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슈

   
김상득
ǻ
네시간
   
13000
2012�� 01��



■ 책 소개
“슈슈”는 복잡하고 모순적인현대인의 부조리한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 신조어다. 삶의 절박함 속에 우연히 마주치는 어처구니없는 헛웃음, 혹은 소소한 유쾌함은 “웃음이주룩주룩(^^)”으로, 웃음의 뒷전에 꼬물꼬물 묻어나는 상실과 불안, 절망과 외로움은 눈물이 꼬물꼬물(ㅠㅠ)”로 표현되고 있다. 눈물이 주룩주룩흘러내리고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것이 정상적인 표현이라면, 이것을 뒤집어 표현함으로써 부조리한 감정으로 희극화시키고있다.

이 책은 희망과 가능성을 추구하지만 끊임없는불안과 상실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 우리의 자화상이다.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애매하고 모호한 감정에 싸여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의표정이다. 웃음과 눈물이 함께 엉킨 이야기들은 어느 순간 삶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른다. 우리가 김상득의 글에 공감이 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 저자김상득
『대한민국 유부남 헌장』『남편생태보고서』『아내를 탐하다』 세 권의 책을 썼다. 2012년 현재「중앙SUNDAY」S매거진에 <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소소한 일상을 소재로 웃음과 눈물이 꼬물꼬물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 차례
1장. 슈슈 = ^^ + ㅠㅠ
웃음이 주룩주룩, 눈물이꼬물꼬물
사랑의 뿌리 | 갈비 1인분 | 적응의 부작용 | 후딱 안 일어나고 뭐 하노? |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마지막 인사 | 너 자신을 알라 | 밤하늘의 별을 볼 때면 | 삶은 저쪽에 있다 |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남자 | 인사성 밝은 남자 | 대머리지휘자가 드문 이유 | 작가 사인회에서 | 한밤중 부엌 식탁에서 | 춤추는 헤어 디자이너 | 책을 빌려줄 수 없는 이유 | 맞선과 면접이 똑같은까닭 | 예를 들면 선생님 | 의리의 사나이, 사토 | 순두부 아줌마, 미안합니다 | 자동차에 대한 명상 | 임신부 알아차리기 | 알아준다는느낌 | 어깨를 빌려드립니다 | 침이 고인다 | 휴대전화기 찾아주기 | 동안이네요 | 회식을 반성하는 회식 | 지각 문제 해결을 위한 보고서 |화장실 쟁탈전 | 런치메이트를 고르는 법 | 아들의 첫 휴가 | 다 큰 아들과 목욕하기 | 전기가 끊긴 집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착오에대하여 

2. ^^ 
웃음이주룩주룩
멀리 문상을 가지 않는 이유 | 혼자 식사하는 즐거움 | 공자님의 ‘트친소’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예를들면 사전 | 시간이민자 | 문자종결자 | 책장 정리를 하지 않는 이유 | 기대부응본능가설 | 결혼정보회사에 다니는 독신주의자 | 쌀국수집서비스 미스터리 | 신사는 유머를 갖고 다닌다 | 눈치 없는 제자 | 중국어를 공부하는 이유 | 호텔 요코하마의 청소반장 이토 | 순이 이야기| 웃지 않는 남자 | 단테 선생님 | 언니가 돌아왔다 | 동리 선생이 소설을 쓰게 된 사연 | 감독 리더십 | 고독해지고 싶은 사람을 위한실용대화법 | 아들탐구생활 | 아들 군인 가는 날 | 아들은 조국 제일의 병사 | 아들의 여자친구 | 우리 집 둘째 | 내 은밀한 애인 |남편수리센터 | 아들 면회 간 날

3.ㅠㅠ 
눈물이 꼬물꼬물
하늘은 비를 내리려 하고 | 부끄러움만 드립니다 | 그 밖의 사람 | 화투와 글쓰기의 공통점| ‘너무’가 너무 많은 시대 | 글쓰기의 악몽 | 불편한 의자의 진실 | 기억 못하는 남자 | 의지박약자의 작심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진다는 것 | 숫자에 약한 남자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집중할 수 없는 사연 | 목소리 | 좀 애매한 사람 | 쉰목소리 | 안다 형 | 신 팀장 가방의 비밀 | 천식에 대한 명상 | 환상의 콤비 | 친절한 철수 씨 | 태수 이야기 | 그림 선생님 이야기 |남옥이를 생각해서라도 | 멧돼지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습니까? | 세 번의 실수 | 삶은 옆자리에 있다 | 안정을 찾는 법 | 히터 좀 끄면 안될까요? | 아저씨, 그렇게 살지 마세요 | 제게 맡겨주세요 | 칸트 아저씨 | 이게 조개라고? | 귀가 | 참 나쁜남편




슈슈


슈슈 = ^^ + ㅠㅠ : 웃음이 주룩주룩, 눈물이 꼬물꼬물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유독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겨울의 찻집>에 나오는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경우가 잦다. 문자를 보내면서 그런 감정을 표현해야 할 경우 적당한 이모티콘이 없어서 조금 답답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고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라 나는 직접 슈슈라는 이모티콘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나는 밤 산책을 좋아한다. 사계절 다 좋지만, 환절기가 가장 좋다. 심한 일교차가 주는 심리적 생리적 긴장도 즐겁고 마치 계절의 변화가 내 몸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은, 몸의 변화도 흥미롭다. 밤 산책의 묘미는 느긋함에 있다. 표정도 옷차림도 느슨해진다. 운동복에 사파리 잠바를 걸치고 천천히 발걸음이 가는 대로 마음의 리듬에 따라 걷는다. 걸음의 호흡에 맞춰 숨쉬고 그 숨결에 따라 생각을 풀어놓는다. 걸으면서 기지개도 해보고, 권투 선수처럼 팔을 죽죽 뻗기도 하면 행복 같은 간지러움이 발가락 끝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보스포루스로 산책 나가는 걸 좋아했던 오르한 파묵의 문장을 살짝 빌려서 말하면, 나는 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삶이 그렇게 최악일 수는 없어. 여전히 중앙공원으로 산책 나갈 수는 있으니까."


밤에 중앙공원을 걸으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 생각은 번잡한 낮에 떠올리는 것과는 다르다. 가령 공원 숲길을 걸으면서 부동산 투기나 위장 전입 등을 생각하기란 좀 어렵지 않겠는가. 밤 산책을 하면서 드는 생각은 가령 이런 것이다. 군에서 야간 보초 설 때 주변시라고 해서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경계하라고 주의를 준다. 어둠 속에서 한 사물만 오래 보고 있으면 상상하는 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경험했는데 심지어 바위가 여자로 보이기도 했다. 사는 게 어두울수록 주변시가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본다.


밤 산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밤의 공기다. 그것은 신의 숨결이나 손길 같다. 몸 전체를 감싸는 서늘하고 부드러운 감촉. 온몸의 숨구멍을 열어 약간은 관능적이기까지 한 밤의 공기를 호흡하다보면 가만가만 밤의 소리가 들린다. 밤은 소리의 세계다. 낮의 번잡과 소음에 가려 들리지 않던 작은 것들이 내는 소리의 우주. 풀벌레와 새와 나뭇잎과 바람이 내는 소리가 다 들려온다.


느긋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하자 나는 "잠깐만요"라고 소리치며 허둥지둥 탄다. 산책자에서 도시생활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기다려준 아주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나는 아주머니의 눈길을 피해 괜히 엘리베이터 안 게시판을 읽는 척한다. 거기 이런 게시물이 있다. 송곳 등으로 차량 타이어 펑크를 내고 다닌다는 용의자를 찾는 내용인데 그의 인상착의가 다음과 같다.


"키 170~180센티 정도, 마르고 왜소한 체격. 약간의 대머리, 코가 크고 수염이 더부룩함. 회색 사파리 잠바, 줄무늬 바지, 경상도 말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님."


비로소 나는 아주머니의 눈빛에 담긴 의혹과 불안을 이해했다. 용의자의 인상착의는 나와 흡사했으니까. 먼저 나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뺐다. 그리고 아주머니를 향해 힘껏 웃었다.


"저는 코가 납작하잖아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슈슈.


착오에 대하여

지난 해 여름의 일이다. 나는 박동훈 감독의 <계몽영화> 시사회에 초대 받았다. 초대해준 사람은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윤성호 감독이었다. 개봉 전 마지막 시사인데, 종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목요일 저녁 8시에 진행되니 시간과 동선이 되면 와서 보라는 초대였다.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나는 너무 기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호성을 지를 뻔했지만 사무실이었고 동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어 겨우 참았다. 나는 무조건 시간과 동선을 목요일 저녁 8시 종로로 맞추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나는 윤 감독의 팬인데.


시사회가 있던 목요일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연우와 나는 낙원상가에서 7시 40분에 만났다. 시간이 남아 로비에서 서성대다 출입구 쪽에 수줍게 붙어 있는 A4용지를 발견한다. "일반시사회 8시 30분"


시사회가 시작하려면 앞으로 50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예상치 못한 잉여 시간이 생기면 갑자기 지루해진다. 만나면 늘 화제가 끊이지 않던 연우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 별 수 없이 우리는 비 구경만 한다. 길고 지루한 장마 비 구경을.


8시 20분쯤 입장하려는데 영화 홍보팀 부스에 윤성호 감독이 보인다. 나는 얼른 달려가 인사를 드린다. 윤 감독이 놀란다. "이제 오신 거에요? 시사회는 8시부터였는데."


그날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8시와 8시 30분, 두 차례의 시사회가 있었다. 우리가 초대 받은 시사회는 8시 시사회였는데 A4 용지의 안내 문구를 보고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의심도 하지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


지난 주 일요일의 일이다. 우리 부부는 얼마 전에 자대배치 받은 둘째 면회를 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동차를 가져간 것은 부대가 화성이라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고 네비게이션이 있으니 처음 가는 길이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트렁크에 음식을 가득 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삼겹살과 상추와 풋고추와 오이와 마늘과 밥과 된장찌개와 귤과 바나나와 배 그리고 커피와 도넛과 휴대용 가스버너와 수저와 칼과 물티슈와 휴지 등등의 짐들이 트렁크를 가득 채웠다.


둘째는 군복이 영 안 어울린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어서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는데 군복은 꼭 남의 옷을 입혀놓은 것처럼 어색하다. 부대에 도착해 둘째를 보자마자 아내는 상부터 차린다. 면회는 식회다. 아들 얼굴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음식 먹이러 가는 것이 면회다. 커피와 도넛과 귤과 바나나와 배를 먹인 다음 아내는 삼겹살을 먹이자고 한다. 나는 아직 점심때도 아니니 아들 얼굴도 좀 보고 이야기도 하자고 한다. 아버지로서 뭔가 아들에게 계몽적인 말을 해주고 싶다. 군 생활 경험을 꺼내며 군대에서는 연대 책임을 지기 때문에 적어도 부대원들에게 폐는 끼치지 않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미리미리 준비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사람이 되라고 강조한다. 아내는 방위 다녀온 사람이 무슨 군대 이야기냐며 고기나 구워 점심 먹이자고 한다. 나는 준비해온 휴대용 가스버너 케이스를 연다. 그런데 전동 드릴이 들어 있다. 케이스 색깔이나 모양이 비슷해서 착오를 일으킨 것이다. 의심도 하지 않고 확인도 하지 않고.


아내와 둘째가 나를 노려본다. 삼겹살과 상추와 전동 드릴도.



^^ 웃음이 주룩주룩

고독해지고 싶은 사람을 위한 실용 대화법

만일 그대가 충분히 고독한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 글은 오직 주위에 친구나 동료가 많고, 그들로부터 넘치는 사랑을 받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한 글이다. 드물겠지만 반드시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인기가 많아서 도무지 고독해질 틈이 없는 사람, 그래서 괴롭고 슬픈 사람. 가령,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노래한 시인 정현종도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가 누구든 이 글을 읽고 충분히 고독해진다면 기쁘겠다.


사람들 사이에 말이 있다. 우리는 그 말을 하고 산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과 가까워질 수도 있고 멀어질 수도 있다. 고독하고 싶다면 말을 잘해야 한다.


하루는 김 부장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 원래 넥타이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 맨 것이라 보는 사람마다 인사를 건넨다. "오늘 넥타이 멋지네요." "넥타이가 잘 어울리십니다." "그거 어디서 샀어요?"


김 부장은 칭찬이 어색하다. 그것은 살아오면서 수십 번, 수백 번도 넘게 사진을 찍었지만 여전히 카메라 앞에만 서면 얼굴 근육이 굳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김 부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살게요."


가끔 윤 대리는 삶은 감자를 가져와 사무실에서 아침으로 먹는다. 파티션이 있지만 그 너머 김 부장이 있다. 혼자 먹어도 모자랄 자신의 아침을 착한 김 대리는 동료에게 내어준다. "이거 좀 드세요." 원래 주는 것은 먹고 보는 김 부장이지만 거절할 때도 있다. 조금 전 혼자 커피와 베이글을 먹어서 배가 부른 때라면. 김 부장은 받은 감자를 잠깐 들었다 내려놓는다. "들었습니다."


김 부장은 가능한 음식을 사무실로 가져오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 아까운 것을 동료와 나눠 먹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김 부장이 어쩌다 먹을 것을 가져왔다고 해보자. 그도 사람인지라 옆자리 박 팀장에게 권한다. 물론 본심은 아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대개 한번은 사양한다. 절호의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박 팀장의 "괜찮아요"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 부장은 말한다. "고마워요."


신 팀장은 원룸에서 혼자 살기 때문에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한 물건을 사무실로 배달 받는다. 어떤 사람은 박스를 뜯지 않고 그대로 집으로 가져간다. 그러나 신 팀장은 받자마자 박스를 뜯어 자신이 산 옷이며 가방, 구두를 동료에게 자랑한다.


꼭 물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이 찍은 사진이나 그린 그림, 쓴 글,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도 자랑한다. 자랑하고 싶을 때 사람은 좀 뻔뻔해진다. 상대에게 감탄과 칭찬을 은근히 강요한다. 가령 파마를 한 신 팀장이 김 부장에게 "부장님, 저 머리 어때요?"라고 묻는다고 하자. 본심과 달리 김부장도 그냥 "예쁘네요"라고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그는 절대 거짓말을 못하는 사람이다. 못 믿겠다면 그건 그대의 자유다. 김 부장은 신 팀장에게 묻는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이미 흥은 깨지고 기분도 살짝 상했지만 신 팀장은 웃으며 다시 묻는다. "그럼요. 정말 어때요?" 김 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음……예쁘네요."


그렇다. 그대의 자유가 이겼다.


남편수리센터

아내들은 다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남편은 비슷합니다. 모두 비슷하기 때문에 오작동이나 고장 역시 유사한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남편 제품의 수리를 희망하는 접수가 폭주하고 있지만 대부분 고객이 사용설명서만 읽었어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물론 남편 제품의 사용자가 그러기 어렵다는 점은 공감합니다. 제품을 구매할 당시 사용자는 대개 낭만적 감성으로 충만한 상태라 설명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기 때문이죠. 사용자가 제품의 기본적인 사양이나 특성, 취급 시 주의사항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용하는 경우 얼마 지나지 않아 제품에 고장이 발생합니다. 가령 아래 사례처럼 말입니다.


사례1. "남편이 너무 이기적입니다. 집안일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이 제품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기 기능입니다. 일종의 자기방어 시스템이죠. 이 기능이 가동되어 사용자를 포함한 가족 전체를 방어하며, 파견된 직장에서 자신의 업무를 수행합니다. 다만 너무 오래 가동하면 오작동을 일으키는데,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제품을 꺼두는 것입니다. 꺼지는 순간 외부 작동은 멈추지만 내부에서는 조용히 자기 성찰의 피드백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점검이 끝난 후 다시 켜질 때 남편은 깨닫게 될 겁니다. 사용자에겐 남편 말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요. 그러면 설거지라도 하겠지요.


사례2. "잔소리를 아무리 해도 남편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립니다."

이 제품은 소음에 약합니다. 특히 잔소리는 가장 심각한 외부 충격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 남편의 90퍼센트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잔소리 무시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남편 중 오직 10퍼센트만이 잔소리에 반응합니다. 그러나 그 반응이란 것도 오작동이나 버럭 같은 이상 소음 발생, 작동 중지 등의 부정적인 것뿐입니다.


사례3. "한마디 상의 없이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보는 남편 때문에 속상합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남편에는 대부분 대화 기능이 장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상의 같은 프리미엄 기능의 경우 구매 시 별도로 주문해야 하는 옵션 사양입니다. 제품의 기능적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용자의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사례 4.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갈수록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옵니다."

늦게 들어오긴 합니다만, 그래도 항상 집에 들어온다는 사실에 주목해 주십시오. 남편에는 탁월한 귀소 기능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어도 제품의 90퍼센트 이상은 집을 찾아갑니다. 이 제품이 친구와 술을 좋아하는 것은 그 둘이 모두 남편에게 용기와 자신감 에너지를 충전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시 이기 기능을 작동시키는 원천이 됩니다. 회로를 망가뜨릴 정도가 아니라면 눈감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불량 남편은 드뭅니다. 기술적인 결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정상 제품에 허용되는 기준치 이상은 아닙니다. 기준치를 벗어나는 제품에 대해서는 법률이 정한 반품 및 환불 절차를 받을 수 있습니다.


끝으로 남편수리센터에 신고하기 전에 한번 남편 제품의 상태를 확인해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혹시 관심의 플러그가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랑의 전원이 꺼져 있는 것은 아닌지.



ㅠㅠ 눈물이 꼬물꼬물

불편한 의자의 진실

의자와 진실의 공통점은 둘 다 불편하다는 것이다. 오래 앉아 있으면 의자는 어딘가 불편해지고, 진실 역시 깊이 파고들수록 점점 불편해진다.


김 부장은 자신의 의자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김 부장의 의자는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좌경이다. 앉으면 기우뚱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쏠리면서 위태로워진다. 의자가 이 모양이니 안 그래도 산만한 김 부장이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다.


대개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것은 의자에 앉아서 일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일한다는 것은 곧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혹은 8시까지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직장생활이란 그런 것이다. 의자에 앉아서 아침을 먹고 의자에 앉아서 출근한다. 의자에 앉아서 회의를 하고 메일을 읽고 거래처와 전화를 한다. 의자에 앉아서 제안서를 검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메일을 보낸다. 의자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의자에 앉아서 커피를 마신다. 의자에 앉아서 인터뷰를 하고 품의서에 결재한다. 의자에 앉아서 퇴근하고 의자에 앉아서 회식한다. 그러니까 일생을 의자에서 보내는 것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의자에서.


일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김 부장은 의자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사무실을 둘러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자는 다 멀쩡하다. 그런 것 같다. 불구의 의자는 오직 자신의 것뿐이다. 김 부장은 임자 없는 의자를 발견한다. 출산휴가 들어간 직원의 의자. 그것을 자신의 의자와 몰래 바꾼다. 그 의자는 반듯하다. 편안하다.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게 분명하다. 마치 의자가 몸 전체를 감싸 안는 것 같다. 한없이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 바로 이 의자다.


일주일쯤 지나자 김 부장은 또 의자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의자는 좀 딱딱해야 좋을 것 같다. 푹신한 것은 뭐든 퇴폐적이다. 생각의 허리를 접게 만든다. 정신의 척추와 영혼의 고관절을 다 망가뜨린다. 회의실 의자 하나가 남는 게 있어 그것을 가져와 자기 의자로 쓴다. 역시 뼈에는 딱딱한 것이 좋다. 딱딱한 의자는 앉는 사람에게 바른 자세를 선물한다. 김 부장은 만족한다. 자신의 체중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하는 의자의 물성이 마음에 든다. 사람으로 치자면 꽤나 품성이 강직한 사람일 것이다.


며칠을 못 가 김 부장은 강직한 의자가 불편하다. 피곤하다. 엉덩이가 배긴다. 온몸이 뒤틀린다. 바늘방석이다. 온몸의 세포가 다 곤두서는 느낌이다. 생각이, 신경이, 피가 모두 엉덩이로 가 그곳을 아주 예민하게 만든다. 엉덩이는 아주 얇은 막이 된다. 앉았다 하면 바로 터진다.


결국 김 부장은 원래 자신의 의자를 찾아와 앉는다. 왼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진 자세로 업무를 본다. 그것이 의자 탓이 아니란 걸 이제 김 부장도 안다. 김 부장은 원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두 다리의 길이도 다르다. 불구는 의자가 아니라 자신이다. 몸을 바꾸지 않는 이상 의자를 바꾼다고 달라질 게 아니다.


기억 못하는 남자

작가 보르헤스는 갖고 있는 책의 양이 엄청났는데 책에 대한 갈망은 더 엄청났던 모양이다. 그는 이미 갖고 있는 책도 생전에 다 읽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항상 새 책을 보면 사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고 한다. 서점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발견할 때마다 보르헤스는 한숨을 쉬었다. "저 책을 살 수 없어 얼마나 슬픈가? 집에는 같은 책이 이미 있으니까."


정작 내가 놀란 것은 책에 대한 그의 애착보다 기억력이다. 그는 어떻게 그 책이 이미 집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었을까? 내 기억력은 기억력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은 어두워진다. 요즘은 자주 기억이 정전된다. 오히려 내가 가진 것은 기억력이 아니라 망각력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 페이지를 읽으면 이미 읽은 두 페이지를 잊어버린다. 기억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망각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가끔은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통째로 잊어버리기 위해 독서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 든다.


나는 주말에 종종 서점에 들른다. 꼭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은 마치 백화점에서 아이쇼핑만 해도 즐거워지는 여자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이번에 또 어떤 책이 나왔는지 살펴보는 설렘도 좋고, 오래전에 나온 책 속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을 발견하는 기쁨도 좋다. 무엇보다 서점에서는 책을 직접 만지는 스킨십의 쾌락이 있다. 책장을 넘겨보고 책 등을 쓰다듬을 때면 기분이 야릇해진다.


얼마 전 나는 니콜러스 로일이 쓴 『How To Read 셰익스피어』를 발견했다. 서점에서 목차와 저자 서문을 훑어보고는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극, 역사극, 그리고 비극이라는 제목의 첫 작품집의 머리글 가지각색의 독자들에게에서 셰익스피어의 친구이자 동료 배우인 헤밍과 콘델은 간단한 조언을 건넨다. "그러니까 자꾸, 자꾸 읽으시기를."


아마 책을 산다면 아내로부터 "또 책 샀어요?"라는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책을 산다. 그리고는 해야 할 집안일은 팽개치고 소파에 앉아 아내의 잔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재미있게, 열심히 읽는다. 다 읽은 책을 책장에 꽂으려고 할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이미 같은 책을 사서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숨을 쉰다. "저 책을 샀으니 얼마나 슬픈가? 집에는 이미 같은 책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나는 기억 못하는 남자다. 나 같은 독자를 두고 헤밍과 콘델은 말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꾸, 자꾸 읽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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