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독설

   
태정호
ǻ
지상사
   
13000
2012�� 01��



■ 책 소개
“패자만 양산되는 현 세태에날리는 독설”

내가 어떤 곳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가야하며, 그 안에서 내가 갖는 위상과 가능성, 그리고 한계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에사회 권력의 본질과 구성원들에 대한 정신적 지배 행태의 일단을 제시함으로써 사회규범과 정설의 맹목적 준수와 추종을 경계하고, 도덕성과 가능성,가변성 측면에서의 허구적이고 과대 포장된 자아인식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주장한다. 또한 긍정과 발전, 성공 일변도의 삶에서 벗어나 실체적 현실에기반을 둔 인생의 위기관리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맹목적인 경쟁과 모방, 추종이 아닌 자기 주도적 의사결정으로 채우는 삶을제안한다.

■ 저자태정호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학위를 이수했으며, 전문 CEO로 다우기술감사, UDS 주식회사 대표이사, 주식회사 태원엔터테인먼트(현 아인스 M&M) 대표이사, 우원개발 주식회사(KOSDAQ) 대표이사 등을역임했다. 

■차례
머리말

1.사회의 화장을 지우고 옷을 벗기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교육의 또 다른 얼굴
국가관과 애국심
윤리와규범
하면 안 된다 vs. 해야 한다
공헌과 보상의 별거
보상 형성의 일반론
필요성의 역설
미시적 권력에 의한왜곡
무공헌 무보상의 원칙
불공정의 일반화
고아원과 돼지농장 이야기

2. 자신을 속이지 말라
도덕적 자아의 멍에를 풀고
즐기는가, 아니면견디는가
잠재력이란 환상을 잠재우고
성장은 멈추었다
최고기록의 함정
지구력도 실력이다
‘하지 않는다’와 ‘하지못한다’ 사이의 진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3. 실패는 극복하지 말고 피해 가라
실패는 실패의 어머니다
절실함이 실패를부른다
패자는 말이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
멈출 수 있겠는가
즐길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공이다

4. 당신의 인생주권 회복을 위해
꿈은 흉내 내지도경쟁하지도 말라
최 진사 댁 셋째 딸과 칠복이 이야기
당신의 본능에 의지하라
삶의 주인으로살자




청춘독설


사회의 화장을 지우고 옷을 벗기면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인가?" 평균 이상의 애국심과 건전한 의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그렇다, 당연하다!"고 대답해야 된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도 있고,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도 있는데다, 정치인들은 언제나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강변하고, 선거철만 되면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모든 연설을 시작하며, 스스로 국민의 종이라 자처하니 언뜻 맞는 말인 것도 같다. 하지만 일단 이 거룩한 진리에 부질없는 흠집 내기를 한번 해보도록 한다. 앞의 질문에 정답이 "그렇다, 국민이 주인이다."로 제시되었다 치고 계속해서 다음의 질문들에 답해보자.


그럼 북한의 주인도 북한 국민인가? 이번에도 "그렇다."로 답할 것인가? 아니면 김정일, 김정은 부자 혹은 조선노동당이 답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본래 국민이 주인인데 김정일 정권이 무력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어정쩡하게 답할 텐가? 질문을 바꿔 "합법, 불법, 수단의 적법성, 도덕성을 막론하고 현재 북한은 누구의 것이냐?"로 물으면 답하기가 더 쉬워지려나?


일제 강점기 이 땅 이 나라의 주인은 누구였나? 조선 국민? 일본 국민? 일본 제국주의 정권? 순종황제? 나라가 없어졌으니 주인도 없다? 도대체 뭐가 정답인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질문이라 답이 궁한가? 그렇다면 훨씬 더 간단한 질문으로 옮겨 가자.


조선 건국 초기 국가의 주인은 누구였나? 조선시대 전체를 두고는 왕권국가와 신권국가 간 이견이 많으니 왕권이 강성했던 건국 초기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의 시대로 범위를 확 좁혀보자. 이제 답은 뭔가? 여전히 국민인가, 아니 백성이라고 해야 맞나? 경쟁상대가 대통령이나 총리, 총독, 지도자가 아니라 왕이니까 백성이란 답을 내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그럼 왜 조선의 주인은 왕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인가? 조선은 왕국이고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서 그런가? 그럼 영국의 주인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인가? 이건 확실히 우문이다. 입헌군주국이 아닌 절대왕권에 의한 통치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화정과의 비교인 것 같으니 적합한 예가 아니다. 그러면 절대왕권의 왕국과 민주공화국 이 둘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① 세습왕권 대 국민 참여로 선출된 권력, ② 1인 지배 대 다수에 의한 분권, ③ 법체계가 미비한 임의적 지배 대 엄격한 법률에 따른 운영, ④ 왕족-양반-중인-상민-천민으로 나누어지는 세습신분제도 대 원칙적으로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한 만민평등제도, 뭐 이 정도면 대표적인 차이는 어느 정도 훑어본 것 같다. 그러면 이런 차이로 나라의 주인이 바뀌나? 또 대한민국 역사에서 군사독재정권으로 공인되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 국가의 주인은 누구였나?


이제 이런 질문들은 계속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백성이든 국민이든 그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다. 나라의 주인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권력이다. 그것이 한 사람이건 집단이건 세습되었건 선출되었건, 그 집단의 구성원 수와 권력 획득 방식, 그들 내부에서의 권력 분배 방식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권력 자체의 기본 속성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럼 도대체 국민은 무엇인가? 아주 딱 들어맞는 단어가 있다. 자원, 곧 인적 자원이다. 기업처럼 소유권이 명확한 공동체로 대상을 바꾸면 인적 자원이란 개념은 더 확연해진다. 그러면 누구를 위해 이런 자원을 개발하고 사용할 것인가? 당연히 소유주의 효용 극대화를 위해 개발되고 사용된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생식활동도 아주 직접적으로 통제받아 왔다. 한국전쟁으로 인적 자원이 고갈되자 베이비붐이 발생했고, 이게 너무 확산되어 자원의 잉여가 예상되자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와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까지 갔다가, 출산율 최저 국가까지 가니 이제 또 결혼 좀 하고 애 좀 낳으라고 난리들이다.


왜 이렇게 자원개발계획이 오락가락하나? 물론 주인의 무능함과 근시안적 사고에 기인하는 바 크지만, 인적 자원 자체가 성장과 가공(교육)에 평균 2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리고, 또 다른 자원들을 상당량 투입한 후에야 국가와 사회에서 용도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장기적으로 수요를 예측하다 보니 착오가 생길 수밖에 없는 부분도 많다.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건 나뿐

국가는 일반 대중이 속해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사회집단이기 때문에 구성원은 대개 중앙 핵심권력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원으로서의 국민 개념을 이끌어내기가 오히려 간단하다. 하지만 집단의 규모가 작을수록, 그리고 구성 목적이 명시적이지 않거나 공동의 이해 증진과 같이 모호할수록 개별 구성원은 자신을 자원이 아닌 주인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또 실제 권력의 일원이 되는 경우도 빈번하기 때문에 권력자로서의 자신에 도취되어 자원으로서의 자신을 망각할 때도 많다.


모든 조직에게는 필요한 자원을 확보, 개발, 선별, 가공해서 효율성과 적재적소 원칙에 따라 배치하고 활용해 최대의 성과를 내는 것이 천명이다. 따라서 자원이나 그 자원이 가공되어 만들어진 부품이나 도구를 위해서 움직이는 조직은 없다. 또 다른 자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을 불사르는 자원도 없다. 결국 나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도 여자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키가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권력일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자신을 움직이고 살아갈 자격이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데 보통은 이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여러 사회집단에서 집단의 효율 향상을 위해 구성원에게 지속적으로 주입하는 온갖 요소가 구성원 각각의 두뇌와 생활 속에 깊이 각인되어 습관화되면서 이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바랄 수조차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정과 학교, 직장에서, 또 온갖 매체를 통해 사람들 속에 깊숙이 설치된 온갖 덕목과 원칙, 진리들이 그들의 허구성과 개인에 미치는 해악을 모두 숨긴 채 사람을 지배한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

잠재력이란 환상을 잠재우고

세상 모든 실패와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은 과대망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나 기업의 쇠망도 개인의 좌절과 절망도 상당 부분은 자신의 힘과 능력에 대한 오판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렇다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폐해 측면에서 보면 과대평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미하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할 체력도 기량도 되지 않는 사람이 무리하게 도전하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충분히 등정 가능한 사람이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도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에베레스트에 오르지 못한 것뿐이다. 과소평가는 이룰 수 있는 성취를 놓치게 하지만 과대평가는 참담한 실패를 부른다. 아무리 충분한 능력이 받쳐 주더라도 상황변수에 따라 성패가 수없이 엇갈리는 것이 삶이라면, 과대망상은 실패와 낙오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조금 보수적으로 인식하고 여기에 적절한 수준의 목표와 도전을 이어가는 것이 오히려 웬만한 고난을 이겨내면서 성공을 쟁취하고 또 다른 성공을 향해 뛰어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최고기록의 함정

육상이나 수영과 같은 기록경기에서 큰 대회에 나와 자신의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선수들은 대단히 드물다. 간혹 자신의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선수도 물론 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각종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수립되었던 과거 기록을 깨는 것이고, 자신이 연습할 때 세웠던 최고기록을 대회에서 경신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대단한 행운이다. 또 일단 절정에 도달하고 나면 사양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육체에서 떠나 정신적인 능력의 영역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자신이 가진 최고기록을 자신이 늘 보여줄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거의 일반화되어 있고, 한 술 더 떠서 100kg을 들어본 적이 있으니 200kg도 들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주장을 전개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자신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가정하고 인생과 맞닥뜨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실패자가 되는 길에 접어든 것이다.


우리 삶에서 선택이나 도전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시간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긴 운동경기보다 훨씬 길다. 100미터를 10초 이내에 뛰기에 도전해서 실패하는 데까지는 10초밖에 안 걸리고 조금만 쉬면 호흡도 체력도 회복될 수 있지만, 마라톤에 도전한다면 포기하기까지 두어 시간은 뛰어야 할 것이고, 그만큼 도전 과정에서의 위험성과 체력을 회복하는 기간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몇 년, 수십 년을 건 선택과 도전을 결정한다면 과연 자신의 능력을 어느 정도 수준이라고 가정해야 할까?


지구력도 실력이다

IQ 같은 지적 능력을 측정하는 검사나 어떠한 종류의 시험도 다 한정된 시간 내에서 주어진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수준 이상의 능력을 수치화해주지는 못한다. 기껏해야 몇 시간 동안 피검사자나 수험생의 능력을 측정하는 데 그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따금 자신이나 제3자의 지적 능력을 판단하게 될 때도 짧은 기간 동안의 에피소드나 이벤트를 가지고 하게 된다. 결국 아무리 과학적인 접근 방법을 쓰더라도 어떤 사람이 몇 년 동안 해낼 수 있는 성취의 양과 질을 유의미하게 예측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근거로 마라톤 선수를 선발해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곧잘 조성된다. 자신의 꾸준함과 지구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만큼, 스스로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한 가지는 반드시 장거리를 뛰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100미터가 빠른 사람이면 100미터 경기에 계속 출전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면 되고, 마라톤 선수는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면서 살면 된다. 문제는 100미터를 잘 뛰니 마라톤도 잘 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할 때 생겨난다. 실제 생활로 무대를 옮기면 이런 얘기가 된다. 단거리 선수는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그때마다 성과를 거두면서 그 연속 과정 속에서 살아가야 성공할 확률이 높은 사람이다. 반대로 마라톤 선수는 단기적인 압박과 계속적인 변화보다는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차근차근 진도를 밟아가는 유형이 적합하다. 물론 순발력과 지구력 모두를 지니고 있으면 그야말로 팔방미인으로 선택의 폭도 넓겠지만, 100미터와 마라톤을 동시에 우승하는 사람이 없듯이 한 측면에서의 강점은 거의 필연적으로 반대 측면에서의 약점을 수반한다는 점을 알고 그렇게 받아들여야만 한다.



실패는 극복하지 말고 피해 가라

절실함이 실패를 부른다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다. 고난을 헤치고 나가다 보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비슷한 뜻의 격언과 속담도 줄을 잇는다. 이런 말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정도의 수준으로만 받아들여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말 궁하면 통하는 줄 안다.


내가 현재 궁핍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십중팔구 이미 몇 번 실패를 겪었다는 얘기고, 그런 상황 자체만으로도 이미 나는 실패한 확률이 높은 사람이다. 그동안 실패를 충분히 했고, 여기서 더 물러날 자리도 없고, 죽으란 법은 없다고들 하니 이제는 성공하리라는 헛꿈은 꾸지 말아야 한다.


사면초가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냉정함과 합리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부상당한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듯이, 일단 처한 상황 자체가 핸디캡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만큼 원하는 목표를 성취할 확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작은 성취로는 극복이 안 되는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단번에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대박을 꿈꾸게 한다. 위험 부담이 그 만큼 높아지고 성공 확률이 그 만큼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거기다가 남아있는 자원이 풍족할 리도 없으니, 무엇을 하건 필요한 만큼의 자원 투입도 이루어질 수 없고, 비상시를 대비할 여유도 없다. 계획하고 예측했던 바에서 아주 조금만 상황이 어긋나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이것이 남의 일이라면 웬만큼 생각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게 되겠어? 저 친구, 이번에 완전히 망가지겠는데." 하며 혀를 끌끌 찰 상황인데, 이게 자신의 상황이 되면 갑자기 성공률이 100%에 근접하고 희망과 확신이 가득 들어찬다. 사업을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믿음으로 끌고 나간다. 주변에서 우려의 소리가 나올수록 이 믿음은 더욱 더 커진다. 잘못 되었을 때의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는 아예 생각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 자꾸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배척한다. 상대방이 싫어하고 적대시하는데 욕 얻어먹어 가며 계속 바른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이제 주변에 제대로 된 사람도 없어진다. 애초 설득력이 없는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으니, 모자라는 사업 자금은 투자 받거나 융통해보려 해도 상대방으로부터 위험 요인에 대해 의심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확신한다! 당신이 잘 몰라서 그런다. 그렇게 안 되는 방향으로만 생각하면 무슨 사업을 할 수가 있나?" 이외에는 별로 할 얘기도 없다. 해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피해나 최소화하자며 누군가에게 떠넘기려 해도 자신보다 더 어리석은 바보를 찾을 수도 없다. 그냥 투입한 자원만 몽땅 없어진다.


내가 절박한 처지에 있다고 해서 무슨 일을 하건 성공률을 높여주는 법칙은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쫓기는 심정 때문에 일을 더 망치기 일쑤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언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을 수 없는 문제지만, 일단은 그 절박함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수적이고 우선이다. 절박함이란, 상황 자체를 묘사하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똑같은 상황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반응과 대응책이 달라진다. 태생적인 것이건 재수가 없어서 생긴 일이건 관계없이 일단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벌어진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받아야 할 징벌 또한 수용해야만 한다. 일은 다 저질러 놓고 그에 따르는 고통은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심리상태, 이게 바로 절박함이다.


시험을 못 보았으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고, 투자에 실패했으면 돈을 날리는 것이다. 일단 벌어진 일은 아무리 덮으려 해도 덮어지지 않는다. 시험을 못 봤으면 일단 성적표 받고 창피당할 만큼 당하고 야단도 맞을 만큼 맞아야 된다. 그러고 나서 다음 시험을 미친 듯이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 순리다. 그 상황 자체를 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견뎌내야 한다. 아무리 과거가 화려했더라도 일단 몰락했으면 그 시점에서 자신의 상태를 본인의 것으로 수용하고, 벌어진 상황을 그대로 속속들이 이해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거기에서 탈피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단번에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애당초 그런 처지에 놓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난 이런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는 단 하루도 견딜 수 없다."에서 출발해 위만 쳐다보며 지내다 보면, 자신이 지금 안전하게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지, 떨어지다 나뭇가지에 걸려 매달려 있는지, 늪에 빠져 움직일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는지 알 수도 없고, 떨어지는 과정에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주변에 쓸 만한 물건은 뭐가 있는지도 돌아볼 겨를이 없어진다. 계단이나 디딤판이 있어 간단히 걸어 올라도 되는 길이나 로프가 달려 있어 비교적 쉽게 타고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어도 찾질 못한다. 결국엔 자신이 그토록 견딜 수 없다던 그곳보다 더 열악한 곳,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으로 추락하고 만다. 지금보다 조금씩이라도 나아질 수 있는 건실한 방법을 찾아내고 작은 성취들을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상황 인식과 접근 방법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의 인생주권 회복을 위해

삶의 주인으로 살자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없고 또 완전히 세상을 등질 수 없는 한, 세상의 정해진 원리 속에서 나름대로 적응하며 살아가야 한다. 또 그 안에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인생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선택들을 하고 적절한 노력을 경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의건 타의건 수많은 사회집단에 소속되게 마련이고, 그 각각의 집단들은 모두 그 집단 자체와 그 집단의 권력 효익에 최대한 부합하는 방향으로 그 구성원들을 이끌어가려 한다.


이러한 각종 사회집단들이 갖는 공통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우리 앞에 끝없이 제시되는 도덕이고, 규범이고, 때로는 법이다. 이것들은 결코 각 개인이 행복하거나 질 높은 삶을 열어가는 데 도움을 주려는 의도로 설정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모든 것들을 잘 지키면서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내 자신을 위해 주어지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인 대우는 내가 세상의 요구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대접을 잘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로 결정된다. 사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삶이 거꾸로 가장 함부로 취급받을 수도 있다. 때로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이미 주어지고 고착화되어서 내가 지금 세상을 알고 그에 대처하려 해도 그리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걸어가는 길에 외관상 큰 변화를 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세상에 눈 뜨지 않으면 그런 판단조차도 할 수 없어진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환상과 앞날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을 접고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그 안에서의 자신을 돌아보고, 제대로 된 상황인식과 자아인식 속에서 짧은 기간이라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절반의 성공은 거둔 것이 아닐까 한다. 당신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 대한 자결권은 상당 부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세상을 두 번 살아본 사람은 없다. 여러 사람들이 같이 하게 되는 비교적 동질적인 경험도 학교나 군대 같은 대단히 표준적이고 통제된 환경 하에서 지내게 되는 기간을 제외하면 거의 찾을 수 없다. 취업, 결혼, 출산, 육아 같이 상당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삶의 과정들도 실제로는 그 과정에 붙여진 명칭만 같을 뿐, 남의 사례를 나에게 그대로 가져다가 적용할 만큼 동질적이진 않다. 아무리 세상을 살면서 많은 일을 겪고 경험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후배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다분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 누가 목소리 높여 자신 있게 얘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정답인 것도 아니고, 나이 많은 사람이 얘기한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며, 돈이 많거나 권력을 쥔 사람이 주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인 것도 아니다. 사실 어떤 주제가 됐든 너무 속속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확정적인 강한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만큼 세상은 다면적이다. 언뜻 절대적인 답이 정해져 있을 것 같은 문제에서도 항상 상황변수나 가정에 따라 정답이 바뀐다. 자연에서 제공되는 먹을거리들은 거의 같지만, 시대에 따라 건강에 좋다는 음식과 나쁘다는 음식조차 계속 바뀌어 왔다. 똑같은 새우, 조개, 오징어, 계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콜레스테롤이 많아 고혈압과 동맥경화에 걸린다고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가, 조금 또 지나고 나면 뛰어난 콜레스테롤 분해 성분이 있으니 오히려 많이 먹는 것이 좋단다. 앞으로도 많은 먹을거리들이 피해야 할 음식으로 분류되었다가 다시 또 권장음식 군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세월을 이겨갈 것이다.


음식 같은 예는 기술이 발전하고 발견이 증가하면서 과거에는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어 나타나는 자연스런 변화라고 하겠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도전과 선택에 관련한 문제는 당신에게 제공되는 의견이나 충고는, 그 제공자 자체가 정답을 모른다는 절대적인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수많은 왜곡요인들 속에 노출되어 있다. 일단 상대방이 당신을 시기하고 견제할 수 있다. 당신을 경쟁 대상으로 보거나, 당신과 비교했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우위 요소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생각이 있거나, 아니면 그냥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진심 어린 충언을 제공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별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방향으로 당신을 이끌어가려 노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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