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언어

The Language of Blood

   
제인 정 트렌카(역자: 송재평)
ǻ
도마뱀출판사
   
13000
2012�� 05��



■ 책 소개
한국계입양인 출신 작가이자 액티비스트, 제인 정 트렌카의 데뷔작
해외입양의 디아스포라를 더없이 독창적이고 대담하게 풀어낸 자전적기록

태어난 지 6개월 만에미국으로 입양된 제인 정 트렌카의 자전적 에세이. 1972년 네 살 된 친언니와 함께 보수적인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저자가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성장기를 거친 뒤 20대 중반에 한국 어머니와 가족을 만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하면서 삶과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까지의 여정을 통해 입양으로얻은 것과 잃은 것, 문화와 가족, 기억과 상상으로 가득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2003년 미국에서 출간 당시, 입양 문학 분야의 진부한 틀을 깨고 수준 높은 문학성을 이루어냈다는 호평을받으며 미네소타 북어워드 2개 부문을 수상하고, 제인 정 트렌카는 반스앤노블이 선정하는 신인작가로 발굴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디아스포라의현실이 반영된 아시아계 미국문학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아, 미네소타 주립대와 UC 버클리대 등 여러 대학교와 고등학교의 수업용 교재로채택되어 널리 읽히고 있다.

■ 저자 제인정 트렌카(정경아, Jane Jeong Trenka) 
1972년 한국에서 출생하여 생후 6개월 만에 미국 미네소타로입양되었다. 옥스버그 칼리지에서 피아노와 영문학을 전공했다. 데뷔작 『피의 언어The Language of Blood』(2003)로 반스앤노블의신인작가에 선정되고, 미네소타 북어워드에서 2개 부문을 수상했다. 『피의 언어』는 미국 백인 가정으로 입양된 작가의 개인적 체험을 문학으로승화시킨 자전적 에세이다. 입양의 디아스포라로 분열된 자아가 참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미국 내 소수인종이자 여성이자입양인으로서의 마이너리티 문제를 대담하면서도 독창적인 글쓰기로 풀어내어 출간 당시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학교와 도서관에서꼭 읽어야 할 도서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트렌카는 이후 한국으로 이주한 뒤 현재 서울에서 작가이자 액티비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 Truth and Reconciliation for the Adoption Communityof Korea)’을 공동 설립하고, 2009년부터 사무총장으로 이 모임을 이끌면서 한국의 입양 문제와 해외입양인들의 인권을 위해 분투 중이다.다른 저서로 『Outsiders Within(2006, 『인종간 입양의 사회학』)』『Fugitive Visions(2009)』가있다.

■ 역자 송재평
전남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텍사스 A&M 대학에서 「다시 쓰는 (포스트)식민주의 시대의 국가 : 조이스, 오브라이언,루시디 속에 나타난 문화정치와 비판적 민족주의」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메리그로브 칼리지 영문학과 부교수로 재임 중이다. 식민주의 및포스트식민주의 문학/문화 이론을 중심으로 다양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출간하는 한국문예지 「Azalea」를 비롯한여러 저널에서 한국의 시를 번역하여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 차례
개정판 서문 
어머니의 편지
꿈꾸는 인형 
가족의 초상 
나의스토커 
첫 만남 
피의 언어 
상실의 시간 
추방자 
비상(飛上) 
초판 <작가의 말&&

 





피의 언어


꿈꾸는 인형

내 이름은 정경아. 주민등록등본에는 1972년 음력 1월 24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호준의 다섯째 딸이고, 그의 둘째 처인 강안선의 셋째 딸이자 넷째 자식이다. 친가 쪽으로는 정송필과 이진화의 손녀, 외가 쪽으로는 강순옥과 박옥분의 외손녀이다. 조상 중에는 지주와 학자와 정부관리 들이 있었다. 내게는 여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배밭이 있고, 개울이 흐르는 땅, 절과 암자가 첩첩 산속에 꼭꼭 숨어 있으며 사람들은 호탕하게 웃고 죽은 조상을 섬기는 땅에서, 나는 태어났다.


세상의 반을 돌면 나는 또 다른 사람이다.


나는 제인 마리 브라우어. 비행기에 태워져 미국 땅을 밟은 1972년 9월 26일에 브라우어 가의 딸이 되었다. 미네소타 주 출생증명서에는 1972년 3월 8일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프레더릭과 마거릿 브라우어의 둘째 딸이다. 친가 쪽으로는 다윈과 도리스 브라우어의 손녀, 외가 쪽으로는 아이버와 루린 라이크만의 외손녀이다. 우리 조상은 대개 농부나 공장노동자였고, 전직 성경 판매원이 한 사람 있었다. 내게는 언니도 한 명 있다. 나와 피를 나눈 친자매로, 같은 집에 함께 입양되었다. 나는 다섯 살 때 판사 앞에 서서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자랑스러운 미국 시민이 되었다. 대평원의 땅, 일직선으로 죽 뻗은 지평선 상의 하늘과 땅이 끝없이 맞닿아 있고 루터교회가 광활한 옥수수밭에 점점이 흩어져 있으며 종교적 금욕주의가 자손 대대로 뼛속 깊이 박혀 내려오는 땅에서, 나는 다시 태어났다.


일본 강점기의 혹독한 시절, 내 어머니는 여자로 성장했다. 가족의 막내로서 조카들과 동년배였던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아홉 살 때부터 오빠들 손에 길러졌다. 그러다 가난한 집으로 시집간 지 석 달 만에 아이가 들어섰지만 곧 전쟁이 터져 과부가 되어 굶주리게 되었다. 잘 사는 친정 오빠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을 때에는, 이미 결혼한 여자이니 시가 쪽 식구라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 후 어머니는 착한 며느리의 의무를 다하며 십 년간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러고 나자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아들자식은 놔두고 홀로 상경하여 새 남편을 찾아보라고 했다.


내 아버지는 5대 독자였기 때문에 그를 북한에 남아 있게 할 친척도 그 무엇도 없었으므로, 전쟁 중에 남으로 내려와 새 삶을 시작했다. 첫째 부인이 딸 둘을 낳고서는 남편과 자식들을 버렸고, 그런 아버지와 재혼한 어머니는 삶을 다 바쳐 전처소생의 딸들을 친자식처럼 키웠다. 그 얼마나 지난한 세월이었던가. 풍족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 기억은 그렇게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선영, 선미, 은미, 미자, 경아, 딸만 너무 많았다. 아버지가 애타게 바라던 아들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더욱이 아버지는 가장 어린 딸 둘을 버리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수많은 가족이 이와 같은 일을 겪었다. 이야기는 한결같다. 굶주림, 이산가족, 혹한, 가난, 가족을 부양 못 하는 가장, 술주정, 낙심, 절망…….



가족의 초상

한국 어머니의 불간섭 방침은 내가 미국에서 보낸 첫 크리스마스부터 고등학교 이 학년의 겨울까지 계속되었다. 입양기관이 어머니를 말린 건지, 내가 충분히 클 때까지 어머니가 기다린 건지, 혹은 어머니 자신의 삶이 남에게 보여도 될 만큼 행복해질 때까지 기다린 건지, 아무튼 어머니가 내 인생에 끼어들지 않은 이유는 모르겠다.


스쿨버스가 커브 길을 돌아 사라지고 내가 진입로의 끝, 우편함 옆에 서 있던 때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이 한순간 파르르 깨져버릴 것 같은 날들 가운데 하루였다. 우편함에서 꺼내어 벙어리 장갑에 쥔 편지봉투는 두툼했고, 내 양 볼은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으며, 청명한 하늘은 할로우와 서울 그리고 그 두 곳을 잇는 지구의 일부를 광활한 활꼴의 창공 아래로 감싸고 있었다.


나는 진입로를 내달리며 편지봉투를 찢고,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고,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와 부츠를 벗고는, 동봉된 사진들을 먼저 유심히 살펴본 뒤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 사건에 관심이 있으리라 여긴 단 한 사람, 데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핑크색과 초록색으로 번갈아가며 머리카락을 염색하고 음악에 열광하며 패션 감각이 있는, 내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웬일인지 그가 편지의 중요성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에 나는 놀랐다. 그가 우리 집으로 건너와 직접 편지를 확인한 뒤 편지지를 경건하게 만져보고 사진 속 얼굴들을 관찰하며 나와 한국 가족을 비교해보고 싶어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방금 일어난 사건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의 내면에는 늘 한국 가족에 대한 생각이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입 밖에 내어 얘기한 적은 없었으니, 그들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어느 누가 알 수 있었으랴.


그날 밤, 편지 하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용기를 내어 내 평생 가장 긴 번호로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중대한 대사건으로 보지 않았다. 부모님은 전화 통화를 엿들으려고 모여드는 대신, 텔레비전을 보고 식품 목록을 정리하는 등 각자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국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그 밤의 기억은, 자기 몸을 이탈한 자의 시점으로 기록된다. 마치 내가 이 세계의 천장에 핀으로 꽂힌 채 우리 집 지붕을 통해 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두운 구석방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의식할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신과 희미한 램프 그리고 나를 세상 저편의 어머니와 연결 해주는 기적의 전화뿐이었다. 어머니는 그저 내 이름만을 불렀다. 부서지는 목소리로 부르고 또 불렀다.


"경아, 경아야……."


이야기는 보통 이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 법이다. 한국의 생모가 자식을 찾는 이야기는 달리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주위에는 그 반대의 상황, 즉 자식이 생모를 찾는 이야기뿐이다. 내 어머니 말고 또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을 매수할 돈도 없고 든든한 남편도 없고 영어도 못하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어머니. 그녀에게는 오로지 의지만이 있었다. 한 무리의 남자들과도 맞먹을 강한 의지였다.


그 편지가 도착한 지 육 년 만에 드디어 우리가 만나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 옛날 자신이 입양기관에 가서 담당자가 내 주소를 줄 때까지 기다린 끝에 결국 받아냈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경우에도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 이런 종류의 일에는 규칙과 규정이 있게 마련이고, 게다가 거기에는 입양기관이나 사회복지회의 중개인을 통해 조금씩 유출된 미확인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정확히 확인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미국 부모의 이름, 주소, 나이, 사진 등 입양기관이 수집해놓은 온갖 정보들이었다. 어머니는 입양기관의 사무실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여 비닐봉지에 싸온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벤치 위에서 자는 둥 마는 둥하며 여러 날 죽치고 앉아 기다렸음이 틀림없다. 그들은 어쩌면 수도 없이 소리치며 어머니를 밖으로 끌어내기도 했을 텐데, 결국 진저리가 난 담당자가 그저 귀찮은 일을 피하려는 심산에 마지못해 정보를 건네주었을 것이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우리를 미약하게나마 함께 이어놓은 것은 어머니의 순전한 의지력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날 내가 발견한 편지가 진정 어머니가 첫 크리스마스 때 한복을 선물로 보내준 뒤로 처음 보낸 것이라면, 그토록 힘들게 얻은 정보를 십칠 년 동안이나 기다렸다가 사용했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어머니의 놀라운 자제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첫만남 

창밖은 땅이 하늘을 밀어내며 비행기를 가까이 받아들이고 있다. 논들이 펼쳐지던 지상의 풍경이 고속도로로 바뀌자 나는 가방을 다시 정돈하여 꾸린다. 잠시 후 비행기의 불가피하게 긴 지상 이동과 기내 복도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머리 위의 선반으로부터 가방들이 내려진다. 이후로 나는 수차례 이런 여행을 하게 되는데, 몸뚱이들이 한꺼번에 밀려들고 시간과 공간의 관념이 사라지는 특성 -영원한 현재의 시간 속에 육체가 갇힌 기분- 때문에 이런 여행이라면 딱 질색하게 된다.


대학 시절의 남자친구 숀이 없었다면 나는 이 첫 여행을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숀은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가죽 잠바와 군화로 무장하고 오토바이를 몰았으며 자연스러운 곱슬머리를 마치 코르크 마개 뽑는 기구처럼 뱅뱅 꼬아 다녔고 한 번도 자기 아버지를 만나려 하지 않았던 친구이다.


숀은 미니애폴리스의 교외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그의 세계는 내 세계보다 언제나 더 넓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여행 전문가들이며 진정한 유레일 베테랑들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는 어느 대학 교수의 아들인데, 반은 브라질 혈통이고 포르투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독일 출신의 터키 여성과 결혼했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학생들이나 멕시코, 네덜란드, 티베트, 프랑스 등지에서 미국 대학으로 유학 온 외국 학생들과도 사귀었다. 나는 그 모든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대학을 졸업하는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었다. 아동가정협회에서 주관하는 모국 방문단에 등록한 것이다. 그들은 소심한 사람들의 손을 잡아준다고 약속했다.


"어떤 사람들은 외적인 여행으로 내적인 여행을 대신한단다." 숀의 어머니가, 내가 좋아하는 숀의 눈과 똑 닮은 눈으로 날 그윽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대체로 모든 일에, 그리고 특히 몇 가지 일에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외국여행을 떠나보지 못한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이 내게 힘을 주었다. 내가 한국에 가는 것으로 외적인 여행과 내적인 여행을 동시에 경험하리라는 것을 그녀는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모국 방문단에 참가한 아이들 중 다수는 친부모를 찾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관광지를 둘러보는 한편 최대한 빨리 친부모를 찾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난 수년간 친가족과 연락을 취해 온 터라, 몇 주 전부터 언니와 한바탕 팩스 교신을 주고받은 끝에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헐렁한 검은색 폴리에스테르 바지와 금속성 자수가 놓인 감청색 상의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진 최고의 정장 외출복이었다. 호텔로 향하는 한 시간가량 어머니는 어둠 속에서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나는 한국어를 못하고 어머니는 영어를 못하니 서로 나눌 수 있는 얘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내 손만 잡고 있었고, 나는 내 손이 얼마나 뜨거운지, 어머니가 얼마나 작으며 또 그 손은 얼마나 뼈만 앙상한지 따위의 물리적 감각만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이분이 내 어머니구나. 방문자 인솔자 중 한 사람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그가 우리의 첫 만남 때 카메라를 대기하고 있다가 찍어준 사진 속에는 미국을 떠날 때와는 다른 얼굴이 들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첫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 속의 나는 해명하기 힘들 만큼 확연히 변해 있다. 커다란 앨범을 꺼내 보여줄 때마다 친구들은 "이게 너니?" 하고 묻는다. 내 얼굴은 미국을 떠나기 전 미니애폴리스 공항에서 찍은 사진에서 보다 더 둥글다. 표정도 다르다. 나는 딴 사람이 된 것이다.


거의 일주일을 엄마의 아파트에서 지내는 동안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종일 한국말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나에게는 미국에서 가져온 존 해슬러의 소설이 정신 안정제와도 같았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는 그 책에 매달려 미네소타의 시골 마을과 그곳 영어 교사들과 목사들을 묘사한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그 주가 끝날 무렵 한국말이 꿈속까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꿈은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날 하루 동안 들은 소리들의 재탕이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거기, 한국말이 있었다. 한국 여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철저히 한국말로 된 꿈이었다. 그러고 나서 뭔가 정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잠에서 깨지 않았는데도 그 꿈은 흩어져버린 것 같았고, 남은 것은 일종의 고조된 현실이었으며, 그로부터 아주 우렁찬 목소리가 떠올라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는 그 목소리에 답했다. "내 이름은 경아입니다. 전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렇습니다. 내 이름은 경아입니다."



피의 언어

내가 마음잡고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안 캐럴 언니는 미자의 몸을 빌려 우리 한국 어머니의 유전자를 아이에게 물려주었는데,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그 외손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테일러는 미식축구 스타 선수였던 아빠와 수완 좋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 엄마 캐럴은 사춘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예쁘고 인기 많고 영리했다. 그건 미국 엄마와 나로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었다. "네가 그 선생하고 갈보처럼 놀아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좋은 점수는 못 얻겠지." 미국 엄마는 캐럴을 비꼬아대곤 했다.


한국에 있을 때 어린 캐럴을 괜한 편견으로 보게 했던 특징들이 할로우에서는 오히려 이롭게 작용했다. 언니의 피부는 나보다 더 희고 눈은 더 크고 얼굴은 덜 넓적하며 속눈썹은 부드럽게 휘었다. 거의 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은 중력에 굴하지 않고 깃털처럼 나풀거렸다. 게다가 언니는 지나치게 괴짜도 아니고 지나치게 내성적이지도 않았다. 뭔가 하나에만 특출한 타입이 아니라 이런저런 능력들을 놀랍도록 조금씩 두루 갖춰, 여자아이들과 남자아이들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다. 영리하지만 책벌레는 아니고 운동도 좀 하고 음악도 좀 하는, 나보다 네 살이 많은 언니야말로 내가 닮고 싶은 이상형이었다.


그리고 엄마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남자아이들과 놀아나지 않았다.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올 경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려워 부모님의 집을 지어준 목수의 아들하고만 겨우 데이트를 해봤을 뿐이다. 그는 사전 승낙을 받은 상태였고 어쨌든 지붕을 고쳐주러 우리 집에 들르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언니는 대학 시절 무려 다섯 건의 결혼신청을 받는 쾌거를 올리다가, 정신건강 분야와 관련된 첫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드디어 직장 동료에게 결혼을 승낙해주었다. 엄마는 언니가 연애에 성공한 것이 교활한 속임수를 쓴 결과이며, 일에서 성공한 것은 엄청난 아부의 증거라고 해석했다.


캐럴은 교활한 술책을 쓴 것이 아니었다. 언니는 미국 사회에 스스로 동화(同化)함으로써 자신의 질서정연한 삶을 이루어나갔다. 그녀의 동화 과정은 아주 완전무결한 것이었다. 자신의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한국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관심조차 없을뿐더러 한국에 대한 내 관심에도 관심이 없었으며, 백인과 결혼한 뒤 교외로 이사를 가서는 스포츠유틸리티 자동차를 사고 아이를 낳았다.


그런 언니에게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는 대개 자식을 위해서라면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하게 되지 않는가. 이를테면 자기 병력(病歷)을 찾아보는 일 같은 것 말이다. 어느 날 오후, 내가 일하는 곳으로 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나 한국 간다. 뭘 가져가면 좋을까?" 엄마에게는 아름다운 묵주, 은미 언니에게는 꿀과 인스턴트 커피, 명희에게는 목걸이를 선물하라고 제안했다. 그러는 나 역시 언니에게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대화다운 대화 없이 수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얽힌 문제들-우리가 미국 가족에게 어떤 존재이며 한국 가족에게는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함께 이어주는 사람은 누구인가?-을 풀어나갈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한국 방문 계획이 빠른 속도로 추진되기 시작하면서 캐럴 언니는 나와 대화하는 중에 한국 어머니를 네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러고 나서 내 어머니라고 부르기까지는 그 일주일간의 첫 한국 여행 이후 수년이 더 걸렸다.


"숨 막히는 기분 있잖아. 숨을 쉴 수가 없었어." 캐럴 언니가 어릴 적 한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 땅을 다시 밟은 순간들에 대해 얘기했다. "비행기 안에서 한국을 내려다볼 땐 뭔가 기억나겠지 싶었거든. 그런데 아니야.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가슴만 답답한 거야." "전혀 기억나는 게 없었어?" 내가 물었다. "응. 기억날 줄 알았지. 어떤 냄새를 맡거나 한국말을 들으면 기억이 떠오를 거라 생각했어. 장소든 사람이든 아니면 그 어떤 거라도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다니 믿기지가 않더라. 네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기억할 것 같지? 네 살 반 된 아이들에게도 기억이란 게 있잖아. 테일러도 자기가 그 나이였을 때를 기억하는 걸. 그리고 말이야, 우리 어머니는 나한테 화가 많이 났어! 한국말을 못하는 게 이해가 안 되나봐. 또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화를 냈어. 옛날에는 내가 그렇게 담가달라고 애걸하곤 했다는데, 특별히 나를 위해 담가준 적도 있었다는데, 기억이 나야 말이지. 그리고 글쎄, 젓가락을 사용할 줄 모른다고 그걸 빼앗아 가더니 휙 던져버리는 거 있지."


어릴 적 언니는 미국에 보내지기 오래전부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아이였다. 언젠가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릴 적마다 은미 언니는 엄마에게 "함께 도망가요!"라고 했고, 캐럴 언니는 "난 달러를 모아 미국에 갈 테야"라고 했단다.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캐럴은 늘 알고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딸이 기억을 까맣게 다 잊어버린 채 예전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진 걸 보고 엄마는 몹시 상심하고 화가 났던 것이다. 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그러다 보니 캐럴은 한국에 있는 동안 은미 언니를 친구 삼아 지냈다.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언니라는 존재(은미 언니는 이 여동생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남편과 아이와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캐럴은 은미 언니와 엄마의 관계에 감탄하고 말았는데, 가장 친한 친구 사이 같은 모녀는 함께 쇼핑하고 비밀을 나누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런 모녀지간이야말로 캐럴이 미국 어머니와 진정 맺고 싶었던 관계였지만, 어머니보다는 학교 선생님들과 이런 친분 관계를 쌓기가 더 쉬웠다. 우리가 어디에서 사랑을 얻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캐럴 언니에게서 전화가 온다.

"언니 안녕. 웬일?"

"은미 언니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어."

"그래서 뭐래?"

"우리 한국 엄마가 아프대. 은미 언니가 당장 오라는데, 너 한국 갈 수 있니?"

"물론 가야지! 어디가 아픈 거야?"

"암이래, 뇌종양."

"빌어먹을. 난 갈 거야. 언니는?"

"응, 한 이틀 다녀오려고."


미니애폴리스에서 서울까지의 여정은 서른 시간이 걸린다. 디트로이트와 일본을 경유하는 비행에 이어 기차, 버스, 자동차까지 타고 드디어 캐럴 언니와 내가 병원에 도착한다. 엄마의 병상으로 다가간다. 조그맣게 오그라든 엄마. 몸에는 튜브들이 꽂혀 있고 두 팔은 혈액검사와 주저앉은 혈관, 또 잘못 꽂은 주사바늘로 인해 온통 검푸른 멍투성이다. 신체의 왼쪽 부분이 마비되고 왼쪽 시력을 잃었다.


은미 언니가 엄마의 머리를 자기 쪽으로 돌려 실명한 눈에 초점을 맞추게 해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면서 엄마에게 큰 소리로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큰 소리로 말을 걸어보자. 그러면 엄마가 나을지도 모른다.


"저 이루믄 경-아-입니다(제 이름은 경아입니다)." 비행기에서 한국어로 연습한 문장이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에게 배런즈 외교관 훈련 교재에나 나오는, 격식을 차린 언어로 말하고 있다니. 서투른 한국말, 내가 구사하는 바보 같은 말들이 부끄럽다. 만나면 얼마나 가슴 터질 듯한 기분인지, 그런 내 마음을 어머니에게 전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기차가 몇 시에 오는지, 물건값이 얼마인지, 또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 따위는 남들에게 물어볼 줄 아는 것이 부끄럽다.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뒤로 늘어지는 그 모든 튜브들을 무시한 채 엄마가 손을 뻗어온다. 내가 그 손을 잡고 몸을 가까이 기울이자, 엄마는 가냘픈 목소리로 자신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영어 한마디를 들려준다. "아이 러브 유, 경아. 아이 러브 유."


"이쁜 애기." 엄마와 나는 방바닥에 누워 있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는 식으로 몸에 베개를 괴어주었다. 내가 잠잘 때와 똑같은 자세이다. 둥근 베개를 목 밑에 넣고 다리 사이에 베개 하나, 팔 사이에 또 하나를 넣고 이불을 덮는 식이다. 미닫이문을 조금 연 뒤 바깥의 딸기 트럭이 보이도록 엄마의 몸을 바로잡아주었다.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이쁜 애기." 엄마가 또 부른다.


엄마의 의식과 소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그 조그만 아기의 목소리가 되어, 내가 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말해줄 수 있을 텐데. 엄마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억해온 슬픈 인생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결말을 행복하게 바꿔놓고 싶다. 엄마가 어린아이였을 때, 엄마의 엄마가 아직 살아 있었을 때 꿈꾸던 동화처럼 바꿔놓고 싶다. 무엇보다도 엄마에게 당신의 이쁜 애기라는 두 마디 말이 내 인생의 나머지 줄거리를 바꿔놓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이전까지 누군가가 나를 그토록 간절히 원하거나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이 말은 앞으로 내 정신력의 깊은 원천이 되리라. 지금 여기, 엄마와 함께 있는 이 순간부터.



상실의 시간

명희가 드디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동일한 이메일 주소로 발송인의 이름만 달리 바꿔가며 시험 삼아 메일을 보내왔다. 그녀가 보내온 이름들은 love game과 같이 한국산 티셔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어들과 자기 생일을 조합해서 만든 것들이었다. 가끔은 영어로 써서 보내오기도 했지만 한글로 보내올 때는 그걸 해석하느라 그다음 한 주를 다 보냈다. 지루함,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싶은 소망, 그리고 또다시 쌓이는 지루함을 동생의 글에서 읽을 수 있었다.


십일월 말, gangsterjeong으로부터 부고의 메일이 왔다. Today Mama die. My heart break(오늘 엄마가 돌아가셨어. 가슴이 미어져).


나는 엄마에 대한 슬픔과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동생에게 도움이 되는 가족이 되고 싶었고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가 임종한 날에도 그랬듯 나는 너무 멀리 있었다.


엄마보다 겨우 일 년 반 전에 아버지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바로 그 병원에서 엄마가 돌아가신 것은 부당해 보였다 아버지로부터 도망 다니느라 이십 년의 세월을 보내고, 병환이 깊어지자 아버지에 관한 기억에 시달리다 같은 장소에서 죽어 시신까지 같은 영안실로 옮겨졌으니, 아이러니였다.


나는 친구 메리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우울해졌다고 말한다.


"움직일 힘도 없어. 그저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고만 싶어. 있는 힘을 다 짜내어 식품점이든 주유소든 그 어디든 간다 해도, 거기서 결국은 엉엉 울어버리고 말 것 같아."

"그래, 사람들이 하는 말 있잖아. 모든 우울은 너 자신에게로 돌려진 분노이며, 모든 분노는 부당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메리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로 한 번 더 일격을 가한다.

"네 부모님은 늘 어느 정도는 널 미워할 거야. 넌 그들이 원래 희망하던 아이가 아니거든."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비록 지금은 십대의 자식을 둔 어머니가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어린 시절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나를 미워한다고? 부모님이 백인 남자아이들을 원한 것은 사실이다. 로버트와 찰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했지만, 그들이 얻은 것은 로버트란 이름의 조카 아이와 찰리라는 이름의 고약한 헛간 고양이 그리고 이름이 낯설어서 바꿔야 했던 한국 여자아이 둘이었다.


메리와 나는 대용품 같은 아이들이다. 우리가 입양된 것은 양부모에게 아이를 하나 더 받아들일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양부모가 입양을 옳은 일이라 생각해서 입양만을 원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메리와 나는 양부모가 택한 마지막 방편이다. 이를테면, 2세 번식을 위한 추첨에서 당첨되지 못한 사람들이 위로의 뜻으로 받은 경품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친자식을 대신하기 위해 들어온 아이들이다.


메리의 말은 정곡을 찌른다. 부모님이 나를 미워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와 관련된 어떤 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몸에, 누군가의 여성성 혹은 누군가의 남성성에 문제가 있음을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우리는 부적합함과 불완전함을 상기시키는 존재이다. 물론 겉으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수치심은 그 자체의 진실을 수반하는 법이다.


메리의 말이 이어지고 그녀의 반지가 햇빛에 반짝거린다. "네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지, 집을 잘 치우는지, 좋은 엄마가 되는지,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넌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님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아이가 될 수 없단 말이야. 떨쳐버릴 수 없는 그 기이한 기분을 넌 항상 느끼며 살게 될 거야. 설령 부모님을 몰아붙이며 도대체 네게 뭘 원하는지 말해달라고 따져본들 소용없어. 부모님이 네게 원하는 건 네가 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거니까. 그들은 절대 네 면전에 대고 넌 우리가 원했던 아이가 아니야. 넌 대용품이고 차선책이지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그게 진실이야. 입양은 멋진 일 따위의 미사여구 밑에는 그런 진실이 숨어 있고, 그들은 그걸 스스로 인정하기조차 부끄러워해. 그러니 그들로서는 절대 입 밖에 낼 리 없지만 넌 그걸 알고 있어. 왜냐하면 넌 그들에게 완벽하지 못한 아이라는 자괴감에 끈질기게 시달리며 살고 있으니까."



추방자 

사랑하는 엄마, 당신의 삶을 공경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이고, 당신이 그토록 원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화목한 가정을 내가 만드는 것이겠지요. 나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남편과 내 곁에서 안전하게 커가는 아이들이 있는 그런 가정 말이에요.


엄마, 지금 내가 보이나요? 한 번은 엄마를 위하고 또 한 번은 나를 위해 두 배의 행복 속에 살고 싶은 내 마음이 보이나요? 이 행복은 내가 만든 성인용 마술 가루에요. 이걸 얼굴에 대고서 내 소원을 불어넣는답니다. 두 손을 공중으로 휙 던져 올리면 행복은 아름다운 황금빛 천사처럼 바람을 타고 높이 올라가지요. 내 마음은 맑고 환해집니다. 어디선가 당신도 이 행복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겠어요. 엄마,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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