든 선택에 100퍼센트 힘을 싣는 건 마찬가지다.
선택에 대한 확신이 30퍼센트여도 좋고, 10퍼센트여도 좋다. 중요한 것은 선택 자체가 아니다. 선택한 다음 날 아침부터의 내 모습이다.
단순하게 상처받고 단단하게 산다는 것
원 안의 행복, 원 밖의 불행
2013년에 나는 갑자기 원이 터져나갈 정도로 바빴다. 내 이름을 건 쇼도 하게 됐고, 책도 잘 나갔다. 강의는 물밀 듯이 밀려왔고, 밖에 나가면 초등학생들까지 알아봤다. 20여 년 만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누군가는 내 원만 보고 나를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원 밖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하루에 일곱 개 이상의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정말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다음 스케줄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천 원짜리 김밥을 잠깐 먹는 게 전부였다. 돈은 잘 벌리는데 오히려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진 것이다.
인간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스케줄 때문에 밥 먹자는 약속을 수도 없이 미루면서 저절로 나쁜 사람이 돼 가고 있었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가장 미안했던 것은 역시 가족이었다. 하루는 큰딸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얼굴 본 지가 도대체 언제야. 제발 우리 밥 좀 먹자!"
"미한한데 엄마가 스케줄이 너무 많아서 전혀 기억을 못해. 최 아사한테 전화해서 스케줄 언제 되는지 좀 알아봐."
큰딸은 기막혀 하면서도 최 이사한테 전화해서 물어본 모양이다. 그런데 그 대답이 더 황당했단다. 그때가 1월 중순이었는데 3월 9일 저녁에나 예약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날 하루밖에 시간 안 되네, 이거라도 잡아줄까?"
"됐어요. 그냥 일하라고 하세요."
큰딸은 기분이 상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정도로 당시의 내 원 안에는 오직 일밖에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미어터질 만큼 꽉 차 있었다. 그러니 밖에서 들어오고 싶어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님 포기하거나. 기다리다가 안 되면 자연 소멸되거나 뒤돌아 가버리는 것도 많다. 원 밖의 것들이 언제까지나 기다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내 원에 너무 많은 것을 채우려 한 탓일까 얼마 안 가 끝내 원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논문 사건으로 갑자기 방송도 하차하게 되었고, 강의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순간적으로 원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지난 20년간 매일 1센티미터씩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됐다. 원은 텅 빈 채로 오래 있지 않는다는 것을. 마치 삼투압 현상처럼 자연스럽게 원 밖의 것들이 원 안으로 스며들어 어느새 원 안의 빈자리가 가득 채워졌다. 어느새 나는 남편과 아이들이랑 집에서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렇게 내 원은 그동안 소홀했고 미뤄뒀던 것들로 하나둘씩 채워지더니 어느새 그것만으로도 빵빵해졌다. 원 안과 밖이 완전히 교체된 것이다.
어쩌면 인생에서 운명의 진실은 원 밖에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원 안만 보고 살아간다. 이것 아니면 나는 못 살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연스럽게 채우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구겨 넣고 다른 것이 못 들어오게 막는다. 그런데 살다 보면 원이 깨지는 날이 온다.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렇게 집착했던 원이 터져나가면 마치 내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이 깨지면 반드시 다른 행복들이 빈자리를 채워준다. 그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그 원은 더 소중한 것들로 채워질 수도 있다.
뜨거운 화해, 운명과의 악수
인생을 팔십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엄마, 나 미대 합격했대!"
5년 전이다. 큰애가 경악한 표정으로 대학 합격의 소식을 알려왔다. 자기도 얼마나 놀랐을까. 나한테도 딸의 합격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우리는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얼싸안고 빙빙 돌았다.
내 딸로 칠 것 같으면 예술을 하는 애라 그런지 인생도 예술이다. 중고등학교 때도 공부하고는 담을 쌓고 지냈던 애다. 그런 애가 떡하니 대학에 붙었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진짜 예술은 입학 이후에 시작됐다. 등록금을 보낸 지 며칠 안 돼서 학교 입학처에서 전화가 온 것이다.
"따님이 자퇴하는데 동의하십니까?"
얼마나 힘들게 들어간 학교인데 입학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자퇴라니. 그것도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잔뜩 화가 나서 큰애를 불러다 앉혔다. 너 왜 그랬어? 일단 말이나 들어보자. 그런데 딸에게서 뜻밖의 얘기가 나왔다.
"엄마, 난 내가 미술을 정말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면 공부하기 싫어서 미술로 물타기 한 거야. 쉽게 대학 가보려고. 그런데 나, 다시 한번 해보고 싶어. 정직하게 수능만으로 공부에 도전해보고 싶어. 내 공부의 한계를 보고 싶다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 딸이 달리 보였다. 저렇게 솔직하고 용감할 수가. 자신한테 미술이 안 맞는 것 같아도 내 길이라고 우기며 다닐 수도 있었을 텐데. 물타기라는 대목에서는 나도 찔렸다. 내가 음대를 갔던 이유도 20퍼센트 정도의 물타기가 있긴 했다. 그런데 내 딸은 나도 못 했던 것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케이. 재수가 뭔 대수인가.
그리고 1년 후, 또다시 수능 성적표 받는 날이 돌아왔다. 조마조마하며 기다리는데 딸이 1년 전보다 밝은 얼굴로 뛰어왔다. 표정만 봐서는 당장 서울대라도 붙을 기세다. 그런데 큰애 입에서 나온 얘기가 정말 예술이었다.
"엄마, 나 감 잡았어! 수능 한 번만 더 보면 될 것 같아!"
"아빠, 어쩐대. 얘가 이번에 또 삼수한대."
"공부하는 걔가 힘들지, 지켜보는 네가 뭐가 힘들어. 하라고 햐."
아버지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해답을 내놓으셨다.
"팔십을 살아보니 대학을 스물에 들어가든 스물셋에 들어가든 나중에 보면 아무 표시 안 나더라. 몇 년 늦게 들어가는 게 뭔 대수냐."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고 나는 삼수를 허락했다. 딸도 이번이 벌써 세 번째라 그런지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달라지는 게 성적이 아니라 외모라는 사실이었다. 정작 달라져야 할 성적은 그대로고 얼굴을 꾸미고 칠하는 솜씨만 발전했다. 나는 그 꼴이 한심해 볼 때마다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볼 때마다 옥신각신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꽃피는 봄이 지나 5월이 왔다. 여전히 블라인드 속눈썹과 꽃다발 손톱을 한 딸이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찾아왔다. 큰딸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엄마, 난 역시 미술이었어. 이제야 내가 왜 미술을 하게 되었는지 알겠어!"
2년 동안 남의 길을 걸어보고 나서야 내 길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다음 날, 딸은 바로 삼수를 접고 뛰쳐나왔던 학교로 도로 들어갔다. 지금은 2년 어린 후배들과 함께 미술을 전공하며 무사히 잘 다니고 있다.
남들은 말한다. 2년이라는 시간이 아까워서 어떡하냐고. 동기들이 3학년일 때 이제 1학년이면 늦어서 따라가기 힘들겠다고. 그러나 나는 딸의 2년이 아깝지 않다. 전혀 늦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시작점은 같아졌지만 뛰는 사람이 달라졌으니까. 스무 살 때와 스물두 살의 내 딸은 많이 달라졌다. 스스로 왜 미술을 해야 하는지 답을 찾았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성장이다. 20대 초반에 남들보다 한 템포, 두 템포 늦추며 딸은 정당하고도 정직한 최선을 선택했다. 남들에겐 방황일지 모르나 내 딸에겐 그리고 나에겐 적어도 정직한 방황이었다.
사는 연습
하루 안에 일생이 담겨 있다
가끔씩 나는 오늘이라는 기적에 대해 생각해본다. 신이 나에게 허락한 날은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뿐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인생이란 알 수 없다. 어제까지 멀쩡했던 사람도 오늘은 다시 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오늘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 해도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된 것은 오늘 단 하루뿐이다.
그런데 시간의 개념으로 보자면 오늘은 단순한 하루가 아니다. 내 나이 정도 살다 보면 상대방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대충 보인다. 품격 있게 살아온 사람들은 직업과 상관없이 일단 얼굴부터 다르다. 맑고 청량한 기운이 돈다. 고생은 많이 한 듯 하지만 불행에 짓눌린 얼굴이 아니다. 오늘 하루만 봤을 뿐이지만 그의 지난 세월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미래도 대략 그려진다. 이렇게 자신감 있고 당당하면서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시련이 와도 쉽게 넘어지지 않겠구나.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롱런하는 경우가 많고, 힘든 시련이 와도 결국은 다시 일어나곤 한다. 그렇게 보면 오늘 하루라는 시간 속에는 지나간 과거는 물론 앞으로 올 미래의 모습까지 다 담겨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만 자각하지 못할 뿐.
이 얘기를 언젠가 내가 회의 때 직원들에게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얘기를 유심히 듣던 직원 한 명이 며칠 후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제가 어떻게 죽을지 미래를 봤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어디 용한 점집이라도 갔다 왔어?"
"그게 아니고요. 원장님이 하루 안에 일생이 담겨 있다고 하셨잖아요. 제 하루를 보니까 제가 어떻게 죽을지 보이더라고요."
하루를 일생이라고 치면 하루의 끝인 잠은 곧 죽음이다. 그런데 잠들기 전에 자신의 모습을 보니 하루를 제대로 정리하기는커녕 아무 데나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보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지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을 때도 분명히 오늘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드라마나 보다가 갈 것 같다는 것이다. 피곤에 지쳐 쓰러지듯 삶에 지쳐 허망하게 죽을 게 분명하단다.
그런데 하루와 일생이 닮은 게 이뿐만이 아니다. 지각하지 않을 정도로만 일어나서 회사에 오면 그때부터 오늘 뭐하지?를 생각한다. 그렇게 오늘 할 일을 정리하고 조금씩 시작하다 보면 금방 점심시간이다. 그런데 자기 인생도 똑같더라는 것이다. 인생의 오전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청소년기 때부터 20대까지 나 뭐해야 되지?만 생각하다가 시간이 다 갔다는 것이다. 계획도 없이, 몸으로 이리저리 부딪쳐 보지도 않고 무기력하게 보낸 시간이 너무 많았단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앞으로의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이다. 왜냐면 자신의 하루를 보면 정신 차리고 제대로 일하기 시작하는 게 보통 오후 4시. 그러다 보면 남들 퇴근할 시간에 퇴근을 못한다. 매일 같이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오후부터 저녁 시간을 인생의 중장년기에 대입하면 비극적인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하루 중에 제일 자신 있는 시간대가 있을 거 아냐. 나한테 제일 잘 맞고 효율성 높은 시간대, 그 한 시점을 바꿔봐."
올빼미 체질인 그녀가 고른 시간대는 잠자기 직전인 밤 11시였다. 예전에는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봤다면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 날 일정표를 만든다. 시간대별로 세세하게 스케줄을 짜면서 미리 다음 날의 하루를 그려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들기 직전 잠시 눈을 감고 5분 동안 명상을 한다. 그렇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오늘 하루 감사했던 일들과 감사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에 보여주고 싶은 모습 그대로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중에 한 시간을 바꿨을 뿐인데 효과는 꽤 괜찮았던 모양이다.
매년 새로운 다이어리에는 어제까지의 자신과 전혀 상관없던 목표들을 적는다. 담배 끊기, 영어공부 하기, 운동하기. 그러나 사람은 어제 살았던 대로 똑같이 오늘을 산다. 12월 31일의 내 태도, 습관, 삶의 방식, 감성이 그대로 1월 1일로 이전된다. 오늘 바뀌지 않는 것이 갑자기 1월 1일에 되는 기적이란 없다.
결국 오늘 하루다.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시간인 오늘, 바로 지금을 바꿔야 한다.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 낀 소모품이 아니다. 인생의 깃털같이 수많은 시간들 중의 일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가장 집중하며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오늘이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하루에 내 일생이 담겨 있으니까. 오늘 하루처럼 우리는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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