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 이수광의 문학세계

   
이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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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술정보
   
22000
2008�� 01��



■ 책 소개 
현재까지 지봉 이수광에대한 연구는 백과사전류에 해당하는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의 실학자적 측면에 치우쳐 있었다. 이 책은 이수광의 문학과 사상이 면면히 담겨져있는 『지봉집』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 세계와 철학, 사상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 저자 이재원
1957년 경주에서 태어나 단국대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함재(涵齋) 김재홍 선생 문하에서 15년간 한문공부를 하였다. 후에는 방송통신대 일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현재대원고등학교에서 일본어 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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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서문
책머리에
들어가는 말

Ⅰ. 서론(序論)
Ⅱ. 지봉(芝峯)의 생애(生涯) 및 교우(交友)
Ⅲ. 『지봉집(芝峯集)』의 체재(體裁) 및내용(內容)
Ⅳ. 지봉(芝峯)의 사유세계(思惟世界)
Ⅴ. 지봉(芝峯)의 시문학관(詩文學觀)
Ⅵ. 지봉(芝峯) 시(詩)의세계(世界)
Ⅶ. 지봉(芝峯) 시(詩)의 풍격(風格)
Ⅷ. 지봉(芝峯) 시(詩)의 문학사적(文學史的) 위상(位相)
Ⅸ.결론(結論)

참고문헌(參考文獻)
芝峯 李수光の 文學世界
색인




지봉 이수광의 문학세계

  

지봉(芝峯)의 생애(生涯) 및 교우(交友)

생애

지봉 이수광의 일생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과 김상헌이 쓴 지봉에 대한 「묘지명」과 장유가 쓴 지봉의 「행장(行狀)」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지봉집』에 실린 「묘지명」과 「행장(行狀)」을 바탕으로 그의 생애를 살펴본다.


그는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과 효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녕군 이비(李裶)의 6대손이다. 아버지는 명종 때 호조, 형조, 병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이희검이고 어머니는 문화(文化) 유씨(柳氏)인 첨정(僉正) 유오(柳塢)의 딸이다. 지봉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1563년(명종 18년)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났으며, 자가 윤경(潤卿)이고 호가 지봉(芝峯)이다. 13세 때 벌써 사서와 이경에 통달하였다. 그리고 성균관에 출입하여 동료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16세에 드디어 초시에 합격하여 재명(才名)을 떨치게 되었다. 17세 때는 부친상을 당하고 3년상을 마친 뒤 학문에 더욱 힘써서 당시에 문병(文柄)을 잡은 이율곡이 공의 시문을 당대 최고로 일컬으며 매우 칭찬했다. 20세에 진사(進士)에 합격했다.


23세 때 대과에 급제해 승정원 부정자(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50세까지 관직에 있었다. 지봉은 주로 임금의 교서나 외교문서를 담당했으며 그 역할로 인해 자연스럽게 문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1590년에 명나라 신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의 행렬에 참가했는데 이때가 28세였다. 지봉의 나이 3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그는 곧장 금산(金山)으로 내려가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지봉은 여기서 천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595년 지봉의 나이 33세 때 노모의 상을 당한다. 선조 30년인 1597년에는 정유재란이 발생해 다시 전쟁을 겪었고 이 해에 명나라의 황극전(皇極殿), 중전(中殿), 건극전(建極殿)에 화재가 발생하자 지봉은 진위사(進慰使)가 되어 두 번째로 북경을 방문하게 된다. 35세의 지봉에게는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1606년(44세) 봄부터 1607년 늦가을까지는 관직에 나선 이래 처음으로 질병 때문에 1년 이상을 쉬게 되었다. 47세까지는 대체적으로 병약한 시기였다. 이 시간은 정권교체 시기여서 1608년에는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게 된다.


1611년(광해군 3년)에는 세자관복(世子冠服)을 주청하기 위해 다시 북경을 다녀온다. 이때 지봉은 49세였다.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과 서양문물을 직접 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학문의 폭도 넓어졌고, 실학에 대한 학문의 기반도 갖추어졌다. 그의 무실사상은 후에 이익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익의 사상은 후에 정약용, 박지원 등에 이어져 실학의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지봉은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을 느껴서 관직을 그만두는데 이때가 1613년(51세)부터 약 10년 동안이다. 그는 잠시 벼슬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며 이 시기에 많은 작품을 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인조가 옛 신하들을 불러들였고, 지봉도 도승지로 정계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 뒤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에 올랐고 1628년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봉집(芝峯集)』의 체재(體裁) 및 내용(內容)

지봉이 남긴 문헌은 크게 『지봉유설』과 『지봉집』으로 나눌 수 있다. 『지봉유설』은 이미 전문이 번역되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인용되고 활용되었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하고, 『지봉집』의 체제를 일별해본다. 『지봉집』은 크게 시와 산문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31권과 부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운문(韻文)의 체재(體裁) 및 내용(內容)

1634년, 지봉이 사망한 지 6년 뒤에 그의 자녀들이 의령에서 목판인 초간본으로 『지봉집』을 간행했다. 이 문집은 총 34권으로 이루어졌는데, 머리 부분에는 이정구, 장유, 이식, 이준, 신익성의 「서발(序跋)」과 지봉의 필적을 보여주는 유묵(遺墨) 「서도중결의후(書圖中決疑後)」가 나오고, 1권에서 20권까지는 운문에 해당하는 한시(漢詩) 작품 총 1573수가 실려 있고, 나머지 14권에는 산문이 기록되어 있다.


한시가 수록된 20권은 다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1권에서 7권까지는 지봉이 일생동안 지은 시 중에서 한시의 형식적인 종류를 분류하여 오언절구에서 오칠언고시까지 총 689수가 실려 있다. 이 부분에서는 칠언율시가 가장 많다. 그리고 8권에서 20권까지는 한시의 종류와 관계없이, 지봉이 사신으로 간 시기나 특정 지역의 관리로 재직했던 시기 등 일정 기간에 지어진 작품을 모아서 각 권에 특정한 시집(詩集) 제목을 붙여서 실었다. 다만 마지막의 20권은 별록(別錄)이란 명칭으로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앞의 19권까지 실리지 못한 시들을 모아서 엮었다. 8권의 『안남사신창화록(安南使臣唱和錄)』부터 20권인 『별록』까지는 총 884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


- 『안남사신창화록』에는 총 18수의 시가 실려 있다. 안남사신 풍극관(馮克寬)과 지봉이 창화(唱和)한 작품을 싣고 있는데 이중 지봉의 시는 9수이다. 이 시집의 작품들이 지어진 시기는 정유년(1597년)의 겨울로 지봉의 나이 35세 때이며, 그가 두 번째로 북경에 갔던 시기이다. 작품은 주로 지봉과 풍극관이 자신의 모국을 소개하며 서로간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 이외에 후반부에 나오는 둘의 대화 내용은 지봉이 안남에 대하여 묻고 풍극관은 대답하는 형태로 되어 있다.


- 『금중록(禁中錄)』에는 지봉의 나이 47, 48세 즉 광해군 원년과 2년의 시기에 걸쳐서 지어진 작품 44수가 실려 있다. 지봉이 은대(銀臺, 승정원에서 한림학사들이 정치를 의논하는 집)에서 벼슬할 때 여러 동료들과 밤늦게까지 함께 근무하며 우의를 돈독히 맺었다. 따라서 벼슬을 그만둔 뒤에도 자신들의 모습을 불후(不朽)하게 남길 수 있길 원했다. 동료 간의 따뜻한 정을 시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중에서 시인이 은대에서 느낀 소감을 피력한 시 한 편을 감상한다.


강과 바다 건너 자주 멀리 유람하였고

거듭 벼슬함에 부끄러움 느끼네

아름다운 궁궐을 항상 꿈꾸어왔고

은대에서 생활한 지 16년이 되었네

삼성(三省, 의정부, 의금부, 대간을 지칭함)의 관원은 새 인물이나

궁중에서 벼슬함에 풍경은 옛날과 같네

장차 힘써 은총에 보답하고자 하는데

이미 흰머리가 되었음을 깨닫지 못했네


시인 지봉은 은대에서 16년간 관리생활을 하였음을 회고하면서, 이제는 늙어버린 자신을 서글퍼하고 있다. 임금의 은총에 보답해야 하는데 벌써 노년기에 접어들게 된 안타까운 심정을 형상화하였다.


- 『신은창화록(新恩唱和錄)』은 지봉의 둘째 아들 민구가 1612년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시들을 모은 것이다. 부모인 지봉이 아들의 급제를 축하하는 잔치를 마련하였는데, 그 자리에 손님으로 온 여러 사람들이 시를 주고받았다. 창화한 시가 모두 100수였는데 그 가운데 지봉의 시는 30수이다. 시집에는 먼저 지봉 집안을 치켜세우고 아들 민구의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심희수의 시가 두 편 나온다.


 - 『황화집차운(皇華集次韻)』은 평양 지방의 승경이나 유적지를 제목으로 쓴 작품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총 38수의 시가 실려 있다. 다른 시집과 달리 이 시집에는 따로 발문이 없다. 또한 작품이 지어진 연대도 알 수 없다. 다만 시집 편집 순서를 참고하면 승평록이 지어진 이후이니, 1620년 이후의 노년기에 지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곳에는 공용경, 오희맹, 강일광, 왕몽이, 동월, 왕창 등의 시에 차운한 작품을 모아놓았는데 모두 우리나라 평양 지방의 승경지나 유적지를 제목으로 삼아서 지은 것이 특징이다. 이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황화(皇華)는 황제의 사신을 가리키는데, 당시에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에 왕래했을 때 자연스럽게 평양의 승적지를 배경으로 시를 읊게 되었다. 이들 시에 대한 화답의 시를 지봉이 쓰게 되었으며 그 시들을 모아서 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묻노니 신선의 아들은 어디로 갔는가

하늘의 바람은 학의 등 뒤에서 부네

울퉁불퉁한 바위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지러진 달은 옥가락지 같네


이 시, 「조천석(朝天石)」은 조천석을 바라보며 먼 옛날의 역사를 회고하는 시이다.


산문(散文)의 종류(種類)와 내용(內容)

『지봉집』 31권 중에서 21권부터 31권까지는 다양한 종류의 산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부록」 3권에는 지봉과 친분이 있었던 여러 사람이 쓴 「행장(行狀)」「묘지명(墓地銘)」「신도비명(神道碑銘)」「제문(祭文)」「만사(挽詞)」 등이 기록되어 있다.


- 23권의 『잡저(雜著)』에는 묘비명, 전(傳), 서(書), 첩(帖)의 장르에 해당하는 23편의 글이 실려 있다. 지봉이 쓴 묘지명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그는 주로 지기(知己)와 그 부인(夫人)들에 대한 묘지명을 많이 썼다.


- 27권과 28권의 『병촉잡기(秉燭雜記)』는 훌륭한 선배학자들의 의론을 소개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형태로 쓰인 작품이다. 지봉의 다양한 사유세계나 나타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에 언급된 학자만 해도 수십 명이 된다.


- 29권은 잡저(雜著)란 제목 하에 「경어잡편(警語雜編)」을 싣고 있다. 후학에게 경계해주는 말이나 자신이 경계로 삼는 말이 많이 실려 있다. 인생관과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지봉이 남긴 수많은 산문 중 『지봉집』의 전반부에 실려 있는 세 편의 「차자(箚子)」 작품을 분석해보자. 「차자」는 간단한 서식(書式)으로 쓴 상소문에 해당한다. 즉 표(表)와 장(狀)과 비슷한 종류이며, 군신백관이 임금님께 건의하기 위해 시기에 관계없이 올릴 수 있는 공문(公文)에 해당한다. 지봉이 오랜 기간 부제학이라는 벼슬에 몸담은 관계로 상소의 일종인 차자를 쓰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지봉집』에 실린 차자 중에서 「조진무실차자(條陣務實箚子)」만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작품 외에 세 편을 살펴보고자 한다. 나머지 세 편 중 가장 긴 차자는 수도이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상소한 글이고 같은 해에 쓰인 또 다른 한 편은 고명(誥命) 주청사(奏請使) 파견 문제에 대한 글이다. 이 두 작품은 1612년에 쓰여진 것이다. 당시 지봉의 나이는 50세였다. 마지막으로 가장 짧은 한 편의 차자는 묘현대례(廟見大禮)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 글인데, 이 글은 1602년에 쓰였으며, 지봉의 나이는 40세였다.


지봉의 차자는 그 당시에 훌륭한 문장으로 인정받은 것 같다. 특히 1625년에 그가 63세가 되었을 때, 국가 재건을 위한 건의문으로 올린 「조진무실차자」는 명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을 읽고, 인조는 "경이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담아 언급한 바가 극진한 이론과 격언을 다했으며 무실(務實)에 힘쓸 것을 강조하고 있으니, 그 뜻에 부응하도록 국가정책에 반영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인조는 지봉의 건의 내용을 국가정책에 반영하겠다는 강한 뜻을 드러냈던 것이다.

 


지봉(芝峯)의 사유세계(思惟世界)

존심양성(存心養性)과 성경(誠敬)

존심양성에서 존심(存心)은 맹자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가의 실천 명제로, 욕망 등에 의해서 본심을 어기지 않고 항상 그 본연의 상태를 유지하며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도덕성을 길러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양성(養性)은 그 하늘에서 부여받은 천성을 기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재능을 자라게 하는 것도 결국 이 존심양성을 실행하는 것이다.


지봉은 그가 남긴 저서 「채신잡록(采薪雜錄)」, 「병촉잡기(秉燭雜記)」, 「경어잡편(敬語雜編)」 등에서 자신의 사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채신잡록」에서 존심양성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자.


"주역은 세심진성(洗心盡性)을 말했고, 맹자는 존심양성(存心養性)을 말했다. 나는 세심진성은 성인(聖人)의 일이고, 존심양성은 학자(學者)의 일이라고 말한다. 존심으로써 세심에 이르고 양성하여서 진성에 이르면 학자가 능히 일을 다 하였도다."


여기서 지봉은 주역과 맹자의 사상을 인용하고 부연하여 설명하면서 배우는 자는 존심양성해야 하며 더 나아가 학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더 높은 차원의 세심진성에다 두어야 함을 언급했다. 지봉이 언급한 존심과 성찰(省察)의 지극한 경지는 어떠한 것인지 설명한 구절을 보자.


"과욕(寡慾)함으로써 무욕에 이름은 존양(存養)의 지극함이요, 한사(閑邪)에서 무사(無邪)에 이름은 성찰의 지극함이다."


이 글에서 지봉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을 지켜 욕심을 줄여서 결국 무욕에 이르면 존양의 지극함에 이를 수 있고, 한편으로 사악함을 막아서 사악함이 없음에 이르는 것이 성찰의 지극함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존양과 성찰을 구분해 거기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무욕해야 존양할 수 있고 무사해야 성찰할 수 있다. 곧 존양과 성찰해야 무욕하고 무사할 수 있는 지인(至人)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유학과 성리학에 관심이 많아 상당히 깊게 공부하였다. 따라서 나름대로 전현(前賢)들의 이론에 동조하기도 하며 추가로 자신의 의견을 보태기도 하였고, 가끔 이론(異論)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지적인 능력만 보아도 조선 중기에 성리학자로서 일가견을 지녔던 인물이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지봉은 「채신잡록」에서 성(誠)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결같음은 誠이요, 한결같음을 주(主)로 하는 것은 誠하는 것이다."


오로지 변치 않고 한결같이 만물에 존재하고 또한 우리들이 수행해야 할 진리가 바로 성(誠)임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렇게 행한 사람만이 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그가 유학의 여러 덕목 중에 성(誠)에 대해 누차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誠은 체(體)요, 誠之者는 용(用)이 될 수 있다. 誠은 성인(聖人)의 일이요, 誠하는 것은 학자(學者)가 해야 할 일이다.


다음은 지봉이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경(敬)과 관련된 문장을 살펴본다.


"학문함에 敬을 주(主)로 함이 매우 중요하니, 敬을 主로 하지 않으면 가히 잡을 곳이 없게 된다."


학문을 함에 敬을 위주로 하지 않으면 취할 것이 없게 되니, 정중하고 삼가는 자세로 학문에 임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결국 학자(學者)의 행동 중에서 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노불(老佛)에 대한 긍정적 시각

"본심을 지니고 이치를 밝힘은 성인의 학문(유학)의 뜻이요, 마음을 단련하여 도에 합하는 것은 도가의 요지요, 마음에 나아가 천성을 깨닫는 것은 불교의 법칙이다. 세 가지는 다 心을 주로 하나 작용은 같지 않다."


타고난 본성으로 사물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 유학이 추구하는 바요, 심신을 수련하는 연금술의 일종인 연단(煙丹)으로 도에 합치하는 것은 도가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리고 즉심시불(卽心是佛)은 즉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이니, 깨달아서 얻은 나의 마음이 곧 부처 마음과 같아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 마음에서 깨닫는 것이 바로 부처의 마음이 되니 이것이 바로 불교의 법칙이라는 논리이다. 이처럼 유불선의 교리가 모두 마음에서 출발하지만 그 추구하는 목표가 다름을 언급한 것이다. 비록 그 작용은 달라도 그 출발점은 마음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봉이 나름대로 유불선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노자에 대해 언급한 글이 있어서 소개한다.


"한번 나아가고 한번 물러남은 주역이요, 물러감을 나아감으로 여기는 자는 노자이다. 물러감을 나아감으로 삼은 즉 술(術)에 해당한다". 지봉이 나름대로 불교나 도교에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더 나아가 그들의 사상을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으니 다음 글에서 알 수 있다.


"양생서에 말하길 마음이 고요하면 숨 쉼이 절로 고르고, 고요함이 오래 지속되면 숨 쉼이 절로 안정된다. 또 마음은 숨 쉼을 중요하게 여기고 숨 쉼은 마음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나는 말하되 고요히 앉아 숨을 고름이 수양하는 방법 중에 敬을 主로 하는 工夫와 관계된다. 그래서 정자(程子), 주자(朱子)가 모두 여기에서 취했으니 그것을 외도(外道)로 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노자는 말하길 덜고 또 덜어야 무(無)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 말이 매우 좋으니 가히 학자가 욕심을 줄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실학적 사유(思惟)로서의 무실(無實)

지봉은 조선 시대에 이단시 취급되었던 여러 사상을 폭넓게 수용하여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를 지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문물을 접하는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지봉의 폭넓은 학문과 다양한 외국문물의 경험은 훗날 실학의 단초를 여는 바탕이 되었다. 이론에 치중하여 공리공론(空理空論)만 일삼는 학문을 지양하여 현실에서 실천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중기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그 시정(是正)을 위하여 무실(無實)에 힘쓰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사유세계를 그의 문집 내용에서 살펴본다.


"정자가 말하길 이윤이 신(莘)에서 농사짓고 부열이 암(巖)에서 집을 지으니, 천하의 일은 배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나에게 달려 있음을 밝혔을 따름이다. 나는 말하되 나에게 있음을 밝힘은 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니, 궁달(窮達)함을 배우는 자가 아니며 어찌 여기에 참여하리요?"


"요즘 사람들의 독서는 다만 작문을 일삼으니, 문자로써 대충 보기만 하고 능히 체인(體認)하지 못하니 만약 능히 體認하지 못한다면 독서해서 무엇하리요? 선유(先儒)가 학문을 하는 것이 文을 배우기를 먼저 하였으나 능히 道에 이른 것이 적은 것은 바로 이 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선비 된 자는 유용한 학문을 해야 하고 무용한 글을 해서는 안 되고 유익한 말을 해야 하고 무익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널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보디 능치 정치에 옮기지 못하면 또한 학문함이 쓸모가 없다."


"일을 하는 자는 이름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실상(實相)을 귀하게 여기니 실상이 모자라면서 큰 지위에 오르는 군자는 하지 않는다."


지봉은 이윤, 부열과 같은 학자도 실용의 학문을 했듯이 나의 덕을 밝히는 궁달한 학자가 되어서 실용의 학문을 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공리공론만 일삼는 학문만 하지 말고 몸소 체인하는 실용의 학문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실공, 실덕이 있는 유용한 학문을 해야 함을 다시금 강조하면서 현실에 직접 소용이 되는 학문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마지막에서는 역시 말보다 실행의 어려움을 강조하였으니, 결국 무실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실천을 강조하는 무실은 후에 실학(實學)으로 발전되었다.     


지봉(芝峯) 시(詩)의 문학사적(文學史的) 위상(位相)

『지봉집』의 「서문」, 「발문」, 「행장」 등에는 지봉에 대한 여러 학자와 시인들의 견해가 나온다. 오성 이항복(1556~1628)은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지봉의 시는 면류관을 쓰고 옥을 찼으며, 풍극관이 화답한 것이 또한 글을 잘못 씀이 없어 왕왕 사람을 일으키는 것이 많다. 공부방에서 향을 태우고 소리 내어 읊조리니 족히 상쾌하게 만든다."


이항복은 지봉의 시가 관면패옥(冠冕佩玉)과 같이 우수하며 읽음에 상쾌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났음을 칭찬하였다. 그리고 함께 벼슬함에 지봉의 인품이 절개가 깊고 불의한 행동이 없음을 높이 평가했다.


지금까지 지봉에 대한 제가의 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한 평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그의 시에 대한 평가를 보면 관면패옥과 같고, 풍아(風雅)에 근원하며 연묘(硏妙)하여 중당(中唐)을 능가하며 성당(盛唐)에 어깨를 나란히 겨룰 정도이며, 읽는 자로 하여금 마음을 상쾌하게 만든다는 평이다.


둘째로, 산문에 대한 평은 장유가 "아순(雅馴)하며 전아(典雅)한 체(體)를 갖추었다"고 했으며, 이식은 "지봉의 古文이 정련아순(精練雅馴)하며 중체(衆體)를 고루 잘했다"고 하였고, 이이는 "시문(詩文)이 함께 당시에 관수(冠首)가 된다"고 칭찬하였다.


마지막으로 지봉에 대한 인물평은 절개가 깊고 불의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청빈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염처지정(恬處之靜), 염수지결(廉修之潔)한 인물이었다고 평가되었다. 그의 학문과 덕망은 당대 일류인(一流人)으로 인정받았으나, 평시에 스스로는 조용히 한묵(翰墨)을 즐기며 생활하였다.


지봉은 조선 중기의 개혁주의자에 해당하는 인물로 주자학적 통치 이념이 당시 조선조의 사회, 경제적 현실과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고 외래 사상을 수용하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사상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뛰어난 시인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가 추가될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시인인 그가 시문학에 끼친 영향과 역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초기까지 송시풍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를 이어받은 강서시파(江西詩派)가 있었다. 이들에 대한 반발로 당시복귀(唐詩復歸) 운동이 펼쳐졌으니 대표적 인물이 삼당시인(三唐詩人)이다. 지봉은 이 삼당시인 중 이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그들의 사조를 이어받아 조선 중기에 당시(唐詩)를 꽃피운 대표적 인물이다. 둘째, 이른바 침류대시단(枕流臺詩壇)으로 불리는 당대의 지식인 단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 모임의 구성원은 성리학 이외에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시작(詩作)에 있어서도 내용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 셋째, 유희경 등 여항 문인들과도 교유하였으며 그의 시가 여항 문인의 시에도 영향을 주었다. 넷째, 당시 어떠한 시인보다도 다양한 종류의 한시를 쓰고 있으며 당대와 후대의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지봉은 조선 중기에 당시(唐詩)를 꽃피운 대표적 시인이라 평가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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