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Travels With Epicurus

   
대니얼 클라인(역자: 김유신)
ǻ
책읽는수요일
   
13000
2013�� 03��



■ 책 소개
75세의 노학자가 현자들의 섬에서 찾아낸청춘 이후, 더 아름다운 삶의 비결!

75세의 유쾌한 노학자 대니얼 클라인은 영원한 청춘을 꿈꾸며 살아가는독자들에게 현자들의 섬에서 찾아낸 ‘청춘 이후의 삶과 시간의 지혜’를 전해준다. 저자는 인공치아 시술 대신 그리스의 이드라 섬으로 여행을 떠나기쁨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나이가 들어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다. 에피쿠로스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세네카,키르케고르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과 카뮈와 사르트르, 윌리엄 블레이크의 문학적 조언들을 아우르며 놓치기엔 아까운 인생의 마지막 선물들을고스란히 담아냈다. 흘러가는 시간을 즐기고, 사라지는 기쁨을 음미하며, 항구에 정박한 배처럼 느긋하게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 저자 대니얼 클라인
1939년 델라웨어 생. 미국인이 사랑하는 작가이자 세계 여러 나라에 소개된 교양 철학 저술가이다. 하버드에서 철학을전공한 후, 여러 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방송계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술집에 들어온 플라톤과 오리너구리 한마리(Plato and a Platypus Walk into a Bar)』와 같은 대중 교양서를 주로 집필하였으며, 지난 2009년에는 소설『현재의 역사(The History of Now)』로 「포워드 매거진」 선정 올해의 책 은메달을 수상하였다. 현재 아내와 함께 매사추세츠 주에서살고 있다.

■ 역자김유신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에이브러햄링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Abraham LincolnUniversity School of Law)에서 전문법학석사(Juris Doctor) 과정을 수료하였으며, 현재 대한민국 법령집을 영문으로옮기는 번역자로 일하고 있다. 역서로는 『어떻게 살 것인가』『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것일까』『자조론』『피크 앤드 밸리』『BBC 구하기』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에피쿠로스와 함께 여행을 
1장 즐겁게 살지 못하면 바르게도 살 수 없다
2장 세월은 똑같은 속도로 흐르지않는다
3장 고독한 만큼 나에게 가까워진다
4장 아름다움은 선택이다
5장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다
6장 능력 밖의 것들을내려놓다
7장 한순간에 영원을 붙든다

에필로그 -인생의 단계마다 각기 다른 의미와 즐거움이 있다 
역자의 말 - 항구에 정박한 느긋한 배처럼





철학자처럼 느긋하게 나이 드는 법


1장 즐겁게 살지 못하면 바르게도 살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사모스 섬에서 성장했다. 사모스 섬은 이드라 섬처럼 에게 해에 있는 섬이지만, 아나톨리아 또는 소아시아 지역에 가까운 섬이다. 에피쿠로스는 플라톤이 태어난 지 불과 80년 뒤인 기원전 341년에 태어났으나, 플라톤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주요 관심사는 우리에게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그의 질문은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인 것 같다. 그러나 수십 세기가 흐르는 동안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이 질문보다 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질문들이 던져졌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년)는 이해할 수 없어 한바탕 웃어넘기게 되는 질문들을 제시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눈앞에 닥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존재하는가?"라든가, "무엇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인 질문이 현대에는 더 중요한 질문으로 대접받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도 실재성(Reality)의 성격에 대해 사색했으나, 그는 근본적으로 더 궁극적인 질문, "인생을 최대한 활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몰두하였다. 에피쿠로스가 오랜 사색을 통해 얻은 답은 가장 좋은 삶이란 행복한 삶, 즉 쾌락으로 가득 찬 삶이라는 것이었다.  


욕망을 해소시키는 정원으로의 초대 

우리는 흔히 에피쿠로스주의자라는 말을 식도락가나 극도로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그런 의미의 에피쿠로스주의자는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예들이 마스티카(유향나무에서 추출한 수액)를 넣고 구운 꿩고기 요리를 좋아했지만, 에피쿠로스는 아무 양념도 하지 않고 삶은 콩 한 사발을 더 좋아했다. 민주적인 성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쾌적함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쾌적함에는 쾌적한 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꿩 요리가 미각을 자극하지만, 에피쿠로스는 그런 감각적인 쾌감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콩을 직접 재배했다. 자신이 키운 것으로 만든 음식에서 큰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스스로 가꾸었다는 것이 콩을 먹으면서 얻는 만족감의 일부였다. 한편 그는 감각에 대하여 선불교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콩 맛에 완전히 몰입하면 갖가지 양념과 향료로 맛을 낸 요리에 못지않은 맛을 느끼고 오묘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 콩 요리가 지닌 또 다른 장점은 요리가 아주 쉽다는 것이었다.


당시 아테네 사람들 중에는 에피쿠로스와 그의 사상을 사회 안정을 해치는 위협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개인적인 즐거움을 인생의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자기 이익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철학은 당대 아테네인들이 국가를 단결시키는 접착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던 이타주의를 와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정치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각자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기로 작정하면 사회는 저절로 제 기능을 잘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신조 중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다. "즐겁게 살지 못하면 지혜롭거나 바르게 살 수 없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의 철학대로 살았다. 에피쿠로스는 아테네 외곽에 정원이라는 원시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고 자신의 철학에 동조하는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정원에서 채소를 가꾸고 끝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정원 대문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을 처음 찾아온 이야! 여기에 머물러도 좋다. 이곳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선(善)은 쾌락이다. 이곳의 관리인이자 친절한 주인은 언제든지 그대를 환영할 것이다. 그는 그대에게 빵을 대접하고 물도 풍부하게 주면서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여태까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는가? 이 정원은 그대의 식욕을 돋우지는 않지만, 식욕을 해소시켜줄 것이다."



2장 세월은 똑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

내가 학교를 그만둔 이유

1960년대 초, 나는 소르본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으며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파리 5구의 아렌드 뤼테스 공원에서 로마제국의 1세기 전초 기지 유적이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으로 발길을 향했다. 나는 관람석 꼭대기로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검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경기를 펼치던 바로 그 경기장에서 여섯 명의 프랑스 노인들이 잔디 볼링의 변형인 페탕크 시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정중하고 우아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두 상의에 넥타이나 스카프를 매고, 몇 사람은 멋진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한 사람이 공을 굴려 표적을 정확히 맞추면 다른 사람들이 고개 숙여 정중하게 축하 인사를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멋지고 기품 있는 영감 여섯 명이 열정적으로 시합에 몰입하는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나 갑자기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들을 보면서 가슴에 희망이 차올랐다. 그렇게 상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이들이 늙은이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인생의 끄트머리에 있는데도 여전히 살아 있음을 기뻐하며 인생을 즐기고 있었다. 원숙한 성인이 되는 길로 비틀거리며 들어서는 젊은이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참으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페탕크 시합을 본 지 며칠 만에 나는 대학원을 자퇴하고 돈이 떨어지기 전에 즐길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기기로 작정했다.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 안에 있는 에피쿠로스주의자가 그렇게 결정한 것 같다. 그 무렵 소르본대학교의 한 동기생 말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어로 학교를 가리키는 단어의 본래 뜻이 여가였다고 한다. 플라톤은 대화록 『에우티데모스』에서 이것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작품에서 교실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여가 시간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놀이를 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을 펴서 궤변가들을 눌렀다. 그리고 플라톤의 계승자이자 즐거움에 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에피쿠로스는 배움과 행복 사이에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그는 교육의 근본 목적은 마음과 감각을 인생의 각종 즐거움에 맞게 조율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3장 고독한 만큼 나에게 가까워진다

홀로 생각하고 대화하는 기쁨 

에피쿠로스는 정신적 즐거움이 육체적 쾌락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 확신했다. 마음은 과거의 즐거움을 되새기고 미래의 즐거움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말년에 에피쿠로스주의자로 전향했는데, 그는 정신적 즐거움이 우월한 이유를 "지속적이고 상호 연결된 즐거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에피쿠로스와 플라톤은 노년이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광범위한 주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라고 믿었다.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노인은 성적 흥분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기회의 창이 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년에는 고요함과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 열정이 느슨하게 풀어지면 단 하나가 아닌, 수많은 미친 주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노년의 이런 기회가 경제 활동과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 활동과 정치에서 벗어나면 다른 일, 특히 사적인 일과 철학적인 관심사에 두뇌를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인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열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기에 아주 이상적인 위치에 있다고 말했다.


현대의 두뇌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년에는 철학적 사유를 하기가 쉽다는 플라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몬트리올대학교 연구진은 노인의 두뇌가 젊은이의 두뇌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를 지휘한 오우리 몬치 박사는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지고 두뇌는 자원을 더 잘 배분하는 방법을 습득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신경생물학적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의 연구진은 "두뇌는 작동하는 속도가 느려질수록 지혜로워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이유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하는 두뇌 부분과 지각적인 예측을 하는 두뇌 부분이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의 두뇌는 도파민 의존도가 저하되어 충동적인 반응이 줄어들고 감정에 지배받는 정도가 줄어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늙으면 "더 지혜로워진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이 뜻하는 의미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노인들은 젊은이들과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천천히 생각하는 데 적합한 주제는 천천히 생각해야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노인들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과학자들의 말대로 도파민 중독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그걸 누가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는가? 새롭게 터득한 생각법의 근원이 무엇이든 간에, 노인은 멋진 일에 대하여 젊은이들보다 생각할 기회를 더 많이 얻는 것만은 분명하다.  



4장 아름다움은 선택이다

결혼은 오래 지속될수록 빛난다

에피쿠로스나 플라톤은 결혼이라는 주제에 대해 기록으로 남긴 것이 많지 않다. 결혼은 생식을 위해 필요한 것이고, 생식은 자연스럽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 철학자들은 결혼이라는 주제에 대해 그 이상으로 언급할 흥미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를 갖고 싶은 남자와 여자만 결혼을 통하여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서적인 측면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결혼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결혼을 통하여 얻는 동반자 관계는 높이 평가하였다. 이 동반자 관계는 부부가 노년에 들어설 때 더욱 중요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우정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 같다. 인간은 천성적으로 짝을 이루고 살려는 경향이 있다. 도시를 형성하는 것보다 부부관계를 맺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 가정이 도시보다 일찍 형성되었고 도시보다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인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저서 『수사학』 제2권에 "노인은 다정다감하게 사랑할 줄도 모르고 격렬하게 미워할 줄도 모른다. 노인은 편견에 따라 언젠가는 미워할 것처럼 사랑하고 언젠가는 사랑할 것처럼 미워한다"라고 썼다.


이후에도 철학자들은 결혼의 가치와 위험성에 대해서 수많은 말을 쏟아냈으나, 노년기까지 지속되는 결합에 대해서는 언급한 사람이 거의 없다. 놀랍게도 황혼기에도 지속되는 결혼에 대해 가장 적절한 견해를 밝힌 사람은 급진적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년)였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이례적으로 실용적인 측면에서 밝혔다. "결혼할 때에는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라. 나는 노년기에도 이 사람과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가? 결혼 생활에서 그 이외의 나머지는 모두 덧없는 것이다." 머리가 이상한 허무주의자 니체가 내심으로는 결혼 상담자를 자처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5장 살아 있음이 곧 기적이다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강조한 말은 매사에 절제하라는 것이다. 지나침과 부족함 사이에서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라는 덕목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용기가 지나치면 무모해지고 용기가 너무 적으면 겁쟁이가 된다. 그는 절충안을 찾으라고 충고한다. 그래야 언제나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의 덕목을 미학적인 이상과 결부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상을 좋아한다. 이등변 삼각형이나 균형이 잘 잡힌 건축물처럼 예술적으로 균형 잡힌 사물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제된 행동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아름답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움은 곧 균형이고, 균형은 곧 아름다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현대 그리스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인들은 대다수가 기름기 많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쾌락을 적당히 즐길 줄 안다. 식탁 앞에 앉아서 천천히 음식을 즐긴 후에는 담배를 한두 대 피워도 좋다. 이들은 하루 종일 담배 연기를 신경질적으로 뿜어대거나 담배를 완전히 끊으려고 행동 절제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자신에게 스트레스를 가중시키지도 않는다. 오늘날 이 지구에 사는 민족들 가운데 그리스인들이 최장수 민족 중 하나라는 사실이 경이롭지 않은가? 이들의 장수 비결은 이른바 지중해식 식단에 들어 있는 올리브오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반성하지 않는 삶

노인은 자신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기에 가장 적합한 단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에는 마음속에서 타오르고 있었지만 출세라는 목표 때문에 희미해진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 문제들을 생각해보기에 적절한 위치에 있다. (존 레논의 말을 알기 쉽게 바꾸어 표현하면, "인생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고 있는 동안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다시 중요한 문제라고 느껴진다.


노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이 노년기로 가는 여행에 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는 사유, 특히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데 적합한 도구를 갖추면 노년을 제대로 보내는 데, 큼직한 문제들을 생각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생각할 때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야 한다. 때로는 학교에서 배운 철학 때문에 "도대체 문제가 무엇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직감적으로 느끼는 철학적 자극이 손상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사상가들의 강력하고 난해한 개념들에 사로잡혀 맨 처음에 그들의 저서를 읽게 만든 호기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철학의 방향으로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은, 반성하지 않는 삶은 자신을 위해서 결코 좋지 않다는 기본적인 직관력밖에 없다.



6장 능력 밖의 것들을 내려놓다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내 친구 패트릭은 아직 초고령자가 아니다. 노인 우울증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서 우울증 징후가 보이고 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래서 서글프고 침울하다. 그는 내게 "자네는 영원한 청춘을 바라는 녀석들처럼 노년을 제멋대로 살고 있네"라고 질타했다. "진짜 노년을 제대로 보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탐구하면서 돌아다니는 건 영원한 청춘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친구들과 다를 것이 없어. 그런 친구들이나 자네나 언제라고 닥칠 것을 부인하고 살아가기는 마찬가지네"라고 핀잔을 주었다.


패트릭은 내가 간과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채고 있는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노년에는 심술궂게 행동하면서 사는 것이 정직하게 사는 것일까? 연극이나 영화에서는 옛날부터 노인을 괴팍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노인은 자기가 하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젊은 것들은 일을 제대로 안 한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은 노인이 괴팍하게 심술을 부리며 투덜거리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이 불만스러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잘 생각해보라. 진지하게 넋두리를 늘어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니까.


괴팍한 노인으로 변하는 것도 나름대로 특전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로 출발하기 전에 패트릭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늙어가는 것을 불평하는 것이 내 취미가 되었네. 그건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지." 그에게는 그게 효과를 발휘했으나 내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실존주의에 물들어 있는 내 머리로는 패트릭의 우울증 징후가 인생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인생의 끝, 특히 오래 산 이후에 만나게 되는 인생의 끝이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주 젊었을 때부터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이것이 스물한 살에 이미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지 않으면 인생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라는 뜻인가? 인생의 유한성에 비추어볼 때, 50년 후에 죽든 5년 후에 죽든 큰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실존주의자 알베르 카뮈는 초고령기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두려움과 질병은 말할 것도 없고 절망감도 인생의 무의미함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뮈도 각자 결정과 해석을 통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부조리를 초월하여 의미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정당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노년을 보내는 방법은 영원한 청춘을 추구하는 사람처럼 숨 가쁘게 야망을 품는 것도 아니고, 내 친구 패트릭처럼 끊임없이 절망감에 휩싸여 지내는 것도 아니며,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정하게 이런 말을 했다. "초고령기에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곧 들이닥칠 초고령기 때문에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스토아 철학에서 배운 교훈을 가슴에 새기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초고령기에 이르기도 전에 초고령기에 겪게 될 두려움에 집중하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기 전에 아직 남은 아주 적은 시간을 내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사로잡혀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이 시간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



7장 한순간에 영원을 붙든다

평범함 속에서 우주를 본다

부활절을 그리스어로는 파샤(Pasha)라고 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유월절을 뜻하는 페사크(Pesach)와 유대인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축제 첫날에 희생 제물로 바친 파스카 양(Paschal lamb)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리스의 부활절과 유월절은 매년 달의 변화에 따라 계산된 날짜에 기념하는데, 나는 그리스 친구 타소의 집에 부활절 만찬 초대를 받았다.  

  

타소와 아내 소피아, 타소의 아들 코스마스 부부와 코스마스의 십대 아들 니콜라오스까지 모두 다정하고 쾌활했다. 마당 한 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꼬챙이에 꿰어 불 위에 올려놓은 어린 양의 다리는 아직 익지 않았다. 먼저 우조와 전채 요리들이 들어왔다. 그릴에 구운 문어, 노릇하게 구운 치즈, 오렌지 껍질로 양념을 한 돼지고기 소시지, 올리브와 포도 잎으로 싼 음식, 오이와 요구르트를 곁들인 샐러드 등 전채 요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요리를 내올 때마다 그 요리를 만든 사람은 마당을 한 바퀴 돌면서 자랑스럽게 자신의 별미를 나누어주었다. 니콜라오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 합격을 비롯해 가족들의 사소한 일들을 언급하며 건배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인이 타소의 정원에서 벌어지는 이 광경을 보았다면 부활의 의미는 퇴색하고 부활절이 세속적인 휴일로 바뀌었다며 종교가 타락했다고 탄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랑하고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새싹이 돋는 레몬나무 아래에 앉아 있는 동안 본질적으로 성스러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닥불 주위에 앉은 식구들은 서로 따뜻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타소의 정원에서는 노년기의 이상적인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늙은이인 나로서는 이러한 평화로움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이라고는 함께 어울리는 것밖에 없다. 신나는 일이나 대단한 업적도 기대하지 않는다. 사실, 이 순간에는 바로 여기에서 누리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우주에서 바라는 것이 없다. 이 집 식구들의 얼굴에서 "세상을 보고" 있으니까. 늙은 에피쿠로스가 정원에 긴 식탁을 놓고 친구들과 어울렸을 때에도 이와 같은 분위기였을 것이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고귀함.


숭고한 체험을 하려고 집착하지 말고 그런 체험이 은총으로 왔다가 스쳐 지나가도록 하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충고가 떠오른다. 내 영적 지도자인 블레이크는 형이상학적인 시들 가운데 보석처럼 영롱한 네 줄짜리 시 「영원」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한 가지 기쁨에 집착하면

훨훨 날아다니듯 자유로운 삶이 파괴되지만,

날아다니는 기쁨에 입을 맞추면

영원히 아침을 맞이하며 살리라.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