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 서울

   
김지현
ǻ
네시간
   
13000
2012�� 06��






&>■ 책 소개
도시 서울,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삶의좌표 찾기

&>시끄럽고바쁘다. 밥벌이의 지겨운 노동과 지나친 경쟁 구도 속에서 사람들에 치여 먹고 사는 문제에 척박한 현실을 대면한다. 도시,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이미지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도시, 서울’에서 감히 ‘행복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방송 작가 14년차, 서울 살이 19년차. 저자는서울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홀로서기’, ‘관계 맺기’, ‘행복 찾기’, ‘거듭나기’로 나누고, 이 네 가지 ‘디테일 서울 살이’를 통해도시의 삶을 구석구석 들여다본다.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 저자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글쓰기다.

■ 차례
프롤로그 - 서울에서 산다는것

&>DetailSeoul Part One 디테일 하나, 홀로서기: 민달팽이에게도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덜 독립적이고 덜쿨해야지
취미를 뭘 할까 하는 고민
가족, 답 없는 관계
‘뻥카’를 버리고 ‘진카’로 베팅할 때
도시 유목민의 트렌드,노퍼니처주의
이웃집, 그 남자 그 여자의 속사정
과식, 스트레스, 무분별한 음주… 이건 아니잖아?!
때론 고양이를 키우는그녀들이 부럽다
인생에는 허튼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
to do list+1 스탠딩커피

&>DetailSeoul Part Two 디테일 둘, 관계 맺기: 도시는 외로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서울의 밤하늘엔 3G와 4G가 떠있다
카페는 내 인생의 소울메이트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낮술의 이유
시간대별로 옷을 갈아입는 서울 풍경
외로운 밤엔 누가뭐래도 치맥이 진리!
도시는 잠들지 않는다
소설책에서 연애의 이상향을 찾다
지금 필요한 건 야성에 눈뜨는 시간
디자인에매혹되는 스타일 산책
도시를 즐기는 사람, 불평하는 사람
계절별로 놓칠 수 없는 감상 포인트
to do list+2비행술

&>DetailSeoul Part Three 디테일 셋, 행복 찾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
1만 원의 위로샤머니즘
쇼핑은 불안을 달랜다
길에서 조우하는 수상한 가게들
잇 레스토랑, 그 소심한 허세
종로 뒷골목의 낭만에무임승차하다
맛과 멋! 외국을 만나는 이색적 풍경
진정한 놀이의 달인이 제안하는 휴가법
된장녀가 아니다, 리얼 세대의워너비다
벼룩시장, 포트럭 파티의 세계로 고고
명품 라이프, 럭셔리 라이프, 하이엔드 라이프
to do list+3 커피 한잔

&>DetailSeoul Part Four 디테일 넷, 거듭나기: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서울 뒷골목 풍경
도시를 사랑하는 몽상가가 보내는편지
반경 5킬로미터 내에서 행복하기
고향을 닮은 그곳, 망원동에 사는 이유
나와 함께 늙어가는 동네, 종로 3가
오래된풍경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까미노 데 홍제, 느리게 혹은 편안하게
감성을 어루만지는 거리, 삼청동
세월이 축적한 이야기엔감동이 있다
처음의 눈물, 지나온 과거에 대한 예의
서울 촌년의 버스 여행
결국 남는 것은 삶의 좌표를 찾는 문제
todo list+4 통인시장 도시락카페

에필로그 - 서울의 지도 위에 새기는 삶의 노선





디테일, 서울


홀로서기: 민달팽이에게도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뻥카를 버리고 진카로 베팅할 때

누구나 마지막까지 들키고 싶지 않은 비장의 카드 한 장쯤은 있다. 주머니 안쪽 깊은 곳에 감춰두고 산다. 그 카드를 꺼내 들 한 방을 아끼려고 침묵하거나 엄살을 떤다. 포커를 칠 때 진카를 꺼내기 전까지 뻥카로 시간을 때우는 것처럼. 마흔은 뻥카가 떨어지고 본격 진카를 꺼내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더는 젊지 않다는 걸 알기에. 사회적 입지가 좁아지기에 다들 손놀림이 빨라진다.


작은 무역회사에 다녔던 N은 1년 동안 자격증을 준비해 영어 강사로 두 번째 직업을 시작했다. 요즘 계약직인 방과 후 영어 교사 자리도 석, 박사 출신이 즐비하지 않던가. 아직 자리는 못 잡았지만 40대, 50대를 떠올리면 교육계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15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한 J는 취미를 살려 차 소매상을 준비하고 있다. 여자 나이 마흔이면 대기업이나 전문직이 아닌 이상 자리가 없다. A는 방송 작가를 그만두고 연봉 6천만 원에 성과급을 주는 보험 영업직으로 이직했다. 몇 년 안정적인 수입으로 목돈이 생기면 뭔가를 준비할 계획. 방송 작가인 S도 빚을 조금 내서 서울에 빌라 한 채를 샀다. 다른 재테크는 못 해도 노후 대비용 집 한 채는 있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에서다. 또 갚아야 할 빚이 있으면 쓸데없이 돈 안 쓰고 열심히 일하게 될 테니까. 이렇게 남들 움직이는 걸 보니 나도 뭘 좀 해야겠다 싶다. 카드 판에서 어김없이 순번이 돌아오듯, 곧 내 차례가 돌아온다.


꼭 숫자에 유난 떠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나처럼. 뻔히 숫자 놀음이라는 걸 알면서 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나이 앞자리가 바뀔 때마다 민감해지고, 아홉수일 때마다 방황한다. 더군다나 이번엔 마흔 아닌가. 인생을 80세까지 산다 치면 이제 절반을 살았고, 남은 절반을 계획해야 한다. 30세 때는 30대를 어떻게 살까 10년 후를 내다봤지만, 마흔에는 남은 40년을 내다봐야 한다. 왜냐하면, 치매를 고민할 만큼 심각한 기억력 감퇴에, 뚝뚝 떨어지는 체력, 누가 암이라도 걸렸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다. 이제는 질병과 노후도 염두에 둬야 한다.


자, 마흔의 계획을 어떻게 짤 것인가. 치밀하게 40대 계획을 세울 것인지, 어차피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인데 물 흐르듯 살 것인지. 느슨하게 살 건지. 보다 밥벌이에 매진할 건지. 새로운 걸 배워 인생 2라운드를 시작할 건지, 한우물 판다는 심정으로 하던 거 계속할 건지. 고민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마흔을 앞두고는 뭘 해야 할까. 40대를 키워드로 검색해보니 여전히 꿈과 성공을 위해 살라는 조언들이다. 여전히 우리는 꿈을 좇아 살아야 하는 걸까.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처럼 간절히 원해도 온 하늘은 도와주지 않으며, 아무리 긍정 마인드를 가진다 한들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건 미비하다. 나는 꿈이란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줄 안다. 꿈은 지금 여기가 아닌 불투명한 미래에 살게 한다. 현실에 발을 못 딛고 내내 꿈에서만 살게 한다. 차라리 꿈을 버리면 오히려 행복에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쥔 패를 꺼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은 건 내가 해보고 싶은 일들, 내 꿈이다. 내내 쥐고만 있던, 어떻게 써보지 못한 진카들. 인생 뭐 있느냐고, 사는 게 별거냐고 허풍 떠느라 뻥카들은 다 써버렸다. 그러나 내내 품에서 꺼낼 타이밍을 기다렸던 진카들은 쉽게 꺼내지지 않는다. 두렵다. 아껴둔 진카가 게임을 승리로 이끌지 패배로 이끌지 모르니까. 돌이켜보면 지금껏 나는 뻥카처럼 살았다. 관계에, 일에,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계속 패를 쥐고만 있을 수는 없다. 믿었던 진카가 실은 뻥카였다 한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어쩌면 진카 한 번 못 꺼내보고 게임이 끝날 수도 있다. 마흔은 그런 시기다. 정말 꺼내야겠지? 이제는 위장하지 않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허세 떨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직진. 내 카드가 이길 거라는 확신. 그것이 뻥카가 된들 훌훌 털고 자리를 뜰 용기. 이젠 정말 그래야겠지? 나, 마흔엔 치열해지기로 했다.



관계 맺기: 도시는 외로움을 허락하지 않는다

서울의 밤하늘엔 3G와 4G가 떠 있다

트위터 계정을 없애야겠다. 자투리 시간에 활용한다며 시작한 게 이제는 나의 유용한 시간마저 잡아먹고 있다. 그러나 그다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게 이런 다짐조차 트위터 140자 박스 안에 적고 있다는 사실. 작년 봄 친구의 소개로 시작한 트위터는 급성 호흡기 질환처럼 무섭게 내 생활에 스며들었다. 내 생각, 내가 가는 곳, 나에게 벌어진 일, 그 모든 걸 트위터에 남기고픈 열망. 아침에 눈을 뜨면 베개 옆에 놓아둔 스마트폰으로 트위터를 보고, 운전 중 신호 대기에 걸리면 그 새를 못 참는다. 친구와 수다를 떨다가도 잠깐 자리를 비우면 수다 내용을 정리해 올린다. 읽고, 쓰고, 읽고, 쓰고, 그 반복된 행위 탓에 마치 엄청난 창작 활동을 한 것처럼 피곤하기까지 하다. 정말이지 마지막으로 책을 읽은 게 언제였더라. 마지막으로 친구와 수다를 떤 게 언제였더라. 명상했던 건. 카페에서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던 건. 그 모든 중요하거나 혹은 잡스러웠던 시간이 실종됐다.


몇 번이나 트위터를 없애는 걸 고민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관계란 따지고 보면 늘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앞에서 열거한 단점도 있지만 그걸 상쇄할 만한 장점도 있지 않은가 싶다. 파워 트리터러인 소설가 이외수는 재밌을 때는 재밌는 거 하면 되고, 몰입했던 경험은 쓸데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옳거니! 사람은 바닥을 치면 올라오고 너무 멀리 갔다 싶으면 돌아오는 법. 이미 PC 통신이나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 같은 걸 통해 검증하지 않았던가. 결국, 시간이 흐르면 다 시들해지고 만다는 것을. 다 지나간다는 만고의 진리 말이다. 매번 이런 식으로 정당화하니 중독이 고쳐질 리 없다.


내게 트위터는 이렇다. 책을 읽다가 몹시도 마음에 드는 문장에 밑줄 쳐 놓고, 그래도 부족해 누군가와 나누고 싶을 때, 문득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 엄마와 통화 후 기분이 울적할 때, 그 감상을 담는다. 맛있는 식당을 발견하면 소개하고 싶고, 재밌는 영화를 보면 권하고 싶다. 때론 오랜 생각 끝에 도달한 결론을 말해주고 싶고, 때론 더러운 기분을 똥 싸버리듯 방출해버리고 싶다. 이런 얘기를 한창 바쁠지도 모르는 친구에게 전화해서 하는 것보다, 깨알같이 적어놨다가 나중에 감흥 없이 읊는 것보다, 트위터의 타임라인에 적어 흘려보내는 게 훨씬 낫다.


또 아일랜드 가수 데미안 라이스가 내한 공연을 마치고 새벽에 홍대에 떴다든지, 광화문에서 촛불 집회가 있다든지, 이태원의 어느 카페에서 벼룩시장을 한다든지, 어느 극장에서 어떤 영화가 개봉했는지, 내 방 책상에 앉아 스크롤을 위아래로 조절해가며 서울 돌아가는 상황을 체크한다.


트위터 친구와의 관계도 트위터를 계속하는 이유다. 어디 살며, 뭐 하는지, 몇 살인지도 잘 모른다. 술과 음악을 좋아하지만 꼼짝 못 하는 주부의 푸념, 여수에서 전원생활을 시작한 싱글녀의 고민, 고양이 두 마리 키우는 싱글녀의 소소한 일상, 싱가포르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동갑내기, 매일 아침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아저씨. 매일 업데이트되는 그들의 일상을 지켜보며 때론 연민을 느끼고, 때론 응원하고, 때론 웃기도 한다. 그리고 무심한 심장을 툭 하니 건드려주는 묘미가 있다. 가령 구 남친 봇이라는 트위터 계정이 있다. 옛날 남자친구가 했을 법한 말을 읊는 계정인데 그게 참 구구절절하다.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너는 그게 매력이야. 약속? 누구? 당분간은 힘들 거라는 거 나도 알아, 근데 이대로는 정말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이렇게 콕콕 잘 짚어내나, 읽으며 박장대소하다가도 어떤 말 한 마디에 밑도 끝도 없는 심연에 빠지기도 한다. 자니?라는 말. 그 시절엔 연인이 자는지 안 자는지 그게 왜 그렇게 궁금했을까. 전화나 문자로 곧 잘 거라는 소식을 받았더라도 바로 잠이 드는지, 더 있다가 잠이 드는지. 더 있다가 잠이 든다면 그 시간까지 뭘 할 건지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서 다시 문자 한 통 넣는다. 혹시나 잠에서 깰까 봐 전화는 못 하고 문자를 하는 그 배려의 한 마디, 자니? 이렇게 트위터 글 하나로 잠 못 이루는 말캉한 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안다. 정보니 소통이니, 재미니, 저마다 트위터를 하는 이유가 있지만 우리가 야심한 밤 침대 위에서까지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이유는 외로움이다. 뭘 먹었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슨 노래를 듣고, 어떤 기분인지. 내용은 다르지만 그 함의는 나 아직 안 자고 있어요. 아직 깨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거다. 누군가는 내 존재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 연애도, 트위터도, 예술도 실은 다 자기존재의 확인을 위한 것이 아닌가.


서울의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마도 와이파이에 3G, 4G까지 가세해 마치 영화 <매트리스>의 녹색 코드처럼 하늘 위를 촘촘하게 흐르고 있겠지.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전파에 접속해 외로움을 달래는 거고. 밤하늘에서 별의 낭만이 아닌 3G, 4G를 느끼는 나도 병이다. 참으로 사랑도 병이고, 트위터도 병이다.



행복 찾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삶의 방식

종로 뒷골목의 낭만에 무임승차하다

허름한 선술집을 그냥 지나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추운 겨울날 창문에 뽀얗게 서린 김. 그 너머로 옹기종기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는지 나만 모르는 인생의 재미를 누리는 것 같아 시샘까지 한다. 나는 왜 이런 허름함에 매료되는지 생각해본다. 편안함, 푸근함 그리고 만만함을 보태고 싶다. 대충 입고 들어가면 어때, 많이 마셔봤자 얼마나 나오겠어, 하는 만만함.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 가운데 몇 안 되는 만만한 상대.


한때 서울의 허름한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취미였다. 맛에 대한 탐구보다 허름한 풍경에 매료되었던 탓이다. 가령 깔끔하고 세련된 외경을 자랑하는 강남의 고층 건물은 뒷모습도 매끈하지만, 종로와 을지로 일대의 고층 건물은 앞모습만 요란했지 뒷모습은 영 허술하다. 그게 싫은 건 아니다. 겉은 화려하게 단장했는데 어쩌다 들켜버린 너덜너덜한 속옷이랄까? 알고 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친구를 만난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내 주변엔 청담동의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가 주는 댄디 가이는 없어도,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가사에 나오는 도라지 위스키가 뭔지 설명해줄 수 있는 이들은 많다. "너 정말 도라지 위스키를 몰라?" 일단 한번 뻐겨준 다음, 입가에 슬쩍 미소를 머금으며 회상 모드로 전환. 그들은 종로나 을지로 한쪽에 묻어둔 그네들의 추억을 끄집어낸다. 그들이 몸소 통과해온 낭만의 시절 이야기. 나는 그들의 시절에 무임승차한다.


을지면옥에서 제대로 코스 요리를 즐기는 법

닉네임 멍후. 58년 개띠. 한때 을지로 명동 종로 일대를 누비던 모던 뽀이.


종로, 을지로 일대에는 가옥 옥(屋) 자를 쓰는 가게들이 유난히 많다. 을지면옥, 조선옥, 보건옥, 우래옥, 영춘옥, 청진옥 등. 강세를 보이는 메뉴는 불고기와 냉면. 지금은 백화점에 가면 동서양을 넘나드는 다양한 식당들이 밀집해 있지만, 옛날엔 이곳이 최고의 외식 거리가 아니었을까. 전성기에 종로와 을지로를 누비고 다녔던 멍후 아저씨를 따라 을지면옥에 가봤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프랑스 요리엔 그것만의 먹는 방법이 있듯, 을지면옥에서도 불고기와 냉면을 즐기는 그만의 방법이 있었던 것. 이것은 어디까지나 멍후 아저씨라는 개인이 수차례의 방문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동참 여부는 당신의 몫.


주문에 들어간다. 첫 번째 주문은 불고기와 수육, 소주로 한다. 수육과 소주는 서양식으로 따지자면 애피타이저와 같은 것. 수육 몇 점에 소주를 홀짝이다 보면 불판 위 불고기가 달짝지근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불고기는 맛만 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서너 점 정도만 먹는다. 갈 길이 머니 허겁지겁 배를 채워서는 안 된다. 인원이 많아 불고기가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냉면 사리를 시켜 불고기 국물에 말아 먹는다.


두 번째 주문은 평양냉면으로 한다. 이미 정평이 난 평양냉면의 명가인데 더 말을 보태어 무엇 하리. 심심한 냉면 맛도 보고 불고기를 면으로 둘둘 말아 둘의 조합도 시도해본다. 배가 찬다. 더는 여기에 무엇을 보태리. 뭐든 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 하지 않던가. 그러나 술자리에서 한 잔만 더가 없다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미련이 없다면, 그게 어디 술자리인가? 마침 소주도 많이 남은 듯하니 세 번째 주문에 들어간다. "국밥 한 그릇이요."


가만히 보니 아무래도 술이 조금 부족할 것 같아 한 병 더 시키기로 한다. 술이 남았으면 남았지 부족해서야 되겠는가. 얼큰한 국밥과 소주의 궁합은 설명하지 않겠다. 얼큰한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돈다. 취기란 게 등급이 어디 있겠느냐만 만약 있다면 이것이 정점에 도달한 취기가 아닐까. 이상, 을지면옥에서 정찬 코스를 즐기는 방법. 나는 멍후 아저씨로부터 굉장한 걸 배웠다.


피맛골 상인들이 벌였던 디오니소스를 아십니까?

고모님. 피맛골에서 황태구이집 13년 운영. 피맛골 재개발로 지금은 통의동에서 비를긋다라는 카페 운영.


종각역 1번 출구 구 제일은행 뒤편의 피맛골. 그 골목엔 황태구이를 파는 서까래, 황소곱창, 제일 골뱅이 그리고 LP뮤직바 제이제이가 10년 넘게 이웃하고 있었다. 주인들은 거의 40대. 서까래 여주인 둘만 빼고 나머지는 다 부부가 운영한다. 비교적 손님이 일찍 끊기는 밥집 여주인 둘이서 퇴근길에 한 잔 걸치고자 찾은 데가 바로 옆의 곱창집. 그렇게 안면을 튼 후엔 매일 보지 않으면 허전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하여 하루는 황태구이집, 하루는 골뱅이집, 이런 식으로 매일 모였다. 다들 먹는 장사니 밥과 술이 부족할 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2차로 제이제이에서 놀 적에 어쩌다 춤판이 벌어졌는데, 다들 장사만 할 줄 알았지 놀 줄은 몰랐던 것. 소싯적 춤 좀 췄던 제이제이 사장이 이웃들에게 셔플댄스를 가르쳤고, 블루스를 가르쳤다. 선곡은 톰 존스, 에타 제임스 같은 50, 60년대 블루스와 소울 음악들. 날마다 흥과 춤이 어우러진 축제였다. 다음 날 동이 틀 때까지 말이다.


그랬던 그들은 2008년 피맛골 재개발로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져봤자 종로 바닥을 뜨지 못해 조계사니, 통인동이니, 가회동이니 그 언저리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인지, 그렇게 헤어진 후론 좀체 모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억이란 게 쉽게 잊힐 종류의 것이던가? 고모님이 운영하는 통인동 카페에서 술을 마시다 보면 아주 가끔 춤판으로 이어진다. 누구 하나 부끄러워하거나 빼지 않는다. 이미 리듬과 흥이 몸에 밴 사람들. 이 일대를 순시하는 전경들은 이 풍경을 익히 잘 알 것이다. 심야에 쩡쩡 울려대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 가게 1층이 전면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우연히 통인동을 지나다가 피맛골 디오니소스를 재현하는 두 여인네의 흥겨운 몸짓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운이 좋다면.



거듭나기: 알면 알수록 빠져드는 서울 뒷골목 풍경

반경 5킬로미터 내에서 행복하기

2011년 1월 1일 나는 타이베이 외곽에 있는 온천 마을 우라이에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느냐면 이렇게 정확히 기억하고자 만든 신년 이벤트였으니까. 그때는 오로지 여행 계획만이 낙이었다. 우라이는 여느 관광지다운 풍경이었다. 전통품을 파는 가게와 식당이 즐비했는데 완자탕을 먹으러 들어간 한 노점 식당. 나는 그곳 여종업원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저 수많은 관광객들은 여기 뭐가 볼 게 있다고 이렇게 찾아오나 싶은, 매우 권태로운 표정.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저 관광객 무리에 있었다. 그녀한테는 이곳이 너무 시시하겠지. 어쩌면 완자탕을 판 돈으로 서울에 오고 싶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대만에서는 TV만 켜면 한국 드라마였다. <대장금>은 인상 깊게 봤고, 소녀시대와 빅뱅의 팬일지도 모른다. 집에 가면 한국 여행 안내서를 펼쳐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는 그녀가 가고 싶어하는 서울에서 왔다. 결국 누군가에겐 떠나온 곳이 누군가에겐 떠나고 싶은 곳이다.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있느냐가 관건이 아닌가. 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가면 좀 더 재밌게 지낼 궁리를 해봐야지. 나는 그녀가 가고 싶을지도 모를 서울에 살지 않는가. 누군가 말했다. 자기 생활 반경 5킬로미터 내에서 행복을 못 찾는 사람은 어디서도 행복을 못 찾는다고. 나는 왜 행복이 5킬로미터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했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생활 반경 5킬로미터 내라면 어디까지일까, 생각했다. 사실 어떤 동네가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지 관심 두고 살 리도 없지 않은가. 내내 그게 궁금했다.


5킬로미터 내 나만의 지도 그리기

5킬로미터는 내 걸음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동네들이었다. 효자동, 부암동 일대. 5킬로미터 내에 조선의 궁궐도 있고, 북한산이나 북악산을 바라보며 커피 한 잔 할 수 있는 곳이 수두룩했다. 이러한 발견만으로도 이미 기쁨 충만. 몰랐던 게 아니라 5킬로미터 내에 포함된다니 새삼 많은 걸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5킬로미터 내에 있는 상점들을 구역 관리하는 조폭의 심정으로, 간섭하기 좋아하는 반장 아줌마 정신으로 쏘다녔다. 그 기록들을 적는다.


하나, 효자동, 창성동 일대

경복궁역을 중심으로 효자동부터 소개한다. 청와대 근처라는 이유로 개발이 안 돼 70, 80년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곳. 곳곳이 한옥이고, 그 한옥이 만들어내는 골목길은 걸어도 걸어도 정겹다. 효자동의 자랑거리는 오밀조밀 들어차 있는 작은 미술관들이다. 공짜라 부담 없이 들어가 본다. 사진전을 둘러보고 난 후엔 툇마루에 걸터앉아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다 온다. 옛날 축음기 모양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좋다. 어렸을 때처럼 툇마루에 누워 낮잠을 청하고 싶은 곳이다. 통의동 카페 골목엔 느낌 있는 카페들이 즐비하다.


둘, 서촌 일대

효자동과 도로 하나를 마주한 동네가 서촌이다. 통인동, 체부동, 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청운동. 서울 토박이들도 잘 모르는 동네가 이곳이다. 서촌의 개성은 효자동과 어깨를 겨룬다. 효자동이 현직 예술가들의 동네라면 서촌은 과거 예술가들의 동네. 윤동주, 노천명, 이중섭이 살았다고 한다. 한옥도 효자동과 달리 아직 손대지 않은 날것들이 많다. 60년 된 한옥 서점, 한옥 철물점처럼 생활형 한옥이 그대로 있다. 여기에 양옥과 최신 빌라까지 보태졌다. 제각각 안 어울릴 것 같은데 또 묘하게 잘 어울린다. 미술 공방 옆에는 세탁소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예술과 세탁이 다르지 않다. 나와 다른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묘한 포용력에 괜히 끌린다. 게다가 통인시장, 금천교시장, 오래된 시장이 둘이나 있다.


셋, 5킬로미터 밖

어느 날은 경복궁에서 광화문 오피스텔 단지로 꺾어진다. 성곡미술관과 예술 영화관 씨네큐브가 있는 코스. 성곡미술관 앞에는 와인바 타인의 취향과 커피집 커피스트가 있다. 미술과 와인, 커피의 삼박자라니. 이곳을 지날 때면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불어를 듣게 된다. 와인바 타인의 취향에서 커피스트의 담벼락을 스크린 삼아 프랑스 영화를 빔으로 쏴주기 때문. 잠시 파리 뒷골목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또 어느 날은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와대로를 거쳐 삼청동으로 넘어간다. 요즘 삼청동은 외국의 어느 도시에 온 기분이다. 언덕배기에 있는 예쁜 카페들을 구경하며 안국동으로, 가회동으로, 날씨 좋으면 북촌 너머 창덕궁 옆 동네인 원서동까지 걷는다. 아, 5킬로미터 내의 행복을 10킬로미터로 수정해달라고 부탁할 판이다.


무명의 것들이 의미를 갖는 시간

걷다가 밥을 먹기도 하고, 차를 마시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곳은 단골이 된다. 동네 어느 가게의 단골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가수 이상은은 뉴욕 여행기 『뉴욕에서』에서 친구의 단골 식당에 함께 가는 것은 정말 친근한 행동이다라고 했다. 나도 친구가 동네에 올 때마다 단골집에 꼭 들른다. 알려진 곳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고 우연히 멋진 장소를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감흥은 후자가 훨씬 크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무명의 것이 나로 인해 의미를 갖게 되는 거니까. 어떤 곳은 혼자 찾기에 좋다, 또 어떤 곳은 다음에 다른 이와 함께 와야지 하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즐겁다. 재밌다. 어떤 이념에 사로잡혀 모든 걸 그 틀로 해석하는 게 싫어 지금껏 그 어떤 주의자도 되길 거부했으나, 처음으로 추구하고 싶은 주의가 생겼다. 지금, 여기 주의자,


자, 나의 5킬로미터 내 맛집 지도를 보여줬으니, 이제 당신의 지도를 내놓을 차례. 당신의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 * *


본 도서 정보는 우수 도서 홍보를 위해 원저작권자로부터 정식인가를 얻어 도서의 내용 일부를 발췌 요약한 것으로, 저작권법에 의하여 원저작권자의 정식인가 없이 무단전재, 무단복제 및 전송을 할 수 없으며, 원본 도서의 모든 출판권과 전송권은 원저작권자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