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이창재
ǻ
북라이프
   
14000
2013�� 12��



&>■ 책 소개
1년에 단 두 번만 문이 열리는 사찰, 백흥암. 수많은 방문과 설득 끝에 간신히 문이 열린 백흥암에서 저자는 300일 간 머물며 스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결과 다큐멘터리 ‘길 위에서’는 완성되었고, 백흥암 속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 과정은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책은 오랜 기간 촬영을 했음에도 시간상 제약으로 편집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보다 따뜻하고, 보다 여유 있는 호흡으로 전하고 있다. ‘수행 공간’이라는 특성상 외부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백흥암의 숨은 이야기부터 한 여인의 스님이 되는 과정이 때론 말간 웃음과 함께, 때론 가슴 먹먹한 울음과 함께 펼쳐진다.

&>■ 저자 이창재
한양대 법대를 졸업하고 신문사, 광고기획사, 다큐멘터리 방송채널 등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예술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2013년 현재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중앙대 영상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며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국내 최초로 비구니 스님들의 일상과 수행 과정을 밀착 취재하여 만든 ‘길 위에서’는 다큐멘터리로는 쉽지 않은 5만 관객이라는 성적을 기록했고, 전주국제영화제 본선 진출, 서울독립영화제 초청, CINDI영화제 버터플라이상 수상 등 작품성으로도 인정받았다. 저자는 영화에서는 차마 공개하지 못했던 비구니 스님들의 깊은 속마음과 인터뷰, 그리고 뒷이야기를 고스란히 책 속에 담아냈다.

&>■ 차례
추천의 글 고요한 삶의 여백 속으로 _정목 스님
프롤로그 첫사랑을 돌아보다 

&>고요한 산사로 갔다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무는 일
선택은 때론 눈물을 남긴다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누구에게나 겨울은 찾아온다
예순 살, 나는 아직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흘러보아라
설레는 우정, 가슴 시린 염려
절대 고독의 시간

에필로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길 위에서


첫사랑을 돌아보다

20대 초반, 나는 출가라는 카드를 제법 오랫동안 만지작거렸다. 삶에 상처받고 세상사에 지칠 때면 사람들이 왜 사는지가 궁금했고, 어떻게 이런 고통스런 삶을 견딜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즈음 한 선배를 통해 불교를 진지하게 알게 됐다. 막연했지만 이 길을 통해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성큼 다가온 졸업은 순식간에 나를 사회로 밀어냈고 나는 가지 못한 길을 자꾸 되돌아보며 직장 속으로, 가정 속으로 들어갔다. 사회에서의 적응, 긴장, 휴식의 반복은 20년의 세월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반복되던 일상에서도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은 반복됐다.

나는 지금 왜 살고 있는가?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나의 생활에 사유가 스며들 만한 여유가 생기자 오래전 그 물음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면서 젊은 날의 영혼을 온통 사로잡았던 첫사랑 같던 불교가, 그리고 내가 가지 못한 길이 절실히 궁금해졌다.

그 길을 갔더라면 내 삶은 조금 달라졌을까?

그 물음을 안고 여러 수련 단체와 사찰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불교수행단체 중 하나인 천안의 호두마을에 갔다. 그곳에서 예순을 넘긴 비구니 노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출가 후 평생을 집도 절도 없이 선방(禪房, 절에서 참선하는 방)에서 선방으로 옮겨 다니며 깨달음을 구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제는 이곳 호두마을에까지 와서 잡무를 돕는 걸로 노구를 의탁하고 여생을 다른 수행에 바치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노스님에게서 인간적 고뇌와 깊은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그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추구해야 할 진리가 과연 있는 것인가? 인간이 그토록 간절하게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 진리는 진정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까?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는 걸까? 나는 치열하게 정진하는 비구니 스님(여자 스님)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수행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곳이 바로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백흥암이었다. 1년에 단 두 번만 일반인들에게 문을 여는 작은 사찰이었다. 예상대로 촬영 허가는 쉽게 나지 않았다. 큰 스님께서 대뜸 내게 여기서 무얼 보고 싶냐고 물으셨다. 두 번째 찾아 뵜을 때 심지(心志)가 있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장담컨대 백흥암을 촬영할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걸세. 내가 죽을 때까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찍겠다면 제대로 해. 이건 본래 어려운 일이야. 심지가 없으면 끝까지 해내기가 힘들어. 명심하게."


그리고 한 달 후, 마법처럼 백흥암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스님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까지는 그 후로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요한 산사로 갔다

경북 영천에서 은해사를 지난 차는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팔공산 자락을 15분 이상 올랐다. 갑자기 턱 하니 길을 막고 선 듯 절 하나가 나타났다. 여느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절들과는 사뭇 다르다. 상당히 무뚝뚝하고 무심해 보인다. 그냥 막무가내로 길을 막고 선 듯한 보화루와 담벼락, 굳게 닫힌 대문이 견고한 방어막을 치고 있다. 게다가 절 대문 표지판에는 이곳은 참선 정진하는 수행도량이오니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봉쇄수도원 같다. 바로 백흥암이다.


문을 걸어 잠근 이유

백흥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을 위한 선원을 운영하는 절이다. 참선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도량이기 때문에 소임을 맡아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몇몇 스님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모든 시간을 고스란히 수행에 쏟아 붓는다. 소임을 맡은 스님들의 하루 일과에서부터 연중행사까지도 철저히 수행하는 스님들을 위해 조정되어 있다.


스님들이 공부하는 시간에 관광객이나 참배객이 들어와 시끄럽게 떠들면서 수행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일일이 주의를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문을 걸어 잠그고 방문객의 수를 조절할 수밖에.


사찰 경영이 어려운 데도 불구하고 선원을 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수행하는 스님을 돕는 것이 큰 공덕을 쌓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성불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스스로의 수행이라는 이유로 소임을 맡은 스님들은 힘든 생활을 기꺼이 감수한다. 이런 공덕은 다시 자신이 수행을 할 때 다른 스님의 공덕을 통해 돌려받는 것이다.


화엄의 바다

나는 선원에서도 수행 스님을 받는 기준이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법랍(法臘, 출가한 후 승려가 된 해부터 세는 나이) 몇 년차 이상 이런 식으로 말이다. 백흥암처럼 기풍 좋은 선원은 아무래도 와서 정진하고 싶어 하는 스님들이 많지 않을까 싶었다. 소현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화엄의 바다라는 말이 있어요. 바다는 깨끗하고 넓은 물줄기라고 받아들이고 더럽고 좁은 물줄기라고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더러운 도랑물도, 시궁창 물도, 큰 강물도, 맑은 계곡물도 다 받아들이는 게 부처님의 화엄의 바다죠. 어떤 스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나쁜 벗이라고 하는 사람도 그 사람의 어머니가 봐서는 절대 나쁜 자식이 아닐 거라고. 그런 것처럼 우리도 누구는 좋다고 받아들이고 누구는 나쁘다고 내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사실 공간으로 보자면 백흥암은 수행하기에 그리 좋은 곳이 아니다. 선원을 운영하는 절에서 선원이 공양간처럼 살림을 하는 공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일반적이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수행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공간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흥암은 작은 사찰이라 선원 바로 아래가 공양간이다. 아침에 칼 쓰는 소리부터 밥 짓는 냄새까지 선방으로 모두 올라간다. 수행 공간도 좁다 보니 당연히 복작복작한 느낌도 난다. 수행하는 스님들은 매일 선방에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절의 대소사를 도와야 하는데 백흥암은 일도 많은 편이다. 그런데도 많은 행자가 몰리는 것은 기풍 자체가 고매하고 높은 수준의 수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법정 스님의 책에서 읽은 글이 생각났다. "흔히 말하기를 출가 수행자는 세 가지를 갖추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스승, 함께 수행하는 벗, 수행하는 장소가 그것입니다."


무심한 듯하지만 부족함이 없는 곳, 모자란 듯하지만 소박한 멋이 있는 곳, 백흥암은 바로 그런 절이다.



선택은 때론 눈물을 남긴다

배움은 상세할수록 좋다

스님이 되고자 하는 행자 50여 명이 법당에 나란히 섰다. 앞으로 여기서 15일 동안 공부한 후에 계를 받으면 스님이라 불릴 것이다. 묘하게 결연한 의지가 경내에 감돌았다.

"출가 수행자는 어떤 슬픔, 어떤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예비 원력(願力, 부처를 믿는 사람의 기본적인 결심 힘 등)으로 영원하고 참된 가치를 지향해야 합니다. 행자 여러분, 여러분은 수계교육을 통해 출가정신을 탐구하고 확고한 수행력을 길러야 합니다."


수계교육원은 스님이 되기 위한 모든 것을 배우는 공간이다. 지금까지 속세에서 배웠던 모든 것을 지우고 승려로서 알아야 할 것들, 행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채우는 시간이다. 모든 일정은 빡빡하게 짜여 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법당에 가서 예불을 드리고 108배를 한다. 아침 공양을 한 후에는 각종 율법, 염불의식을 배운다. 점심 공양 후에는 교리를 배우고 참선을 한다.


저녁 공양은 하지 않는다. 오후불식(午後不食)이라 하여 11시 점심을 먹은 뒤에는 음료수를 제외한 어떤 곡기도 입에 대지 않는다. 부처님이 수행하던 당시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다. 스님들 말씀에 의하면 오후불식으로 몸도 마음도 맑아지는데 이런 결핍 속에 즐거움이 있다고 한다. 또 혼자서 하라면 하기 힘들지만 여럿이 함께 하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다고 한다.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계를 받기 이틀 전, 모든 행자들이 두 시간에 걸쳐 세 걸음 걷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三步一拜)로 산길을 돌아왔다. 산속이지만 여름 햇살은 강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행자들의 주황색 옷이 차츰 땀으로 젖어갔다. 무릎이 꺾이듯 앞으로 쓰러졌다. 그래도 포기하는 행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드디어 삼보일배가 끝났다. 가슴이 벅차올라서일까? 불전 앞마당에 모여 예불문을 함께 독송하는데 한두 행자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염되듯 예닐곱 명의 행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마치 심장에서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들의 눈물을 바라보던 내 눈가에도 내면의 밑바닥에서도 퍼올려지는 듯한 눈물이 흘러나왔다. 닦고 싶지 않았다.


삼보일배와 더불어 수계교육원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삼천배가 이어졌다. 교육을 받은 지 15일째 되는 날 밤 9시 정도부터 철야로 삼천배를 시작한다. 다 하려면 여덟 시간 정도 걸린다. 삼보일배와 삼천배 행자들의 의지를 시험하는 통과의례다. 정말로 힘든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 스스로의 몸으로 증명하는 마지막 관문인 것이다.


삼천배로 밤을 샌 행자들이 목욕을 하고 법당으로 모였다. 이제 더 이상 행자가 아니라 예비 승려라 할 수 있는 사미니 스님이 된다. 여기서 계를 받고 강원에 들어가 4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될 터였다. 회향식에서 행자 모두가 함께 발원문을 낭독했다.


이제 갓 스님 되신 분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경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정말로 시작이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여기서부터가 더 어려운 길이라고 한다. 기운 내시기를, 좌초하지 마시기를, 나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합장했다.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천년의 지혜

절에서의 가장 궂은일이라면 해우소 청소와 불 때는 소임인 화대 임부다. 그런데 이 일들은 법랍이 높은 스님들이 담당한다. 군대로 치면 화장실 청소나 보일러 담당을 말년병장이 맡는 셈이다.


선방 법랍이 두 번째로 높은 스님을 따라 처음으로 백흥암의 해우소에 발을 들였을 때 화들짝 놀랐다. 올림픽 개최 전의 중국 화장실 같았기 때문이다. 칸막이가 가슴 높이에도 못 미치는 건 그렇다 쳐도 더 심각한 건 문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시멘트로 낮은 칸막이벽을 쳐놓았을 뿐이다. 옆문은 있는데 앞문은 없는 셈이다. 게다가 큰 구멍 아래로는 21세기 절에서 보기 드문 거대한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었다. 다만 톱밥이 간신히 덮어주어 조형물과 직접 대면하지 않는 정도의 배려는 있었다. 여기를 하루 두 번씩 청소하는 스님은 속세 나이도 지긋해 보이는 분이었다.


"해우소라는 곳이 아무래도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잖아요. 그런 곳을 세상에 대한 시비가 강한 행자나 법랍이 낮은 스님이 맡으면 분별심이 더 강해질 수 있어요. 또 해우소를 쓰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행자가 청소할 때랑 법랍 높은 스님이 청소할 때랑 마음 자세가 달라요. 아무래도 어른 스님이 청소하시면 스스로 깨끗하게 쓰려고 조심하게 되지요. 사람들에게 깨끗하게 잘 써라 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끗하게 쓸 수 있어요. 그런 것 때문에 은연중에 법랍이 높은 스님으로 정해지는 거예요."


화대 소임을 자청한 무진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서른 분이 수행하고 기거하는 넓은 선방을 보일러로 데우는 게 아니라서 따뜻한 데는 따뜻하고 추운 데는 추울 수 있어요. 또 선방에 있는 스님들 각자가 원하는 온도가 다 달라요.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의 온도를 다 맞출 수 없잖아요. 법랍이 있는 스님이 화대 소임을 맡으면 그런 점을 조율할 수 있어요. 설사 춥더라도 어려우니까 추워 죽겠으니 불 좀 더 때주세요 하고 요청을 잘 못해요. 다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방 온도에 대한 시비가 줄어들지요."


천 년 넘게 이어져 내려오면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불교 내부의 전통과 규칙은 생각보다 훨씬 지혜롭고 사려 깊었다.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생기는 문제를 최소화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리라.



예순 살, 나는 오늘도 성장하고 있습니다

화두, 나를 찾는 길

열아홉 이후 40년을 지속해왔다는 스님의 수행. 대체 수행은 무엇일까? 영운 스님은 화두를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화두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를 하면 내가 나를 찾는 것이거든요. 부모를 통해 태어나기는 했지만 태어나기 이전의 나는 누구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죠. 결국 스님들이 찾는 것은 나를 찾는 길입니다."


화두는 커다란 의심이다. 마음속에 큰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 그 의문을 시작으로 존재의 근원까지 파헤쳐가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스님이 하나의 화두에 집중해서 참선하지만 몰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하나의 생각을 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흩어진단다.

 "화두를 염불하듯 익히면 간절한 생각이 들지 않아요. 처음에는 이것이 뭔가?를 생각하지만 결국은 내가 생각하는 화두와 내 몸이 하나가 되어야 해요.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놓치기 쉬워요."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랫동안 선방 생활을 한 영운 스님에게는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을까?

"얼음 위를 걷듯 조심조심 가야 화두를 놓치지 않을 수 있어요. 화두를 탈 때 수마(睡魔)가 큰 장애가 될 수 있지요. 오죽하면 마귀 마(魔)자가 붙겠어요. 졸음을 깨우고 정신을 살펴서 들어갈 때 흔들림이 사라지지요. 그렇게 해야 내가 공부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마음이 없어져요. 자신의 생각을 자꾸 들여다보면서 공부할 때 화두가 자리 잡히게 됩니다."


밥값 내놔라

선방 스님들은 일정 기간 동안의 운력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참선에 할애한다. 그렇게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절의 시주, 소임사는 스님들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안거 때 오는 스님들은 공부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일단 선방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그동안 일상적으로 했던 일들, 인연으로 만났던 사람들 등 모든 것을 다 뒤로 미뤄버려요. 오직 해야 할 것은 화두 공부, 그 한 가지죠.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몸부림을 치고 답답함을 느끼지만 단 한 시간이라도 화두와 내가 하나 되는 순간을 느끼면 답답했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립니다. 그때의 기쁨은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지요. 화두와 내가 하나가 되었다면 안거 기간에 제대로 밥값을 하는 셈이죠."


밥값이라는 말에 영운 스님은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이번 철에는 정말 밥값을 했나? 많은 스님들이 정말 내가 밥값을 했나 하고 생각해요. 사실 아무것도 안 하고 90일 동안 선방에 앉아만 있었잖아요. 수행하는 동안 밥은 누가 주는 거며 빨래는 누가 해주는 겁니까?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섰을 때 그 값을 내놓으라고 하면 뭐로 내놓을 것이냐고요. 그러니까 그 밥값을 해결하려면 수행을 안 할 수가 없지요. 정말 무서운 밥값이거든요."


누군가의 도움으로 내가 이렇게 수행에 정진할 수 있는 것이니 3개월이든 1년이든 허튼 짓 하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것만도 큰 축복이라고 영운 스님은 말했다.

"선방에서 내가 밥값을 안 내도 될 만큼 수행을 했는가를 생각하면 게을리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도 사람인지라 이만하면 잘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 마음이 자꾸 들면 자기를 꾸짖어야 해요. 물론 옆길로 샐 수도 있어요. 하지만 또 얼마든지 마음을 돌려서 원래의 길로 돌아올 수 있어요. 마음자리를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니까요. 그렇게 수행의 길 위를 걸어가는 거지요."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