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은 할 일이 많을수록 커진다

   
에카르트 폰 히르슈하우젠(역자: 박민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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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14000
2012�� 01��



■ 책 소개
베스트셀러 『행복은 혼자오지 않는다』의 괴짜 의사 에카르트 폰 히르슈하우젠의 ‘행복’에 이어 이번에는 ‘의학’과 ‘건강’을 테마로 한 에세이. 의사이자 코미디언,동시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그는 세상을 진단하는 눈으로 의학과 일상 속 유쾌하고 재미난 현상들을 발견하고 놀라운 결과들을 도출해 낸다.

저자는 다양한 과학 실험과 폭넓은 의학 지식을 기반으로남자와 여자의 심리적 생태적 차이, 동물과 인간의 유사성을 분석함으로써 서로 이해하고 더불어 살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들을 모색한다. 또한현대사회의 건강 트렌드, 질병과 새로운 의료기술에 대한 잘못된 상식을 바로잡고, 첨단기술이 가져온 문제점들에 대해 비판한다.

■ 저자 에카르트 폰히르슈하우젠(Eckart von Hirschhausen)
196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나 베를린자유대학과하이델베르크대학, 런던대학에서 의학과 언론학을 공부했다. 샤리테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생각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방송출연과 무대공연을 시작했다. 코미디언, 카바레티스트, 웃음트레이너, 강사로 독일의 각종 매체와 무대에서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지적인 유머, 마음에 깊이 남는 메시지, 수준 높고 건강한 웃음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TV프로그램 <슈미트 & 포허&&의‘히르슈하우젠 아카데미’ 코너 진행자로도 유명하며 병원과 직장, 공공장소에서 치료를 위한 웃음을 지원하는 ‘치료를 돕는 유머 재단’ 활동도겸하고 있다. 2009년까지 ‘행복을 가져오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전국순회공연을 했고 50만 명 이상이 라이브로 관람했다.

건강을 테마로 한 그의 첫 책 『간은 할 일이 많을수록커진다(Die Leber waechst mit ihren Aufgaben)』와 유쾌한 행복 에세이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Glueckkommt selten allein)』가 독일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베스트셀러 작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www.hirschhausen.com

■ 그림 에리히 라우쉔바흐(Erich Rauschenbach)
1944년 출생.베를린 예술대학(HDK Berlin)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후 다양한 출판사와 신문, 잡지, 방송에서 프리랜서 캐리커처 작가 겸 일러스트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www.erich-rauschenbach.de 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역자 박민숙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빌레펠트대학(Uni. Bielefeld)에서 독일어교육학과 언어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베텔신학교(Kirchliche HochschuleBethel)에서 라틴어(Latinum)와 고전 그리스어(Graecum)를 공부했다. 2012년 현재는 훔불트독일문화평생교육원에서 독일어를가르치며 틈틈이 번역을 하고 있다. 독일 베스트셀러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와 『3096일』을 우리말로옮겼다.

■차례
머리말에 해당되는 글 

남자와여자 
인간과 동물 
건강 
질병 
음식 
의사 
대체의학 
정신과 영혼 
섹스와 그 후유증
밤이면 밤마다 
스포츠 
첨단 기술 
일상의 미친 짓 
보너스 

역자 후기





간은 할 일이 많을수록 커진다


남자와 여자

남이 안 되는 꼴을 보면 고소하다 - 인간관계를 위한 전기충격

밉상인 동료가 미용실에 가더니 눈 뜨고는 도저히 못 봐줄 꼴을 하고 나타났다. 사장이 커피메이커에서 커피를 뽑다가 데었다. 오랫동안 기계를 자기 손으로 작동해 본 적이 없던 탓이다. 포르쉐 운전자가 파란 신호에서 시동을 꺼뜨린다. 조금은 낯 부끄럽긴 해도 일상의 고소한 순간들이다. 우린 정말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들일까?


옛말에 남이 안 될 때 느끼는 기쁨이 가장 통쾌한 기쁨이란다. 그러나 이 부끄러운 감정이 과학적으로 연구된 것은 오래지 않다. 아무도 이런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므로 조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도 솔직한 대답을 얻지 못한다.


과학자들은 피실험자들을 경제게임에 참여하게 하는 실험을 실시하였다. 이 실험에서는 과학자 한 명이 함께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으로 가장해 의도적으로 치사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연구를 위해서 그는 정말로 욕을 얻어 먹을 정도로 미움 받을 짓만 골라서 했다.


게임 후 그 재수 없는 인간은 인체에 해가 없는 전기충격으로 응징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참가자들이 그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동안 그들의 뇌 활동을 기능적으로 조작된 핵스핀에 의해 관찰했다. 이때 엑스레이 사진에 의해 남이 안 될 때 느끼는 쾌감과 관련해 중요한 뇌 영역이 두 개가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 한 영역은 타인이 손해를 당할 때 느끼는 동정심과 관련된 영역이고 다른 영역은 쾌감과 연관된, 이른바 보상센터라 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동정심은 이마 뒤에 위치하고, 우리가 무언가 좋다고 생각하는 흥분의 감정은 중뇌에 위치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안 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가의 여부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에게 일어난 불행에 대해 달콤한 복수심을 느끼는가에 달려 있다. 그가 우리에게 호의적이라면 동정심을 갖게 되지만, 재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의 불행을 즐길 것이다.


여자들은 이 재수 없는 인간에게 언제나 어느 정도의 동정심을 보이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그에게 정당한 벌칙이 가해지는 것에 대해 기뻐했다. 남자들의 동정심 영역에 자비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실은 과거에 판사나 사형집행인, 그리고 최근에는 소방관이나 구조대원 같은 지나친 동정심이 지장을 줄 수 있는 직업군에서 왜 남자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타인에게 도움을 베풀어야 하는 직업의 종사자들은 자신의 감정에 지배받아서는 안 되고,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일읠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남이 안 되는 것을 더 고소해 할까? 앞서 진행된 연구에서는 부당한 행동이 작은 육체적 고통으로 처벌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확실히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처벌에 대한 통쾌감을 더 많이 느꼈다. 그러나 측정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아마 여자들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고소해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의 경우 생각하는 방법이 남자들과 다르고 더 복잡하기 때문에 그것을 교묘하게 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있어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쾌감은 좀 더 은밀할 수 있다. 일례로 여자들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대신 빈정대는 말로 꼼수를 부린다. 육체적인 체벌보다는 미묘하게 정을 떼는 쪽을 선호하고, 화를 풀리게 해주는 전기충격 대신 슬슬 맥 빠지게 만들어 버리는 고도의 전략을 취한다. 이러한 여자들의 심리는 그냥 한판 제대로 붙고 맥주 한 잔 함께 들이켠 뒤 풀리는 남자들에 비해 훨씬 측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어째서 남이 안 되면 고소해지는 이런 감정이 존재하는 걸까?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할 이러한 감정이 진화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따라서 누군가 부당하게 행동하면 그는 이 고소한 감정에 의해 보란 듯 처벌을 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금 서로에게 우호적이고 협조적으로 행동하도록 자극을 받게 되는 것이다.


즉 고소한 감정은 원칙적으로 보자면 인간 진화의 옐로카드와 같은 것이다. 축구선수가 옐로카드나 레드카드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보나마나 경기는 난장판이 될 게 뻔하다. TV를 보면서도 종종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야." 우리는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을 보며 자기 삶에 새로운 빛을 다시금 발견한다. 대부분의 낮 시간대에 방송되는 토크쇼들을 보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메시지를 얻는다. "당신보다 열악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세상에는 이렇게 많습니다!"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정도는 이미 고전이 되었다. 할머니가 미끄러졌다면 걱정하는 마음을 갖겠지만 유명 코미디언이 제대로 자빠지는 모습을 본다면 조금은 기뻐해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을 종종 동일한 상황 속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즉 고소해하는 감정은 가장 아름답지 않은, 매우 추한 쾌감인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코미디 영화 <뚱보와 멍청이>에서 누군가 나무판으로 머리를 맞는 것과 홈비디오 프로그램에서 일반인이 맞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배우의 경우 실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고 있다. 하지만 홈비디오 장면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보면서 시청자들은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다. 물론 몇몇 장면에서는 비디오 속의 황당한 사고가 사전에 조작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먼저 카메라를 작동시킨 후 어린 아이를 일부러 흔들리는 그네에 앉힌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 우리가 알고 있거나 부당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이 아닌,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기뻐하는 데도 사디스트와의 경계가 있으며, 진짜로 고소한 감정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만다.


끝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타인의 불행이 끝나면 나의 쾌감도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때로는 소심한 복수를 오래도록 만끽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한번은 실실 웃으며 이렇게 속삭인 적이 있다.


"얄미운 이웃집 남자가 드디어 휴가를 갔을 때 기분 정말 짱이었어. 골프장 뺨치게 정성스레 가꿔 놓은 그의 잔디밭에 야생 잡초 한 봉지를 몽땅 뿌려 버렸거든!"



질병 

코감기 - 흐르는 콧물에 대처하는 자세

"얘야, 양말 좀 신어라, 그러다 감기 걸리겠다." 이 말에 세상 모든 할머니들은 공감할 것이다. 발이 차면 여지없이 코감기에 걸린다. 의학공부를 할 당시 바이러스에 대해 배우면서 언제나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뭐라? 이 쪼그맣고 발칙한 녀석이 차가운 발에서부터 콧속까지 기어 올라온단 말이야?"


하지만 이제 나는 차가운 발이 코감기에 걸리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이러스가 우리 몸에 침투하는 순간 우리 몸의 순환계가 그것에 대항해 싸우느라 발까지 피가 잘 돌지 않기 때문에 발이 차가와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두 학생 그룹이 보여 주었다.


한 그룹은 젖은 양말을 의무적으로 신었고 다른 그룹은 신지 않았다. 그리고 전원의 얼굴에 같은 양의 감기 바이러스를 뿌렸다. 누가 감기에 걸렸을까? 두 그룹이 똑같이 감기에 걸렸다. 수백 만의 할머니들이 혼란에 빠질 만하다.


코감기 바이러스는 빌 게이츠나 마돈나와 흡사하다. 영원토록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감염으로 인한 환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접촉을 줄일 수는 있다. 코감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그야말로 비합리적이다. 저녁에 감기 기운이 있으면 아침에 지하철 안에서 재채기를 하던 사람을 원망한다. 쓸데없이 나다니지 말고 집에나 있을 것이지!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그 증상을 느끼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된다. 또한 감기가 공기를 통해 감염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개는 손에 의해 전염된다. 그러나 내가 지하철 손잡이를 잡기 전에 어떤 코훌쩍이가 먼저 거기에 손을 대고 있었는지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므로 차라리 재채기를 한 자를 탓하는 게 낫다. 최소한 얼굴이라도 알고 있으니까. 적어도 손을 코앞에 대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 결과 모든 어린이들은 손을 입으로 가리고 재채기를 하는 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배운다. 바이러스의 관점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바이러스들은 천성적으로 뭔가 새로운 일을 꾸미기를 좋아하고 새로운 누군가를 다시 감염시킬 때까지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코흘리개로 만들어 버리는 뻔뻔한 놈들은 코에서 손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이 손을 대는 곳이면 어디든 바람같이 잽싸게 옮겨 가는 것이다. 문 손잡이, 지하철 손잡이, 집에 있는 리모트컨트롤까지 말이다. 좀 더 품위가 있으신 분들은 손수건을 소지한다. 나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지만 항문기에 관해서만큼은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한 성인 남자가 몇 분 동안 코를 풀고 난 후 자신의 손수건에 묻은 내용물을 다시 한 번 슬프게 들여다보는 이 순간은, 30대 남성이 자랑스럽게 소변기로 눈길을 돌리는 그 순간과 동일하다. 두 경우 모두 다음과 같은 의식을 반영한다. 그래, 우리 남자들은 아이를 낳을 수 없어. 하지만 이것들은 전적으로 나 혼자의 힘으로 낳은 것들이야!


그리고 손수건을 포갠다. 그로 인해 양손은 감염된다. 그리고 수건은 따뜻한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수건에 묻은 신선한 콧물이 몸의 온기를 느낀다. 이것은 바이러스에게는 일종의 지중해 클럽과도 같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위생적일까? 땅바닥에 코를 푸는 것이다. 그곳에는 바이러스에 감염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다. 바이러스는 추위와 무료함에 떨다가 결국 죽고 만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처한다. 주저 없이 바닥에 대고 재채기를 함으로써 전염의 순환고리를 단절시키고 공동체를 보호한다. 안타까운 사실은 공동체가 나의 이런 심오한 이타주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를 형편없는 인간으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 여러분은 부디 바이러스 대신 지식을 전파하시길. 이제부터 코가 좀 근질거리기 시작하면 당신은 타의 모범이 되어 코를 땅바닥에 풀어 버릴 의무와 책임이 있다. 이것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다. 오늘이나 내일 당장은 아니겠지만 가까운 미래에 두 사람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한 사람이 코를 바닥에 풀면 다른 사람이 멈춰 서서, "당신도 에카르트 박사를 아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그 둘이 양팔로 서로 얼싸안아도 전혀 감염되지 않는 것, 그게 바로 내 꿈이다.



정신과 영혼

인도 - 도로교통에서 터득하는 깨달음의 길

마음의 평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나는 그 진원지로 날아갔다. 인도에서 아유르베다 마사지와 명상으로 보낸 2주. 평정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아시람(Ashram, 힌두교도들이 수행하며 거주하는 곳)이 아닌 도로교통에서.


"Please horn, okay!" 인도에서는 화물차 뒤에 이렇게 쓰여 있다. "경적을 울려 주세요, 괜찮습니다!" 처음에 이것을 보았을 때는 마치 독일의 어느 운전자가 "내 차를 긁어 주세요"라고 적힌 스티커를 자기 메르세데스 벤츠에 붙여 놓기라도 한 듯 신기했다.


며칠을 곰곰이 생각한 후에야 이곳 인도에서 경적은 독일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경적을 울리는 건 자기는 정당하고 상대가 부당하다는 의사표시다. 그래서 우리는 운전대 위를 살짝 누르는 행위만으로 족히 주변사람 스무 명은 피가 거꾸로 치솟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모두가 경적을 울리고 아무도 그걸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다. 반대로 경적을 울리도록 직접적인 강요를 당하기까지 한다. 거리에서 생존을 건 싸움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기 위한 춤사위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 춤사위를 두고 고속도로에는 뚜렷한 차선도 없다. 차선은 차가 달릴 때 저절로 생겨난다. 게다가 밤에 자동차에 앉아 있는 일은 상당히 종교적이다. "You are afraid, my friend? You have to trust existence(두려운가, 친구? 자넨 존재를 믿어야 하네)!"


운전을 하는 순간, 목숨이 여러 개 붙어 있는 힌두나 슈퍼마리오가 되기를 기원하게 된다. 전조등은 쓸데없이 배터리만 축내므로 밤에 다른 누군가가 반대편에서 오는 소리가 들릴 때만 필요시에 켠다. 친절하고 짧게 한 번 깜빡! 그리고 다시 불을 끈 채 서로 요란스럽게 지나쳐간다. 추월을 하고 싶다면 아까 말한 대로 경적을 울려 알리면 된다.


가끔 세 대의 차가 일렬로 차선이라 간주되는 한 개의 차선 위로 달리게 된다면 어느 쪽으로 추월할지는 스포츠 정신에 맡긴다. 보통 우선권은 더 비싼 자동차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모든 인도인들은 교통의 물결 속에서 갑작스레 끼어드는 차가 새 차인지, 오래된 차인지를 사고 직전 단시간 내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독일 사람들이라면 이 판단을 하는 데에만 며칠 골머리를 앓고 여러 관련 전문가들을 끌어들여 자문하고 결국에는 소송도 불사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스키 여행에서 버스가 구불구불한 커브 길을 달리다가 당신이 앉아 있는 중심이 아주 잠깐 절벽 끝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창밖으로 봤을 때의 기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인도에서 버스를 타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장시간 동안, 당신은 절벽에 매달려 있고 맞은편에서 화물차가 달려오고 있다. 그러나 두 운전자 모두 비켜서지 않을 기세다.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보다 카르마(Karma, 업보)가 더 중요한 순간이다. 다른 모든 승객들이야 다음 생을 기약하겠지만 불쌍한 기독교 영혼인 내게 있어서는 예정보다 이른 천국행이 되는 것이다.


하긴 경적이 있긴 하다. 그것도 다양한 소리를 가진 경적. 독일 사람에게는 모든 경적 소리가 늘 공격적인 것으로 똑같이 들리지만, 인도 사람들은 경적으로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한 가지 소리지만 완전히 다른 신호이다. 뚜, "조심하쇼, 오른쪽으로 추월하겠소." 뚜,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커브 길을 가고 있으니 속도를 줄이겠소." 뚜. "내 경적이 고장 난 건 아닌지 그냥 한 번 시험해 봤소. 경험상 곧 다시 경적이 필요할 것 같소."


동물이 찻길에 있다고 알리는 경적 소리는 또 다르다. 고양이부터 개를 넘어 유명한 소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의 경중에 따라 차이가 있다. 소에게는 거의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 또한 독일 사람이 좀처럼 개를 발로 차지 않는 것처럼 인도 사람들은 소를 치는 법이 없다. 소가 길 위에 서 있다. 마음대로 큰일을 보면서. 아무 할 일도 없이 그냥 서 있는 것이다. 어차피 아스팔트 위에는 먹을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말이다. 남의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재미는 호모 사피엔스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닌가 보다.


인도의 도로교통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재미난 현상은 후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때 뒤에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전자 멜로디가 울려 퍼진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차가 후진할 때 귀를 마비시키는 아수라장 속에서 어떤 매혹적인 노래가 울려 퍼지는지 아시는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밤이면 밤마다

숙면 - 깨어난 순간 그대로 누워 있으라!

어째서 잠보다 잠에서 깨어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훨씬 더 중요한 걸까? 잠을 잔다는 건 멋진 일이다! 당신은 무언가를 꿈꿀 수 있다. 물론 꼭 그래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세상은 이렇게 소리친다. 깨어나라, 당신의 꿈을 실현하라! 한 번 솔직해져 보자. 나는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꿈을 꾸다 보면 모든 일이 전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황당한 일도 종종 있다.


독일 사람들은 핀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사람들보다 일찍 일어난다. 하지만 그래서 얻는 이득이 무엇인가? 핀란드 사람들은 독일 사람보다 더 영리하고, 이탈리아 사람은 독일 사람보다 그들의 화폐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기며, 스페인 사람은 그들의 시에스타(Siesta, 낮잠)을 미화시킬 줄 안다. 기어이 한 번쯤은 푹 자 보겠다고 우리는 그들의 나라로 꾸역꾸역 휴가 여행을 떠나고 있지 않은가! 독일인들의 도약은 침대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우상 아인스타인은 무려 하루에 10시간씩 잤다. 더 오래 누워 있는 사람이 더 사고를 잘한다. 수면학자들은 이것을 피로를 해소하는 수면의 기능이라고 부른다. 의미상으로는 멍청해지는 걸 해소하는 학문의 기능이라 말할 수 있겠다. 수면학자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항상 더 오래 깨어 있으려고 하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증명된 바로는, 지속적인 수면부족은 사고력 저하, 비만, 우울증, 저항력 약화를 야기한다. 고양이는 평균 14시간을, 파리는 12시간을 자는데, 물론 하루살이 입장에서 보자면 12시간 자는 쪽을 선호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 인간만이 간밤에 4시간도 채 못 자고 하루 종일 비실거리면 은근 자랑스러운 기분이 드는 걸까? 아마도 어린 시절 일찍 잠자리에 드는 일이 우리에겐 체벌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하여 어른이 된 지금, 단지 반항심으로 자지 않고 버팀으로써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는 것이다.


"죽고 나면 푹 잘 수 있을 텐데 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수면은 본래 인간의 원초적 상태다. 학자들은 여전히 "우리는 왜 자야 하는가?"라는 질문의 해답을 밝혀내고자 애쓰지만, 지금까지도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주제가 빗나갔으니 당연한 일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깨어 있어야 하는가?" 이것이 핵심적인 질문이다. 본래 깨어 있는 상태는 다시 편하게 잠들 수 있도록 에너지를 모으는 역할을 담당한다. 동물들은 먹이를 빨리 구할수록 더 오래 수면을 취할 수 있다. 유독 우리 인간만이 필요 이상으로 깨어 있고, 심지어는 이것을 영리하다고까지 여긴다. 우리는 하루에 23.5시간 동안 잘 수도 있다. 요즘은 30분이면 슈퍼마켓에서 일주일 내내 먹을 충분한 음식을 구할 수 있으니까. 동물처럼 먹을 것을 구하느라 하루 종일 깨어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나친 활동성이 경제와 자연을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가장 값비싼 원료에 속하는 게 무엇인가? 바로 기름과 커피이다. 이는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는 억지로 깨어 있기 위해 커피가 필요하다. 또한 깨어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견뎌내지 못하고 항상 더 빨리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기름을 필요로 한다. 타산이 더 이상 맞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 에너지를 모으기는커녕 날려 버리고, 우리 자신과 지구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들이여, 지금 당신이 있는 그곳에 머물러라! 우리는 맥도널드의 드라이브 인에서 빅맥 하나를 사먹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수십 미터를 달린다. 또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기름을 엄청 잡아먹는 비행기 안에서 저칼로리 다이어트 콜라를 주문한다. 이렇게 해서는 에너지 균형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신체자생 에너지, 즉 체중 고민도 수면 중에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곰이 몇 주 동안 단잠을 자듯 당신도 한잠 푹 자고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온몸의 군살이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잠자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 잠 많은 자는 거지가 아닌 개척자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찍 일어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오래 누워 있어야 한다! 눈을 감고 푸욱~. 수면은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위다. 이 사실 앞에서 더 이상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그럼 좋은 꿈꾸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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