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산문 선집『다산의 마음』. 그 사상의 비판성과 혁신성에 주목하면서, 다산의내면과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글들을 모아 엮었다. 특히 자기성찰적 존재로서의 다산, 고뇌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다산에 주목하고 있다. 문학,철학, 정치, 경제, 역사, 과학 등 광범한 영역에 걸쳐 저술을 남긴 다산의 인간됨과 사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산은 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좌절과 고통, 불안과 고독을 겪으면서도 자신과 자신의 삶을돌아보았다. 또한 평생 민중의 편에 서서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예리하게 비판하며,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른한편으로 다산은 꽃과 나무, 산과 물을 즐기며 가까운 사람들과 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화려한 것보다는 고요하고 맑은 정취를 좋아했으며,교류한 사람들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특히 유배 기간에는 자녀들에게 마음가짐과 학문하는 방법에 대한 장문의 편지를 보냈고, 형 정약전에게도일상생활이나 학문적 성과 등에 대한 편지를 보냈다.
■ 저자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이자 사상가로서, 주체적이고 합리적인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다방면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남겼다.18년의 유배 생활 동안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를 비롯한 500여 권의 책을 썼으며, 평생에 걸쳐탁월한 시와 산문 작품을 남겼다.
■ 편역 박혜숙(朴惠淑)
서울대학교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인하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시조의 생태미학」 「고려속요의여성화자」「여성영웅소설과 평등, 차이, 정체성의 문제」 등이 있으며, 저서로 『형성기의 한국 악부시 연구』, 편역서로 『사마천의역사인식』『부령을 그리며 사유악부선집』 등이 있다.
■ 차례
간행사
책머리에
나를 찾아서
"나"를 지키는 집 | 좌천의즐거움과 괴로움 | 퇴계 선생을 우러르며 | 관아(官衙)를 새로 짓고 | "여유당(與猶堂)"이라 이름 붙인 뜻 | 네 가지의 마땅함 | 떠 있는삶 | 유배 생활 12년 |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 가진 것은 덧없다 | 어떻게 살 것인가 | 바로 "이"(斯)
파리를 조문(弔問)한다
목민관은 누구를위해 있는가? | 토지는 균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 토지의 공동 소유를 제안함 | 선비도 생산적인 노동을 해야 한다 | 신하가 임금을 몰아낼수 있는가? | 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 음악은 왜 필요한가? | 참된 시(詩)란? | 정치 잘하는 법 | 술자리에서 사람 보는 법 |파리를 조문한다 | 백성들이 죽어 가고 있다
가을의 음악
겨울 산사(山寺)에서 | 가을맑은 물 | 나의 아름다운 뜰 | 벽 위의 국화 그림자 | 부쳐 사는 삶 | 임금님의 깊은 마음 | 내가 바라는 삶 | 취한 사람, 꿈꾸는 사람| 집 | 가을의 음악 | 근심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 바쁘지만 바쁘지 않은
우리 농(農)이가 죽다니
내 어린 딸 |우리 농이 | 자식 잃은 아내 마음 | 아아, 둘째 형님 | 그리운 큰형수님 | 아내의 치마폭에 쓰는 글
밥 파는 노파
백성 이계심 | 인술을 펼친몽수 | 효자 정관일 | 화악 선사(華嶽禪師) | 기이한 승리 | 밥 파는 노파
멀리 있는 아이에게
첫 유배지에서 | 오직독서뿐 | 새해 첫날 |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마라 | 가을 하늘을 솟아오르는 한 마리 매처럼 | 두 글자의 부적 | 재물을 오래 간직하는 법 |천하의 두 가지 큰 기준 | 우리 집안의 가풍 | 사치하지 마라
해설
정약용 연보
작품 원제
찾아보기
다산의 마음
나를 찾아서
‘나’를 지키는 집
수오재(守吾齋), 즉 ‘나를 지키는 집’은 큰형님이 자신의 서재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 그 이름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며 “나와 단단히 맺어져 서로 떠날 수 없기로는 ‘나’보다 더한 게 없다.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한들 ‘나’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라고 생각했다. 장기로 귀양 온 이후 나는 홀로 지내며 생각이 깊어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 만물 중에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밭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집은 지킬 필요가 없다. 내 동산의 꽃나무와 과실나무들을 뽑아 갈 수 있겠는가? 나무뿌리는 땅속 깊이 박혀 있다. 내 책을 훔쳐 가서 없애 버릴 수 있겠는가? 성현(聖賢)의 경전은 세상에 널리 퍼져 물과 불처럼 흔한데 누가 능히 없앨 수 있겠는가. 내 옷과 양식을 도둑질하여 나를 궁색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천하의 실이 모두 내 옷이 될 수 있고, 천하의 곡식이 모두 내 양식이 될 수 있다. 도둑이 비록 훔쳐 간다 한들 하나 둘에 불과할 터, 천하의 모든 옷과 곡식을 다 없앨 수는 없다. 따라서 천하 만물 중에 꼭 지켜야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유독 이 ‘나’ 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며 출입이 무상하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지만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혹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으로 겁을 주면 떠나가며, 질탕한 음악 소리만 들어도 떠나가고, 미인의 예쁜 얼굴과 요염한 자태만 보아도 떠나간다. 그런데 한번 떠나가면 돌아올 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 중에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니 꽁꽁 묶고 자물쇠로 잠가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나’를 허투루 간수했다가 ‘나’를 잃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과거 시험을 좋게 여겨 그 공부에 빠져 있었던 것이 10년이다. 마침내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어 사모관대에 비단 도포를 입고 백주 대로를 미친 듯 바쁘게 돌아다니며 12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어 친척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한강을 건너고 문경 새재를 넘어 아득한 바닷가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야 멈추게 되었다. 이때 ‘나’도 땀을 흘리고 숨을 몰아쉬며 허둥지둥 내 발뒤꿈치를 쫓아 함께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말했다.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왔는가? 여우나 도깨비에게 홀려서 왔는가? 바다의 신이 불러서 왔는가? 너의 가족과 이웃이 소내에 있는데. 어째서 그 본고장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멍하니 꼼짝도 않고 돌아갈 줄을 몰랐다. 그 안색을 보니 마치 얽매인 게 있어 돌아가려 해도 도망갈 수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나’를 붙잡아 함께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무렵, 내 둘째 형님 또한 그 ‘나’를 잃고 남해의 섬으로 가셨는데, 역시 ‘나’를 붙잡아 함께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유독 내 큰형님만이 ‘나’를 잃지 않고 편안하게 수오재에 단정히 앉아 계신다. 본디부터 지키는 바가 있어 ‘나’를 잃지 않으신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큰형님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수오’라고 붙이신 까닭일 것이다.
파리를 조문(弔問)한다
술자리에서 사람 보는 법
황해도관찰사 이공(李公) 의준(義駿)이 부용당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여기에 참석한 수령이 10여 명이었다. 나는 사관(査官)으로 해주에 갔는데, 이공이 편지를 보내, “지금 연꽃이 한창이라 모임을 마련했으니, 자리를 함께하였으면 하오”라며 초대하였다. 내가 연회에 도착하자 이공이 술을 권하며 말했다. “이곳은 선화당(宣化堂)과는 다르니, 오늘은 마음 편히 즐기도록 하오.”
나는 말했다. “참으로 좋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관찰사가 지방 수령들의 잘잘못을 살피기에는 선화당보다 이곳이 낫다고 생각됩니다. 공께서는 그 까닭을 아시는지요?”
이공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령들이 선화당에 오면 걸음걸이가 단정하고 얼굴빛은 엄숙하며 말은 삼가고 행동은 공손하게 예의에 맞아, 한 사람도 훌륭한 관리가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부용당과 같은 장소에서는 연꽃 향기가 진동을 하고, 버들가지는 늘어졌으며, 죽순과 고기가 상에 가득하고, 곱게 꾸민 기생들이 모여 있으며, 좋은 술을 마시고, 좋은 안주를 배불리 먹고, 상관은 좋은 낯빛을 하고 있어, 거침없이 즐기며 담소를 합니다. 이때 떠들고 웃으며 제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를 살펴보면 그 잡스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필시 유능하지만 가볍게 법을 어기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아첨하며 상관을 칭송하고 우러르며 빌붙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그 비루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필시 면전에서는 아첨을 잘하지만 백성들을 속이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기생과 눈짓을 나누고 뜻을 전하면서 이성에 대한 정을 못잊는 사람이 있으니, 이를 살펴보면 그 나약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필시 직무에 게으르면서 요구와 청탁은 많을 것입니다. 술고래처럼 퍼마시며 만취하고도 술을 사양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그 혼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필시 술로 인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며 형벌을 남발할 것입니다. 이와 같으니 수령들을 살핌에 있어 선화당보다 이곳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파리를 조문(弔問)한다
경오년(1810) 여름에 엄청난 파리떼가 생겨나 온 집안에 가득하더니 점점 번식하여 산과 골을 뒤덮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도 엉겨 붙고, 술집과 떡집에도 구름처럼 몰려들어 우레 같은 소리를 내었다. 노인들은 괴변이라 탄식하고, 소년들은 분을 내어 파리와 한바탕 전쟁을 벌이려고 했다. 혹은 파리통을 설치해 잡아 죽이고, 혹은 파리약을 놓아 섬멸하려 했다. 나는 이를 보고 말했다.
“아아 이 파리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 변해서 이 파리가 되었다. 아아, 이들은 기구하게 살아난 생명들이다. 슬프게도 작년에 큰 기근을 겪었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를 겪었다. 그로 인해 전염병이 유행하였고, 가혹하게 착취까지 당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시신이 쌓여 길에 즐비했으며, 시신을 싸서 버린 거적이 언덕을 뒤덮었다. 수위도 관도 없는 시신 위로 따뜻한 바람이 불고, 기온이 높아지자 살이 썩어 문드러졌다. 시신에서 물이 나오고 또 나오고, 고이고 엉기더니 변하여 구더기가 되었다. 구더기떼는 강가의 모래알보다 만 배나 많았다. 구더기는 점차 날개가 돋아 파리로 변하더니 인가로 날아들었다. 아아, 이 파리들이 어찌 우리 사람들과 마찬가지 존재가 아니랴. 너의 생명을 생각하면 눈물이 줄줄 흐른다. 이에 음식을 마련해 파리들을 널리 불러 모으나니 너희들은 서로 기별하여 함께 와서 이 음식들을 먹어라.”
이에 다음과 같이 파리를 조문(弔問)한다.
가을의 음악
가을 맑은 물
용산의 서쪽 마포에 ‘추수정(秋水亭)’, 즉 ‘가을 물’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는데, 정씨(鄭氏)가 산다. 정자가 강가에 있으므로 사시사철 보이는 것이 모두 물인데, 유독 ‘가을 물’이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정씨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전에 살던 사람이 이름 붙인 것을 그대로 따라 부를 뿐, 그 뜻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정자에 있어 보면 가을 물이 가장 좋습니다. 봄에는 물고기?소금?땔나무 등을 파는 시장이 서며, 밀려온 진흙이나 거품 같은 더러운 것들이 뒤섞여 강기슭에 쌓입니다. 모래톱이 깨끗하지 못한데다 배들도 많이 모여듭니다. 이때는 강물이 좋은 줄을 모릅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면 장마로 불어난 물이 마을의 더러운 것들을 깨끗이 쓸어 보냅니다. 그런 뒤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나무에 단풍이 들고, 푸른 하늘은 맑게 확 트입니다. 강 언덕과 모래사장의 불어났던 물이 비로소 줄어들고 구름 떠다니는 하늘 아래 밝은 모래는 맑게 빛납니다. 물새는 강가로 날아들고, 어부들의 노래가 포구에 울려 퍼집니다. 이때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끝없는 강 물결이 아득히 펼쳐져 있어 맑고 깨끗하여 즐길 만 합니다. 그래서 정자의 이름을 ‘가을 물’이라 한 게 아닐는지요.”
내가 말하였다. “그렇다. 자네의 말이 옳다. 그러나 사물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모두 내 마음에 달린 것이다. 방탕한 풍류객에게 이 정자를 주면, 강 버들과 물가 꽃이 아름다울 때면 기생과 악사들을 데려다 놓고 놀 것이다. 그런 사람은 가을 물을 반드시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이익만을 추구하는 욕심 많은 장사꾼이라면 건어물 냄새를 향기처럼 여길 터이니, 어느 겨를에 이 정자에 앉아 가을 물을 감상하겠는가? 오직 맑은 선비라야 가을 물을 좋아할 것이다. 자네는 노력하기 바란다.” 그러고는 함께 말한 것을 글로 써서 추수정기(秋水亭記)로 삼는다.
우리 농(農)이가 죽다니
우리 농이
농(農)이는 내가 곡산(谷山)에 있을 때 잉태했다. 기미년(1799) 12월 2일에 태어나, 임술년(1802) 11월 30일에 죽었다. 열꽃이 피더니 마마가 되고, 마마가 종기로 되었던 것이다. 나는 강진의 유배지에서 글을 지어 농이의 형에게 보내, 무덤에 가서 곡(哭)하고 이 글을 읽게 하였다. 농이를 곡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네가 이 세상에 왔다가 떠날 때까지가 겨우 3년인데, 나와 헤어져 산 게 2년이나 되는구나. 사람이 60년을 산다면, 40년 동안이나 아버지와 떨어져 산 셈이니, 참으로 슬프구나. 네 모습은 깎아 놓은 듯 빼어났다. 코 왼쪽에 조그만 검은 점이 있고, 웃을 때면 양쪽 송곳니가 드러나곤 했다. 아아, 네 얼굴이 생각나 사실대로 네게 말한다. (집에서 온 편지를 보니, 그 생일날에 아이를 묻었다고 한다.)
복암이 항상 말하길 “요절한 자녀가 있으면, 그 생년월일?이름?자?모습과 죽은 연월일까지 자세히 써 놓아 나중에도 알 수 있게 해서 그 살았던 흔적이 남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매우 어진 말이다.
내가 경자년(1780) 가을에 예천의 관사에 있을 때, 아이 하나를 채 낳지도 못하고 잃었다. 그리고 신축년(1781) 7월에 아내가 임신 중 학질에 걸려 딸아이를 여덟 달 만에 조산하여 나흘 만에 잃었다. 미처 이름도 못 짓고 와서(瓦署)의 언덕에 묻었다.
그 다음에 무장이와 문장이를 낳았는데, 다행히 제대로 자랐다. 그 다음이 구장이고, 그 다음이 딸아이 효순인데, 순하게 태어난 걸 효도라 여겨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구장이와 효순이에게는 모두 광명이 있지만, 실제로 글을 땅에 묻지는 않았고 책에만 기록해 두었다. 그 다음에 딸 하나를 얻었는데, 지금 열 살이 되어 이미 열병을 두 번이나 넘겼으니, 아마도 요절은 면하지 않았나 싶다. 그 다음이 삼동인데, 곡산에서 마마로 죽었다. 그때 아내는 임신 중이었는데 슬픔 중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열흘이 지나 그 아이도 마마에 걸려 며칠 만에 죽었다. 그 다음이 농이다. 삼동이는 병진년(1796) 11월에 태어나서 무오년(1798) 9월에 죽었다. 그 다음 아이는 이름이 없었다. 구장이와 효순이는 마재의 언덕에 묻었고, 삼동이와 그 다음 아이도 마재의 산기슭에 묻었으니, 농이도 역시 마재의 산기슭에 묻었을 것이다. 모두 6남 3녀를 낳았는데, 살아남은 아이가 2남 1녀이고, 죽은 아이가 4남 2녀이니, 죽은 아이가 살아남은 아이의 두 배다. 아아, 내가 하늘에 죄를 지어 이처럼 잔혹하구나.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밥 파는 노파
밥 파는 노파
어느 날 저녁, 주인 노파와 한담을 나누었다. 노파가 갑자기 물었다. “영감님께서는 글을 읽으셨으니, 이 일이 이치에 맞는 건지요? 부모의 은혜는 같지만, 어머니의 노고가 더욱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옛 성인이 교화를 펴면서 아버지는 중요하게 여기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겼습니다. 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하였고,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입는 상복도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격을 낮추었습니다. 아버지의 친족은 일가가 되게 하였고, 어머니의 친족은 도외시하였습니다. 이건 너무 치우친 게 아닌가요?”
내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옛날 책에도 ‘아버지는 처음 나를 생겨나게 한 사람’이라고 하였소. 어머니의 은혜가 비록 크지만, 아버지의 은혜는 하늘이 만물을 처음 있게 한 것과 같으니 그 은혜가 더욱 큰 게지요.”
노파가 말했다. “영감님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해 보니, 풀과 나무에 비유하자면 아버지는 씨앗이요, 어머니는 땅입니다. 씨앗을 땅에 뿌리는 일은 지극히 미미한 일이지만, 땅이 씨앗을 길러 내는 공덕은 매우 큰 것입니다. 밤톨은 밤나무가 되고 볍씨는 벼가 되니, 온전한 모습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땅의 기운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類)가 나누어지는 것은 모두 씨앗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니, 성인이 교화를 펴고 예(禮)를 제정한 것은 생각건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는 노파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크게 깨달았고, 삼가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밥 파는 노파가 천지간의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미묘한 뜻을 말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매우 기이하고도 기이하도다.
멀리 있는 아이에게
첫 유배지에서
몹시 기다리던 참에 편지를 받으니, 마음에 무척 위로가 된다. 무(武)는 아직도 병이 다 낫지 않았으며, 어린 딸은 점점 쇠약해진다 하니 마음이 괴롭고 염려가 된다. 나는 약을 먹은 후로 좀 나아졌다. 마음이 불안한 증상이나 몸을 곧게 펴지 못하는 증상 등은 다 나았다. 왼팔은 아직 예전 같지 않지만 차차 좋아질 것이다. 다만 이 달에 들어서는 공사(公私) 간에 애통한 일을 당하여 밤낮으로 슬피 사모하고 있다. 누가 이런 일을 초래했는지. 길게 적지 않는다. - 6월 17일
날짜를 헤아려 보니 82일 만에 너의 편지를 받았구나. 그동안 턱 밑에 준치 가시 같은 흰 수염이 일고여덟 개나 생겼다. 네 어머니가 병이 날 줄은 짐작하고 있었다. 큰며느리도 학질을 앓은 뒤라 모습이 더욱 초췌해졌겠구나. 생각하면 견디기 어렵다. 더구나 신지도에 계신 둘째 형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반년 동안이나 소식이 끊어졌으니 이러고도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나는 육지에 있어도 괴로움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섬에서야 어떻겠느냐? 형수님의 정경도 측은하니, 너는 그분을 어머니처럼 섬겨야 할 것이다. 육가도 친형제처럼 대하여 극진히 쓰다듬고 보살펴야 한다. 내가 밤낮으로 축원하는 것은 오로지 문아(文兒)가 독서하는 것뿐이다. 문아가 선비의 마음자세를 갖춘다면 내가 다시 무슨 한이 있겠느냐?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책을 읽어 아비의 간절한 마음을 저버리지 말아 다오. 팔이 시큰거려서 이만 줄인다. - 9월 3일
재물을 오래 간직하는 법
(……) 세상의 옷이나 음식, 돈이나 물건 등은 모두 헛되고 부질없는 것이다. 옷은 입으면 해지고, 음식은 먹으면 썩어 버리며, 재물은 자손에게 물려줘도 끝내 흩어지고 사라져 버린다. 오직 못사는 친척이나 가난한 벗에게 나눠 주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의돈이 창고에 쌓아 두었던 보물은 흔적도 없지만, 소광이 하사 받은 황금을 친구나 친척들과 함께 누린 일은 아직도 유명하다. 석숭의 별장에 있던 호사스런 장막은 티끌로 변했으나, 법중엄이 배에 가득 실은 보리를 어려운 친구에게 다 준 일은 아직도 명성이 높다. 그 까닭은 무엇이겠느냐?
유형적인 것은 쉽게 부서지지만, 무형적인 것은 없애기 어려운 법이다. 자신의 재물을 자신이 사용하면 그것은 유형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재물을 남에게 베풀면 그것은 정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질을 유형적으로 향유하면 장차 해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무형적으로 향유하면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재물을 깊이 감추려면 남에게 베푸는 것이 가장 좋다. 도둑이 훔쳐 갈 걱정도 없고 불에 타 버릴 염려도 없으며, 소나 말에 실어 힘들게 나르지 않아도 거뜬히 간직할 수 있고, 몸이 죽은 뒤에도 천 년토록 이름이 전해지니 세상에 이처럼 큰 이익이 있겠느냐? 재물이란 단단히 움켜쥐면 움켜쥘수록 더욱더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메기와 같은 것이다.
?
저물녘에 숲 근처를 거닐다가 우연히 한 어린아이를 보았다. 다급하게 소리쳐 울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마치 누군가가 무수한 송곳으로 배를 찌르고 절굿공이로 마구 가슴을 때리는 듯했다. 너무나 참담하고 절박하여 잠깐 사이에 거의 죽을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나무 밑에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다고 했다. 아아, 천하에 이 어린아이처럼 울지 않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관직을 잃고 세력이 꺾인 사람, 손해를 보고 재물을 잃은 사람, 자식을 잃고 너무 슬퍼 거의 실성한 사람. 이 모두가 달관한 경지에서 본다면 밤 한 톨에 울고 있는 것일 따름이다. (……)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