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중하차

   
기타무라 모리(역자: 이영빈)
ǻ
새로운현재
   
13000
2013�� 06��



■ 책 소개
마흔한 살의 봄, 여섯 살 아들과 떠난여행! 

가족을 되찾기 위한 여행이자 자신을 되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 기타무리 모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30대에 유명 잡지 편집장으로 취임한 이후 일에만 몰두하느라 가족이 등을 돌리고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된 저자가 과감히 사표를 내고 아내에게 천만원을 받아 아들과 친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그렸다. 가족을 되찾기 위한 여행이자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행이기도 했다. 마흔한 살의봄, 여섯 살 아들과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상상이 되지 않았지만, 저자에게 그것은 단 하나의 계획이자 단하나의 희망이었다. 

■ 저자 기타무라모리 
1966년에 태어나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 사학 게이오기주쿠 대학교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92년에 닛케이홈출판사에 입사해 2005년부터 2008년 봄까지 「닛케이 트렌디」의 편집장을 지냈다. 현재는 일본 사이버대학교의 객원교수로 IT 마케팅론을가르치면서 방송, 강연, 집필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공저로 『닛케이 트렌디 히트상품 항해기-일본인의 소비는 이렇게 변했다』를냈다.

■ 역자 이영빈
출판기획자이자 전문 번역가. 서울여자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했고 SBS 아카데미 일본어 영상번역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프리랜서 영상자막 번역가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책 기획과 번역을 하고 있다.

■ 차례
서문 

1. 그게 시작이었다 
편집장님, 편찮아 보이세요 
내일 사표를 내자

2. 갑자기 망가져 버린 나
차 안에 아들을 내버려 두다 
사표가 수리되다 
아버지인 당신에게 투자한다 
3. 아들과 처음 떠나는 긴 여행 
압박이 서서히시작되다 
아이와 놀아두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4. 퇴직 
그 남자의 연봉은 얼마인가 
아빠는 귀찮은 존재일 뿐

5. 아빠는 무직이니까
아들의 작은 손을 오랜만에 잡고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6.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왜 계속나빠지기만 하는 걸까 
처음 가 본 병원 
도심 한복판의 심리 상담소 
아빠는 나를 제일 좋아해 
7. 도로 아미타불 
집에는 돈이 없다
무직이니까 일은 안 합니다 

8.1년 만에 타는 지하철 
스위치를 찾아라 
아내는 내 손을 잡았다 
9. 직장인의 유통기한 
무직이었던 부부의 비밀이야기 
아들은 다 알고 있었다 

10. 스위치를 끄다 
알아차림 
그리고 새로운 결심

11. 다시 비행기에 오르다
마지막 도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시간

12. 가족의 인연 
아내가 쓰러졌다 
아빠는 여기 있어





도중하차


그게 시작이었다

내일 사표를 내자

사표를 썼다.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지키고 싶었다. 진짜 이유는 알리지 않은 채 회사를 멋있게 정리하고 싶었다.


상사에게든 인사담당자에게든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솔직하게 말했다면, 장기 휴가를 받거나 부담이 적은 부서로 이동시켜 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내 곳곳에서 "그렇게 유난을 떨면서 일 중독자로 살더니 망가졌다"고 수군댈 것이 뻔했다. 그런 식으로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유명 월간지의 잘 나가던 편집장인 채로 퇴직하고 싶었다. 이 와중에도 이런 걸 마음에 두는 인간이니까 몸에 이상이 생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에 이상이 있다고 소문이 나면 더욱더 회사로 돌아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만둬." 아내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도 묻지 않았다. 표정을 살폈지만 별반 동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별다른 말없이 그만두라고 하는 것이 더 불안했다.

"아직 다른 계획은 없어, 당분간 무직이야. 나 벌써 마흔이 넘었어. 다음 회사야 금방 구하겠지만…." 나는 쉴 새 없이 주절댔다.


아내는 내가 하는 말을 막았다. "다음 일자리 말이야, 1년 안에만 구해줘." 그 말을 남기고 화장을 하러 세면대로 향했다.



아들과 처음 떠나는 긴 여행

아이와 놀아두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

"아이가 크는 건 정말 눈 깜짝할 사이야. 같이 놀아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히 후회해." 그때마다 나는 "그래."라고만 말하고 항상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아내는 늘 이렇게 말했다. "좀 있으면 상대도 안 해줄걸? 지금 제대로 대화하지 않으면 나중에 당신이 아이를 혼낼 때, 들은 척도 안 할 거야." 상대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섯 살이 될 무렵부터 아들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아들과 내가 단둘이서 하룻밤 묵고 오는 여행을 한다. 걱정 어린 아내의 잔소리가 많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 전에 꼭 이를 닦게 해. 위험한 건 시키지 말고, 너무 많이 먹게 하지도 마."

"네, 네."

"그리고 무엇보다…. 싸우지 마."

이건 무슨 소리. 만약 싸움을 건다면 내가 걸 것이라고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에 나는 아들을 가끔 볼 때마다, 아이라는 존재는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을까, 사실 이런 생각을 주로 했다. 인사도 하지 않고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원래 표현을 잘 안하는 성격이겠거니 하면서도 아버지로서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해서 종종 꾸짖었다. 기본적인 예절은 어릴 때부터 잘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는 항상 아들 편을 들었다.

"평소에는 육아에 신경도 안 썼으면서 갑자기 이래라저래라 하니까 아이가 말을 들을 리가 없지."

이렇게 나를 책망했다. 그런 내게 싸움하지 말라니. 지금 나는 싸움은커녕 아들과 어색하지 않게 대화나 할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데 말이다.



퇴직

아빠는 귀찮은 존재일 뿐

비행기와 지하철을 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회사를 그만둔 것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킨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면 아내도 아들도 따뜻하게 맞아 주리라 믿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한 번이라도 여행을 다녀오면 아들과의 거리가 줄어들 줄 알았는데 결과는 달랐다.


핫코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한 달 쯤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아들은 소파에 드러누워서 만화를 보고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만화를 보기 시작해서 한참이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조용히 타일렀다.

"너 너무 만화만 보는 것 아니야?"

그날 아들은 기분이 안 좋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듣고 있어?"

아들은 무시하고 있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잠깐 아빠랑 얘기하자."

아들의 시선은 여전히 만화에 고정된 채였다.

"이 녀석, 이쪽을 좀 보라고!"

나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흔들었다. 아들이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다.

"아빠, 귀찮게 하지 마."


"귀찮다고 하지 않나 발로 차지 않나, 이거 뭐야? 너무하는 거 아니야?"

"진짜 귀찮단 말이야."

아들은 울면서 할아버지 방으로 도망쳤다.

정작 울고 싶은 건 이쪽이었다. 없는 돈에 호화로운 여행에도 데려가 줬는데 귀찮다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

"당신, 여행 가서 뭐하고 온 거야?"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아내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따뜻함을 기대하고 가족의 곁으로 돌아와 보니, 그저 나는 성가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일이 없다. 따라서 수입도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가족에게 귀찮다는 소리를 듣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아니 귀찮고 성가신 존재가 된 것은 이미 회사를 그만두기 전부터였을 것이다.



아빠는 무직이니까

아들의 작은 손을 오랜만에 잡고

매일 아들과 함께 유치원을 오가면서 조금씩 여러 가지 사실을 아들에게 배웠다. 역 앞의 꽃가게 아저씨와는 친해서 지나갈 때 항상 인사를 주고받는다는 것. 급식 때 아들이 싫어하는 토마토가 나오면 선생이 몰래 먹어준다는 것. 소극적인 성격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공원에서 놀 때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이끌며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것.


어느 날 아침, 유치원에 도착해 담임선생님과 잡담을 하고 있는데 아들이 예고도 없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외쳤다.

"아빠는 무직이니까!"

불과 몇 달 전까지 아들은 "아빠는 편집장이니까."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나도 아들의 말이 그다지 싫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무직이니까."로 바뀌니까 몹시 당황했다. 내가 일하지 않는 것을 아들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는 걸까. 그런 것치고는 말투가 너무 밝다. 아들은 분명 웃고 있다.


아들이 "무직이니까." 하고 웃었기 때문인가. 나는 조금이라도 벌이가 될 만한 일을 하기로 했다. 무직이 되었다고 해도 나이가 들 때까지 은퇴 생활하듯 보낼 수도 없고, 예전에 유행했던 시골 생활처럼 한가로운 인생을 지향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어느 부분에서라도 사회와 이어져 있기를 바랐다. 한 달 수입이 삼십만 원, 오십만 원이라도 좋다. 적은 돈이라도 상관없으니 돈을 벌자. 그러면 마음이 다소 안정될 것이다.


한 달에 두 번 있는 지방 방송 외에도, 운 좋게 편집장 시절에 교류가 있던 곳에서 강연 의뢰가 조금씩 들어왔다. 친구의 도움도 컸다. 5년 만에 만난 친구가 이자카야에서 맥주병을 따면서 제안했다.

"시간 있으면 우리 회사 신입사원 연수에서 강연 좀 해줘."

고마웠다. 나는 그날부터 집에서 연수 자료 만들기에 열중했다. 어쨌든 시간은 잔뜩 있다.


친구가 근무하는 회사는 도쿠시마 현의 나루토에 있다.

"비행기 타고 와. 본사가 도쿠시마 공항에서 택시로 20분 정도 거리에 있어. 당일 아침에 출발하면 점심 전에는 도착할 거야."

이 말을 듣자마자 비행기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차하는 역이 많은 신칸센을 타기로 했다. 당일 정오까지 나루토에 도착하려면, 전날에 도쿄를 떠나 중간 지점인 오키야마 부근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면 된다.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나루토에서의 일은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다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간간이 날아드는 강연 의뢰는 대부분 지방에서의 일이라 연락이 올 때마다 깊은 한숨이 나온다. 의뢰를 거절하면 일이 끊기니 그럴 수도 없다. 친구에게조차 말할 수 없던 심신의 이상을 업무 관계자에게 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지 싶다. 먼 곳으로 갈 때마다 속임수를 궁리하기도 어렵다.


이번에는 나가사키 현의 사세보에서 강연 의뢰가 왔다. 담당자는 "티켓은 저희 쪽에서 준비해드립니다. 사용한 티켓은 강연 후에 제출해주세요."라고 했다. 강연 의뢰를 해온 곳은 지방자치단체였는데, "최근에 감사가 엄해서요. 이런 교통비까지 감시받고 있어요."라는 설명을 들었다.


문제는 정말 우연히, 그것도 너무 쉽게 해결되었다. 지인인 경영 컨설턴트와 이야기를 하던 중 "출장을 가는데 도쿄에서 사가까지 철도로 왕복했지 뭐예요."라는 푸념을 듣게 됐다.

"가벼운 중이염요. 기압으로 비행기는 힘들어요."

힘들었겠다며 맞장구를 치면서 내심 이거다!를 외쳤다. 꽤 자연스러운 이유이고 상대가 걱정할 만한 심각한 사정도 아니다.


컨설턴트와 헤어져 바로 강연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가벼운 중이염이 생겨서요."

며칠 뒤, 강연 담당자는 아무 의심 없이 도쿄-사세보 왕복 티켓을 집으로 보내줬다.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처음 가 본 병원

나는 정신과 상담을 받기로 했다.

내가 망가진 인간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기에 의사를 멀리했다. 하지만 이제 이것은 전문가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겠다. 번화가에 있는 병원에 예약했다.


지금까지 나에게 닥친 일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조금이라도 상세하게 말해야 좋을 것 같아서 비행기에 탈 수 없게 된 상황부터 지하철에서의 공포체험까지 공들여서 말했다. 이윽고 회사를 그만둔 이야기에 다다랐을 때 의사가 끼어들었다.

"굳이 퇴직까지 할 필요 없었는데."

여기서 그런 말을 하면 곤란하다. 내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인가.


"제 지금 상태 말입니다. 이게 뭐죠? 그게 궁금합니다."

"공황장애야."

"원인이 뭘까요? 역시 스트레스일까요? 아니면 원래 이런 기질이 있던 겁니까?"

"공황장애가 생기는 요인은 많아. 사람에 따라 다르고. 잠재적으로 공황장애가 발병할 수 있는 사람이 일본에만 백만 명이나 된다고 하니까 말이야."

공황장애의 인구통계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된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의사는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야기는 약 처방으로 넘어갔다.


도심 한복판의 심리 상담소

나는 처방받은 약을 먹지 않기로 했다. 병원에 다니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나는 우선 심리 상담부터 받아보기로 했다. 상담사는 쉰 정도의 남성이었는데, 보자마자 유명한 가부키 배우 나키무라 간자부로가 떠올랐다. 좋은 징조일까. 나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바로 상담을 시작했다.

"이건 대체 뭘까요?"

"흔히 말하는 공황장애입니다."

"제 증상이 회사를 그만둘 정도의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만두고 지금 여기에 계시니까요. 회사를 그만둘 정도의 증상이 맞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한숨을 놓았다.


"공황장애는 왜 발생하는 겁니까?"

"많은 분들이 공황 스위치가 있다고 합니다. 특정 상황에서 그 스위치를 누르고 마는 거죠. 대개는 한 번 누른 다음 다시 발생할까 계속 불안해합니다. 혹은 누른 스위치를 계속 눌러서 두려움을 느끼는 상태가 보통 사람들과 달리 오래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장애인 겁니다."

스위치라고 하니 짚이는 데가 있었다. 공포는 항상 덜컹 소리를 내면서 찾아온다. 그런 식으로 공포가 시작되면 점점 스스로 나 자신을 압박하는 것도 상담사의 말 그대로였다.


상담소를 나오면서 정말 공황장애가 낫게 될까 생각했다. 믿을 수 없었다. 증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징조라 했지만 솔직히 와 닿지 않았고 스위치를 끈다는 것을 내가 잘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희망은 얻었지만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확실한 것이 하나 있긴 했다. 아들과의 여행을 계속하자. 지금 타고 싶은 것은 그냥 타자는 것이었다.



도로 아미타불

무직이니까 일은 안 합니다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일을 계속하던 어느 날 밤, "아, 일하는 거 정말 힘드네."라고 무심코 말한 것을 아들이 놓치지 않고 되받아쳤다.

"아빠, 무직입니다.라고 사람들한테 제대로 말해야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옷에 써 놔. 저는 무직이니까 일을 안 합니다.라고."

생각지도 못한 아들의 말에 처음에는 웃기만 했지만 잠시 후 깨달았다. 이것은 아들 나름대로 진지한 제안이었다.

"맞아, 지금은 일할 때가 아니네."

아들 입장에서는 나를 걱정해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 일을 덜 해야 아빠가 더 많이 놀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유치원 선생님에게 "아빠는 무직."이라고 기쁜 듯이 외치지 않았던가. 게다가 여행을 가자고 한 것은 나다. 굳이 옷에 무직이라고 쓰지 않아도 지금의 상황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아들은 지금까지 여행할 때마다 나의 공항장애를 알아맞히거나 긴 거리를 달리는 열차 안에서 나를 걱정하는 등 어른스러운 발언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여섯 살 아이다. 별것 아닌 일로 묘하게 토라지거나 떼를 쓰거나 어리광을 부리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이는 아이로 있으면 된다. 어른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상담사의 말이 떠올랐다.



직장인의 유통기한

아들은 다 알고 있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도쿄 역을 걸으면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돌이켜봤다. 회사원 시절에는 비행기든 신칸센이든 타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어느 날 불가능해졌다. 결국 회사까지 그만뒀다. 그런데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고 급행열차는커녕 준급행열차에도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찍 귀가해 아들과 목욕을 하고 싶다고 간절히 바랐던 초겨울 어느 저녁에 나는 무사히 나고야 역에서 준급행열차를 올라탈 수 있었다.


왜 다시 급행열차를 선택했을까. 도전하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급행열차를 탄다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그저 머릿속을 스친 것뿐이었다. 그리고 기차 마니아인 아들에게 신형 열차 N700을 타고 싶으냐고 물어보았다. 당연히 아들은 "응, 나 아직 타본 적 없으니까."라고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에서 경험시켜야겠다고 즉각 결심했다. 나에게는 오랜만에 급행열차를 타는 날이 아들에게는 꿈의 N700을 처음으로 체험하는 날. 서로 기념해야 할 승차가 되는 셈이다.


오늘은 공황 스위치를 켜지 않겠다.

몇 번이나 다짐했다. 스위치를 켜지 않겠다는 각오를 계속 되풀이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의 나는 항상 나 자신을 계속해서 벼랑으로 몰았다. 다음 역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중간에 내릴 수 없다. 다음 역까지 못 참을 거야. 중간에 두려워지면 절대 안 된다. 지금 내릴까. 더 못 갈 거야. 절대 못 갈 거야. 등 상황이 악화되는 것은 공황 스위치를 오기로 계속 누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마 여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는 것 같다.


공황 스위치는 누군가가 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른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상담사가 가르쳐준 대로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그럼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어제는 정말 다행히 급행열차를 타고 무사히 올 수 있었다. 한 번 성공한 것을 감사히 생각하면서 무난하게 준급행열차를 타면 된다. 괜히 이번에 또 도전했다가 도중에 실패한다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급행열차를 타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마음 상태라면 돌아갈 때도 무사히 도쿄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들아, 이번에도 N700을 탈까?"

아들은 즉각 대답했다.

"응, 나 또 타고 싶어."


기차는 정각에 도쿄 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 내려서 무사히 돌아온 것을 자축했다. 기쁨의 성격은 생각했던 것과 좀 달랐다. 해냈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 있었던 것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그런 느낌에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음이 실실 새어나왔다.


아마 아들은 내 상태를 다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기차가 멈추면 어떡하느냐고 나를 놀려댔지만 사실 갈 때도 올 때도 내내 걱정해서 내 눈치를 살핀 것이 아니었을까. 나름대로 우리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녀석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고마운 마음에 울컥한다. 녀석 덕분에 무사히 돌아왔다. 아이는 항상 그렇듯, 어른의 생각 그 이상이다.



스위치를 끄다

알아차림

1년 동안 여러 가지를 겪으면서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안정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상생활 속에서 아내가 상담사와 같은 역할을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지난번 지하철에서 아내가 내 손을 잡아 줬을 때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회사를 그만두어도 좋다고 아내가 곧바로 동의해줬을 때에도 나는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아들과 여행을 하겠다고 돈을 달라는 나에게 선뜻 천만 원을 마련해준 아내에게도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고민을 안고 있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사실을 이해해주는 사람이다. 내게는 그게 아내와 아들이었다. 깨달을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상담사였다. 전문가인 정신과 의사라고 해서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내가 내 퇴사와 여행에 동의한 것은 아마 나의 괴로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같이 여행했던 아들도 내 공포심을 나름대로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비행기에 오르다

마지막 도전

"아빠, 비행기 좋아해?"

"그럼, 원래 좋아했어."

그렇다. 나는 불과 몇 년 전까지 해외 출장은 물론 혼자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 게 요리를 제철에 먹으려고 혼자 상하이까지 가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는 게 정말 아무런 일도 아니었던 때가 훨씬 길었다. 고작 한두 해 사이에 사람은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다.


탑승구를 간신히 지나 겨우 기내에 들어간 순간 오! 라고 머릿속에서 외쳤다. 아들과 내가 앉을 좌석이 정말 널찍했기 때문이다. 비행은 순식간이었다. 물론 도중에 위기는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수하물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며 아들에게 말했다.

"아빠 잘 참았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들은 바로 "응."이라고 끄덕였다.


공황을 나와 도쿄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고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여보, 나 비행기 탈 수 있었어, 지금 오키나와야."

"아, 그래. 수고했어."

아내는 담담했다. 나는 항공기가 바뀌어 소동이 일어나고 비즈니스 클래스에 타게 된 사연을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얼마나 당황했는지도 전했다. 아내의 반응을 기다렸는데 고작 돌아온 것은,

"잘됐네, 돈 절약했네." 한마디였다.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아들은 히죽히죽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더욱 간단했다. 별일 없이 무사히 아들과 비행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곧바로 귀가했다.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을 하고 돌아온 여행이었는데 아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이었다. 나에게는 묻지도 않고 그저 아들의 얘기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열심히 듣고 있었다. 아내는 이미 내가 거의 치유되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일까.


다음 날 아침 나는 오랜만에 상담소를 방문했다. 뭔가 결과를 보고하고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상담사는 환하게 맞아 주었다. 오늘 방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았다.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