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찾던 낚시터에서도 좀체 초조함과 답답함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저자는 이제좀더 넉넉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낚시터를 찾는다. 그곳에서 저자는 잃었던 감성을 되찾고 자유롭게 상상하며 감동을 느낀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돌아가는 현대생활에서 사람들이 잃어가고 있는 감성적 자유와 함께 청년기를 지나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된 저자의 단상을 자연스러운 의식의흐름으로 담아내며, 바쁜 일상으로 외면하거나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반추한다.
■ 저자 김판수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경향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사회부, 경제부, 외신부 등의 부서에서 환경 및 생태계, 환경 정책, 사회 일반, 기업 경영, 실물 경제, 국제정세, 초중등 교육 분야 등을 취재했었다. 지금은 낚시와 환경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자유기고 생활로 지내고 있다. 현재 낚시문화와 환경에 관한책을 집필하는 중이다.
■ 차례
글을 시작하며
1. 낚시의 과거
세상 똑바로 보기 | 낚시와 정신세계| 찌, 귀소본능을 깨우다 | 밤의 감옥에서 풀려나다 | 시간의 억압에 맞서다
2. 감동
오름과 내림 | 시간을 포착하는 공간 |부드러움 | 균형추의 미덕 | 정점 알아 맞추기 | 모호함 즐기기 | 원시적인 생동감 | 여백 | 어둠 속 찌에 관한 단상 | 파문과 상상
3. 상상
별 보기 | 별자리 언어 | 소나기와 텐트| 물과 사람 사이 | 비늘 읽기 | 붕어 예찬 | 피라미, 구차하지 않은 강직함 | 가물치와 쏘가리 사이 | 미끼와 유혹 | 애벌레와 어른벌레| 겨울잠 | 진화일까 감옥일까 | 물풀을 보면서 | 물고기의 기억력, 3초 | 물고기는 바다를 돌아보지 않는다
4. 들판 여행- 그리움을 찾아서
바람기 달래기 |석모도 소금밭 | 청양 둠벙 | 동진강 들녘 | 남대천 토성리 | 도피안사의 피안 | 탄금호 입석 | 백제의 낚시 | 상주 공갈못 연(蓮) |금강 하구 | 은어와 섬진강
5. 반성
야생이 홀로 서지 못하는 까닭 | 들판수난사 | 들판의 질서, 약육강식 | 빈집 | 산고(産苦) | 바다 메우기 | 어떤 호수의 운명 | 탈고되지 않은 기고문 |어둠
강가에서 쓰는 저자 후기
낚시, 여백에 비친 세상
1. 낚시의 과거
낚시와 정신세계
낚시에서 기다림이 지루하지 않다면, 그것은 물고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 덕분이다. 그런 설렘은 낚시 장비가 진화할수록 점점 더 커져갔다. 장비의 진화가, 낚시꾼이 물가에서 물고기를 점점 더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또 물고기를 자주 보게 될수록 낚시꾼은 물가에서 더 많은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래서 물가로 나가는 사람과, 물가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 물가는 삶의 한 변방이라기보다는 삶의 원천이 되었다. 삶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상상과 사색의 중심축이 되었다. 나아가 세상을 찬찬히 바라보는 전망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인간은 낚시의 근본적인 원리는 변화시킬 수 없었지만 부품이나 장치, 보조기술은 새롭게 바꿔놓았다. 물고기의 행동습성이나 식성은 바꿀 수 없었지만 물고기를 유혹해 낚아내는 주변 기술만큼은 문명 혹은 과학기술의 고도화에 발맞춰 적잖이 바꿔놓았다.
먼 선사시대 사람들은 낚시의 효용 가치를 배고픔 해결에 우선적으로 두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낚시는 수렵의 한 방편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한 힘든 노동이었을 것이다. 낚시의 전설로 남아 있는 강태공에 얽힌 이야기는 낚시가 단순한 수렵의 단계만은 아닌, 더 먼 훗날의 일이다. 물론 지금도 생계를 잇기 위해 낚시를 하는 직업 어부를 민물이나 바다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낚시는 점차 취미나 휴식, 나아가 예술 구도의 정신세계를 경험하는 방향으로 가치의 중량과 폭을 지속적으로 넓혀왔다. 현실의 삶이 팍팍해질수록 사람들은 지혜와 감동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어 다녔으며, 마침내 낚시라는 피안에 그들의 정신세계를 의탁하기에 이르렀다. 낚시 문화는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으로부터 적지 않은 힘을 입었다. 그러다가 차츰 정신세계를 경험하고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과학기술이나 물질문명을 되레 비판하고 조롱하는 역할을 맡기에 이르렀다.
감당하기 힘든 삶터에서 비켜난 다른 한쪽에서는, 낚시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심미학적 정신세계가 오랜 세월 쉼 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사색과 관조가 우러나고 지혜와 깨달음이 샘솟아 메마른 삶터로 흘러들고 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는 마음자세가 종교적이든 도덕적이든 예술적이든 영역의 가름에 상관없이 낚시는 인간의 정신생활을 풍요롭게 살찌웠다.
2. 감동
시간을 포착하는 공간
눈으로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완벽하다 싶은 어둠이 충북 내륙의 깊은 산 속 어느 호수에 있다. 평면적으로는, 어디가 뭍이고 어디가 물인지를 가르는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입체 공간으로는, 어디에서부터 허공이 시작되는지 그 허공을 일으켜 세운 평면상의 윤곽선이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낚시꾼은 어둠이 깃들기 전에 눈에 보였던 것들을 머릿속에 넣어둔 기억에 의지해, 지형의 경계나 지물의 윤곽을 짐작할 뿐이다. 눈을 뜨나 감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완전한 어둠이다.
이 호수는 밖으로부터 빛이 한 줄기도 흘러들지 않아, 밤낚시 하기에 더없이 적당하다. 하늘에는 흐린 날씨 때문인지 달빛도 별빛도 없다. 만약 낚시꾼이 어둠이 오기 전에 이 호숫가에서 미리 보아 둔 것이 없었더라면 산의 높이라든지 호수의 넓이라든지 하는 경계의 개념조차 생기지 않을 테다. 시각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낮의 기억을 되살려 볼 때 호수를 빙 둘러 감싼 산등성이는 분명 하늘과 닿아 있지만, 그 경계가 눈으로 감지되지 않는다. 뭍과 물을 가르는 경계도 짐작으로만 파악될 뿐이다.
그는 호숫가에 앉아 어둠 속을 더듬어 낚시채비를 수면을 향해 던져 넣는다. 낮의 기억으로는 앞쪽에 수초 따위가 없어 채비의 안착을 방해할 게 없어 보였다. 채비가 물 속으로 제대로 잠기는지 찌의 빛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채비는 물 속으로 모두 잠기고, 콩알만 한 빛의 점 하나만 수면과 일치되게 남겼다. 그는 하늘과 땅조차 구별할 수 없는 막막한 혼돈 속에 빛 한 점을 만들어 냈다. 찌는 자신의 몸 속에 빛을 낼 수 있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천체가 떠 있지만 이들 가운데 스스로 빛을 내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제 물고기가 입질을 해주면 점의 빛은 선의 빛으로 바뀔 것이다. 깜빡거림의 분절된 점선이 아니라 연속되는 선의 형상을 한 채 길게 수면 위로, 허공을 향해 솟구칠 것이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자 흐렸던 날씨가 개는지 하늘에 별이 하나 둘 빛을 내기 시작한다. 어느새 달도 그의 머리 위에 반쪽으로 떠 있다. 희미한 구름 몇 가닥이 달을 지나 흘러간다. 어둠이 걷혀가고 있는 것이다. 어렴풋하게나마 눈앞에서 물과 뭍의 경계가, 멀리 산등성이와 하늘의 경계가 비로소 드러난다.
갑자기 찌 빛의 깜빡이는 동작이 빨라졌다. 딱따구리가 부리로 나무를 연속동작으로 쫄 때, 동작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그런 느낌의 빠르기다. 낚시꾼의 심장박동도 덩달아 빨라졌다. 어떤 녀석일까? 녀석은 좀처럼 찌를 올려주지 않는다. 명멸의 시간만 남긴 채 찌는 다시 고요하게 점으로만 수면에 박혀 있다. 미끼를 먹지 않은 이유가 뭘까? 하지만 그는 잠시나마 찌의 움직임을 경험했다. 비록 눈요기요, 맛보기였지만 물 속의 생명이 만들어낸 동작이었다.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찌 주위에 둥글고 미세한 파문이 그려졌을 것이다. 입질의 주인공이 물고기가, 또 붕어가 아니면 어떠랴. 새우나 징거미가 기어와 미끼를 건드리다가 도로 제 갈 길로 갔을 수도 있다. 그는 다시 기다림 속에 빠져든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떠 있고 수면에는 찌가 박혀 있다. 긴 기다림에는 눈이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한다. 눈이 기댈 곳이 없으면 마음이 공허해진다. 별과 달과 찌가 내는 빛이 낚시꾼의 시선이 기대는 곳이다. 어느새 산등성이 위로 하늘이 밝아지는 기운이 서려 있다. 산 너머에는 분명히 해가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다시 찌가 빠른 속도로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이어 서서히 올라온다. 찌는 솟아오르면서 경박스럽게 촐랑대지 않는다. 잔잔한 평면에 박힌 한 점이 무한한 허공에다 선명하게 긴 말뚝을 꽂아 넣는, 중후한 오름이다. 한 점의 빛이 기다란 선의 빛으로 바뀌면서 수면의 평면과 허공의 입체를 하나로 이어주는 순간이다.
그는 낚싯대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들어올리며 챈다. 대는 끝이 뿌리와 나란하게 평행을 이루며 허리에서 둥글게 꺾여 휘어진다. 세속의 시간으로 오 분 가량 지났을까, 녀석은 힘이 다했는지 발 앞으로 이끌려 나온다. 낚시꾼도 가쁜 숨을 몰아쉰다. 땀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고 입김이 햇빛을 받아 찬란한 산란을 일으킨다. 붕어다. 한 자가 되고도 남을 길이다. 녀석은 낚시꾼의 두 손바닥에 얹힌 채 황금빛 아침햇살을 온몸의 비늘로 받아내고 있다. 그 빛을 다시 낚시꾼을 향해 쏘아댄다. 녀석이 몸을 펄떡일 때마다 그의 가슴도 급하게 뛴다.
3. 상상
피라미, 구차하지 않은 강직함
낚시꾼이 물가에서 붕어에 못지않게 자주 만날 수 있는 물고기는 피라미일 것이다. 피라미는 붕어와 함께 우리나라 민물에서 개체수가 가장 많은 물고기 가운데 하나다. 피라미는 붕어보다 몸집이 훨씬 작다. 다 자란 녀석도 길이가 대개 20센티미터를 넘지 않는다. 길이만 짧은 것이 아니라 너비도 좁다랗다. 몸의 빛깔은 붕어보다 화려하고 밝은 편이다. 등은 갈색을 띠고 있으면서 배와 옆구리는 눈이 부실 정도로 광채가 나는 환한 은백색이다. 또 산란을 하는 시기에는 화려한 혼인색을 띤다. 마치 붉은 색이나 청록색의 컬러 물감으로 곱게 분단장을 한 듯하다. 붕어보다 몸 색깔이 더 맑고 화려하다.
그래서인지 피라미는 버들치나 각시붕어나 갈겨니 등과 같이 몸단장을 잘 하는 녀석들과 곧잘 어울려 다닌다. 붕어보다는 좀 더 말끔한 물에서 살아간다. 피라미는 강이나 호수에서 붕어와 함께 살아가기도 하지만 붕어에 비하면 혼탁함에 견디는 힘이 좀 약한 편이다. 얕고 좁은 실개천이나 여울에서 붕어는 볼 수 없어도, 머리를 상류를 향해 둔 채 은빛 광채를 번득이면서 헤엄치는 피라미 떼는 자주 볼 수 있다. 피라미는 하류의 물이 탁한 곳보다는 물 흐름이 빠른 상류의 투명한 곳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무 곳에나 함부로 몸을 의탁하지 않을 듯한 풍모가 피라미에서 느껴진다.
피라미는 성미가 까다롭고 급한 편이어서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다. 낚시질에 의해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붕어와는 달리, 몇 분 지나지 않아 곧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 만다. 물가에서 피라미를 손님으로 맞았을 때는 그 자태를 감상할 충분한 여유가 없이 곧바로 물 속으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 개똥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더 낫다는 속담 속의 구차한 삶이나 적당한 타협이 피라미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태도로 볼 때, 피라미는 외모만큼이나 깨끗한 성품을 지닌 물고기다.
그렇다면, 피라미는 생명력이 약한 물고기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피라미는 이 땅의 민물에서 붕어에 못지않게 많은 개체수를 가진, 생명력이 강한 물고기다. 강한 생명력은 아마 강한 군집성이나 번식력 덕분일 것이다. 피라미는 여느 민물고기와는 달리 물 속에서 늘 떼로 몰려다니며 집단생활을 한다. 무심코 시냇물에 밥풀 한 알을 던져 넣었을 때 곧바로 떼로 몰려드는 피라미들의 성화를 자주 경험한다. 이들은 천적의 공격에도 공동 대응을 한다. 또 번식시기에는 암수가 함께 강바닥의 자갈이나 모래를 깊이 파헤쳐 산란자리를 마련한다. 알이나 새끼를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의도다. 피라미는 단일 개체로서는 약해 보일지라도 종 전체로는 강한 생명력을 지녔다. 그래서 다른 물고기에 비하면 피라미는 세상에서 모조리 한꺼번에 사라질 위험이 덜한 편이다. 물론 인간의 횡포가 오래 계속된다면 피라미도 견디지 못해 사라질 수밖에 없겠지만.
요즘 세상에 피라미의 이런 독특한 성미와 자태를 감상하려는 낚시꾼들이 예상 밖으로 참 많다. 그들은 왜 피라미를 애써 찾아다니는 걸까? 아마도 혼탁한 물에서는, 사람에 의해 더렵혀진 환경에서는 숨을 쉬지 않겠다는 품성을 피라미로부터 느껴보려는 뜻이 아닐까. 또 낚시에 걸려들었을 때 이내 숨을 멈춰버리고 마는 피라미의 태도에서 어지러운 세상과 함부로 타협하지 않겠다는 듯한 강한 고집을 느껴 보려는 뜻이 아닐까. 마치 전장에서 적에게 생포되었을 때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가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듯한 비장하고 강직한 태도가 피라미로부터 풍겨난다. 불행하게도, 사람세상에서는 굴종을 강요하거나, 굴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피라미 꾼들에게는 어쩌면 피라미를 만난다는 것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 대쪽같은 선비를 만나는 듯한 설렘일 수도 있겠다. 대의명분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초개같이 버리려 했던 강직함이,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오늘날 새삼스레 더욱 소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피라미 꾼들에게 피라미낚시는 현실에서는 충족하지 못하는 그리움을 찾아나서는 길일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 피라미가, 어지럽고 시끄러운 세상이 싫어 틈만 나면 물가로 달려 나오는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젠 세상 어디에도 ‘피라미 같은 녀석’은 없다.
4. 들판 여행- 그리움을 찾아서
은어와 섬진강
섬진강 물은 해마다 초봄에 유난히 강한 은빛을 띠곤 했다. 얼음이 풀릴 무렵이면 물은 어디에 있든 늘 햇빛을 받아 번득이게 마련이다. 흐름을 종잡을 수 없는 봄바람에 수면이 촐랑거릴 때면 물은 굳이 섬진강이 아니라도 번득임이 요란하다. 하지만 섬진강은 초봄에는 여느 강보다 눈부심이 더욱 그윽하고 맹렬했다. 분명 눈부심이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그것은 번득임의 주인공이 수면 위로 떠다니지 않고 물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정지해 있지 않고 늘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물 속의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은빛 은어 떼였다. 은어가 바다로부터 돌아와 큰 무리를 지어 일제히 상류로 거슬러 오를 때면, 섬진강 물도 은빛을 띤 채 번득이면서 그 무리를 따라다니곤 했다.
은어의 나라, 섬진강. 이웃 지리산이 등성이까지 진달래꽃으로 벌겋게 달아오를 무렵이면, 남해바다에 집결해 있던 은어 떼들은 한꺼번에 일제히 섬진강을 향해 출발했다. 아무도 바다에서 강으로 내몰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해마다 그때쯤이면 그냥 그렇게 해왔다. 그래서 섬진강을 끼고 살아가는 하동이나 구례 사람들도 해마다 은어의 행렬을 맞으러 강가로 몰려나가곤 했다. 그들도 오랜 옛날부터 그렇게 해왔다. 누군가로부터 내몰려 물가로 나간 게 아니다. 강원도 남대천 사람들이 동해바다로부터 돌아오는 연어를 연례행사로 맞이하곤 했던 것처럼.
봄에 섬진강으로 돌아온 은어는 가을에 번식을 한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은어는 곧 근해의 바다로 내려가 겨울을 보낸 뒤, 이듬해 봄에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되돌아온다.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어 가을에, 암컷이 알을 낳자마자 수컷이 곧바로 정자를 쏟아냄으로써 수정을 한다. 번식을 마치면 암수 모두 자신의 일생을 마친다. 곧, 은어는 한해살이다.
섬진강을 따라 하구에서 상류로 올라가다 보면, 은어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뜨인다. 은어낚시는 여느 낚시와는 사뭇 다르다. 은어의 생활사나 활동습성을 마음속 깊이 이해하는 지혜가 없으면 낚시를 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섬진강 은어낚시는 예로부터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성행했다. 요즘은 지역주민 말고도 은어낚시 동호인들이 꽤 생겨났다. 낚시는 주로 은어가 바다에서 강의 하구를 거쳐 상류로 떼 지어 올라올 때부터 시작돼 산란과 방정, 곧 번식 직전까지 이뤄진다. 봄과 여름이 낚시철인 셈이다. 예전에는 낙동강에서도 은어낚시가 성행했다지만 오염이나 개발 탓에 은어도 낚시도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섬진강과, 동해로 흐르는 일부 작은 하천에서만 낚시 명맥이 겨우 이어져 내려온다. 골재 채취로 인한 서식처 훼손, 댐과 보의 건설로 인한 물 흐름 단절, 수질 오염 등이 원인이 되어 섬진강 은어도 삶이 예전 같지 않다. 근래 섬진강에서는 인공 부화한 새끼 은어를, 남대천의 연어처럼, 강으로 풀어주기도 한다. 바다로 나갔다가 봄에 다시 강으로 돌아와 주기를 기대하면서.
은어낚시는 다른 낚시에 비해 기법이 매우 독특하다. 낚시를 하지 않고 그냥 낚시꾼 곁에서 구경만 해도 신비로움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은어는 물 속 돌의 표면에 자라는 이끼를 갉아먹는 습성이 있다. 가끔 실지렁이 같은 꿈틀 벌레를 먹기도 하지만 주식은 돌에 들러붙은 미세한 이끼다. 그래서 이끼가 자라는 큼지막한 돌 몇 개로 이뤄진 틈바구니가 보금자리면서, 아울러 먹이를 구하는 공간이다. 은어는 이 공간을 다른 종의 물고기에게는 물론, 같은 종의 은어에게도 절대 양보하지 않는 집착을 보인다. 다른 은어가 그 공간을 침범하면 사납게 공격하면서 텃세를 부린다. 섬진강 사람들은 늘 주인행세를 하려는 이 텃세를 이용해 오래전부터 은어낚시를 해왔다.
은어는 몸에서 달콤하고도 신선한 수박향기가 난다. 그래서인지 서양 사람들도 은어를 ‘달콤한 물고기’라 부른다. 돌의 이끼를 먹는 은어에서만 달콤한 향기가 나지, 인공사료를 먹는 양식장 은어에서는 이 향기가 좀처럼 풍기지 않는다고 한다. 은어는 그 이름으로도, 생김새로도, 향기로도, 삶의 태도로도 참 아름다운 물고기다. 그런데 자신의 먹이 공간을 이웃에 양보하지 않으려는 강한 집착, 그 텃세 하나 때문에 사람에게 낚이고 마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녔다. 은어의 습성을 깊이 이해해 독특한 낚시문화를 일구어 온 섬진강 사람들. 그들의 삶에서 지혜와 멋이 물씬 풍긴다. 은어가 예전처럼 다시 많아져야 사람들의 지혜와 멋도 더욱 넉넉하게 되살아날 텐데.
5. 반성
바다 메우기
부남호와 간월호는 쌍둥이 호수다. 나란히 이웃해 있는데다 천수만 간척 사업으로 1995년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인공 담수호다. 사람들은 1980년대 중반 천수만에 물막이 공사를 벌여 천수만에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그 이후 천수만 바다를 흙으로 메우기 시작해 1만 3천여 헥타르의 드넓은 논을 만들어냈다. 부남호와 간월호는 그 논에 물을 대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담수호다.
천수만 들녘은 겨울철새의 낙원으로 소문나 있다. 간척으로 만들어낸 드넓은 논이 철새들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가창오리 같은 수많은 철새들이 해마다 겨울 한 철을 쉬었다가니 이곳 들녘은 철새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터전이다. 철새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가을걷이를 끝낸 겨울에 벼 낟알 같은 먹잇감이 논바닥에 곳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라 한다. 벼 낟알은 논에서 나왔고, 논은 부남호와 간월호의 물로 경작되니 철새들을 불러 모으는 원천은 부남호와 간월호인 셈이다.
지금까지 부남호와 간월호는 논에 물을 대면서 벼를 키워 사람뿐 아니라 철새들까지 먹여살려왔다. 그런데 최근 수년 사이에 수질이 자꾸 나빠지고 있다. 상류의 하천으로부터 생활폐수나 공장폐수나 축산폐수가 자꾸 흘러들어 이들 호수에 갇힌 채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염이 날로 심해지자 해당 지방자치단체는 호수 바닥에 쌓인 고약한 물질들을 긁어내는 준설사업을 벌일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잖아 벼 재배를 위한 농업용수로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 두 호수는 수십 년 동안 바다와 통하지 않은 채 갇혀 있다 보니 물이 점점 오염될 수밖에 없었다. 물이 탁해지다보니 오염에 잘 견디는 잉어나 붕어 이외에 다른 물고기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가끔씩 호수의 수문을 열어 물을 바다로 내보내지만 오염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수문 열기는 호수의 오염을 좀 늦추는 시간벌기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오히려 수문을 열 때마다 오염된 물이 한꺼번에 흘러나가 바다를 더럽히기 일쑤다. 부남호나 간월호에서 물고기의 입질이 가장 활발할 때는 수문을 열어 물을 내보낸 이튿날이라 한다. 특히 여름철 홍수에 대비해 오래 묵은 물을 한꺼번에 빼내고 새로운 물을 담았을 때 물고기들이 입질을 자주 한단다. 잉어든 붕어든, 물고기들은 물이 맑아져야 먹이활동을 활발히 한다는 얘기다. 두 호수는 물이 더 나빠지면 철새들을 불러 모으지 못할지도 모른다. 물고기 같은 물 속 생명들도 점차 사라질지 모른다. 낚시꾼들도 발길을 끊어 더 이상 잉어낚시터로서의 유명세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물론 서해안에는 인공 호수가 부남호나 간월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북으로 긴 해안선을 따라 바다를 메워 조성한 인공 담수호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사람들이 총체적으로 배고팠던 시절,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생산하려고 사람들이 바다로까지 경작지를 넓혀야 했던 흔적들이다. 바다를 메워 논을 만들었다 해서 무조건 벼를 재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벼는 파종에서부터 이삭이 여물 때까지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간척지 논 주변에는 반드시 물을 가두기 위한 호수를 만들어야 했다. 또 바다를 메워 만든 논의 토양은 소금기가 많게 마련이어서, 소금기를 씻어낼 다량의 민물이 필요했다. 서해안의 호수들은 대부분 바닷물을 밀어낸 자리에 만들어진 민물 저수지다. 방조제라는 높고 긴 둑을 쌓아 바닷물과 민물의 소통을 막고 있는 인공구조물이다.
간척지 논은 주로 바다의 얕은 곳을 메워 만들어졌다. 그래서 갯벌이 사라졌다. 간척은 곧 갯벌을 메워 없애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갯벌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도 간척사업과 함께 사라졌다. 특히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의 갯벌은 자주 간척의 표적이 되곤 했다. 강으로부터 민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생태계 파괴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시화호 간척사업이나 새만금 간척사업도 넓은 육지와 호수를 만들어냈지만 바닷물과 민물의 소통을 차단했다. 드넓은 갯벌에는 바닷물과 민물이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있다. 갯벌은 방조제에 갇힌 탓에 바닷물을 만나지 못해 썩어간다. 민물도 바다로 흘러나가지 못한 채 호수에 갇혀 썩어간다. 갯벌에 기대어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이 이미 사라졌고, 앞으로도 사라질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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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람들은 바다와 갯벌을 메우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웬만큼 먹고 살 만해져 원초적 배고픔에서 벗어났다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바다와 갯벌을 메우고 있거나 메울 궁리를 하고 있다. 지역균형발전이란 논리도 간척의 명분으로 자주 등장한다. 수도권사람 지방사람 차이 없이 균형 있게 잘 살아야 한단다. 옳은 말이다. 다만 갯벌과 생명의 입장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경기갯벌 인천갯벌 충청갯벌 전라갯벌 가리지 말고 균형 있게 메워, 생명을 골고루 없애자는 뜻과 무엇이 다를까.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말하면서 왜 미물들의 삶을 배려할 줄을 모를까.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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