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정조대왕의 일생을 놓고 보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단지 서막에 불과하다.사도세자와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영조로부터 끊임없이 성군의 자질을 시험받는가 하면, 외척의 모략과 암살 위협 속에서 우여곡절 끝에 임금의 자리에오른다. 그 가운데서도 왕조를 파국으로 몰아 간 파당정치를 해소하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이루는가 하면, 부국강병으로 앞날을 도모하는 성군이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정조대왕이다.
■ 저자
김이영 - 방송작가. 1974년 서울에서태어났으며, 성균관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2001년 SBS 단막극으로 데뷔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드라마 <우리 집> <내사랑 팥쥐>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등이 있다.
류은경 - 소설가. 1971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으며,서울예술대학을 졸업했다. ‘작가세계 신인소설상’으로 데뷔했으며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2006 젊은 소설’에 선정된 바 있다. 주요작품으로 「가위」 「배꼽」 「맨홀 안의 남자」 「누군가 다녀갔다」 「부활 소나타」 「홈, 스위트 홈」 등이 있다.
이병훈 - PD. 1944년 태어났으며 1974년<113 수사본부>로 데뷔한 이래 MBC TV 드라마를 대표하는 PD가 되었다. 주요 작품으로 드라마 <허준><상도> <대장금> <서동요> 등이 있다. 1975년 방송윤리상(제3교실)을 시작으로 문공부장관상, 방송대상TV부문 연출상, 한국 방송협회 방송대상 우수 작품상, 국회 대중문화 미디어상, 한국 방송PD연합회 올해의 프로듀서상, 한국 방송협회 방송대상드라마 부문 작품상, 제40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연출상, 여의도클럽 제6회 방송인상,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최완규 - 방송작가. 1964년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으며,1993년 MBC 베스트극장 극본 공모에 당선하여 데뷔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드라마 <종합병원> <야망의 전설><허준> <상도> <올인> <주몽> 등이 있다. 1994년 MBC 방송대상 작가상, 2000년 드라마‘허준’으로 한국 방송대상 작가상, 2003년 드라마 <올인&&으로 제30회 한국 방송대상 작가상, 2006년 MBC 연기대상 특별상,2007년 백상예술대상 작가상을 수상했다.
■ 차례
운명의 뒤주
깊은 밤의만남
무덕이라는 아이
화각함
궁궐 밖으로
내 이름은 산이다
전하지 못한 그림
환궁
세자 아닌세자
세손궁의 무기고
천보총
사라진 자객
이산 정조대왕
운명의 뒤주
농밀한 먹물을 온통 칠해 놓은 듯 새벽 하늘은 푸른 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창경궁의 찬연한 단청마저 음울한 잿빛으로 물들인 구름은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기세였다. 그러나 며칠째 비는 내리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서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고 있는 누군가처럼 구름도 풀어야 풀 것을 풀지 않고 있었다. 간혹 무거운 구름을 비집고 바람 한 줄기가 불어왔다. 하지만 창경궁을 감돌고 있는 불길한 적막에 겁이라도 먹은 듯 나뭇잎 하나 흔들지 못하고 금세 사라졌다. 바람마저 떠난 창경궁은 괴괴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고요한 적막을 조심스럽게 갈라놓는 소리가 들린 것은 새벽이 좀더 깊어졌을 무렵이었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주저하듯 망설이듯, 잠깐 이어졌다. 이내 잦아들고 또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그 소리는 음산한 궐 한의 공기 때문에 더욱 기괴하게 들렸다. 그 괴이한 소리의 진원지는 놀랍게도 휘령전 뜨락이었다. 휘령전이 어디인가.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던 곳, 바로 그곳이 아니던가. 그러나 무언가 마찰하는 듯한 소리가 분명히 휘령전의 뒤주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뒤주는 달빛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뜨락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앞에 검은 형체 무엇이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손을 놀렸다.
“서두르게, 벌써 인시가 되었어.”
검은 형체들 뒤에 서서 불안하게 오가던 또 다른 형체가 재촉했다. 어느덧 저 멀리 동편 하늘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돋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검은 형체가 새벽빛 속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사모에 흑단령을 입은 동궁전의 내시들이었다.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내시들의 손에는 작은 톱이 들려 있었다. 목숨보다 아끼는 누군가를 위해 동궁전의 내시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뒤주에 구멍을 뚫는 중이었다.
서걱서걱… 서걱서걱…
톱을 한번 움직일 때마다 내시들의 흑화로 톱밥이 하얗게 떨어져 내렸다. 톱밥이 쌓여갈수록 내시들의 사모와 흑단령 또한 급하게 앞뒤로 움직였다. 그때마다 추임새를 넣듯 허리의 흑각대가 톱자루와 부딪치며 달그락거렸다.
“아직 멀었는가? 한시가 급해.”
허리에 삽금대를 찬 동궁전 내시감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바스락!
어디선가 마른 풀 밟은 소리가 들렸다.
“쉿! 멈추게!”
비장한 낯빛으로 연신 주위를 살피던 내시감이 다급하게 속삭였다. 톱질하던 손을 멈춘 내시들이 겁먹은 눈으로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소인입니다. 상전어른.”
노래기처럼 몸을 웅크린 내시 하나가 어둠을 밟으며 뒤주로 다가왔다. 내시감이 망을 보라 일러 두었던 내시였다.
“어찌 되었는가?”
“명당전 쪽에도 금군은 커녕 쥐새끼 한 마리 없습니다.”
무슨 영문인지 금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뒤주에 접근은 했지만 언제 금군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내시의 대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내시감은 곧바로 긴장의 끈을 조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네. 속히 서둘러.”
매서운 눈초리가 주위를 살피는 내시감의 옷자락 사이로 날카로운 금속이 얼핏 보였다.
“상전어른, 뚫렸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애를 태우던 나무판이 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자 내시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하… 저하…!”
뚫린 구멍을 향해 내시감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내시감의 마음을 먼저 전하려는 듯 사모가 구멍 가까이 가 닿았다.
“저하, 소인입니다. 내선이옵니다.”
흡사 그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것처럼 구멍에다 얼굴을 바짝 갖다 붙이며 내시감은 다시 한 번 말했다. 내시감의 목소리가 뒤주의 모서리를 꽉 잡은 그의 손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저하, 세자저하….”
“… ….”
뒤주 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시감의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설마 벌써 숨을 거두신 것이….”
두려움이 해일처럼 덮쳐왔다. 내시들은 창백해진 눈으로 뒤주를 바라보았다. 작은 구멍 사이로 손가락이 힘겹게 내밀어진 것은 그때였다.
“…내…선…이냐….”
“예, 저하! 소인, 내선이옵니다. 저하, 옥체는… 옥체는 어떠하십니까?”
슬픔에 젖어 있던 내시감이 물을 만난 고기처럼 풀썩 솟구쳤다.
“나는… 괜찮다….”
그러나 괜찮지 않아 보였다. 구멍에 힘없이 걸쳐진 하얀 손이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그 손을 보자 뜨거운 덩어리가 내시감의 배꼽밑에서부터 목울대로 울컥 올라왔다. 바람도 통하지 않는 한여름의 뒤주 안, 그 안은 얼마나 좁고 또 얼마나 덥겠는가. 그 안에서 팔다리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더위와 주림이 시달렸을 세자를 생각하니 내시감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한가로이 눈물이나 흘리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저하, 벌써 엿새째 곡기조차 못 드셨습니다. 어찌 저하께 이런 망극한 일이 생긴단 말입니까? 저하, 여기 물이… 물이 있사옵니다. 이 물을….”
내시감은 서둘러 단령 자락을 헤집어 벌렸다. 그리고 청심환을 탄 물이 들어 있는 대나무 물통을 꺼냈다.
“…내선아, 그보다 급한 것이 있다…. 아바마마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 듣고 있느냐…? 내가 죽기 전에 꼭… 전해야 할 것이 있어….”
물통을 밀어낸 장헌세자가 내시감의 손을 부여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예, 저하. 하명하시오소서. 전하겠사옵니다. 소인이 목숨을 걸고 주상전하께….”
그 순간이었다.
피잉!
어디선가 날아온 표창이 내시삼의 심장에 가 박혔다. 내시감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내시감의 손에서 떨어진 대나무 물통이 저만치 굴렀다.
“상전 어른!”
쓰러진 내시감에게 달려간 내시들이 표창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십여 명의 무장한 금군들이 검푸른 철릭을 휘날리며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무, 물을··.”
내시감이 죽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내시감의 몸이 축 늘어졌다. 표창이 박힌 자리에서 한 점 꽃잎처럼 배어나기 시작한 피가 이내 단령을 물들이더니 죽통에서 흘러나온 물과 섞여 대지를 적셨다.
“상전어른··.”
내시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미 각오한 바다! 칼을 뽑아라!”
몸체가 유난히 강단진 내시가 흑단령 자락 속에서 예도를 뽑아들며 외쳤다.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삼키던 나머지 내시들도 단령의 터진 옆구리 자락을 벌리고 숨겨두었던 칼을 뽑았다. 그 순간 살기를 띤 금군이 다가오자 등을 밀착한 내시들이 천천히 원을 그리며 그들을 노려봤다.
이윽고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금군이 창을 겨누며 한보 전진하며 내시들의 흑화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물 위를 맴도는 꽃같이 빙빙 돌며 허를 노리던 내시들이 칼을 앞세우고 돌격해 들어갔다. 가슴을 겨누며 파고드는 내시의 칼을 금군의 창과 환도가 막아냈다. 그리고 곧바로 반격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칼바람에 떨어지는 꽃잎처럼 네 개의 사모가 분분히 흩어졌다.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움찔 뒤로 물러났던 강단진 몸체의 내시가 칼을 곧추세우고 금군을 행해 달려 나갔다.
챙-캉! 챙-캉!
금군과 내시들의 창검 부딪는 소리가 고요한 휘령전 들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비록 금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였지만 내시들은 사력을 다해 몸을 날리고 대기를 가르며 맞서 싸웠다. 호수虎鬚를 꽂은 금군의 흑립이 내시의 칼에 맞아 반으로 잘렸고, 복부에 칼을 맞은 금군은 남색 전대가 붉게 변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다 동강난 나무처럼 허리를 꺾였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 현실을 냉정했다. 한 명, 또 한 명…
금군의 칼날이 어둠 속에서 번뜩일 때마다 결사적으로 싸우던 내시들이 피를 토하며 스러졌다. 그때마다 뒤주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된다! 멈추거라!”
뒤주에 갇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말 한마디 할 기운조차 없던 장헌세자였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세자의 몸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 있던 걸까. 작은 구멍 사이로 젊은 내시들이 서글픈 낙화처럼 스러져 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장헌세자는 뒤주의 벽을 쳐대며 오열했다. 그러나 금군 중 누구도 장헌세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지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된다. 만약 한 마디라도 새어나가는 날에는…“
금군대장이 수화자로 내시의 시체를 짓밟으며 눈을 부라렸다.
“…네 놈들의 목에도 이 놈들처럼 칼자국이 날 것이다. 알겠느냐?”
금군대장은 보란 듯이 날카로운 칼끝으로 죽은 내시의 목을 푹푹 찔러댔다.
“예!”
오싹 한기를 느낀 금군이 서둘러 대답했다.
“치워라.”
금군대장이 뒤주를 힐끗 보며 명령했다.
잠시 뒤, 장헌세자의 귀에 들린 것은 내시들의 주검이 어딘가로 질질 끌려가는 소리뿐이었다. 장헌세자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몸부림쳤다.
그동안 뒤주에 갇힌 장헌세자를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었다. 영조의 서슬이 시퍼런 이상 앞으로도 그러할 터였다. 장헌세자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허나 동궁전의 내시들은 달랐다.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자신을 염려해 목숨을 걸고 뒤주에 구멍을 뚫던 그들이 아니던가. 그렇지만 결국 그들마저도 떠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다. 나의 잘못이 크다.”
정헌세자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비통하게 울었다.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듯한 외로움에 울었고, 앞으로 얼마나 이 고통스러운 뒤주 속에 있어야 할지 두려워 울었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세손의 얼굴이 떠올라 또 울었다. 권모와 술수, 시기와 정쟁이 난무하는 궐에 그 아이를 남겨두고 이렇게 떠나고 마는 것인가….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처럼 외롭고 두려운 순간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장헌세자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기운없이 늘어져 있던 장헌세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버님! 살려주옵소서! 소자를 살려주옵소서!”
장헌세자는 뒤주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영조가 직접 뚜껑을 닫고 자물쇠를 잠근 후 장판까지 큰 못으로 받아 동아줄로 묶어 봉했던 뒤주가 들썩거렸다. 그 뒤주 너머로 날이 밝고 있었다.
1792년 윤 5월 19일, 장헌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힌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사라진 자객
붉게 물든 단풍사이로 만월이 보였다. 푸른 달빛은 경희궁에 몽롱하게 낀 밤안개와 섞여 기묘하고도 괴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밤새마저 잠든 깊은 가을밤, 음산하고도 교교한 달빛 아래 누군가 몸을 날려 경희궁 담장 위로 올라섰다.
사내는 어둠보다 시커먼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복면 위로 드러난 사내의 살기 강한 눈이 동궁전의 침소를 살폈다. 침소 앞마당의 횃불이 안개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고, 그 불빛을 통해 세자익위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사내가 담 아래 뜨락으로 뛰어내렸다. 뜨락에 쌓여 있던 낙엽이 사내의 발에 짓눌려 부서지며 작은 소리가 났다. 동궁전 침소를 지키던 세자익위사들의 눈동자가 소리 난 곳을 향해 돌아갔다. 그러나 그뿐, 세자익위사들은 사내가 침소로 다가가는 것을 보고도 못 hs jr 외면을 하더니 이윽고 자리를 피했다.
세자익위사마저 떠난 텅 빈 마당, 복면의 사내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돌계단 위로 올라섰다. 등불 앞에 좌정한 채 책을 읽고 있는 산의 모습이 창호지에 어른거렸다.
잠시 후 침소를 밝히던 등불이 꺼졌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신발을 신은 그대로 마루에 올라간 자객은 천천히 칼을 빼들며 침소의 문을 열었다.
불빛 하나 없는 침소 아랫목의 이불로 간 자객은 칼을 겨눴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 찰나였다. 약간 불룩하기는 했으나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이불에 누워 있는 몸체가 너무 작았다.
자객은 살며시 이불을 들췄다. 이불 안에는 베개 두 개가 길게 놓여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아차 싶어진 자객은 달아나려 재빨리 일어섰다.
그때였다.
“……누가 보내서 왔더냐?”
자객의 등 뒤에서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스라치게 놀라 자객은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누가 보내서 왔느냐고 묻지 않더냐?”
어둠 속에서 서릿발같이 싸늘한 목소리로 묻던 이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어느덧 키가 훌쩍 커 스무 살의 성인이 된 수려한 외모의 산이 자객을 노력보고 있었다.
“넌 누구냐?”
자객은 급히 산의 목덜미에 칼을 겨눴다.
“이 방 안에 있는 내가 누구이겠느냐? 난 네가 죽여야 할 동궁, 이 산이다.”
산은 냉소 어린 표정으로 자객을 쳐다봤다. 미동조차 않는 담담한 눈빛의 산에게서는 상대를 압도하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자, 이제 네 차례다. 널 보낸 자가 누구냐? 살고 싶다면 말해라. 그것만 토설한다면 목숨은 보전해줄 것이다.”
산이 다가오자 자객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다, 닥쳐라! 주제에 동궁이라고 허세 한번 요란하구나. 지금 네 목숨은 내 칼 아래 있어!”
자객이 칼을 치켜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휙!
표범과도 같이 빠른 몸짓으로 소매춤에서 단도를 꺼낸 산이 단도를 던졌다.
“헉!”
어깻죽지에 단도를 맞은 자객은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면서도 칼을 내리쳤다.
촤악!
산의 팔에서 튄 핏방울이 장지문을 적셨다. 하얀 창호지가 붉은 선혈로 번져갔다. 그럼에도 산은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산은 날렵한 솜씨로 자객의 팔을 쳐 칼을 떨어뜨리게 한 뒤 벽에 밀어붙였다.
“이젠 네 목숨이 내 칼 아래 있다.”
산은 자객의 팔에 박힌 단도를 뽑아 그의 목에 겨눴다.
“……죽여라.”
“아니, 난 널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말해라. 누가 보낸 것이냐?”
“클클! 내가 답을 할 것 같으냐?”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객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자객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풀어지는가 싶더니 자객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안 돼!”
산은 황급히 자객의 입에 손을 넣었다. 극약을 씹어 삼켰는지 자객의 입에서 검은 것이 묻어 나왔다. 남사초가 뛰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네.”
남사초가 급히 자객의 맥을 짚었다.
“……절명했네.”
산의 목소리가 참담했다.
“아직 잔당이 있을지 모릅니다! 속히 금군들에게 알려…….”
“내가 가겠네. 자네는 남아서 할 일이 있어.”
산은 의미심장하게 남사초를 보았다.
영조가 보위에 오른 지 47년이 되는 1771년 9월, 나직이 가라앉아 있던 새벽하늘에 긴박한 첩고(疊鼓)가 울렸다.
“혼자서 궐의 담을 넘지는 못했을 터, 놈을 조력한 자가 아직 궐 안에 있을 것이다. 반드시 잔당을 찾아내야 한다. 알겠느냐?”
환하게 횃불이 밝혀진 경희궁 뜰에 도열한 금군을 향해 내금위장이 소리쳤다.
“예!”
횃불을 든 금군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산의 팔 아래로 핏방울이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하, 그만 가셔야 하옵니다. 어서 어의를 불러 상처를 치료하셔야 하옵니다.”
그 순간이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노기에 찬 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전하!”
뜰에 남아 있던 이들이 파랗게 질려 머리를 조아렸다.
“자객이 궐 담을 넘어 동궁의 목숨을 노리다니! 대체 금군은 무얼 하고 있었던 말이냐? 동궁을 지키는 익위사 놈들은 다 어디 있었던 게야?”
“죽여주시오소서, 전하!”
익위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역당의 시체가 안에 있다 했느냐?”
잡아먹을 듯 익위사들을 노려보던 영조가 산에게 물었다.
“예.”
“아는 얼굴이었더냐.”
“아니옵니다.”
영조는 노쇠한 발을 앞세워 동궁전으로 향했다.
“시체를 끌어내라.”
동궁전 침전에 도착한 영조가 내금위장에게 명했다. 내금위장이 눈짓을 보내자 금군들이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상한 덴 없느냐?”
착잡함과 걱정이 묻은 눈으로 영조는 산을 보았다.
“예, 전하.”
그때였다.
“침전에 시신이 없사옵니다!”
금군들이 뛰쳐나오며 아뢰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시신이 없다니?”
산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금군의 말은 사실이었다. 침소 안에는 시체는커녕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깨끗했다.
“이럴 수가…….”
텅 빈 침소를 마주한 산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찌 된 것이냐?”
“송구하오나 소신도 알지 못하는 일이옵니다, 전하.”
영조가 돌아보자 내금위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방에 누구를 들였더냐?”
산은 낮은 어조로 물었다.
“명을 받들어 아무도 들이지 않았사옵니다.”
“그런데 어찌…….”
문득 자신의 피가 튀었던 장지문이 떠올랐다. 산은 황급히 뛰어나가 장지문을 살폈다. 허나 장지문은 얼룩 한 점 묻지 않은 순백 그 자체였다.
“……정말 역당의 시신이 침소에 있었습니까, 저하?”
내금위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말없는 산을 응시하는 내금위장의 눈에 미심쩍은 듯한 빛이 역력했다.
“기십의 금군들이 경계를 섰습니다. 누군가 들어와 시체를 치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내금위장의 말대로 동궁전은 금군들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정말 자객이 들기는 하였느냐?”
영조가 물었다. 불빛에 드러난 흉배의 오조룡이 의심스럽다는 듯 산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분명 자객이 들었고, 그 자객은 자결을 했다. 헌데 어찌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귀신이 한 짓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
산은 입술을 깨물며 영조의 오조룡을 쏘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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