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

   
고민정
ǻ
마음의숲
   
12000
2013�� 08��



■ 책 소개
꽃보다, 시보다 아름다운 고민정 아나운서의치열한 삶과 사랑! 

쉽게 사랑하고 끝내버리는 시대에 고민정 아나운서는 진정한 사랑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밥벌이와는 거리가 먼 시인과의 결혼을 택했고, 그리고 그는 강직성척추염을 앓고 있었다. 이 부부는 조금 힘들다고, 어렵다고, 아프다고 결국 서로를 상처로 몰아내는 요즘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에 대하여이야기한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존경할 수 있는 사랑을택했다는 고민정 아나운서는 이 책에서 매 순간 자신의 삶에 솔직한 그녀의 모습과 곁에서 그녀의 꿈과 행복을 그려 주는 남편 조기영 시인을 만나볼수 있다. 또한 그들에게 허락된 아이 은산을 향한 사랑도 담겨 있다. 남들에게 내색하지 못했던 자신의 고통과 사랑에 대해서도 담담히 풀어냈으며,흔들리지 않기 위해 서로를 의지했던 사랑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꽃보다, 시보다 아름다운 고민정 아나운서의 치열한 삶과 사랑을 만나본다.

■ 저자 고민정
경희대 중문과 학사 졸업 후 2004년 KBS 30기 공채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무한지대 큐’ ‘책 읽는 밤’‘국악한마당’ ‘생로병사의 비밀’ 등 다수의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했으며, 라디오 ‘고민정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DJ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받았다. 2009년 중국으로 1년간의 연수를 떠나 칭다오 대학에서 한국어과 강의를 했다. 복귀 후 TV프로그램 ‘국악한마당’, 라디오 프로그램‘국악의 향기’를 진행하고 있다. 

8년 전 조기영시인과 결혼한 그녀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가고 있다. 물질에 끌려다니기보다는 가치를 우선시하며, 가벼운 사랑이넘쳐나는 세상에서 결코 흔하지 않은 사랑의 진정성을 찾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1장 꽃보다 시보다 아름답게 
시인의 아내로 산다는 건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간 순간 
10년 전 그날의 하늘 
이 숲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감당할 수 있겠니 
존경할수 있는 사랑 
어느 누가 나를 사랑으로 써 내려갈까 
옥탑방 고양이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당신이 되고, 당신은 내가 되어

2장 가난하지도 슬프지도 않게 
사람은 가도 시선은 남는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
언제나 한자리에 있는 조은산처럼 
나는 혼자 남겨지는 게 가장 두려운 소녀였다 
딸에서 엄마로 
서로의 별이 된다는 건
그리움이 묻어나는 달에게 
죽기 전에, 조금 더 늦기 전에 
풍경에는 향기가 있다

3장 밋밋하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은 사람의 다리가 된다 
아나운서 고민정입니다 
빠져든다는 것, 스며든다는 것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바람처럼 햇살처럼 살고 싶다 
샹그릴라는 거기 없었다 
너도 참 쓸쓸했구나 
어둠이 두려운 건 믿지못하기 때문이다 

4장 사람 속에서 빛날수 있게 
얼마나 쓸데없는 자만심이었던가 
내 안에서 커 가는 시간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건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국경 
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 
셀 수 없이 행복한 사람들 
결코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나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우리 
우린 사랑하니까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


꽃보다 시보다 아름답게

시인의 아내로 산다는 건

난 아나운서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아내이기도 하다. 예전 어느 잡지에 실린 ‘시인의 아내라는 글귀가 사람들을 통해 회자되면서 난 저절로 ‘결혼한 아나운서가 아닌 ‘시인의 아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시인의 아내라는 말을 떠올리며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내겐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내가 생각해 왔던 시인의 아내는 모름지기 시를 무척 사랑하던 문학소녀여야 하고 줄줄 외우는 시 몇 편쯤은 있는 그런 사람이다.


예술가의 아내라는 낭만적인 단어 뒤에는 힘든 현실의 벽이 버티고 있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진작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몸에 와 닿던 현실의 벽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차가웠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돈으로 환산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시인인 그 사람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많이 소유하는 것을 경계했다.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은 오직 책 사는 일뿐이었다. 대신 주위 사람들에게, 특히 자신보다 더 힘들 것이라 여겨지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누어주려고 노력했다.


난 현실이라는 땅에 두 발을 딛고, 이상이라는 하늘을 향해 가슴을 열어두어야 했다. 한쪽에만 온 신경을 집중해도 쉽지 않은 일을 난 동시에, 그리고 반드시 해내야 했다. 시인의 아내로 살아가는 일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많다고 이해시켜야 했고, 그 사람에게는 매달 무섭게 찍혀 나가는 각종 보험과 공과금 고지서를 보여 주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돈도 모으고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이해시켜야 했다. 그렇게 난 수도 없이 세상과 그 사람의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외로운 줄타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난 계속 넘어지고 부딪힐 것을 알면서도 시인의 아내로 살아갈 것이다. 힘들다고 그의 잡은 손을 뿌리치기엔 이미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이 너무 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사람 없이는 밥 먹는 일조차 서툰 나라는 걸 내 머리보다 내 가슴이 먼저 알기 때문이다. 난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그러면 된다.

 

감당할 수 있겠니

나이 차이가 열한 살이나 나는 우리는 한 번도 같이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나는 학교생활을 해야 했기에 데이트라고 해봤자 주말에 만나는 게 고작이었다. 같은 과 동문이어서 아는 사람들이 겹치기는 했지만 비밀 연애를 하던 중이라 아무도 모르던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과 선배가 졸업한 선배가 많이 아프다며 내게 무심히 말을 건넸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다는 사람이 그 선배가 맞냐며 몇 번에 걸쳐 확인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미 내 손은 떨리고 있었고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강직성 척추염, 그런 병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주 소수에게만 오는 희귀병이라는 것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치료법이 없다는 것도. 치료법이 혹시 있지 않을까 두 눈을 크게 뜨고 인터넷을 찾아봤지만 자꾸만 눈물이 차올라 화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지금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날이면 그날의 슬픔들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아려 온다.


매주 그가 입원해 있던 병원으로 출퇴근을 하던 어느 날,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그는 계속 내 눈을 피했다. 어딘지 모르게 힘겨워 보이고 괴로운 눈치였다. 그렇다. 지난 일주일 사이 나와의 이별을 준비했던 것이다. 헤어지자는 그 말 한마디 하면서도 그는 끝내 내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축 처진 그의 손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순간 넋이 나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심지어 내가 어디에 있고, 내가 누구인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 감각이 내게 말을 건넸다.


"정말 감당할 수 있겠니?"


처음 이 사람과 연애를 시작할 때도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정말 감당할 수 있겠니. 그때 내 대답은 처음으로 존경이란 단어를 느끼게 해 준 그를 잃지 말자는 거였다. 돈은 내가 벌 수 있는 거지만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시 만나기 힘들 테니까. 가장 중요한 자산은 바로 사람이니까. 그렇게 그와의 연애를 시작하게 해 준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다시 똑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와 똑같은 대답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가난하지도 슬프지도 않게 

딸에서 엄마로

아이가 태어난 이후 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자주 생각한다.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키우는 건 물론일 테지만 그보다는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아이로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수시로 되묻는다. 무엇이든 다 잘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을 테니 자신의 단점이 있더라도 그것을 무기 삼아 지혜롭게 컸으면 좋겠다. 산꼭대기에 가장 먼저 올라 홀로 세상을 호령하는 것보다는 산 중턱에서라도 여러 사람과 함께 웃을 수 있었으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거창하게 말하기보다는 곧 과거가 될 오늘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과연 지금의 세상은 내 아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인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면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게임은 이미 부정출발로 얼룩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달콤한 과실은 정해진 이들에게만 돌아가고, 도덕이나 정의와 같은 단어들은 벽난로 위에 걸린 박제된 동물처럼 한때의 위용을 자랑할 뿐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해 달라 소리치는 한편 한쪽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마치 마음을 준 사람만 상처 받는 짝사랑 같다.


세상이 아기들의 똥만큼만 정직하다면 어떨까. 설령 소화가 안 된 당근처럼 그대로 나온다 해도, 몇 날 며칠 변비나 설사에 걸려도 걱정할 건 없다. 소화가 잘되는 다른 방법으로 조리된 음식을 먹거나 위장이 그 음식물을 소화시킬 수 있도록 훈련하면 된다. 위장에 탈이 났는데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면 더 큰 병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책을 뒤지든 선배 엄마들에게 조언을 구하든 상태가 호전될 수 있도록 여러 방법들을 쓰다 보면 씻은 듯이 낫게 된다. 누구든 실패가 두렵지 않은 이유다.


오늘도 은산이는 얼굴이 발개지도록 힘을 주며 세상으로부터 섭취한 음식물을 정직하게 내놓는다. 그리고 난 적당한 묽기와 색깔로 나온 아기 똥을 보며 한시름 놓는다. 이런 생각들은 그저 머릿속에만 담아 두지 말고 두 소매를 걷어붙일 수 있길, 적어도 은산이가 커 아이를 낳았을 때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지는 않길 바라면서 말이다. 모든 엄마들이 그런 고민을 한다면 이제 막 태어난 아기들만큼은 조금 더 정직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서로의 별이 된다는 건

그는 내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별이다. 난 그저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 내가 하나씩 뽑아 주는 길고 굵은 눈썹, 깨끗한 샘물이 고여 있을 것 같은  깊은 눈, 하품을 할 때면 저 깊은 곳까지도 보이는 큼직한 코, 뽀뽀를 할 때마다 느껴지는 도톰한 입술까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보고 또 봤지만 여전히 매력적이다.


종이 위에 남긴 글도 그를 별처럼 빛나게 한다. 단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아내여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의 글이 좋다. 화려한 글보다는 담백한 글이 좋고, 어두운 느낌보다는 밝은 느낌의 글을 좋아한다. 그래서 책도 한 번에 후루룩 읽히는 것보다는 한 자 한 자 곱씹을 수 있는 책이 좋고, 비극적인 내용보다는 해피엔딩을 더 좋아한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책을 좋아하는 건지, 원래 내 취향이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글을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은 적어도 내겐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꽃향기로 가득하다. 자신이 쓴 글을 잘 보여 주지 않지만 조르면 정말 가끔 보여 주곤 한다. 그럴 때면 난 꽃잎을 먹을 때처럼 달콤하면서도 은은함을 느꼈고, 작은 촛불처럼 수수하면서도 따뜻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나만의 별이 아닌 모두의 별이 되길 바라면서 ‘별책불혹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불혹의 나이에도 별과 같은 책을 쓰기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반면 그는 내가 자신의 별이라 말한다. 그리고 모두의 별이 되길 바란다. 사실 지금까지 그와 다툰 이유는 대부분 난 스스로 별이 되기를 거부하고, 그는 내가 별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부딪치면서 생긴 것들이었다.


"여보, 난 당신이 지금처럼 밝은 별이 됐으면 좋겠어."

"그냥 오빠가 별 하면 안 돼? 난 그냥 까만 밤하늘 할래."


까만 밤하늘을 빛내는 별을 보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우린 얘기했다. 누가 세상을 밝게 비추는 별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나에게 그 사람은 별이고 그 사람에게 나는 별이라는 것이다.



밋밋하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아나운서 고민정입니다

아나운서만 되면 그저 행복한 나날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저 방송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다. 특정 발음이 부정확하다, 말할 때 입 모양이 비뚤어진다, 눈빛이 너무 긴장되어 있다, 목소리가 너무 울퉁불퉁하다, 앉아 있는 자세가 이상하다 등 생각지도 못한 지적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부족한 것투성이인 내가 과연 방송이란 걸 할 수는 있을까 덜컥 겁이 나기도 했고, 이렇게 지적만 할 거면 왜 날 뽑았느냐며 원망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들었던 힘내라는 말 한마디는 내게 큰 위로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방송을 잘할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다.


방송을 하다 보면 항상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넷에 내 이름이 기사화되며 가는 곳마다 알아보는 사람들로 힘이 될 때도 있지만, 아무리 많은 인파 속에 파묻혀 있어도 알아보는 사람 한 명 없는 외로운 섬이 될 때도 있다. 내 이름은 빠른 속도로 잊혀졌고, 매일 방송을 하고 있음에도 친구들에게서 요즘 방송 안 하냐는 말을 들을 때도 있었다. 말할 수 없는 허무함과 역시 난 안 되나 봐 하는 자책감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독여 주는 건 어디선가 응원하고 있을 이들의 목소리였다. 날 감동시켰던 횡단보도의 그분처럼 힘내라고, 당신을 응원하고 있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 지켜 주는 고마운 사람들 말이다. 이 모든 것은 아나운서가 됐기 때문에 겪어야 할 고통이기도 하지만 아나운서가 됐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어둠이 두려운 건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패와 좌절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두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모든 걸 양보하고 희생하며 열심히 공부했는데 말도 안 되는 수능 점수가 나왔을 때,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을 다 갖췄는데도 입사 시험에 계속 낙방했을 때, 가족보다도 더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을 때, 나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그 사람이 이별을 얘기했을 때 마음 속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중국어로 ‘믿는다는 말은 서로 상 자에 믿을 신 자를 쓰는 시앙신이다. 즉 믿음이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을 주고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배신을 당하거나 이별을 했을 때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상대방을 탓하기에 급급하다. 혹은 모든 탓을 자신에게 돌리며 스스로 못났다고 한탄한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패배자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믿고 있을까. 나 혹은 내 아이가 스스로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 믿을 수 없기에 보험에 들기라도 하듯 좋은 학벌만을 향해 쫒아간다. 이 세상에는 공부 잘하는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리고 내 마음을 다 주고 싶은 사람, 내가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사람보다는 나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 그래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 일구는 것보다 모든 걸 갖춘 누군가를 만나 얹혀사는 것이 마치 더 성공한 삶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나보다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 자신의 삶은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상대방은 자신보다 좋지 못한 조건의 사람을 만났으니 실패한 삶이 되기 때문이다. 즉 남에게 피해를 입혀야 곧 자신이 이익을 보는 꼴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내 아이를 믿지 못하고, 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상대방의 숨은 능력을 믿지 못하고…. 그러면서 불거지는 문제들은 부모 탓으로, 환경 탓으로, 사회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렵다면 눈을 감고 귀를 열고 손가락 끝의 신경에 집중해 보자. 어둠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저 나를 둘러싼 하나의 환경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저 내 안의 나를 믿으면 된다. 그 안에서 날 아끼는 누군가가, 단 한 사람이라도 내 손을 잡아 준다면 그 손길을 믿고 따라가면 된다. 작은 불빛의 유무가 마음속 두려움과 평온함을 가르듯, 나를 또 누군가를 믿거나 믿지 않음은 내 삶 전체를 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속에서 빛날 수 있게 

결코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우리가 의료봉사를 간 날은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이른 봄이었다. 갖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두꺼운 옷을 여러 겹 껴입고 갔는데도 난방 기구 하나 없던 농촌 지역의 가건물은 우리를 추위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했다. 게다가 진료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서 있어서인지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파 왔다. 하지만 의사들은 물론 일반 자원봉사자들도 모두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미소로 서로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우리가 맡았던 임무는 진료소를 찾은 어르신들을 접수처와 진료실로 안내하는 일이었다. 그분들이 진료소에 들어오자마자 처음 만나는 사람이 우리였기에 우리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실 그분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더욱 최선을 다했다. 오시는 한 분 한 분께 한국식으로 공손히 인사를 드렸고 내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그분들의 손을 따듯하게 잡았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분명 자신의 것을 조금은 내놓아야 하는 일이다. 오드리 헵번이 시간을 들여 난민국의 아이들을 돌본 것처럼,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아이들의 여린 손을 놓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린 전문적인 기술도 없고, 시간도 없고, 나 혼자 먹고살기에도 빠듯하다는 말을 하며 나눔을 미루기에 바쁘다. 가끔 의료봉사단과 같은 이들을 보면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쁜 일상을 살다 보면 그런 마음조차 까맣게 잊는 일이 허다하다.


그래서 난 내 욕심이 커질 때마다 오드리 헵번의 인형 같은 얼굴을 바라볼 것이다. 그녀의 빛나는 외모도, 그 외모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 그녀의 행동까지도 닮기 위해서 말이다. 얼굴에 깊게 주름이 잡혀 있을 때쯤엔 나도 아름다운 향기를 뿜었으면 좋겠다. 헵번처럼. 

   

나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우리 

남편이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다는 건 우리 부모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결혼 당시 거의 완쾌된 상태였고 설령 결혼 후 병이 악화된다 해도 감당할 자신이 있었기에 굳이 말씀드리지 않았다. 때로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좋을 비밀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꽁꽁 숨겨 왔던 비밀을 TV에 출연해 털어놓게 되었다. 방송은 내가 한 이야기를 잘 담아냈고, 우리 부부는 마치 큰 짐 하나 내려놓은 사람들처럼 후련한 기분으로 TV를 봤다. 그런데 일은 방송이 끝난 이후 터졌다.


"고민정 아나, 남편 NO수입, 제 월급만으로도 충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한 인터넷 신문의 기사 제목을 보게 된 것이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물론 내가 한 말이긴 했지만 앞뒤 잘린 기사 제목만 봤을 때는 남편이 무책임하게 돈도 벌지 않고 사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미안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해결될 수 없는 깊은 상처가 이미 그 사람 마음에 생겼을 거라 생각하니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 방송에 출연하지 않았다면, 내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아나운서가 아니었다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이런 종류의 상처는 주지 않을 텐데, 하는 자책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잠을 청해 보려 눈을 감았지만 베갯잇은 자꾸 젖어 들었고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결국 난 방을 나와 컴퓨터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내 마음을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내 가족을 지켜 주고 싶었다. 내 몸이 화살받이가 된다 해도, 내 살갗이 불에 그을린다 해도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보호막이 되어 주고 모두가 돌을 던질 때 같은 편이 되어 주는 것. 그게 바로 가족일 테니까.


그런데 다음날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난밤에 글을 올린 블로그에 방문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새로운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민정 아나 "남편, 지금의 날 만들어 준 사람" 심경고백

고민정 아나운서 "남편 무능력한 사람 아냐…. 날 만들어준 사람"

고민정 아나 "남편의 경제활동 반대했던 게 나인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내 블로그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달아 놓은 댓글로 넘쳐 나고 있었다. 세상은 이미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버렸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다. 대중들은 진심보다는 자극을 원한다고 얘기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그 사람들이 내게 진심을 담은 응원과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지난 며칠이었다. 분노, 슬픔, 감동, 희망 등 여러 감정들이 한데 뒤엉겼다. 사랑의 감정으로 시작된 부부가 어떻게 한평생을 함께 살 수 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은은하면서도 찬란한 그 빛을 볼 수 있었던 내겐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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