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ǻ
비아북
   
12000
2009�� 04��



■ 책 소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삶의마인드를 숲 속 생명체들의 삶의 방식에 찾고자 하는 책. 생태경영 전문가이자 ‘행복숲’ 공동체 대표인 저자는 나무와 풀이 어떻게 생겨나고 꽃은어떻게 피어나는지, 생명의 탄생과 결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삶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숲의 생존방식을 소개한다. 

 


떡잎을 버리는 것으로 꽃을 피우고 성장하는 초목들의 절제된 생명력과 저장력,살을 내어주는 아픔을 딛고 이룩한 연리목의 숭고한 사랑, 개미와 진딧물과 같은 수많은 공생의 지혜, 자신의 씨앗을 품 안에 두려 하지 않는식물들의 자녀교육법, 철저하게 썩어 흙으로 돌아간 다음 다른 생명을 키우는 나무의 죽음까지. 책에는 숲의 탄생을 시작으로 성장과 결실, 그리고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숲의 생존 메시지가 가득하다.


■ 저자 김용규
‘사단법인 숲연구소’에서 공부했고, 2006년 ‘행복한 삶을 배우는 숲 학교’와 창작과 문화와 교육이 어우러진 ‘행복숲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현재‘행복숲’에 지은 ‘백오산방(白烏山房)’이란 오두막에 살며 공동체 추진 대표를 맡고 있다. 앞으로 ‘생태’와 ‘자기경영’이 결합된 생태경영컨텐츠를 생산하여 오늘과는 다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 차례
추천의 글 - ‘에코CEO’김용규, 숲에게 길을 묻다
프롤로그 - & 희망의 숲에 그대를 초대합니다


1막 태어나다 & - 선택할 수 없는삶
태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 - 모든 생명은 자기답게 살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숙명 - 숲에는 태어난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운명 - 노예로 살 것인가? 주인으로 살 것인가?
수용과 출발 - 시작하라! 거목 아래 신갈나무처럼,담장 앞 담쟁이덩굴처럼!


2막 성장하다 & - 내 모양을 만드는삶
성장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꿈 - 나무에게는 빛, 사람에게는 꿈
버림과 상실 - 두려워하지 마라! 들풀도떡잎을 버려야 꽃이 핀다
상처 - 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향기다
경쟁 - 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관계- 성장을 위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망"
경계 - 경계로 가라! 그곳에 누군가의 길이 있다
혁명 - 버려진 땅을 골라 자신의 영토를세우자!

3막 나로서 살다 - 나를 실현하는 삶
나로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통 -꽃의 유혹?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려!
사랑 - 따로 또 같이, 사랑하려면 혼인목과 연리목처럼
자식 - 품 안에 둘 것인가? 멀리떠나보낼 것인가?
일 - 식물의 방식으로 일할 수 없다면 참된 일이 아니다
휴식 - 결실을 위한 에너지와 창조의 힘
상생 -홀로 숲을 이룰 수 있는 나무는 없다
저장과 공헌 - 아낌없이 주어라! 그래야 아름다운 부자다


4막 돌아가다 & - 다시 태어나는삶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순환 - 천지에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정리 - 세상에 남겨 아름다운 것과 추한것
놓음 - 썩어져라! 한 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죽음 - 두려워할 일은 죽음이 아니다


에필로그 - 그대, 마침내 숲을 이루십시오
감사의말





숲에게 길을 묻다

태어나다 - 선택할 수 없는 삶
숙명 -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주체로서 살 권리와 능력을 이미 그 씨앗 안에 부여받고 태어납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 삶의 잃어버린 주인 자리를 되찾는 데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이 지닌 본래의 능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삶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해온, 삶에 필요한 기교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연이 생명에 부여한, 또 다른 중요한 법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생명 각자가 주체로서 살아갈 힘은 선택의 능력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생명체는 모두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 인간의 삶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잠들 때까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입니다. 나무는 스스로 선택하여 빛의 방향으로 잎과 가지를 키우고, 동물은 스스로 선택하여 먹이를 찾아 혹은 쉴 곳을 찾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삶을 선택과 그 결과의 집합물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선택할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태어나는 것’, 즉 ‘탄생’입니다. 나는 이것을 모든 생명체에 부여된 ‘탄생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형성되는, 바꿀 수 없는 관계들을 포함하여 ‘숙명(宿命)’이라고 정의합니다.


어느 곳이건 숲은 숙명의 증거들로 지천입니다. 숲에 서서 나무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는 온전히 서 있는 채로, 태어난 자리의 환경 및 주변과의 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생명체입니다. 이 버드나무는 자기를 타고 오르는 칡덩굴보다 더 높이 자기 잎을 키워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버드나무는 자신의 하늘을 열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하늘을 열지 못하면 그는 안타깝게도 머지않아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식물들에게 숙명은 그런 것입니다. 성숙한 씨앗이 자신을 부모로부터 분리하여 옮겨주는 매개체를 만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숙명은 예비됩니다. 바람, 물, 혹은 동물 등의 움직임에 몸을 싣고 떠나 우연한 장소에 떨어졌을 때, 발아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만나면 그들의 숙명은 시작됩니다. 이제 씨앗은 그곳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 땅이 그에게 주어진 삶의 여건입니다. 씨앗은 오직 그 주어진 여건에서 발아를 통해 나무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도 그것은 숙명입니다. 인간 또한 나무처럼 부모의 몸을 빌려 어느 시간대에 태어나 그곳에서부터 자신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 환경이 비옥하든 척박하든 태어난 자리에서 그의 삶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혹시 그대도 살면서 태어난 자리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탄생의 불가역성이 가혹하다 생각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퍽 오랫동안 그런 분노를 안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숲의 생명체들이 걷는 길을 보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숲 속의 식물들이 각자 씨앗이 떨어진 자리에서 제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숲은 그 생명체들이 숙명을 대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오랫동안 내 가슴을 차지했던 억울함을 씻어주었습니다.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대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아직 이 마음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대라면 억울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조금 더 숲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보면 좋겠습니다.


성장하다 - 내 모양을 만드는 삶
경쟁 - 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태양은 매일 떠오르지만 그 빛이 숲에 사는 식물에게 골고루 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식물은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며 수직으로 자랍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식물들이 서로 얽히고 겹치면서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그들은 비좁고 제한된 하늘 공간을 나누어야 합니다. 식물은 빛 없이 살 수 없는 생명이므로 하나의 공간을 나눈 식물들은 빛을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났습니다.


‘자연선택설’을 중심으로 하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는 자연에서 펼쳐지는 거친 생존경쟁에 적합한 생물만이 선택되어 번성할 수 있다는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근현대에 접어든 인류가 더욱 치열한 투쟁을 벌일 논거를 제시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시간이 흐르면서 스펜서와 제국주의시대, 우생학과 만났고, 적자생존론은 무자비한 약육강식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발전합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역사상 가장 광범하고 참혹한 전쟁들이 터졌고, 무수한 살상이 벌어졌으며, 인종 우월주의가 횡행했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학문의 영역에서만은 당시와 같은 망령된 주장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삶의 영역에서는 그런 주장이 여전히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다윈의 잘못은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는 적자생존론의 그늘에서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신자유주의의 그늘이 되겠지요. 세계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하는 무한 경쟁의 압박이 거대한 우산처럼 우리 삶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 그늘은 세계와 경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계화의 파생상품입니다. 이 파생상품을 구매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의식을 재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뒤쳐지지 않으려면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하고, 앞선 자보다 더 앞서야 한다는 의식과 동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러한 경쟁 의식은 우리의 영혼을 더욱 가난하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숲은 어떨까요? 숲의 생명들도 이렇게 치열하게 다투며 살까요? 그들도 이토록 가난한 경쟁의식으로 무장한 채 살고 있을까요?


일견 그렇게 보입니다. 숲도 사실은 경쟁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숲의 가장자리에 자라는 키 작은 풀들을 보십시오. 고만고만해 보이는 그들도 실은 하루하루 빛을 다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키가 크면 큰 대로 나무들 또한 빛과 양분을 다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숲의 생명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이 벌이는 경쟁은 우리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나무와 풀들에게 경쟁이란 무엇보다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한 투쟁입니다. 식물이 벌이는 경쟁의 요체는 그렇습니다. 수많은 이웃의 욕망이 충돌하는 수직의 공간에서 자기의 하늘을 확보할 힘을 갖는 것입니다. 타자의 공간을 빼앗기 위한 경쟁이라기보다 비어 있는 공간 속에 나의 존재 기반을 만들어내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을 키우고 변화시키는 경쟁인 것입니다. 이것은 차라리 자신과의 다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울창한 숲 속에서 발아한 어떤 신갈나무는 제 잎을 거의 오동잎만큼이나 크게 키웠습니다. 다른 나무들 때문에 그늘이 들자, 빛을 받기 위해 잎을 더 넓게 키웠던 것입니다. 이건 타인이 아닌, 자신과의 투쟁입니다. 단풍나무는 빛을 얻기 위해 다른 나무의 가지를 피해 허리를 꺾고 줄기를 뒤틀면서 가지를 뻗어가고 있습니다. 모두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재편하고 그에 몰두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빛을 향해 자라는 식물의 성질을 전문적인 용어로는 ‘주광성(走光性, phototropism)이라고 부릅니다. 식물은 빛으로 향하기 위해 자신의 생장을 조절하는 에너지를 재배치함으로써 주광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단풍나무는 자신의 허리를 꺾기 위해 옥신(auxin)이라는 식물생장물질을 휘어지고자 하는 부분의 반대쪽에 집중 재배치했을 것입니다. 이는 에너지의 재편과 성장을 향한 열망이 없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곧게 자라는, 자기의 생장습관과 다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나무와 풀들이 보여주는 경쟁은 자신과의 싸움이 우선입니다. 더러 칡덩굴처럼 타자를 휘감아 결국 타자를 해치는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물들은 자신을 꽃피우기 위한 공간을 열기 위해 오로지 자신과 다툽니다.


주어진 경쟁 환경을 피하고 자신을 실현할 공간과 때를 열기 위해 생명체들이 벌여온 노력이 모여 지금의 정교하고 복잡한 생태계를 이루었습니다. 타자들에 의해 점유된 레드 오션(red ocean)과도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나를 위한 장소와 시간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모여 자신의 삶을 지속할 블루 오션(blue ocean)을 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유전자에 각인하고 대를 이어 전수하는 것을 다윈은 ‘진화’라고 명명했습니다. 또한 블루 오션을 창출해내는 과정에서 생명체는 생태계 속에서 그들의 지위(niche)를 확보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자신이 꽃피울 장소와 시간을 찾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보여주는 경쟁의 정수입니다. 그 경쟁을 통해 생태계는 더 견고하게 연결되고 물질은 막힘없이 흐르며 순환하게 됩니다. 우리의 별, 지구가 푸르러지고, 그로 인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가 살 수 있게 되며, 그것으로 다시 그 푸름을 지속할 수 있는 신비로운 메커니즘이 여기에 있습니다. 창조주의 위대함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경쟁은 창조주의 뜻과 너무 다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지속하고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의 원리로 부여된 경쟁의 양상은 우리 인간의 숲에서는 빠르게 꺼져가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를 변화시켜 나를 실현하고, 그를 통해 더 풍요로운 생명공동체를 이루도록 고안된 경쟁의 원리, 그 건강한 경쟁의 긍정성은 점차 상실되어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누군가의 이익을 빼앗고 누르는 것으로 승리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배우면서,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경쟁이 아닙니다. 이런 경쟁이 심화될수록 곤궁해지는 타자가 늘어나고 공동체도 점차 쇠락해갈 것입니다. 흐름은 막히고 긴 순환의 고리도 서서히 짧아지다가 결국 멈출 것입니다. 마침내 승자의 존립 기반도 무너지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품어야 할 경쟁의 자세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숲의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경쟁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숲은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숲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요, 새로운 영역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핏빛 대지에서 영혼을 고갈시키며 앞을 다투는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푸른빛이 가득한 공간에 서는 것, 감히 추한 욕망이 넘보지 못할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 타자를 파괴하여 내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천박함으로 가득한 세상을 보내고, 아름다운 경쟁으로 더욱 푸르러지는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오늘도 나는 이 숲에서 그날을 그리워합니다.


나로서 살다 - 나를 실현하는 삶
사랑 - 따로 또 같이, 사랑하려면 혼인목과 연리목처럼

2002년에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5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즉 두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은 이혼하는 셈입니다. 비교적 엄밀한 통계에 따르면 2004년 1월 현재 열한 쌍의 부부 중 한 쌍이 이혼을 했습니다. 대략 열 가정 중 한 가정이 이별한 가정인 셈입니다. 이별은 지독한 상실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지혜 앞에 무릎을 꿇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나무들은 어떨까요? 그들도 이별을 할까요? 여기 나무들이 나누는 사랑법이 있습니다. 특히 갈등과 고통과 해소의 지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나무들의 사랑법이 있습니다.


숲에 사는 나무들은 옮겨 다닐 수가 없는 처지이니 별다른 사건이 없는 한 옆자리에 함께 자라는 나무와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들의 숙명은 수많은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하나의 공간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나누고, 양분을 흡수할 땅을 나누고, 서로의 가지와 가지가 만나는 수직의 공간도 나눠야 합니다. 그래서 이동할 수 없는 존재인 나무가 옆의 나무들과 다차원적으로 공간을 나누며 해로하는 방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대부분의 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벌린 채 햇빛을 쐬며 살아갑니다. 이는, 아마 긴 시간 동안 터득한, 광합성에 가장 효율적인 공간 활용법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옆 나무의 가지를 가리기도 하고 옆 나무의 가지와 직접 부딪히기도 합니다. 특히 좁은 공간을 나눠야 하는 나무들은 그 처지가 더욱 곤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숲에는 그 한계를 놀라운 관계로 승화하여 우리 인간들을 꾸짖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우선 연리목이라고 불리는 나무들이 좋은 예입니다.


연리목은 나무와 나무가 맞닿아 더 이상 비켜 설 곳이 없을 때 서로의 장벽인 껍질을 벗고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로 합일한 것을 일컫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붙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나무껍질을 벗고 세포와 세포를 합치고 새로운 껍질을 만들어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살아갑니다. 세분하여 가지와 가지가 합일한 나무를 연리지(連理枝), 줄기와 줄기가 합일한 나무를 연리목(連理木)이라고 부릅니다.


연리목을 이루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연리지가 되는 일은 연리목에 비해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바로 바람의 훼방 때문입니다. 가지와 가지가 맞닿아 하나로 합쳐지려 할 때 거센 바람이 불면, 줄기에 비해 가늘과 가벼운 가지는 속절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야속한 바람을 넘어서서 끝내 합일을 이루어낸 것이 바로 연리지의 사랑입니다. 깊은 사랑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두 그루의 나무가 한 그루로 합일한다는 것은 이렇게 살을 에는 아픔을 딛고 이룩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연리목처럼 옆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고자 한다면 나의 몸과 마음을 열고 세포의 칸막이까지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연리목의 사랑이 너무 귀하여 흔하지 않다면 혼인목의 사랑법은 조금 더 대중적입니다. 숲에 들어가 자주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숲에 존재하는 수많은 혼인목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혼인목이란 서로 같거나 다른 종류의 나무 두 그루가 한 공간에서 자라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그 모양을 만들어갈 때 그 한 쌍의 나무에게 붙여주는 이름입니다. 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 서로에게 뻗는 가지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빈 공간을 찾아 뻗어나가기도 하면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처럼 조화를 이룹니다. 연리목이 제 살을 내어주며 하나로 합일하는 사랑이라면, 혼인목은 서로의 가지를 떨어뜨려 서로의 공간을 열어주는 사랑입니다. 혼인목의 사랑은 옆의 나무로 향하는 날선 가지를 떨어뜨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가 허용한 공간으로만 나의 가지를 뻗으며 마치 둘이 하나인 것처럼 나무의 모양을 완성하는 사랑입니다.


혼인목의 사랑은 서로를 위해 각자의 욕망을 덜어내어 완성되는 사랑입니다. 나도 있고 그도 있는 사랑입니다. 서로 다른 둘의 내가 만나 하나를 이루는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있는 그대로 인연을 수용하는 사랑입니다. 따로이면서 함께 자라는 꿈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보는 과정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순간순간 불편함을 겪으며 긴 시간을 함께 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경지입니다.


이 숲에 살고 있는 혼인목과 옆 마을의 자랑거리인 연리목은 이 시대의 사랑을 닮지 않았습니다. 모두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고비가 없지 않았으나 그때마다 서로를 더 깊이 아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분들에게 갈등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의 영역을 존중해가는 과정의 하나였습니다. 부부의 본질이 각자이면서 또한 하나인 것에 있음을 평생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몸과 마음으로 익혀오셨습니다.


이 숲에는 옛날에도 지금도 혼인목과 연리목의 사랑이 크고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숲에도 그들의 사랑을 닮은 시류가 조금씩 복원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돌아가다 - 다시 태어나는 삶
놓음 - 썩어져라! 한 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죽음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는 나무들은 겉으로 보아도 그 증상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먼저 수세를 잃기 시작합니다. 여름날, 항상성을 지키며 힘차게 살아가는 나무 아래에 서면 하늘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이 달고 있는 견실한 가지와 싱그러운 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세가 약해진 나무들 아래에 서면 가지와 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숭숭 보입니다. 스스로 영양을 생산하여 호흡을 감당하고 그 영양을 남겨 다른 곳의 성장에 쓰던 비율이 역전되면, 즉 호흡이 생산의 규모를 넘어서면 나무는 삶의 균형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세가 계속 약해지면 나무는 항상성을 잃게 되고 머지않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나무가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섰을 때 나타나는 것이 버섯입니다. 줄기에까지 버섯이 피어난다면 나무는 이미 그 전체의 생명을 잃었거나, 잃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는 죽으면서 다른 생물들에게 수많은 혜택을 베푸는 것으로 자신의 죽음을 풍성하게 합니다. 죽어 소멸해가는 나무들의 몸은 다른 생명들을 위해 베푸는 마지막 잔치와도 같습니다.


나무들은 항상성을 잃고 주어진 삶을 정리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푸석푸석 썩어가는 그들의 몸은 누군가의 은신처요 사냥터요 놀이터였다가 비와 바람을 만나면서 아주 천천히 흙으로 되돌아갑니다. 흙으로 되돌아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모든 것을 내어주어 다른 생명을 부양합니다. 썩어가도 나무가 물을 머금어 축축해지면 이끼들이 그 물기로 배를 채우며 자라게 됩니다. 이렇게 자란 이끼는 나무의 죽음에 생기를 더합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크고 작은 생명들을 부양하고 숲을 지키는 나무들은 자신의 일생과 주검 모두를 흙에게 바칩니다. 모든 나무의 죽음이 풍성하고 숭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책에서 삶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스님은 사람의 삶이 이와 같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깊고 깊은 통찰입니다.


더하여, 나는 사람이 죽음을 맞는 자세 또한 나무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묘지 안에 갇혀 영원을 꿈꿀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죽음도 누군가를 위한 ‘만찬장’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대지요, 다른 생명들일 것입니다. 나무의 삶이 그러했듯이 결국 우리의 삶도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은 모든 생명들에게 죽음을 통해 그 빚을 갚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나무들이 그 빚을 갚으며 한 줌 흙으로 소멸하듯이 우리의 주검도 그러해야 합니다. 나는 이 숲에 들어오기 전부터 제법 많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언제고 신이 나를 부르시는 날, 그중 한 그루 아래에 묻힘으로써 자연에 진 나의 빚을 되갚고 싶습니다. 누구나 거쳐야 하는 죽음이 내게 당도했을 때, 나는 그렇게 아낌없이 갚고자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 순간만이라도 나는 모든 것을 편안히 내려놓고 싶습니다. 한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썩어짐으로써 온전한 흙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것으로 이 별과 다른 생명들에게 빚내어 산 삶을 되돌려놓고 싶습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