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찾은 아이들

   
존 불 다우 외(역자: 오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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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윌
   
11000
2008�� 04��



■ 책 소개
전쟁을 피해 시작된 힘든 여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딩카족 소년의이야기!
 
내전으로 폐허가 된 수단에서 한 소년이 전쟁을피해 시작한 여정을 통해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100% 실화로, 한 소년이 고향 마을인 둑 빠유엘을 떠나오던 열세 살 때부터 다시방문하기까지, 19년 간의 삶의 기록이 담겨있다. 2006년에 브래드 피트가 제작하고 니콜 키드먼 내레이션의 영화로 제작되어 ‘선댄스 영화제’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남부 수단을휩쓴 내전으로 고향 마을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잃어버린 아이들(The Lost Boys, 로스트 보이즈)’이라부른다. 주인공 존 볼 다우는 딩카족 소년으로 그 역시 잃어버린 아이들 중 하나였다. 책은 19년간 1600Km에 달하는 그의 삶의 여정을덤덤하게 그려나가고 있다. 오줌을 받아 마실 만큼 지독한 목마름, 살기 위해서 진흙이라도 먹어야 했던 배고픔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군인들의위협까지. 그러나 소년은 부모님이 알려준 긍정적인 삶의 교훈과 딩카족 고유의 강인한 정신을 잃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간다.
 
■ 저자
존 불 다우(John BulDau) - 1974년 아프리카 수단 남부의 딩카족 아이로 태어났다. 1987년 수단 내전이 일어나 평화롭던 마을에 군인들이들이닥치면서 전쟁을 피해 수년간 이어지는 힘들고 고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배고픔과 공포, 시시각각 다가오는 생명에의 위협, 잃어버린 가족에대한 그리움을 이겨내는 고통스런 시간 속에서도 자신이 딩카인이란 사실과 딩카 고유의 긍정적이고 강인한 삶의 자세를 잊지 않는다. 고향 마을 둑빠유엘에서 피뉴두 난민캠프까지 16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걷는 동안, 그는 하루하루를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 여기며 절망을 거부한 채 모든역경을 꿋꿋이 이겨나간다. 2001년 미국에서 시행한 수단 난민 이민 정책을 통해 140여 명의 다른 ‘잃어버린 아이들(The lostboys, 수단 내전으로 가족들과 헤어지거나 고아가 된 아이들)’과 함께 뉴욕 주 시러큐스로 옮겨간다. 이후 수단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기로결심하고, ‘잃어버린 아이들’의 교육과 정착을 위한 재단 설립, 고향 마을의 종합 의료 클리닉 건립 등 다양한 계획을 실천해 나가고있다.

마이클 S. 스위니(MichaelS. Sweeney) - 유타 주립 대학 언론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존 불 다우의 글을 문학적 감성으로 다듬었다.또한 존이 끝까지 책을 써내려갈 수 있도록 곁에서 그를 독려했다. 다른 저서로는 『The Military And the Press』『Fromthe Front』『Secrets of Victory』가 있다.

■ 역자 오정아
동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출판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시카고다이어리』『신이 찾은 아이들』『오스틴랜드』가 있다.

 





신이 찾은 아이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다. 약 251만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땅의 면적은 서부 유럽의 크기와도 거의 맞먹는다. 1956년 수단이 독립하던 해에 실시된 첫 번째 인구 조사에 따르면, 수단에는 572부족이 존재하며 114개 언어를 사용하는 1000만 명 조금 넘는 사람이 살고 있다. 가장 큰 종족은 북부 이슬람 지역에 사는 아랍인들이다. 그 외 수십 개의 종족이 정부 내의 세력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딩카인은 약 200만 명 정도 살고 있다.


수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남부와 북부 사이의 긴장은 계속됐다. 하르툼에 수립된 새 정부는 남부 종족들의 정치 참여를 최소화하고 그들의 기독교 유산을 경시해 남부 수단인의 분노를 샀다. 딩카족을 비롯한 누에르족, 누바족 등 남부 종족들은 정부의 이러한 행위에 맞서 싸웠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반란군을 도와 이슬람교의 전파를 방해한다고 믿었던 정부는 1950년대 후반, 반란 진압을 목적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남부의 마을을 불태웠다. 이 일을 시작으로 결국 수단 전체가 내전에 휘말렸다.


고성능 무기를 보유한 북부의 이슬람교도들과는 달리 남부 종족들은 대의명분에 대한 신념과 자신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믿음으로 무장했을 뿐이었다. 군복도 계급도 없었고, 무기도 충분치 않았다. ‘아냐 니야’라 불린 이들 반군은 유리병에 등유를 채우고 그 입구를 막은 천 조각에 불을 붙여 무기로 사용할 뿐이었다. 1969년 가파르 모하메드 누메이리가 쿠데타를 일으켜 수단의 중앙 정부를 장악하면서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누메이리는 다당제 민주주의를 철폐하고 수단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통일 정부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남부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한다는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았다. 남부의 반군은 이를 환영하면서도 자치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71년 5월 유엔 난민 기구와 세계교회협의회의 도움으로 남부?북부 대표들이 비밀 평화 회담을 가졌다. 1972년 2월, 양측은 공화제의 범위에서 남부 수단에 완전한 자치권을 주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는 당시 회담 장소이던 에티오피아의 도시 이름을 따서 ‘아디스아바바 협정’으로 불렸다. 총선거 후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면서 1973년 5월, 수단은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이와 함께 위도 10도선 아래 있는 모든 지역으로 규정된 남부 수단은 오랜 염원이던 자치권을 얻었다. 북부 수단은 이슬람교를 국교로 선포했으나 시민들이 기독교 예배를 행할 권리마저 빼앗지는 않았다. 아디스아바바 협정이 체결되면서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고, 그로부터 11년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존 불 다우가 태어난 것은 1974년이었으므로 막 평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까지 남부 수단의 자치권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종족 간 작은 분쟁도 그 원인 중 하나였으나 무엇보다도 남부와 북부 사이에 지속되던 팽팽한 긴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1983년 정부가 남북 각 지역에 주둔한 부대를 순환근무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자 남부 수단에 주둔하고 있던 정규군 부대에 북부 수단으로 옮겨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남부 군인들 대부분이 정책에 심하게 반발했다. 가족과 떨어지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거친 북부 군인들을 자신의 가족 가까이로 불러들이는 셈이기 때문이다.


보르 지방에 주둔하던 남부 군인들은 북부 군인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남부의 여러 지방에서 정부의 엄격한 검열이 실시되었음에도 남부와 북부 군인들 사이에 여러 차례 싸움이 벌어졌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남부 군인들은 결국 보르에서 퇴각했고, 그중 일부는 나일 강 상류 지역인 둑 군으로 향했다. 둑 빠유엘에 도착한 군인들은 전쟁이 이미 시작되었으니 함께 나아가 싸우자며 마을 사람들을 부추겼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딩카인 경제학자 존 가랑은 남북 간의 화해를 위한 온건 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소수 종족 사람들도 정부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종족 간 화합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남북의 싸움이 계속되면서 분열이 극에 달해 가자, 존 가랑은 수단인민해방군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그들의 싸움에 동참했다. 1983년 가을, 누메이리 대통령은 자신이 거느린 군대의 군복을 젤라바와 터번으로 바꿨다. 그러면서 엄격한 이슬람법인 샤리아를 수단 전체에 선포하고 법 개정까지 밀어붙였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12개월 만에 58건의 공개 사지절단 처형이 자행되었다고 한다.


수단인민해방군의 정치 기구인 수단인민해방운동은 1984년 3월 누메이리 정권을 전복할 것임을 선포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 원인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비극적인 사건의 발생했다. 리비아 공군이 몰던 투폴레프-22기(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중형 폭격기-옮긴이) 한 대가 정부가 운영하는 옴두르만 라디오 방송국에 폭격을 가해 다섯 명이 사망한 사건이었다. 누메이리 정부는 그 비행기가 소련이 리비아 정부에 공급한 것이 분명한데도, 남부 수단의 한 기지에서 이륙해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고 발표했다. 그 후 누메이리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북부 정부에 충성하는 경찰과 군인들이 비상 지휘권을 얻어 수색이라는 명목으로 가정집에 들이닥쳤고, 증거도 없이 사람들을 체포해 갔다.


존 가랑이 지휘하던 수단인민해방군은 전쟁이 국가 전체로 번져 가자 남부 수단에 기지를 둔 북부의 군대와 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부의 공세가 거세져 에티오피아 국경에 근접한 포찰라까지 쫓겨갔다. 해방군은 1980년대 중반 에티오피아에도 기지를 세워 그곳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다. 한편 북부의 군대는 대낮에 남부 마을을 기습해 소들을 훔치고 포탄을 퍼붓다 밤이 되면 기지로 철수했다. 이 같은 전쟁이 계속되는 데다 3년 연속으로 가뭄까지 들어 남부 사람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1985년 4월 6일 해방군은 정부를 장악하고 누메이리를 해임한 후 새로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남북 간의 불안은 계속됐다. 1987년 중반, 남부 수단 전체로 교전이 번져 갔고, 존의 마을에도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매일 밤 강제로라도 우유를 조금 넘겨 보려 했지만 멀리서 폭탄 터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기만 해도 배가 아프고 목구멍이 닫혀 버렸다. 텁석 입을 닫는 악어처럼. 텅빈 배는 계속 꼬르륵거렸고 머릿속에서는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생각들이 소용돌이쳤지만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1987년 8월의 일이었다. 내가 13년 동안 살았던 둑 빠유엘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 우기 한가운데를 지나던 중이었으므로 기장과 옥수수를 비롯한 작물이 아직 익지 않은 때였다. 추수를 하려면 몇 주는 더 기다려야 했고, 지난해 거둬들인 곡식들은 오래 전 바닥난 상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다섯 명의 아이들은 몇 안 되는 소에게서 얻은 우유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그해 둑 빠유엘 사람들은 충분치 못한 음식으로 전해의 두 배 가까운 사람들을 먹여야 했다. 수백 명의 피난민이 몰려와 마을에 머무는 사람의 수가 3000여 명 가까이 되었다. 고향에서 도망쳐 온 피난민들은 자기 나라에서 망명자 신세가 된 것이다. 딩카의 관습대로 우리는 적은 양이었지만 우리가 가진 음식을 피난민과 나눴다. 피난민들은 우리에게 끔찍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북부와 서부에서 온 그들은 보이는 것이면 모조리 불태우고 폭격하고 파괴해 버리는 군인들에게 쫓겨 무작정 달렸다고 했다. 아랍 민병대인 젤라바들은 얼굴이 검은 사람은 모두 죽였다.


둑 안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의 수는 계속 불어났다. 아버지는 줄줄이 지어 놓은 우리 오두막을 피난민들에게 내어 주었다. 한 오두막을 여섯 가족이 사용했다. 1987년 7월과 8월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일부 어른들은 오두막에서 잠을 자길 포기해야 했다. 전쟁이 점점 가까워져 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와 폭격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의 노인들은 남자들에게 순찰을 돌게 했다.


그날 밤, 내 몸은 뭔가를 알려주려는 듯 몹시 긴장해 있었다. 한밤중의 오두막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모기들이 윙윙대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느닷없이 포탄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나는 재빨리 일어났다. 오두막의 문을 찾아 깜깜한 어둠 속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며 나만큼 공포에 질린 다른 아이들과 부딪혔다. 새어 들어온 빛줄기를 보고 겨우 문을 찾아낸 나는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는 동안 냅다 달렸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남자가 달려가는 걸  보고 그를 따라 키가 큰 풀숲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바로 그때 한 무리의 젤라바들이 내가 막 달려 나온 오두막 쪽으로 향했다. 그날 밤 내내, 그 남자와 풀숲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안전한 곳으로 나를 끌어당긴 그 남자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 아브라함 뎅 니옵은 우리 이웃이었다.


풀숲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젤라바들의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내 머릿속엔 가족들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두 시간 정도 흐르자 총소리가 잦아들었고 마을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우리는 둑 빠유엘 쪽으로 가려 했으나 젤라바들이 아직 가까이에 있는 걸 보고 방향을 바꿔 동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숲 속이나 풀 사이로 몸을 숨기고 무릎을 꿇었다. 젤라바들이 계속 지나갔다. 그렇게 숨어 있다가 젤라바들이 사라진 것이 확인되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반복적인 일상이 계속됐다. 숙고 끝에 아브라함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결정했다. 낮 동안에는 군인들을 경계하면서 머리 위로 솟은 풀숲 사이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이 가장 안전하며, 어두워지면 숲 속 깊숙이 들어가야 발각되지 않는다고 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온몸이 뻣뻣하고 아팠다. 여기저기 베인 발은 여전히 쓰라렸고 피로에 지친 온몸이 쑤셨다. 어린 시절 소를 돌보고 잔일을 하느라 늘 걸어다니던 전력도 매일같이 새벽부터 해 질 녘까지 걷는 데에는 소용이 없었다. 발에 난 상처는 수백 군데가 넘었으며 모기에 물린 피부는 꼭 소나기가 쏟아지는 연못의 수면 같이 우툴두툴했다.


어느 날 해가 저물 무렵, 진흙바닥을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와 우리는 얼른 몸을 숨겼다. 숨어서 헤아려 보니 모두 열일곱 명이었고 남자들뿐인데 어른은 두 명밖에 없었다. 우리는 그들이 적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그들이 딩카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에티오피아로 향하는 난민들이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서도 함께 걷는 편이 낫다고 결정했다.


1987년에서 1988년까지 어마어마한 수의 수단 소년들이 에티오피아에 있는 피난처를 찾아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황야를 뚫고 걸었다. 구호단체 활동가들은 1만 7000명의 ‘걸어 다니는 해골’이 에티오피아 난민 캠프에 도착하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미국 외교관 한 명은 모두 ‘굶주린 강제 수용소 수감자처럼 기운 없고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고 미 국무부에 전했다. 그는 또, 한눈에 보기에도 난민들의 고통은 제2차 세계대전 사진에서 보았던 나치 강제 수용소 희생자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며, 1984년에서 1986년까지 이어진 ‘에티오피아 기근 때만큼 혹은 그 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이라고 보고했다. 난민들을 면담한 사람들은 수많은 난민이 굶주림과 갈증, 질병, 동물의 습격, 군인들의 폭력 등으로 에티오피아 국경에 이르기 전에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난민들은 먹을거리를 얻고 교육을 받기 위해, 그리고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 캠프를 찾은 사람들이었다. 1988년 중반, 에티오피아 남서부 지역에 설립된 난민 캠프에는 26만 5000명의 난민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소년과 청년들이었다. 난민들은 마을을 습격한 정규군과 이슬람 민병대에 쫓겨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고향 마을을 습격한 군인들은 남자와 소년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난민 대표의 말에 따르면, 어머니와 딸들은 습격당할 당시 남자들처럼 재빨리 몸을 피하지 못했다. 뒤쳐진 여자들은 자연히 적에게 쉽게 잡혔으므로 에티오피아까지 갈 수 있었던 소녀와 어머니는 몇 백 명에 지나지 않았다. 1988년까지 남부 지역에 살고 있던 600만 명의 수단인 중 200만 명이 기근과 내전 탓에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중 상당수는 수단의 다른 지역에 정착했다.


피뉴두 캠프 외에 에티오피아의 다른 난민 캠프를 방문했던 한 구호요원은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새로 캠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도착 당시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며 ‘함께 떠난 사람 중 20퍼센트는 피난길에서 사망했다’는 난민들의 말을 전했다. 그 밖의 통계도 굶주림이나 갈증, 질병과 폭력 등으로 피난 중에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다섯 명 중 세 명꼴로 많았다고 밝히고 있다. 한 소년은 인터뷰에서 인골(人骨)을 따라 에티오피아까지 왔다고도 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잃어버린 소년, 소녀들의 고된 여정은 에티오피아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마르 알 바시르 장군이 이끌던 수단의 군사 정부는 수단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바시르 장군의 군대는 1992년 3월 수단인민해방군의 공급선과 연락선을 모두 끊을 목적으로 내전 사상 가장 큰 공격을 감행했다. 케냐에 우간다에 기지를 두고 시작된 난민 구호 작전은 남부 수단의 난민 캠프로 가는 길을 복부 정부가 모두 장악하는 바람에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구호 물품 수송기에 대한 공격이 급증하자 유엔은 구호 물품의 공수 횟수를 대폭 줄였다. ‘휴먼 라이츠 워치(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 인권감시기구)’의 아프리카 지부는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살상과 약탈 외에도 수많은 학대가 자행되었다고 발표했다. 북부 군대는 수단인민해방군이 식량과 지원을 얻지 못하도록 새로 장악한 룸벡과이롤 지역에서부터 2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이 작전으로 집을 잃고 난민이 된 사람의 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한편, 수단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파벌 간 싸움이 벌어져 이에 휘말린 수천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해 가장 참혹한 전투는 7월, 존 가랑 장군이 이끈 수단인민해방군 분파가 주바 지역을 장악하면서 일어났다. 남부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정부를 격퇴하기 위한 대대적인 반격이 감행된 것이다. 당시에는 전기 충격이나 고환을 으깨는 고문뿐 아니라 즉결 처형도 흔한 일이었다.


케냐에서 소년들을 면담한 구호 활동가들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신체적, 정신적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소년들을 살펴본 한 심리학자는 그들이 “지금까지 만나 본 아이들 중 가장 정신적 외상이 큰 아이들”이라고 묘사했다. 소년들은 과거의 장면이 떠오르는 플래시백 현상에 시달렸고 느닷없이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리는 환청을 경험했다. 케냐의 캠프에 수용된 소년들을 조사해본 결과 74퍼센트가 폭격과 공습을 경험했고, 85퍼센트가 굶어 죽는 사람을 목격했으며, 92퍼센트가 총격의 대상이 된 경험이 있었고, 97퍼센트가 포탄이나 총격, 폭력으로 누군가 죽는 것을 본 경험이 있었다.


유엔을 도와 카쿠마 난민 캠프를 운영하던 루터교 세계연맹은 그곳을 집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1992년 9월, 캠프에는 1만 9000명이 머물고 있었고 그 중 4분의 3이 6,7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책임자들은 캠프가 개방되자마자 바로 배구코트와 축구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놀이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소년들은 다음해에 완공될 농구 코트에서 뛰어놀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들은 NBA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팀에서 활약했던 키 230센티미터의 딩카 청년 마누트 볼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 이들이 마누트 볼에 관해 처음 들은 건, 그의 고향인 바 엘 가잘 사람들이 부르던 노래를 통해서였다. 노랫말에 그가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내용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마누트 볼이 카쿠마를 방문했을 때 소년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난민 생활에 이미 이력이 난 소년들은 케냐에 새로 생긴 카쿠마 난민 캠프에 무난히 정착했다. 그들은 오두막을 짓고, 곡물을 심어 가꾸고, 물과 음식을 배급하는 시스템을 고안해 운영했다. 남부 수단 구호 활동을 조정하는 유엔 수단 구호기구가 천막과 물, 기타 생필품을 공급했다. 캠프 내 야외 공장은 여러 건물을 짓기 위한 진흙 벽돌을 만들어 냈다. 외국인 기자들이 카쿠마에서 인터뷰한 소년들은 자신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있었다.


1999년 미국은 수단 내전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의 미국 이주를 허용하면서 난민 캠프에 있는 수단 어린이들을 받아들인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유엔 난민 기구는 전쟁으로 부모와 삶의 터전을 잃은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수단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러한 결정을 승인했다. 사회복지기관과 유엔 난민 기구에서 파견된 면접관들이 미국으로 갈 난민들을 선별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 친척이 있는 난민은 미국으로 이주시키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카쿠마 캠프에 거주하던 3600여 명의 수단 난민들이 최종 선발됐다. 10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였으며, 18세 이하가 500명이나 되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아이들이 부모나 가족 없이 미국 땅에 재정착한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각 사회복지기관은 교회나 미국 정부와 연계하여 이 아이들이 미국 전역의 가정에서 양육될 수 있도록 힘썼다. 국무부 내 난민정착국은 집세와 공과금, 필수품 구입비 등을 지불할 초기 자금을 제공받으며 미국의 아파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3100명의 성인 난민들을 감독했다. 이 일을 자청한 열 개의 기관이 낯선 곳에서 자립해야 하는 난민들을 도왔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미국 재정착은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테러 공격으로 중단됐다. 당시 미국은 국경 경비를 강화했고, 세계 곳곳에서 받아들이던 이주민의 수도 3분의 2로 줄였다.


미국 재정착을 허가받은 수단인들은 미국식 교육을 받을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일 년간 카쿠마에서 난민들을 면담했던 가톨릭협의회 활동가 줄리앤 던컨은 미국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을 희망에 부풀어 있던 아이들은 수년간 자신들을 괴롭혀 온 정신적인 충격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자신 앞에 놓인 발전의 가능성을 본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한 말이다.


미국에 온 잃어버린 아이들이 미국 문화에 적응하는 속도는 모두 조금씩 달랐다. 잃어버린 아이들이 보스턴에 도착하는 광경을 목격한 「뉴욕 타임스」 기자는 에스컬레이터를 보더니 비명을 지르고 도망친 소년도 있었다고 전했다. 차를 타고 새로운 보금자리로 향하던 한 소년은 숲을 지나면서 운전자에게 “저 숲 속에 사자가 있나요?”라고 묻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존 다우와 그의 룸메이트들은 청록빛으로 반짝이는 스캐니어텔레스 호수에서 수영하기를 한참이나 망설였다. 그곳에 악어나 물소가 없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받을 때까지.

“그들에겐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교회 신도들에게 보내는 스캐니어텔레스 교회 선교위원의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들의 휘둥그레진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들은 대부분 평화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보호와 안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역할을 할 후원자들을 잘 따르고 있으며 매우 공손하고 예의가 바릅니다. 그들의 문화적 배경은 우리와 매우 다릅니다. 그들을 만나 보면 여러분은 다른 미국인들과의 만남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귀한 선물을 받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가장 큰 변화는 갑작스럽게 주어진 자유였다. 카쿠마에서 난민들은 생활필수품을 지급받아 생활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삶의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요소인 물을 얻기 위해서도 돈을 치러야 한다. 물이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게 하려면, 샤워기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게 하려면, 상자처럼 생긴 부엌 용품에 넣고 단단하게 얼리려면 먼저 돈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아이들은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많은 난민들이 공장이나 패스트푸드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92년 카쿠마에 발을 들여놓은 날부터 나는 가족을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해왔다. 적십자사로 70여 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적십자사는 흩어진 가족의 상봉을 위해 케냐에서 지내는 난민 소년들의 편지를 수단 국경 너머로 보내 주었다. 미국에 도착하고 이틀이 지난 후 카쿠마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썼다. 내 편지를 받은 카쿠마의 한 친구가 얼마간 우간다에 가 있게 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미국에 사는 잃어버린 아이들에 관해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특히 뉴욕에 사는 존 다우라는 친구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내 소식이 딩카인의 전통적인 전달 수단인 입소문으로 아주 먼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2002년 10월 18일, 오논다가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아파트 우편함에 꽂혀 있는 커다란 편지봉투를 보자마자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봉투 뒷면에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디에우 뎅 레엑.” 나는 집안으로 봉투를 가지고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뜯었다. 그러자 편지와 함께 사진 몇 장이 쏟아졌다. 나이든 남자와 여자 사진이었는데, 머리가 허옇게 세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일요일에는 교회 사람들에게 나의 가족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내가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소리 높여 알렸다. “기뻐해 주세요. 제 가족을 찾았습니다.”


내 궁극적인 꿈은 미국에서든 아프리카에서든 유엔 기구에서 일하는 것으로, 시간과 학비가 주어진다면 이민법도 공부하고 싶었다. 아프리카의 난민들을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경험을 통해 그들이 처한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으면서 국제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종교나 정치적 견해, 인종적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지만 세계에서 그들을 대변할 사람은 거의 없는 형편이다. 처음 시러큐스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모임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우리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공개 토론의 장이나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관심 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수단 잃어버린 아이들 뉴욕 재단’을 설립할 수 있었다. 재단 사무실은 잃어버린 아이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여러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됐다. 재단이 설립 첫 해에 모금한 돈은 전부 3만 5000달러였다.


14년 동안 나는 가족 하나 없이 피뉴두와 카쿠마 난민 캠프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가족이 없으면 가족을 ‘만들기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둑 빠유엘에서 에티오피아까지 가는 길에 가족이 되어 준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나는 난민 캠프까지 가지도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내 가족이 되어 나와 배급받은 식량을 나누고 번갈아 식사 당번을 맡아 준 수십 명의 잃어버린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굶어 죽었을 것이다. 시나고그에서 물처럼 내 안을 흐르던 성령을 느끼게 도와준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 영혼은 오래전에 메말라 버렸을 것이다. 캠프의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며 서로 채찍질하고 격려한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공부를 마치지 못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아이들은 혈연관계가 아니라 종족의 문화로 맺어진 가족을 만들어 냈다. 나는 피뉴두와 카쿠마의 어른들을 부모와 조부모로 공경했다. 마찬가지로 나도 캠프에서 나이 어린 소년들에게 삼촌이 되어 주었다. 그 아이들이 아프면 약을 먹이고 밥을 먹였다. 버릇없이 행동하면 훈계도 했다. 행동과 말로 그들에게 딩카 전통을 가르쳤다. 서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살고 있지만 나는 그 아이들에게 여전히 삼촌이며 가족이다. 나는 그들을 잊을 수가 없으며, 수백 명의 조카와 사촌들을 끊임없이 도울 것이다. 희망으로 서로 연결된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나가는 것. 이는 사방으로 흩어진 남부 수단의 어린이들을 위한 기도일 뿐 아니라, 이민자들의 땅에 뿌리를 내려가는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