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차동엽
ǻ
명진출판
   
16000
2012�� 01��



■ 책 소개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 묻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끌어안았다!

평생 종교를갖지 않았던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께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병철회장은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책은 이러한 다섯 페이지 분량의 물음에서 출발한다. 대중과 소통해온 우리 시대 멘토 차동엽 신부가 24년 전 삼성그룹의창업자 이병철 회장이 남긴 삶과 죽음, 성(聖)과 속(俗)에 관한 질문지를 만난 것이 그 계기가 되었으나 목적은 하나였다. 모두에게 ‘희망’을주고 싶다는 것. ‘한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착한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나?’ ‘우리는 왜 자기인생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까?’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나?’ ‘악인의 길과 선인의 길은 미리 정해져 있나?’ ‘지구의종말이 오긴 오는 걸까?’와 같은 근본적 물음 15가지와 거기서 파생된 동시대인들의 절실한 물음 11가지에 대한 따뜻하고 친절한 대답이 바로그것이다. 책에서는 그 질문들을 각각 Big Q와 Real Q라 이름 붙여 구성하였다. 

■ 저자 차동엽
밀리언 셀러가 된 자기계발서 『무지개 원리』의 저자로 잘알려진 차동엽 신부는 가톨릭 사제이지만 대중 작가이자 강연가로 활동하는 특별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이러한 정체성은 엔지니어의 꿈을 품고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에 들어갔으나 ‘기계를 발명하여 편리한 세상을 만드는 것보다는 세상의 진정한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다’는생각에서 출발해 사제의 길로 방향을 바꾼 인생역정과 관련이 깊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사목(목자로서 양떼를 돌본다는뜻의 신학적 용어. 사제의 길을 뜻함)이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대오각성하였다. 이후 ‘사람을 살리는 일이란 사람들에게살아갈 이유를 갖게 하는 것, 즉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라는 큰 깨달음과 함께 이를 평생의 미션으로 삼게 되었다. 이번에 집필한 『잊혀진질문』 역시 그 미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살기 어렵고 희망이 없다고 아우성인 이 시대, 그러나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보여주는 책이다.

■ 차례
프롤로그 -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 
인트로 - ‘난문쾌답’을 위한 구조조정  


PART 1 생명의 몸살 
BigQ 1 한번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1-1 Real Q 사는 게 고달플 땐 생의 모멘텀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요?
1-2 Real Q ‘불안’과 ‘두려움’이 끈질기게 따라올 때 극복할 방법은 있는 걸까요? 
1-3 Real Q 가슴속에 분노가가득한데 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BigQ 2 착한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나? 
2-1 Real Q 선한 ‘부’와 악한‘부’가 따로 있다면 재테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PART 2 고독한 영혼의 초월본능 
BigQ 3 우리는 왜 자기 인생에 쉽게 만족하지못할까? 
3-1 Real Q 외로움과 고독은 어떻게 다른가요? 
BigQ 4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 필요가 있을까?
4-1 Real Q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4-2 Real Q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만 하는 ‘얌체기도’에도 응답이있을까요? 
BigQ 5 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례는 대체 뭔가? 
BigQ 6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받아들여야 하나? 
BigQ 7 우리나라는 종교가 번창한데 사회 문제는 왜 그렇게 많나? 


PART 3 내 인생의 비밀코드 
BigQ 8 이세상에 신이 있다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나? 
BigQ 9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증거가 있나? 
9-1 Real Q 내가 사는이유를 찾을 방법이 있을까요? 
BigQ 10 창조와 진화에 관한 생각은 영원히 평행선인가? 
BigQ 11 과학이 더 발달하면세상이 완전히 달라질까? 

PART 4피할 수 없는 물음 
BigQ 12 악인의 길과 선인의 길은 미리 정해져 있나? 
12-1 Real Q 다 용서하면행복해진다고요? , 
BigQ 13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나? 
BigQ 14 천국과 지옥이 우리 인생에 무슨의미가 있을까? 
BigQ 15 지구의 종말이 오긴 오는 걸까? 
15-1 Real Q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순간 출구는어디에 있나요? 
15-2 Real Q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꿈은 자꾸 도망가고 이를 어찌해야 하나요? 
에필로그 - 추격전에 나선형사처럼
참고문헌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생명의 몸살

한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과장법을 아무리 많이 써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고통은 그때그때 우주의 중심입니다. 요즈음 특히 2040세대의 고충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10대의 고달픔이라고 전혀 덜하지 않으며, 5060 이후의 세대가 겪는 애환이라고 가뿐하지 않습니다. 크건 작건 많건 적건, 고통은 언제나 버겁다는 얘기입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묻게 해줍니다. 음식점에 갔는데 종업원의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장 나오라고 그래!" 하고 항의하듯이, 우리는 살면서 문젯거리가 생길 때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합니다. 이를 빗대어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고통으로 대표되는 한계 체험을 최종적 포괄자를 위한 암호라고 말했습니다. 어떠한 것이 되었든지 사람이 겪는 어려움은 최종적 포괄자 하느님을 찾게 하는 구실이 된다는 것입니다.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최종적 포괄자와의 상관관계를 짚어보면서 더 넓고 높은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좋은 뜻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막상 고통이 닥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지 않으니 그 괴로움은 더 커집니다. 최선의 선택은 고통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너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하여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너에게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그 답과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대로 그냥 살자. 그러면 먼 훗날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설령 고통의 의미가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난다 해도,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의 답이 되지 못합니다. "제자가 준비되어 있을 때 스승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선불교의 말이 있듯이 때가 되어야 알아듣는 법입니다.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날 우리는 고통에서 도망치려 하기보다 오히려 고통을 동경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치 김용택 시인이 푸념 아닌 달관으로 노래하듯이.


"내 가슴은 늘 세상의 아픔으로 멍들어야 한다.

멍이 꽃이 될 리 없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나는 늘 세상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럴 나이가 되었다. 꽃이 없어도 될 나이.

생각과 행동에 자유와 평화로움을 얻을 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것에도 아쉬워해선 안 된다.

훨훨 나는 창공의 새를 보아라! 평생 물을 보며 살았지 않느냐. 물 같아야 한다.

강물같이 도저해야 한다. 생각이 흐르는 강물처럼 평화롭고 공평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의 가슴은 세상의 아픔으로 늘 시퍼렇게 멍들어야 한다.

그 푸르른 멍은, 살아 있음의, 살아감의, 존재 가치의 증거가 아니더냐."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묻는 이에게 역시 고통은 속앓이의 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에게도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습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루어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이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김용택 시인이 독백처럼 내뱉은 저 다짐 안에 속 깊은 지혜가 번득이고 있군요.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나는 늘 세상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이 결국 모든 걸 소멸시키리라.



고독한 영혼의 초월본능

외로움과 고독은 어떻게 다른가요?

요란한 척, 바쁜 척, 친구가 많은 척하지만 깊은 내면에서 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죽하면 루소가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고 말했을까요. 독일 작가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의 말처럼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엄습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가 이승욱의 분석은 실제 현상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외로움이란, 내가 말할 대상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말 걸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감의 확인이다. 우리에게는 말 걸어주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 오직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몇 명이 있다. [……] 그러나 자신의 일부만이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어중간한 외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외로움은 대체로 어정쩡하다. 절절히 외롭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떠밀려서 당하던 외로움을 이제 좋아서 즐겨보는 것입니다. 고독은 외로움의 변형일 뿐입니다. 이제껏 당해왔던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나는 어차피 외로움에 던져진 사제입니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고독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아예 신 나게 즐기기로 했습니다. 이왕이면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즐기기로 더 욕심을 내봤습니다. 나에게 그 시간은 새벽입니다. 그래서 새벽 일찍 일어나 적막 가운데 홀로의 시간에 한껏 잠겨보기로 했습니다. 아침이슬 소리 없이 내리는 고요 가운데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나는 저절로 두 가지와 대면하게 됩니다.


딱히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니 임의로 나열해보자면, 우선 나 자신과 맞대면하게 됩니다. 이때 나는 철저하게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내 영혼을 보살피고 갈무리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나는 침묵과 맞대면합니다. 나에게 침묵은 신의 얼굴이며 신의 음성입니다. 나는 이 맞대면의 시간에 내 오감에 달린 기도의 문들을 활짝 열고 천상의 지혜를 들으며 그 지혜를 활자로 옮기는 저술 작업을 합니다.


나는 내 고독의 시간으로 새벽을 택했습니다마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그 시간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홀로 운전을 하거나 일을 하는 동안 또는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동안, 그 침묵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시도해볼 수도 있습니다. 주어진 일, 습관이 시켜서 하는 일을 멈추고, 잠깐 나 자신에게 묻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너를 어떻게 대해줄까? 너 참 사느라고 고달프지? 이는 독백 같지만 엄연한 대화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내가 내면의 나와 나누는 소통인 것입니다. 이 대화는 우리가 절친과 나누는 대화보다 훨씬 진솔하고 따뜻합니다.


침묵과 친해지기 위해 가벼운 산책이나 여행으로 시야를 넓힐 수도 있습니다. 오직 나와 일대일로 대면하는 세상 속에 뛰어들면 새삼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홀로 혼자이기에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고독은 더불어 혼자이기에 더 이상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외로움은 타인의 고통을 품지 못하지만, 고독은 타인의 고통을 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50년간 기쁨보다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고백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그만큼 깊은 고독에 칩거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리하여 나는 지금도 고독 예찬론자가 됩니다.


외로움은 사랑의 필요를 호소하는 원초적 욕구입니다. 고독은 그 사랑의 샘을 자신 안에서 발견하는 탐색의 장입니다. 외로움이 영글 때는 육신이 처절하게 흐느끼지만, 고독이 영글면 영혼이 기쁨에 벅차 흐느낍니다. 그리고 그리고, 외로움은 손을 안으로 오그라들게 하지만, 고독은 손을 밖으로 내밀게 해줍니다.


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례는 대체 뭔가?

신이 가장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는 바로 부조리의 현장에서 신이 침묵하는 듯이 보일 때입니다. 특히 우리가 악인으로 부르는 그런 인물이 백주에 범행을 저지르고 버젓이 잘 살고 있는 것을 볼 때, 신은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직장에서 가장 참기 역겨운 일은 평소에는 빈둥거리다가 상사만 나타나면 아부에 능한 직원이 승승장구 승진하는 것을 봐줘야 할 때일 것입니다. 나쁜 짓만 일삼는데 돈이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천하의 나쁜 놈들에게 벼락을 내리시지 않는 신은 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없거나 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누군가 울분을 터트린다 해도, 그 의로운 분노는 옳습니다. 고집스럽게 성실의 법칙을 따라 사는 노력파보다 교묘하게 사기의 법칙으로 사는 요령파가 더 잘사는 꼴을 봐주기란 정말로 분통 터지는 일입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어거지가 용납될 수 있을까요? 초간단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신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적어도 현세에서는 말입니다. 흔히 신은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인간의 행위에 보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상선벌악의 시행은 궁극적으로 사후 또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현세에서 그 중간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마지막 때로 유보되어 있을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죄인 또는 악한 사람에게 회개(또는 회심)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자비가 그 이유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으니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기다려주는 신의 자비가 바로 그 답답한 침묵의 이유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서는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며, 해코지하는 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대신에 벌이 아니라 매를 드실 때가 있습니다. 잘되라고 때리는 사랑의 매 말입니다.


벌과 매, 무엇이 다른가? 같은 것 아니냐고 묻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벌은 벌로 끝입니다. 그걸로 사안 종료입니다. 하지만 매는 매로 끝나지 않습니다. 매를 때리실 때는 반드시 그다음에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더 발전된 내일, 더 좋은 미래를 꿰뚫어 보셨을 때만 매를 드신다는 말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시련을 겪는데 그것이 어떤 반성도 깨달음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삶의 인과관계에서 발생한 고생일 따름인 것입니다.


이제 자명하여졌습니다. 만일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아직도 불공정한 사회라는 뜻입니다. 이를 책임지고 개선해야 할 주체는 하느님이 아니라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요즈음 국민적인 염원이 공정사회입니다. 한마디로 결과지향의 사회문화가 아니라 과정지향의 사회문화가 온전하게 조성될 때 이 여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이 없어도 잘만 살더라. 적당히 요령을 부려 돈 많이 벌어서 부귀와 안락을 누리면 그만이지. 종교? 난 그런 거 몰라" 하며 떵떵거린다면, 한번쯤 철학자 파스칼의 말대로 내기를 해볼 것을 권합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어차피 확률이 1대 1이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확률은 똑같다. 자 그렇다면 도박을 해보자. 서로 반대 경우가 사실이라면 결국 손해는 누가 보는가? [……] 결국 누가 낭패를 보겠는가?"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는 파국의 패를 쥐고 사는 셈이고, 다른 하나는 대박의 패를 쥐고 있는 셈이라는 겁니다.



피할 수 없는 물음

지구의 종말이 오긴 오는 걸까?

종말에 관한 성경의 진술 가운데 그 뜻이 자명한 것을 추려보면 세 가지가 꼽힙니다. 첫째,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회는 단 한 번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그날 우리의 지상 삶이 평가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해서 이 이상의 것을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마르 13,33: 공동번역). 깨어 있다는 것은 시간을 잘 쓰면서 준비하는 자세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했던 로버트 프로스트는 국민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인물입니다. 한번은 프로스트에게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프로스트가 연단에 서자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여 그처럼 위대한 시인이 되셨는지요?"


프로스트는 정말 큰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말했습니다. "나는 마치 도둑놈처럼 시간을 좀 훔쳤습니다. 식사 시간도 좀 훔쳐오고, 잠자는 시간도 좀 훔쳐오고, 사람들과 잡담하는 시간도 좀 훔쳤지요. 그리고 훔쳐온 그 시간을 용감하게 휘어잡고 시를 썼습니다!"


청중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한 상태가 되어 대꾸 한마디도 못하자 프로스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늘 바쁘다고 생각하지만, 필요한 시간은 언제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필요한 시간을 언제든지 훔쳐와서 사용했다는 시인의 말에 재치가 넘칩니다. 동시에 정곡을 찌릅니다.


일찍이 철학자 칸트는 시간은 하나의 인식 형식임을 깨달았습니다. 곧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고, 삶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통찰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 현대 물리학이 과학적으로 해명합니다. 과학의 설명은 명쾌합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안에만 존재할 뿐 우주 어디에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


이 얼마나 놀라운 발견입니까. 이는 인간의 궁극적인 동경이 되고 있는 영원의 실체가 바로 현재라는 전율할 사실 앞에 우리를 서게 합니다. 그러므로 잊지 말지니, 찰나에 영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기억 속에 시간을 스펙트럼으로 펼쳐 놓습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어떤 이들은 미래에서 과거로요. 그러면서 자신들이 그 스펙트럼의 한 구간을 살다가 영원이라는 고향으로 떠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아니라 집단 기억 속의 시간 스펙트럼을 역사라 일컫습니다.


그 구간 너머를 일컬어 나는 시간 밖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애가 시간 스펙트럼의 일정 구간 안에 매장(埋葬)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 구간 너머까지 의미(意味)로 남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말에 대한 사색은 우리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종말을 긍정할 때, 지금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어차피 도상(途上)의 행복임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 길 위에서 가야 할 때가 있고, 머물러야 할 때가 있고, 뒤돌아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슬그머니 일행을 떠나 홀로 성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꿈은 자꾸 도망가고 이를 어찌해야 하나요?

희망에 관한 한 나는 개척자입니다. 모두 절망을 말할 때 나는 희망을 말했습니다. 아무도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지 못할 때에도 나는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깁시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선동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대학교 강연에서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나는 꿈을 향해 계속 달려가는데 꿈은 나에게서 도망갈 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우리 현실이 딱 그렇거든요."


이는 그 학생만의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대학신문 기자들을 비롯하여 요즈음 점점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지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답답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답변을 회피하진 않습니다.


"얼마나들 힘들지 공감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인류 고난의 역사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도 꼼꼼히 추적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꿈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루어진다! 다만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변수 안에서!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버티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답은 버티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꿈을 이루는 가장 큰 인자는 버티기입니다. 시인 롱펠로는 말합니다. "잠긴 문이 한 번 두드려서 열리지 않는다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큰 소리로 문을 두드려보아라. 누군가 단잠에서 깨어나 열어줄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과연 누구인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누군가는 애매모호한 남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거인일 수 있고, 기회일 수도 있고, 사필귀정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꿈에 관한 한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는 맞지 않습니다. 간 만큼 기쁨이며 보람입니다. 설령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도전해봤다는 사실은 여한을 남기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이 탓을 하면서 꿈을 더 이상 품지 않으려 합니다. "이 나이에 꿈은 무슨 꿈. 이미 꿔오던 것도 정리해야 할 판인데." 현명한 판단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장의 맥박이 뛰고 있는 한, 세상에 너무 늦은 것은 없습니다.


건강한 여든 살 노인의 뇌는 젊은이의 뇌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분명 젊은이에 비해 속도는 더디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약들 정도야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칸트는 쉰일곱 살에 처음으로 철학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아흔 살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유명한 첼로 연주가인 파블로 카잘스는 아흔한 살이 되어서도 날마다 첼로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묻더래요. "선생님은 왜 아직도 계속 연습을 하시는 겁니까?" 그에 대한 카잘스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요즘도 조금씩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라네."


오늘은 오늘의 오늘이 있고, 내일은 내일의 오늘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오늘이 매일 주어질 터이니, 더는 꿈을 이룰 기회가 없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꿈을 품고 도전하기만을 권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러 그랬습니다.


흔히 꿈의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나는 이를 굳이 마다하지도 않지만 적극적으로 권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를 꿈의 계획농법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이는 꿈에 농약도 주고 비료도 주고, 때 되면 인위적으로 전지도 하면서 꿈의 결실을 보려는 접근법입니다. 이렇게 하면 꿈이 이루어질 확률은 높아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꿈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부작용이 남습니다. 주위 환경의 피해, 잔류농약 그리고 건강의 이상 등.


이런 이유로 나는 꿈의 유기농법 내지 태평농법을 권합니다. 꿈이라는 나무를 파종만 하고 생태의 이치에 맡기는 것입니다. 오로지 생태적으로만 경합하고 상생하면서 열매를 맺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소출이 적어지겠지요. 하지만 그 꿈의 결실은 주위 환경과 농부 그리고 이웃들에게 자연의 환상적인 풍미를 선사할 것입니다.


꿈을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줄곧 품고 있되, 확실하게 큰 방향을 잡은 다음,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라! 계획농법보다 유기농법을 택하라! 이렇게 우리 꿈의 철학이 압축되는군요.


그러면 이제 남은 문제는? 17세기 네덜란드와 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 그가 유명해지고 난 뒤 한 미술학도가 그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좋겠습니까?" 렘브란트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붓을 잡고 지금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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