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를 금하노라

   
임혜지
ǻ
푸른숲
   
12000
2009�� 09��



■ 책 소개
자유가 화두인 고집 센여자와 환경보호가 화두인 고집 센 남자, 하고 싶은 짓은 다 하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아들과, 구두쇠 부모에 대항해 빚내서 옷 사 입고다니는 수다쟁이 딸, 이들 네 사람이 따로 또 같이 꾸려가는 뮌헨의 괴짜 가족 이야기.

 


저자는 십대 후반에 독일로 건너가 대학에서 건축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고건축전문가이자 독일 남자와 결혼해 두 아이를 키워온 오십대 엄마. 주어진 대로, 운명을 맞아들이듯 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며 살기로 한저자 부부는 돈보다는 시간을, 순간의 안락함보다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강요와 간섭보다는 자유와 존중을 우선시하는 삶을 실천해왔다. 이 책은부부의 일상적이며 정치적인 하루하루를 유쾌하고 부담 없이 접할 수 있게 하며, 덜 가져도 초라하지 않고 품위 있게 사는 그들만의 행복 비법을담고 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공동체 안에서의 자유와 조화, 지속 가능한 개발, 삶의 질, 문화적 다양성을 중시하는 유럽적 가치관, ‘유러피언드림’이 실제로 유럽의 일상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 저자 임혜지
고등학교 때 가족과 함께독일로 이주해 35년을 독일에서 살았다. 칼스루에 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건축사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3년 대전 엑스포에서스위스관 설계 및 기획에 참여했다. 현재 독일 뮌헨에 거주하며 프리랜서로 문화재 실측 조사와 발굴 연구를 하고 있고, 일감이 없을 때는 글을쓰고 살림을 하느라 허둥댄다. 성격은 극과 극이지만 이상(理想)이 맞는 독일 남자와 결혼해 20년 넘게 같이 살고 있다. ‘우리 아이가 공부는못해도 성격은 좋으니 걱정 마세요’라며 선생님을 위로하고 딸에게 대놓고 콘돔 사용법을 가르치는 대범한 엄마이지만, 댄스 학원에서 남편과 왈츠를출 때가 가장 행복한 만년 소녀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 『프리드리히 바인브렌너 시대의 칼스루에 주택』(독일어), 『내게 말을 거는 공간들』이있다.


■ 차례
프롤로그 - 괴짜 가족의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자유로워라, 즐거워라
자유를구하라
돈 대신 시간을 선택하는 인생
어디 부부 살림왕 대회 없나요?
포기한 만큼 품위 있는 삶
지구를 지키는 내 사랑물주머니
식탁에서 고등어를 금하노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과일 쇼핑
파티의 여왕, 기부의 여왕
행복의기회비용


내가 자유로운 만큼 내 아이도자유롭게
놀이 실력이 곧 인생 실력
흔들려도 좋아, 네 힘으로 해!
한두 번 실수로 망가지는 인생은없어
모든 딸은 자라 여자가 된다
존재의 기쁨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열정 없는 턱걸이 인생만은 금물
아이가 내 품을떠나려 할 때
내 맘대로 춤출 권리
아이의 좌절에 대응하는 엄마의 자세


공존을 위한 예의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눈뜬다
사람은 어떻게 나치가 되는가
야만의 역사를 바로잡는 작은 조약돌의 힘
무지개 색을 모른다고?
굴러 들어온 돌과 박힌돌이 공존하는 방법
평범한 재능이 특별한 실력이 되는 비결
과학 기술 강국 독일의 대학 평준화 정책
사람을 위한 법, 자연을위한 법
키를 낮춰 곁에 눕는 마음
완경의 섹스


에필로그 - 자유와 자긍심에 빛나는삶




고등어를 금하노라

프롤로그 - 괴짜 가족의 식탁으로 초대합니다!
우리는 대학에 다닐 때 주거 공동체에서 만났다. 세 명의 남녀 학생이 작은 아파트를 하나 빌려 부엌과 욕실을 같이 사용했는데, 그곳에서는 부엌이 유일한 공동 공간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두 사람 사이에 다른 공통점이 없어서 그랬는지 우리는 만나기만 하면 요리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소담스럽게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밤에 옆방 남학생은 부엌에서 요리 이야기를 하다 말고 내게 프러포즈를 했다. 거절했더니 며칠 있다가 또 물어보고, 한참 있다가 또 물어봤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났다. 서로 너무 다른 것이 신기해 기웃거리다가 자석처럼 딱 붙어버린 걸 보니 진짜로 상극인가 보다. 상극끼리 만나서 치고받고 물고 밀고 하다 보니 그 관계 안에서만 성립되는 묘수를 터득해 이제는 같이 늙어갈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인간관계도 건축 설계와 똑같다.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안을 하나 골라 끈질기게 갈고 닦아 최고의 답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부엌의 식탁에서 만난다. 이제 우리 곁에는 우리를 닮은 십대 후반, 이십대 초반의 자식들이 앉아 있다. 별것 아닌 음식을 차려놓고도 식탁 분위기 하나는 참 화기애애하다. 우리 집에서 화기애애하다는 말은 불꽃 튀는 토론의 장이라는 뜻이다. 엄마의 나라인 한국식 장유유서도 없고 아빠의 나라인 독일식 예의범절도 없다. 논리와 말발의 치열한 대결만 있을 뿐이다. 화두는 여전히 ‘자유’와 ‘환경’이다.


두 고집이 만나서 네 고집이 되었다. 그러나 지신의 고집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의 자유부터 철저히 인정하는 평등한 민주주의의 원칙이 자리 잡을 수밖에.


변화무쌍한 시대의 주인으로 살아가려면 스스로의 양식과 양심 이외에는 어느 것에도 기댈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각자의 양식과 양심이 건강하게 작동하는지 늘 서로 감시하고 격려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남의 이목에 초연하고 상호 의존도가 높은 괴짜 가족이 되어 있었다.


독일 뮌헨에 사는 괴짜 가족의 식탁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첫눈에는 어쩌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독일 사회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기 때문이다. 남 보기엔 보잘것없는 빗방울이지만 자기야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주인이라고 자부하는 주인공들을 소개한다. 산사태를 일으켜 세상을 바꾸겠다는 소명 의식이나 선각자로서 좋은 일을 주도한다는 공명심에서가 아니라 ‘내가 내 삶의 주인인데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가지 않을 핑계가 없다’는 소박한 이유에서 주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같은 길을 가는 가족의 존경과 사랑이 세상의 잣대를 대신하므로, 행복의 기준을 내 마음속과 가족의 마음속에 심어둔 사람이다.


자유로워라, 즐거워라
자유를 구하라

남편 친구의 부인이 한 달 생활비 3천 마르크(약 250만 원)로는 두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어서 부부 싸움을 했노라고 내게 하소연했다. 그때 나는 우리 가정의 총수입은 월 1600마르크이고, 그 돈에서 다달이 7백 마르크씩 집세를 내고 아기를 기르면서도 돈이 남아서 저축까지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도 큰돈은 아니지만 기부도 하며 살았고 남에게 돈도 꿔줬다. 물론 외식이나 비싼 문화생활은 당연히 생략했고, 꼭 필요한 물건만 샀다. 다행히 환경보호에 대한 신념과 맞아떨어져 자동차 없이 산 덕분에 큰돈이 절약됐다. 옷, 가구 등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만들어 쓰면서도 구차스럽단 생각은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생활은 학생 부부에게 아기가 생긴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 핵가족 안에서 아이들을 사랑으로 기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부모의 시간이 귀중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우리는 항상 돈 대신 시간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모험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간혹 휘청거렸지만 이 선택은 오늘까지 이어졌다.


남편이 회사에서 일주일에 36시간 근무를 40시간으로 늘리라는 제안을 받았다. 아이들도 다 컸으니 하루에 30분 더 일한다고 사생활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맘대로 해. 일이 재미있으면 더 해. 하지만 돈 때문에 더 하지는 마. 우린 지금 버는 돈도 다 못 쓰는데." "집에 일찍 와봤자 신문이나 읽고 노는걸." "신문이나 읽고 노는 건 안 중요해?"


신문이나 읽고 노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남편은 일을 더 하지 않았다(몇 달 후에 회사에선 남편을 일주일에 40시간 일해야 하는 위치로 승격시켰다. 그것은 또 다른 책임감과 성취감이 따르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남편을 위해 진심으로 기뻐했다)


우리 부부는 학력에 비해서 적은 보수와 실력에 비해서 낮은 사회적 위상을 떳떳하게 감수한다. 또한 무섭게 절약한다. 아직도 크루아상 하나를 온전히 먹는 법 없이 꼭 둘이서 나눠 먹고 물 한 방울, 토마토 한 알도 헛되게 쓰지 않는다. 자유를 구하기 위한 검약의 습관은 20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 부부 사이에 유별난 동지 의식을 키웠다.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크루아상을 둘로 가르는 순간 우리가 은밀하게 주고받는 교감이라니. 그 자신감과 자긍심이라니. 파트너를 향한 존경과 신뢰를 담은 이 동지 의식은 우리 가정의 버팀목이다.


내가 자유로운 만큼 내 아이도 자유롭게
열정 없는 턱걸이 인생만은 금물

우리 아들이 김나지움 13학년이었을 때의 일이다. 김나지움 13학년은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4학년인 셈으로, 김나지움 졸업시험이자 대학 입학시험에 해당하는 아비투어가 끝나는 시기다. 일찌감치 초등학교 5학년부터 공부를 가르칠 재목과 기술을 가르칠 재목을 분류하는 독일 학제에서 아비투어까지 무사히 마치는 학생은 전 독일 학생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김나지움은 들어가기도 힘들지만 무사히 졸업하기는 더 힘들다.


아들은 정말 바빴다. 그 어렵다는 학과 공부 이외에도 달리 하는 일이 많아서다. 학교의 학생회와 합창부, 밴드부, 운동부 등 여러 가지 특별활동에 적을 두고 있었다. 게다가 학교에서 치르는 모든 행상의 음향과 조명을 담당하는 기술자라 정작 공연하는 날에는 무대에 설 수 없는 처지였는데도 아들은 매주 모든 연습에 꼬박꼬박 참여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다른 일로 바빠서 공부할 시간도 없다는 아들이 취직까지 했다. 예전에 실습하러 갔다가 인연을 맺은 회사에서 계약직 고용 제의를 해온 것이다. 아직 학생인 신분을 고려해 일주일에 열 시간씩 일하기로 했다며 아들은 좋아했다. 시급이 15유로라니 한 달에 6백 유로. 그 정도면 요즘 대학생 평균 생활비는 될 것이다. 우리도 부모로서 덩달아 자랑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에 나는 등교 시간에 맞춰 아들을 깨웠다. 그랬더니 오전 중에 회사 인사과에 계약하러 간다고 학교를 빠진다는 것이 아닌가? 학생이 학교를 빼먹고 회사에 간다고? 나는 놀라서 남편에게 물어봤다.


"쟤가 오늘 학교에 안 가고 회사 간다는 거 당신이랑 의논했어?" "아니." 우리의 대화를 들었는지 딸아이가 목욕탕에서 소리 질렀다. "오빠 야단치지 마! 오빠는 법적으로 성인이야. 학교 결석하는 일에 부모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된다구."


누가 뭐래나? 우리끼리 물어도 못 보냐고오? 그래두 명색이 부몬디……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구시렁구시렁. 전반적으로 크게 빗나가지 않는 한 자식들의 사적인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교육 방침이다. 어려서부터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하고 책임지는 습관을 들이지 못해 어른이 되어서도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나는 독일에서도 숱하게 보아왔다. 곱게 자란 대학생들이 특히 심했다. 자율적으로 공부하는 독일 대학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서, 학업을 끝내지도 그만두지도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니며 시간만 보내는 불행한 학생들을 보며 나는 학력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난독증이 있고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던 우리 아이들은 의외로 김나지움에 입학했고, 가끔씩 낙제할 기미를 보였다. 내가 아이들에게 강력하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였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자신의 소질과 취향을 관찰하여 나중에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를 알아내라는 것이었다. 열정 없이 남 보기에만 그럴듯한 턱걸이 인생만 피해도 성공한 인생이라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공부에 대한 열정이 없는 사람이 단지 성적이 된다고 해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큼은 가장 피해야 할 일이라고 아이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다. 세속적인 경쟁력도 열정이 좌우하지 학력이 좌우하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체험하지 않는가?


김나지움 고학년이 된 우리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할 뜻을 세우고 있다. 아들은 장차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몰라도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는 알고 있고, 딸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놓고 거기에 맞는 과목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나저나 수험생으로서 취직까지 하신 우리 아들의 아비투어 성적은? 이 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하다는 객관적인 점수는? 부모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자기 템포로 기분 좋게 잘 달리고 있는 말에게 꼭 제일 앞에서 달려야 한다고 채찍질을 하는 건 민망스럽지 않은가? 인생 선배로서 할 짓이 아니다.


공존을 위한 예의
야만의 역사를 바로잡는 작은 조약돌의 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위정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존재는 이웃 나라나 경쟁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자국의 지성인들이다. 그들이 바로 자신이 가진 권력의 근원인 주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의 독재자들이 가장 혈안이 되어 제거하려고 했던 이들도 민심을 동요시키는 지성인들이었다. 근래에 미국을 변하게 한 힘도 미국 안에서 나왔다. 이라크에서의 포로 학대 사건을 폭로한 소수의 미군 병사들이 바로 미국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 서너 명이 저버리지 않은 양심은 마치 폭탄과 같은 위력으로 미국의 주류를 흔들어댔다. 이들 서너 개의 조약돌들이 미국이라는 대하의 흐름을 바꾸는 초석이 되었다.


꼭 학식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야만 지성인이 되는 게 아니다. 머리를 빡빡 민 채 낙하산 부대의 장화를 신고 설치던 신나치주의 청년들의 폭력이 심심찮게 일어나던 시기에 독일의 많은 가게의 출입문에는 엽서 크기의 노란 카드가 붙어 있었다. 그 카드에는 자기네 가게는 외국인이 폭력을 피해 들어올 수 있는 피난처이니 위험에 처한 외국인은 언제든지 뛰어 들어오라고 쓰여 있었다. 생면부지의 외국인을 자기네들이 나서서 깡패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선언하는 도자기 가게, 유리 가게, 꽃집 주인들은 바로 독일의 지성인들이다.


주류로 사는 인생과 지성인으로 사는 인생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주류로 살면서 어느 한 영역에서 지성인의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주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편 회사의 평사원이 우리 회사도 나치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금을 내느냐고 물었을 때 아마도 반감을 가졌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위협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가 소신 있는 발언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줬던 것처럼 주류가 지녀야 할 바람직한 태도를 아는 것만으로도 사회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물살이 너무 거칠면 조약돌은 휩쓸려 떠내려갈 수밖에 없다. 조약돌이 외치는 소리가 들릴 만큼 잔잔한 물살이라야 강물이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각성한 많은 이들이 물에서 나와 조약돌로 튼튼히 서기를 자청할 때, 그래서 눈감고 흘러가는 물의 양은 줄고 굳건히 서 있는 조약돌의 수가 많아질 때 강의 물결은 잔잔해질 것이다. 이렇게 강가가 견고하고 물결이 잔잔한 강은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물길을 이루어 남도 파괴하지 않고 스스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생존으로 가는 법칙’에 따라 흐르는 강이다.


부부 관계는 감정이 지배하는 동네
우리 부부는 평생에 걸쳐 무수한 상처를 주고받았다. 서로에게 적응하지 못해 성욕의 주기가 곧잘 어긋나곤 하던 시절에 우리는 간혹 짜증 섞인 혹은 노골적인 무시의 눈길로 상대방을 거절했고, 이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 있다.


묵은 상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한 내 나름의 방법은 따지지 않는다이다. 핑퐁을 주고받는 와중에 튀어나간 공이 누구의 라켓에서 튀어나갔는지를 따지는 것은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우리가 만든 공동의 상처라고 생각하면, 내가 입은 상처가 덜 원통하고 내가 입힌 상처가 덜 부끄럽다. 깊은 곳에서 따끔거리는 생채기는 시간이 지나도 늘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자꾸 들여다보고 가끔씩 건드려보는 것은 백해무익하다. 생채기는 잘 아물면 단단한 굳은살로 남아 보호막의 구실을 하지만, 자꾸 건드려 덧나면 암세포로 발전할 수 있다.


상대의 실수뿐 아니라 나의 실수도 너그럽게 웃어넘기는 유머 감각을 기르기 위해 나는 매일같이 내가 특별히 잘난 존재가 아니라며 오만을 지우는 연습을 한다. 우리 깜냥에 이만큼 해낸 것도 대견하다. 주고받은 상처도 딴에는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한 짓이다.


나는 사회적으로는 공정하고 정확한 과거 청산을 부르짖는 사람이지만 부부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주관과 감정으로 얽힌 동네지 공정성이나 정확성이 지배하는 동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끔 남편이 우리의 과거에 대해 황당무계한 소리를 할 때가 있는데 이럴 때 나는 "그런가?" 하고 만다. 그걸 따져서 위자료를 받을 상황도 아니고, 아무려나 남편이 그렇게 믿고 기분 좋아서 밤이고 낮이고 내게 서비스를 잘한다면 그것도 공동의 이익이 아니겠는가?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