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러브

Slow Love

   
도미니크 브라우닝(역자: 노진선)
ǻ
푸른숲
   
13000
2011�� 10��



■ 책 소개
한 번쯤 멈춰 숨을 고르고, 인생이라는 지도를 살펴보게 해주는책!

프로이트가 인생에서가장 중요한 두 가지라고 말했던 일과 사랑에 모두 실패하고 대신 자기 인생을 되찾은 작가 도미니크 브라우닝의 자전적 에세이다. 구독자 수 95만명에 이르는 인기 잡지 「하우스 & 가든」의 편집장으로 13년간 일하며 수많은 팬을 보유한 저자는, 잡지 폐간과 함께 하루아침에 직장을잃게 된다. 일상을 지탱해주던 중요한 축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 

저자는 실직 후 깊은 무기력과 우울감에 시달린다. 요일의 구분이 없어지고 일이 주던 성취감이 사라지자 자신이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해 끝도 없는 폭식 증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게다가 7년간 끌려다니던 남자친구와의 관계 역시 정리해야 한다는 걸깨닫고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그녀가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에 집착하던 고통스런 시간을 지나 자기 곁에 남아 있는 것들에 마음을열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이를 ‘슬로 러브’라고 정의한다.

실직을 계기로 정신없이 달려가던 삶을 잠시 멈추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온전히 몰입했던 그녀가 결국 발견한 것은무엇이었을까? 2010년 출간되어 뉴욕의 주요 서점에서 ‘MD 추천 도서’로 선정, 뉴요커들 사이에서 인기리에 회자되던 이 책은 현실의 한계와벽을 아는 어른들에게 마지막 로망을 선사할 것이다.

■ 저자 도미니크 브라우닝(Dominique Browning)
구독자 수 95만 명에이르는 전설적인 잡지 「하우스 & 가든」의 편집장으로 13년간 일하며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는 신문 및 잡지 분야의 컨설턴트로활동하며, 「뉴욕 타임스」「뉴욕 매거진」「O, 오프라 매거진」 등에 칼럼을 쓰고 있다.

「하우스 & 가든」의 갑작스런 폐간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슬럼프에 빠지게 된 브라우닝은,그러나 이 시간을 계기로 정신없이 달려가던 삶을 잠시 멈추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을 가진다. 음악과 책, 건강한 음식,자연과 예술 속에 잠기는 이런 활동들은 충만하고 우아한, 자기에게 맞는 진정한 삶을 되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이 책은 현실의 한계와 벽을 아는어른들에게 마지막 로망을 선사할 것이다.

■ 역자 노진선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뉴욕대학교에서 소설 창작 과정을공부했다. 잡지사 기자 생활을 거쳐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감칠맛 나고 생생한 언어로 다양한 작품들을 번역해왔다. 옮긴 책으로 『먹고 기도하고사랑하라』『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아빠가 결혼했다』『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만 가지 슬픔』『새장 안에서도 새들은 노래한다』『금요일 밤의뜨개질 클럽』『자기 보살핌』『동거의 기술』『창조적 습관』『고든 램지의 불놀이』 등이 있다.

■ 차례
프롤로그 - 그것이 슬로 러브다 
Chapter 1 가을 
1. 직장을 잃고 처음맞는 토요일 
2. 남자와 일이 당신을 실망시킬 때 
3. 파자마, 인생의 괴로움을 치유해주는 안정제 
4. 우울할 땐 쿠키다이어트 

Chapter 2 겨울
5. 우유부단한 남자에게 상처받지 않는 법 
6. 인생의 사운드트랙이 필요한 순간 
7. 야구 중계를 듣는,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부엌 
8. 소개팅의 목적 
9. 내 마음의 보수 공사 
10. 새벽 네 시, 불면의 밤을 통과하는피아노 

Chapter 3 봄
11. 책과의 연애사를 떠올리다 
12. 인생 2막으로 한 걸음 
13. 양가적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
14. 오로지 나를 위해 요리하는 즐거움 
15. 머핀과 슬로 쿠커 홀릭 

Chapter 4 여름 
16. 인생을 가볍게 만드는 법에 대하여
17. 비운 후에야 비로소 채울 수 있어 
18. 생애 최고의 여름 
19. 만조와 간자의 경계에서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 단순하고 아름다운삶을 찾아가는 여정




슬로 러브


프롤로그 - 그것이 슬로 러브다

갑자기 나는 실직자가 되었다. 내 일상을 정의해주고, 삶의 속도를 정해주고 규제해주던 바로 그 대상이 사라졌다. 나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온갖 이유로 궤도를 이탈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우리는 직장을 잃었고, 커리어를 잃었고, 노후 자금을 잃었고, 가정을 잃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다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정기적인 수입이 사라지면서 내 삶의 경로를 바꿔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경제적 파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심리적으로 무너지고 다시 시작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물론 나는 신경쇠약에 걸렸다. 나름 어수룩해졌다. 다시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할 정도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로, 스스로에게 성공의 의미를 되물을 정도로. 그다음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어낸 내 여정의 이야기다. 내 사연은 내 가족이나 친구, 태도, 습관, 상심과 마찬가지로 나만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배운 교훈은 보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이번 여정이 시작됐을 때 머릿속에는 오로지 내가 잃은 것들뿐이었다. 그러다 신기하게도 뇌 안에서 뭔가 전환이 일어났고, 더 이상 내가 겪는 이 변화를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의 상실로 받아들이지 않게 됐다. 대신 내 삶의 변화…… 경험, 사건의 가치를 깨닫기 시작했다. 물론 그중에는 재앙에 가까운 사건도 있었지만, 그 모두는 결국 내 일상의 질을 높여주었다. 다시 말해, 내 인생의 질을 높여주었다.


나는 결코 어떤 일들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이 못 된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감정이 더욱 깊어졌다. 세상의 속도는 더 빨라진 듯했지만, 내 삶의 속도는 느려졌다. 처음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몰랐는데, 다 쓰고 보니 결국 이 책은 슬로 라이프, 슬로 러브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음미하기 시작하면서, 슬로 라이프의 느린 속도가 삶을 치유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숨을 고를 수 있었고, 삶에서 우선적인 것들을 다시 생각, 아니 다시 경험하고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내게 남은 것들 속에 오랫동안 머무는 법을 알게 됐다.


이제는 슬로 라이프가 슬로 러브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슬로 러브는 내가 아는 사랑 중에서 가장 오래가는 사랑이다. 언제든 우리 곁에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지극히 사소한 대상들, 이를테면 가족, 우정, 음식, 예술, 책, 우리의 몸, 마음, 영혼, 사방에서 피어나고 웅웅거리는 생명체들에게 느긋하면서도 집중된 관심을 쏟는 데서 비롯되는 사랑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슬로 러브가 고요한 시간에서 비롯된다는 것, 원하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침묵이 주는 가르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직장을 잃고 그와 동시에 강렬했던 연애의 끝과 대면해야 했던 그 기나긴 몇 달 동안, 나는 모든 것의 표면 아래, 위, 너머에 있는 무언가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희미한 평화의 빛을 붙잡았다. 지금도 여전히 우울할 때가 있고, 풀이 죽기도 하고, 한없이 늘어질 때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도 새로운 뿌리가 자라나는 기분이다. 영양분이 가득한 흙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뿌리. 나는 좀 더 빨리 회복되었다. 콕 집어 말하자면, 마침내 이 세상의 기적에 마음을 열게 되었다.



Chapter 1 가을

파자마, 인생의 괴로움을 치유해주는 안정제

실직한 지 한 달쯤 되자, 침대에서 나와야 하는 이유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틀이 잡혔다. 나는 매일의 용무를 정해두었다. 월요일은 우유 사러 가기, 화요일은 산책하기, 수요일은 서점 가기, 목요일도 산책하기, 금요일은 닭고기 사러 가기, 토요일도 산책하기. 일요일은 쿠키 사러 가기. 이 방법의 비결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 용무가 바뀌는 것이 중요하다. 서점 가는 날이 제일 좋다. 반스 앤드 노블에 가면 코트를 입은 채 바닥에 앉거나 벽에 기대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독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조용하면서 분주하고, 도서관처럼 날 위로해준다.


그날의 용무가 있으면 기분이 어떻든 간에 집을 나서게 된다. 요즘은 외출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그러지 않으면 컴퓨터 앞에만 붙어 앉아 도무지 로그아웃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연했거나 실직한 사람들만 하루 종일 온라인 상태에서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는 법이다.


어느 토요일 아침(적어도 이날은 정말 토요일이었다), 한 줄기 햇살이 내 우울함을 뚫고 들어왔고, 나는 눈을 뜨며 오늘을 목적지를 바꿔보리라 생각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잠옷을 파는 브룩스 브러더스에 가야지. 파자마 쇼핑은 침대에서 나를 나오게 해주면서도 침대와 나의 관계를 연장시키는 효과적인 결합물이자, 훌륭한 목표였다.


하지만 먼저 장을 봐야 한다. 집에 음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나는 한창 장이 설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굳이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기에 파자마 위에 재킷만 걸치고, 재킷 밑으로 파자마 상의가 너무 많이 비어져 나오지 않도록 조심했다. 나는 과일 판매대 앞에 선 사람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섞였다.


음식에 집중하는 새로운 마음 상태에서 만사가 척척 진행된 덕분에, 나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우유와 파스타 같은 물건들도 쟁여놓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몇 블록 지나지 않아 파자마 바지 끈에 문제가 생겼다. 한 번만 매듭지은 탓에 바지가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칠칠치 못한 옷차림을 손보기 위해 우리 집 현관 앞에 멈춰 섰는데, 바지는 둘째 치고 머리조차 빗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순간 파자마 차림이 지나친 결례는 아니었을까 걱정됐다. 그리하여 덫에 걸려 도망갈 기회를 노리는 동물처럼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현관에서 숨을 헐떡거리던 나는 옷차림이 어떻든 간에, 이 세상 속의 내 모습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다시 삶에 뛰어든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레깅스나 헐렁한 트레이닝복에 긴 티셔츠를 입은 채 이른 아침의 용무를 보러 달려가거나, 음식과 신문, 청소 용품을 잔뜩 사 들고 가는 중이었다. 다들 자고 일어난 복장 그대로인 것이다.


그들도 파자마를 벗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아직은.



Chapter 2 겨울

내 마음의 보수 공사

실직자가 된 덕분에 확실히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해볼 시간이 많아졌다. 바쁘게 일하던 시절은 끝났다.


나는 현재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는 건 고사하고, 붙잡을 수도 없었고, 붙잡기도 싫었다. 나는 혼자였다. 그리고 두렵고 외로웠다. 친구들도 그 허전함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여러 모로 볼 때 내 행복한 기억의 박물관을 뉴욕에 새로 짓기는 힘들어 보였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모순적인 면에 너무 집착하면서 나 자신의 모순적인 면을 회피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에 애착이 생기면서, 그것을 이용해 나에 관한 어려운 진실을 회피하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걸 멈추고,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 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친구 캐럴라인이 가르쳐준 방법을 쓰기로 했다. 양손으로 주먹을 쥔 다음, 긴장을 풀고 주먹을 펴서 손바닥을 드러내는 것이다. 놓아버린다는 게 참으로 기분 좋았다.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것도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내 마음은 보수공사를 해야 할 시기가 한참 지났다. 그런데도 도구 상자는 텅 빈 기분이었다.



Chapter 3 봄

책과의 연애사를 떠올리다

봄이 너무도 걷잡을 수 없이 불어닥쳐 생소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하루 종일 사무실에 처박혀 있지 않은 덕택에 처음으로 봄을 제대로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날씨를 일기예보가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는 것은 삶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얻게 된 새로운 발견이다. 요새는 자연으로부터 지나치게 차단되면 왠지 찜찜해서, 오후 네 시에 황금빛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것만 봐도 즐거워진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린 피에르 보나르 전시회를 본 후로 빛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박물관은 치유 효과가 있으며, 평온하고 안정적이고 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공간이다. 나는 보나르가 정물화에 담아낸 뜨겁고 메마른 프랑스 남부의 햇살을 생각하며 겨울의 막바지를 견뎌냈다. 그의 그림을 다시 보기 위해 박물관을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이는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울과 나태에 빠져 몇 달을 보낸 뒤, 이제는 매일 몇 킬로미터씩 걷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일 때 사고가 더 유연하며, 몸을 움직이는 데 어떤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개는 특별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걷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냉정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왜 내가 이삿짐에 휘둘리는 거지? 그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이제 본격적으로 이삿짐을 싸야 할 때가 왔다. 그보다 더 힘든 일은 가져갈 책만 추리는 일이다.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독서광이다. 어린 시절의 거의 대부분을 책에 코를 박은 채 보냈다. 책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옆에 있는 물건을 아무 생각 없이 먹어치우기도 했다. 한번은 치약 한 통을 쪽쪽 빨아먹은 적도 있다. 언젠가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집중력이 떨어진다면, 책 속 세상에 흠뻑 빠져들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분명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것이다. 한바탕 웃고 싶을 때는 우드하우스의 책을 집어 든다. 울고 싶을 때는 이디스 워튼이나 헨리 제임스를 읽는다. 신앙심을 느끼고 싶을 때는 멜빌을 읽고, 이 세상에 옳고 그른 선택과 권선징악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을 때는 트롤로프를 읽는다. 책 속에서는 모든 것이 이치에 맞는다. 때로는 책 속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족히 서른 개의 상자에 책을 담은 후, 두꺼운 테이프로 상자를 봉했다. 동네 작은 서점의 주인이 이 책들을 가져가기로 했다. 복도에 그 상자들이 놓여 있는 몇 주 동안, 내가 너무 무자비하게 책을 걸러낸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과거를 너무 많이 버린 게 아닐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너무 많이 버린 건 아닐까?


양가적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

배우자와 함께 썼던 침대를 버리지 않는 것은 아직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했다는 순수하고도 단순한 신호다. 배우자는 떠났는데, 당신은 아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가구가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새로 누군가를 사귈 때마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모두 내다 팔고, 업보를 깨끗이 지워야 할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우리도 알고 있다. 설사 물건을 모두 버린다 할지라도, 그 짐을 너무 오래 끌고 다닌 탓에 마음에는 굳은살이 남아 있을 것이다. 백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저 과거를 떨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로만, 새로운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있을 정도로만, 다른 누군가에게 흔적을 남길 기회를 줄 수 있을 정도로만 깨끗해질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떠나보내고, 무엇을 계속 갖고 있을지 결정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부부로 사는 일의 가장 힘든 점 가운데 하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함께 하고 의견의 일치는 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모든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생각해보라.


생각해보면 이는 스트롤러와 내가 함께 사는 문제의 핵심이기도 하다. 스트롤러의 집에서 지내던 어느 무더운 오후, 정원 일을 하고 싶어 좀이 쑤셨다. 그래도 일단은 스트롤러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는 몹시 수상쩍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대답은 노야. 당신에게 그 땅을 줬다가는 나중에는 이 집 전체를 내놓으라고 할 걸."


내가 이 말에서 회복되기까지는 두세 달이 걸렸다. 분명 이 일로 다시 헤어졌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다툼은 우리 사이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요약해준다. 스트롤러는 누구에게든 집의 일부를 내주는 걸 두려워했고, 나는 그 일부를 원했다. 집 전체, 그리고 그 이상까지도. 우리의 관계가 조금 깊어졌다 싶으면 스트롤러는 날 밀어내는 짓을 했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없을 때를 대비해 나와 말을 하지 않는다든지, 내 전화를 받지 않는 식으로 자신도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자신의 목초지 안에 안전하게 갇혀 있듯이, 나도 내 목초지 안에 갇혀 있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막힘없이 푸른 하늘을 원했다. 그러니 둘 중 한 명은 포기해야 했다.


이젠 내가 왜 우리 집 잔디밭 사이로 민트를 심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내 것이기 때문이다.



Chapter 4 여름

생애 최고의 여름

나는 성인이 된 후로 가장 행복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한때 파티 여는 걸 두려워했던 내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오랜 우정은 깊어졌고, 새로운 우정을 만들어갈 시간과 에너지도 생겼다. 테오와 함께 보내는 시간도 좋았다. 이 모든 것이 감동적이었고, 열아홉 살짜리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상기시켜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오가 내게 언제 떠날 거냐고 물었다.


"떠나다니?"

"아시잖아요. 언제 일하러 뉴욕에 가실 거냐고요."

"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니, 테오? 난 여기서 너랑 있는 게 좋아. 사실 요즘이 내 생애 최고의 여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여기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고. 맡아온 일감들도 있고. 마감도 지켜야 하니까. 드디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단다."

"음, 글쎄요. 전 고독한 여름을 보내게 될 줄 알았어요. 돈도 벌고, 그 돈으로 생활하면서 혼자 지내는 여름요."


분노의 물결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테오에게 여긴 내 집이고, 내 집에서 내가 나가길 원한다면 네가 잘못 생각했다는 식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나 없이 너 혼자 살아보고 싶으면 나가는 문은 저쪽이며, 어디 멀리 떨어진 섬으로라도 가서 방 한 칸짜리 집에 살며 식당 서빙을 해서 집세와 식비를 감당하라고 말했다.


좋아요, 테오는 그렇게 말하며 4리터짜리 생수병을 집어 들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걸 보니 분명 그 미지의 섬으로 향하나 보다.


갑자기 아들과의 이 다툼이 왜 이토록 힘든지 이해가 갔다. 나는 지난 15년간 누구하고도 사나흘 이상을 함께 산 적이 없었다. 아이들하고도 그랬다. 설상가상으로 테오와 싸우기 전에는 그 사실조차 몰랐다. 몇 시간 후, 테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과했다.


이제야 알겠다. 테오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삶을 사랑했고, 훌륭한 가치관을 가졌다. 중요한 질문을 할 줄 알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했다. 그리고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고 보니 테오는 내가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분노와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다. 실직자가 된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열심히 일한 결과가 고작 경력이 박살 나는 것이라면 대체 일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테오는 알고 싶어 했다. 나는 테오가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하려고 노력했다. 일하는 것 자체가 곧 즐거움이라고. 그러자 불현듯 놀랍게도, 마침내 내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경력이 끝난들 어떠한가? 그것은 신나는 모험이었고, 앞으로는 더 많은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자, 하늘이 맑게 개었다. 그 후의 여름은 순풍에 돛 단 듯이 흘러갔고, 하루하루가 평화와 만족감으로 채워졌다.


내가 평생 동안 갈고닦아온 내면의 자원들이 마침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영혼을 구원해주는 놀이의 습관들이 도움이 됐다. 예를 들어 책 읽기, 생각하기, 음악 듣기, 친구 노릇하기, 세상 속에서 움직이는 내 몸을 느끼기, 그리고 마침내 마음을 열고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느끼기 등등. 치유의 약은 늘 내 곁에 있었다. 어서 와서 책을 집어 들라고 손짓하는 소파에, 산책을 나오라고 초대하는 창문 밖에. 나는 그저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다시 내 삶에 받아들일 공간을 찾아내고, 어느새 내 마음을 파고든 고독한 순간의 고요함을 허락하기만 하면 된다.


만조와 간조의 경계에서

오후가 되면 종종 바람이 잦아들며, 호수는 검푸른 거울로 변한다. 카약을 하기에 좋은 계절이 온 것이다. 테오는 대학으로 돌아갔다.


카약을 타고 연못을 가로질러 연안 사주까지 가기는 쉬울 것이다. 카약을 탈 때 필요한 고글과 수건을 넣은 작은 가방을 메고 여행길에 나서려니 즐거웠다. 쌍안경은 목에 걸려 있었다. 휴대전화는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했다. 늘 드는 걱정이긴 하지만, 정말로 해안 경비대에 구조요청 전화를 할 일이 있을까? 늘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쁜 소식은 나중에 들어도 아무 문제없고, 좋은 소식은 기다리는 동안 무르익을 것이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두고 출발했다.


뒷문으로 나가, 호수 가장자리까지 초원의 풀을 베어 만든 길을 따라갔다. 작은 동물들이 파놓은 구멍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발목이라도 삐면 누가 날 도와주겠는가? 요즘 매일같이 내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 조그만 목소리에 짜증이 났다. 부모님, 동생, 아이들, 친구들까지 다들 내게 조심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들의 애정 표현임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은 전염성이 있어서 나까지 불안하게 만든다. 그들이 내 고독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내 고독이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니 내버려두자. 마침내 나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름다운 9월의 오후였고, 공기는 맑고 상쾌했다.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더 이상 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 많이 늙지는 않았다. 근육이 결리긴 해도 결코 쇠약하지는 않다. 혼자 살지라도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숨을 깊이 들이쉬어 폐가 갈비뼈에 닿을 때까지 팽창하는 것을 느낀 후, 마음속의 두려움을 뱉어낸다. 나는 건강하고, 강인하며, 활기 넘치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안다. 내게는 에너지와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시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임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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