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역자: 노혜숙·유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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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문
   
12500
2008�� 09��



■ 책 소개
인간 의식의 심오한 변화에대해 이야기하면서, "지금 이 순간", 즉 미래도 과거도 아닌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현재"를 강조하는 책. 저자인 에크하르트 톨레는 영혼이나존재의 본질 또는 궁극적인 깨달음을 찾는 이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뛰어난 영적 교사이다. 그가 세미나와 명상수업, 개인 상담에서 나왔던질문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제기되었던 질문들은 당시의 대화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 적어 이해를 도왔고, 종종 나오는질문들은 하나로 묶어 유형별로 답했다.

 


인간 행태의 그릇된 본성에 대해 밝히고,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닌 "지금여기"에서 창조할 수 있는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나 내면에 품고 있는 깨달음의 씨앗을 터트려 저자가 경험했던 영적 깨달음의 강력한 힘을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2001년 초판의 개정판이다.


■ 저자 에크하르트 톨레
에크하르트톨레는 최근 떠오르고 있는 인류의 영적 교사 중 한 사람이다.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Now)』에서 저자는 스물아홉 살의 어느 날, 캄캄한 절망의 나락에서 깨달음의 밝은 순간으로 갑작스럽게 솟아올랐던 아름다운 경험을 묘사한다. 그경험은 그의 과거를 용해시키고 인생행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불교 철학과 여러 명상법 등을 배우고익히며 열정적인 내면 여행의 시발점이 되었던 그 변화를 이해하고 종합하는 데 깊이 몰두해 왔다. 그리고 지난 10년간은 상담자이자 영적지도자로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작은 모임들을 이끌어 왔다. 1996년 이후 캐나다 밴쿠버에 살면서 책을 집필했는데,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그의 가르침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역자
노혜숙
 -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졸업, 서강대학교 철학대학원을 수료한 후 한국산업은행과 바클레이즈 은행 서울지점에 근무했다. 번역서로 『마음 가는 대로 해라』『헝그리 정신』『다쓰고 죽어라』『부유하게 살자』『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라』가 있다.


유영일 - 오랫동안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있다. 옮기거나 엮은 책으로는 『갈매기의 꿈』『내 안의 나』『바보들의 행진』『세상에서 가장 긴 이야기』 등이 있으며, 전환의 시대에 마음의지혜를 일깨우는 에세이집 『선물』을 펴냈다.


■ 차례
소개의 글 - 지금 이순간으로의 안내
독자 여러분께 - 깨달음은 우리 안에 있다


1. 나는 내 마음이 아니다
깨달음을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으라|깨달음이란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반응이다


2. 고통에서 벗어나기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라|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마음이 만든 허구에서 벗어나라|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에고는 온전함을 찾아 헤맨다


3. 현재 속으로 침잠하기
마음속에서나를 찾지 마라|시간에 미혹되지 말라|지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영적인 차원으로 가는 열쇠는 현재에 있다|지금 이 순간의힘|심리적인 시간에서 놓여나라|심리적인 시간의 광기|부정적 감정과 고통은 시간에 뿌리내리고 있다|삶 자체에 주목하라|모든 문제는 마음이 만드는환상이다|무지 혹은 망상에서 벗어나기|당신은 이미 완전한 존재이다


4. 마음은 지금을 교묘히회피한다
‘지금’의 상실, 그것이 가장 교묘한 속임수다|일상적 무의식과 깊은 무의식|불안이 부작용을 부른다|일상적인무의식에서 벗어나기|불행으로부터의 자유|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깨어 있으라|인생 여정의 내적인 목적|과거는 현존 속에서 살아남을 수없다


5. 지금 여기에 깨어 있다는것
현존이란 무엇인가|기다림의 숨은 의미|아름다움은 현존의 고요함에서 생겨난다|순수 의식의 실현|당신의 신성한 현존에 대한실재, 그리스도


6. 몸 안에 뿌리내리기
당신의 가장깊은 곳에 있는 것|말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보이지 않는 실재로서 당신 자신을 인식하라|내적인 몸과의 만남|몸을 통한 깨달음|내면의 몸을 통해신과 하나가 되라|안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기|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용서하라|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연결|노화가 늦추어진다|면역체계가강화된다|호흡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기|마음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기|듣는 기술


7.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문
형체 없는 영역에서의 진정한 자유|기(氣)의 근원|꿈 없는 잠|또 다른 문|침묵에 귀 기울이라|공간을 인식하라|공간과시간의 진정한 본질|깨어 있는 죽음


8. 성숙한 인간관계
지금 여기로들어가라|사랑과 증오|중독된 사랑과 완전함에 대한 추구|중독 관계에서 성숙한 관계로|영적 수행자로서의 관계|왜 여자가 깨달음에 더 가까이있는가|여성의 집단적인 업장 녹이기|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버리라


9. 행복과 불행을 넘어선 곳에 평화가있다
선악 너머에 있는 더 지고한 선|삶이라는 드라마의 끝|인생의 무상함과 순환|부정적 감정은 이용하고 버리라|자비의본질|참된 현실을 향하여


10. 내맡김의 지혜
‘지금’을받아들이라|마음의 에너지에서 영적 에너지로|인간관계에서의 내맡김|질병에서 깨달음으로|재난이 닥쳤을 때|고통에서 평화로|십자가의 길|선택의의미


추천의 글 -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의지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나는 내 마음이 아니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요?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내 이름과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결 상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세계로부터 단절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각하든 자각하지 못하든 스스로를 외로운 섬처럼 여기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엄습하고 안팎으로 갈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 진정한 ‘존재’ 상태란 어떤 것인가요?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무수한 형태의 생명체 너머에는 영원한 ‘오직 하나의 생명’이 자리합니다. 그것은 저 너머에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영원히 부수어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생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충만하고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존재 상태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있음’의 상태에 활짝 깨어 있으면서 그 느낌, 그 앎에 머무는 것이 밝은 ‘깨달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 자신의 진정한 ‘존재’ 상태를 경험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 때문에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칠 줄 모르는 생각의 행렬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은 내면의 고요한 세계와 일치합니다. 갖가지 생각을 헤아리면서 그런 생각들을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아가 만들어지고 두려움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 가장 기본적인 오류를 범한 셈입니다. 생각을 자기 존재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머릿속 헤아림을 좇아가다 보면 문제와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미친 듯이 복잡한 세상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은 조각조각 부서진 우리들 마음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면 보이지 않는 장막이 생겨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말이나 이미지를 곡해하고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되므로 진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 장막이 당신과 진정한 당신 사이를, 당신과 당신의 동료 사이를, 당신과 자연 사이를, 당신과 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의 장막으로 인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여기에 있고 당신과는 전적으로 분리된 ‘다른 것’이 저기에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사용하면 마음은 아주 훌륭한 도구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마음이 우리를 부리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마음을 부리지 못하고 부림을 당하는 것이 곧 병입니다. 나를 내 마음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요 기만입니다. 부림을 당해야 할 도구가 주인의 자리를 점령하고 만 꼴입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원할 때면 언제나 마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마음을 ‘꺼버리는’ 단추를 갖고 있습니까? 순간적으로 생각이 멈추는 경우는 있겠지만 생각을 완전히 멈출 수 없다면 마음이 당신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점령한 실체인 ‘생각하는 자’가 진정한 당신이 아님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이를 알면 당신을 점령하고 있는 실체를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생각하는 자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하는 순간’,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활성화되는 겁니다. 당신은 그제야 생각 너머에는 광대한 앎의 영역이 있으며, 생각이란 단지 그러한 앎의 영역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깨우치게 되겠죠. 아름다움과 사랑, 창조력과 기쁨, 내면의 평화 같은 진정 중요한 것들은 마음 너머에서 온다는 것을. 그럼으로써 망각의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으라
당신은 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아 줄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자주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십시오. 낡은 축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들려왔던 사고 유형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라’는 의미입니다. 머릿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 자리에 목격자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는 아무런 견해도 갖지 말고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이것이 생생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 자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며 마음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당신은 그 생각뿐 아니라 그 생각의 목격자인 자신 또한 의식하게 됩니다.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임에 따라, 그 생각의 저변이나 뒤안에 있는 더 깊은 곳의 당신 자신을, 그 현존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당신을 점령하고 있던 생각은 힘을 잃고 재빨리 자리를 피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더 이상 거기에 힘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제멋대로 날뛰는 생각의 횡포를 막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자리를 비키면 당신은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심(無心)’의 틈새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틈새가 처음에는 몇 초에 지나지 않겠지만 점차 길어질 겁니다. 무심의 틈새를 경험할 때 당신은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평소에는 마음에 의해 가려져 있던 존재와의 자연스러운 합일감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심의 영역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소위 순수 의식의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순수 의식의 상태는 자기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당신은 그제야 ‘나 자신’에 대한 예전의 생각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현존이야말로 당신 자신의 위대한 본질이며, 동시에 당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입니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는 대신 단순히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흐름 속에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단지 지금 이 순간을 확고하게 의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으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거두어들여서 주의를 집중하고 예민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무심의 틈새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입니다. 이는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할 수 있는 수행법입니다.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일상적인 활동에 목적을 부여하고 거기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깨달음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마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 속에서 어떤 틈새를 만들 때마다 의식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현재 속으로 침잠하기
지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과거와 미래는 너무나 실재적이어서 때로는 현재보다 더 진짜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과거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과거에 비추어서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의 목표에 맞추어서 지금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은 ‘지금’이 아닌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느껴본 적이 있나요? ‘지금’이 아닌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대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어떠한 일도 과거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어떠한 일도 미래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미래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과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속에 저장된 지나간 ‘지금’에 대한 기억의 흔적입니다. 과거를 기억할 때 당신은 기억의 흔적을 재가동시켜 ‘지금’의 것으로 작동시키는 것입니다.


미래는 마음의 투사물로 상상 속의 ‘지금’입니다. 미래는 언제나 ‘지금’으로 올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도, 당신은 그것을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로는 분명 실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실재는 ‘지금’에게서 빌린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으로부터 ‘존재’로, 시간으로부터 현재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것입니다. 갑자기 만물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에너지가 내뿜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심리적인 시간에서 놓여나라
우리가 과거와 미래를 참조하지 않을 수 없는 실생활의 영역 안에서도 현재의 순간은 여전히 핵심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의 모든 학습은 ‘지금’에 관련되고 적용됩니다. 특별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것도 모두 ‘지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항상 ‘지금’에 주목하면서 시간을 주변 장치로 인식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계속 사용하면서 심리적인 시간(자신을 과거와 동일시하거나 끊임없이 미래로 투사하는)에서 자유롭습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자신도 모르게 심리적인 시간으로 변화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예민하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떠나지 못한 채 자기를 비판하고 저주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실수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잘못을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리적인 시간이 되어서 당신의 거짓된 정체성과 연결될 것입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어쩔 수 없이 심리적 시간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면, 당신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지만, 바로 이 순간 내딛는 발걸음을 존중하고 거기에 최대한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때, 목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미래의 행복이라든가 성취감, 자기 만족을 너무 의식하게 되면 ‘지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 자체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는, 단지 미래로 가는 징검다리로 축소되고 말 겁니다. 그러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심리적인 시간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삶의 여정이 더 이상 모험이 아니라 달성하고 해내야 하는 강박적인 욕구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볼 수도 없고, 그 향기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함으로써 맛보게 될 삶의 기적과 아름다움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몸 안에 뿌리내리기
내면의 몸을 통해 신과 하나가 되라

병들고 늙어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조밀한 물질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하는 당신의 몸은 궁극적으로 실재가 아니며 당신이 아닙니다. 몸을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것은 탄생과 죽음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실재를 잘못 지각하고 있는 것이며, 마음이 지어내는 한계에 불과합니다. ‘존재’와의 접촉을 상실한 당신의 마음은 당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증거로 몸을 만들어 내고, 그 자신의 두려움을 합리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에서 등을 돌리면 안 됩니다. 마음은 무상하고 유한하며 죽음의 상징인 몸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냈지만, 그 몸 안에 당신 자신의 본질적이며 영구적인 실재가 숨어 있습니다.


몸에 저항해서 싸우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 자신의 실재에 대항해서 싸우는 셈이 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입니다. 당신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몸은 얇은 환상의 베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밑에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몸,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놓여 있습니다. 내면의 몸을 통해서 당신은 그러한 현시되지 않은 세계, 탄생도 죽음도 없으며 영원히 현존하는 삶과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면의 몸을 통해 당신은 신과 영원히 하나인 것입니다.


안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기
열쇠는 내면의 몸과 영원히 연결된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내면의 몸을 느끼십시오. 그러면 어느새 당신의 삶에 깊이가 더해지면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최대한 내면의 몸에 계속 집중한다면 ‘지금’에 닻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외부 세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며, 마음속에서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고와 감정, 욕망, 두려움은 어느 정도까지는 거기 그대로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을 점령하지는 못합니다. 주의력을 온통 마음과 외부 세계에 빼앗기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 가능할 때마다 내면의 몸을 느껴 보십시오. 내면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러고 나서 당신의 의식 상태와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질적으로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지켜보십시오.


언제라도 좋으니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일이 있을 때면 그 시간을 이용해서 내면의 몸을 느껴 보십시오. ‘지금’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지 말고, 내면의 몸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써 ‘지금’에 침잠하십시오. 내면의 몸을 인식하는 기술은 당신의 삶을 전혀 새로운 삶, ‘존재’와 영원히 연결된 상태로 발전시킬 것이며,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깊이를 더해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즉시 내면으로 들어가서 몸 안의 에너지 장에 최대한 집중하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당신이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고 내면의 몸을 느끼면, 의식이 마음으로부터 물러나 즉시 고요해지면서 현존하게 됩니다. 만일 그 상황에서 어떤 대응책이 필요하다면 좀 더 깊은 차원에서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을 넘어선 곳에 평화가 있다
선악 너머에 있는 더 지고한 선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고 해도 부정적인 일 속에는 의미심장한 교훈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잠시 동안 겪게 되는 질병이나 사고는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실재하고 무엇이 허구인지, 궁극적으로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를 가르쳐 줍니다.


높은 전망대에서 보면 모든 조건은 항상 긍정적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떠한 조건도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산다면, 당신의 삶에는 더 이상 선이나 악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현명한 삶의 길입니다. 있다면 더 높은 선이 있을 뿐이며, 그 선은 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사랑과 증오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처럼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은 후 더 이상 천국에서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2000년 전, 보기 드물게 세속적인 권세와 지혜를 겸비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운명의 무늬가 어떻게 엮어지든 다가오는 것은 모두 받아들여라. 이 세상에 당신의 욕심을 완전하게 채워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나큰 고통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항하는 마음을 벌이고 받아들이고 용서합니다. 그렇게 하자마자 즉시 위대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악이라고 여겼던 것을 통해서 의식이 활짝 깨어나고, 고통이 내면의 평화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일깨워 주기 위해 거기 존재합니다. 우리의 제한된 관점에서 악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지고지순한 선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은 용서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용서할 때까지 악은 구제받지 못하고 악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무상함과 순환
여전히 물질 세계에 살고 집단적인 인간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 한 육체적인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정신적?감정적 고통과는 다릅니다. 모든 고통은 에고가 만들어 내는 것이고 저항에서 비롯됩니다. 또한 당신이 물질 세계에 있는 한 당신은 자연의 순환과 ‘항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법칙을 따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러한 것입니다.


모든 것의 ‘있음’을 허용함으로써 대립되는 세상 저변에 깔린 좀 더 깊은 차원이 당신 앞에 드러날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을 깊고 고요한 상태로서, 선악을 초월하여 아무 이유 없이 솟아나는 기쁨의 상태로서 언제나 현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의 기쁨이요, 신의 평화입니다.

모습의 차원에서는 분리된 듯이 보이는 온갖 형상들이 탄생과 죽음, 창조와 파괴, 성장과 분해를 거듭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도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일이 잘 풀려서 번창할 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를 거듭하면서 시들고 붕괴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생기고 변화될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옛것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 시점에서 매달리고 저항하는 것은 생명의 흐름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그 결과 고통을 받게 됩니다.


대개는 성장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것도 영원히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계속해서 성장한다면 어떠한 종류의 성장이든 결국은 기형적이고 파괴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입니다. 분해는 새로운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육체 에너지 또한 상승하고 하강하는 주기의 지배를 받습니다. 항상 최고점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매우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시기가 있는 반면, 모든 것이 제자리걸음인 것 같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도 아무 소득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주기는 몇 시간에서 몇 년까지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큰 주기가 있고, 그 주기 안에 작은 주기가 있습니다. 질병은 침체된 에너지 주기에 저항해서 싸울 때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재생산을 위해서는 침체기가 절대 필요합니다. 마음과 동화되어 있는 한, 당신은 불가피하게도 성공과 같은 외부 요인으로부터 자존심과 정체성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침체기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허락하기가 어렵고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당신은 구성하는 조직의 지성이 자기방어 수단으로 당신을 멈추게 해, 재생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질병을 만드는 것입니다.


역설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에 의존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현실적인 삶의 조건도, 외형적인 살림살이도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물이나 사람, 조건 등이 아무런 수고나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당신에게 다가올 것이고,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엔 자유롭게 즐기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왔다가 가 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의존하지 않으면 상실에 대한 두려움도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삶이 편해지고 순조로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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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적인 원인에 근거한 행복은 결코 깊지 않습니다. 당신이 아무런 저항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감에 따라 내면에서 선명하게 느끼는 평화와 존재의 기쁨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재는 당신을 마음의 양극 너머로 데려가서 눈에 보이는 형상에 의존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줍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붕괴되고 무너진다고 해도 당신은 깊은 내면의 평화를 느낄 것입니다. 행복하지는 않을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평화로울 것입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