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홍대용
1731~1783. 호는담헌(湛軒). 18세기 조선의 북학파를 선도한 실학자이다. 천문을 비롯한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해 천문기구인 혼천의를 제작했다. 동양의 전통적인자연과학에 서양에서 유입된 새로운 과학적 성과를 결합하여 지구지전설과 우주무한론 등을 주장했다. 나아가 우주와 지구, 자연과 인간, 민족 간의평등과 평화를 포괄하는 독창적인 사상을 완성했다. 국가 경영에 대한 구상과 신분 문제에 대한 개혁적인 주장을 전개하기도 했다. 일찍이 과거를포기하고 참 선비로서의 수양과 참 학문의 실천에 평생 정진하였다.
■ 역자 김아리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교육과를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논문으로 「노가재연행일기 연구」가 있다. 현재 일반인과 청소년에게 우리 고전과역사를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 차례
간행사
책머리에
진정한 선비
자신을 경계하라
진정한선비
독서의 방법
스승 김원행
"혼천의"를 만든 나경적 선생
악관 연익성
왕세손과의 대화
"나"와 동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성찰
있는 그대로의중국을 보자
"오랑캐"에 대하여
일본도 성인의 나라다
우리나라의 노래
금강산이 아니라 바다를 보라
실학의 모색
쓸데없는 연구, 쓸데없는 저술들
숲아래서의 경륜
천문 기구 "혼천의"
중국 벗들과의 교류
기이한 만남
선비의 사귐에대하여
독서
10년 만에 도착한 편지
양명학의 의의
모든 사상은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구제한다는 점에서합치한다
이단의 학문에 대하여
중국의 세 벗
중국 견문기
서양과의 만남
관상대
북경의유리창
중국의 시장
중국의 기계 제도
허자,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다 : 새로운 세계관의모색
의무려산으로 간 허자
사람과 만물은 평등하다
우주와 지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자연과 문명
모든민족은 평등하다
해설
홍대용 연보
작품원제
찾아보기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진정한 선비
진정한 선비
세상에서 말하는 선비는 세 부류다. 오늘날 재주 있는 선비라고 부르는 ‘재사’(才士)는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와 문장을 공부하여 벼슬과 명예를 구하고자 애쓰는 사람이다. 이는 내가 말하려는 진정한 선비가 아니다.
문장을 하는 선비인 ‘문사’(文士)는 경전의 글귀를 따 쓰고, 반고와 사마천(한나라 때의 역사학자들이다)의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쓸데없는 말을 꾸민다. 그리하여 당세에 추앙받고, 또 후세까지 명예가 이어지길 바란다. 이도 내가 말하려는 진정한 선비는 아니다.
경학을 하는 선비인 ‘경사’(經士)는 말이 고상하고 분명하며, 몸가짐도 단정하고 엄숙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요순(堯舜)시대의 정치와 공자와 맹자의 학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으로는 어두운 곳에서도 속이지 않는 도독이 없고, 밖으로는 세상을 다스릴 재주가 없으며, 속은 텅 비고 아무것도 없다. 그 역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선비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선비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반드시 도덕과 정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예법을 따른다. 대단한 부귀가 주어져도 그의 뜻은 흔들리지 않고, 고생스런 가난도 그의 즐거움을 꺾지 못한다. 천자(天子)도 감히 신하로 삼지 못하고, 제후도 감히 친구로 삼지 못한다.
출세하여 덕정을 펴면 온 세상이 혜택을 받게 되고, 벼슬하지 않고 조용히 은거하면 그의 덕이 천년을 밝힌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된 선비라 할 수 있다.
나의 벗 홍백능(洪T伯能)은 아름다운 선비이다. 재주와 학문이 정밀하고 넓으며, 의지와 기개가 밝고 깨끗하다. 만약 그가 분발하여 성인의 길로 나아간다면 무엇인들 얻지 못하겠으며, 그 길이 아무리 멀다 한들 어찌 도달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너무 명예를 멀리하고 세상과 어긋나는 것도 너무 어렵게 여긴다. 분명 그것은 장점이긴 하나 오히려 문제가 되고 말았다. 백능이 글 짓는 공부에만 열중하니 남들은 그저 재주 있는 사람 정도로만 대하는 것이다.
정말 백능은 이 정도 수준에서 머물려고 하는가? 나는 백능이 앞에서 말한 과거 공부에 매달리는 선비와 비슷해질까 두렵다. 도학은 팽개치고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며, 평탄한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을 달리려 하니 의혹스러운 점이 많다.
* 홍대용은 자신에게 글을 부탁한 선비 홍백능을 위해 이 글을 썼다. 재주 있고 가능성이 많은 홍백능이 문장 공부에만 몰두하는 것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나’와 동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성찰
‘오랑캐’에 대하여
오랑캐가 오랑캐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에겐 예의도 없고 충효(忠孝)도 모르며, 천성이 살벌하고 금수같이 행동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비를 거역한 자식과 임금을 쫓는 신하는 예의도 충효도 없으니, 살벌한 것을 좋아하고 금수와 같은 오랑캐와 비교하여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 오늘날 오랑캐는 중국에 살면서 점점 예의를 숭상하고 충효를 본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랑캐가 처음 발흥했을 때처럼 살벌하거나 금수 같지 않습니다.
중국 선비들은 이미 신분이 무너진 시대의 습속에 익숙해져서 더럽혀지는 줄도 모르게 된 것입니다. 중국 선비들이 이런 것을 즐거워하겠습니까마는 시대의 형편이 그러한 것입니다. 남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한다면 세상에는 버릴 재주가 없습니다.
제가 만난 중국 항주의 벗들이 ‘명나라가 망한 것을 가슴 아파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잘못 전달된 얘기입니다. 그랬다면 제가 왜 그들을 찾아갔겠습니까? 그들과 만난 때는 붓으로 쓰며 대화했는데, 시국에 저촉되는 말이 많아 지우고 고친 부분이 많았습니다. 당대의 제도를 찬양할 땐 웃으며 뜻을 보이기도 하고, 옛것을 언급할 땐 서로 돌아보면서 아무 말 못하고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또 그들의 글과 그림에도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 우리들의 뜻을 따라 연호를 빼 주었습니다.
제 편지 중에 ‘강희(康熙)이후’ 운운한 부분에서 ‘강희’를 언급한 것은 청나라의 연호를 인용한 것뿐이지 ‘강희제’라며 천자나 황제로 일컬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건 청나라에서 쓰이는 말일 뿐인데, 그대가 내가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의 연호)이나 ‘숭정’(崇禎, 명나라의 의종의 연호)과 같은 명나라 황제들의 연호처럼 당당하게 말하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 구절만을 따내서 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는 거 아닌지요?
* 이 글은 김종후가 홍대용의 중국 여행과 관련하여 비난의 글에 대해 답한 것이다.
실학의 모색
쓸데없는 연구, 쓸데없는 저술들
옛날 학자들은 책이 없어서 걱정했고, 오늘날 학자들은 책이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옛날에는 책이 없어도 영웅과 현자가 배출되었는데, 지금은 책이 많아도 인재가 날로 줍니다. 어째서 고금이 이처럼 다른 걸까요? 사실은 책이 많은 것이 화근입니다.
또한 오늘날 정치 담당자는 무엇을 걱정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선배께선, “후배 학자는 형이상학적인 심성론(心性論)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예(禮)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배께선 어째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선배께서 예에 대해 늘어놓은 여러 말들은 보기에 눈이 아프고 듣기에 귀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닙니다. 형식과 문구만을 모방하여 겉으로 꾸미기나 좋아하니, 설령 옛것을 고증해서 책을 만들었다 해도 쓸데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또 잘 모르겠지만, 선배께서 이런 글을 쓰지 않으면 세상이 주자의 글을 이해할 수 없는 겁니까? 아니면 이런 글을 써야만 주공(周f公, 주나라의 무왕의 아우로, 이름은 단이다. 주나라의 예악 제도의 대부분을 그가 완성했다)의 올바른 제도가 비로소 떨어지지 않는 겁니까? 이 글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은 되겠지요. 그러나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큰일은 팽개치고, 마음과 정신을 써 가며 이룩한 작은 성과로 사람들을 돕고자 한다면 이것은 남을 위한 것입니까, 자기를 위한 것입니까?
* 이 글은 석실서원의 선배 학자인 김종후에게 보낸 편지로, 김종후가 예학(禮學)에 관한 주석서를 저술한 것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중국 벗들과의 교류
독서
- 엄성에게 보낸 편지1
독서란 이치를 밝히고 여러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책이란 것은 정밀하게 읽고, 깊이 연구하며, 정확하게 보고, 진리를 얻고 나면 한갓 휴지 조각에 불과합니다. 정밀하게 읽고, 깊이 연구하고, 정확하게 보고, 진리를 얻는 일은 비록 성인이라도 부족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니 독서는 그 공부가 끝이 없는 것으로서 학자들의 평생 사업입니다.
비록 그러하나 앎과 실천은 어느 한쪽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또 근본적인 일과 사소한 일을 구분하는 데에도 크게 등급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못되면, 선(禪)에 빠져 들거나 경전의 자구에 매달려 고증하고 주석을 다는 훈고학(訓?學)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니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독서는 대충대충 여러 책을 건드려 보지만 읽다 말다 하여 정밀하고 깊게 읽지 못하니 어떻게 진실을 논하겠습니까? 이따위로 독서를 하면서도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자기 할 일 다 했다는 듯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고 망령된 행동을 합니다. 독서가 끝나면 읽은 내용을 실천해야 하는 큰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멀리 여행을 하려는 사람에 비유해 봅시다. 책이란 한 권의 여행 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우선 말에게 꼴을 먹이고 수레를 손본 다음, 여행 안내서를 보고 말을 몰아 달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말은 매 놓고 수레만 손질하면서 출발할 생각은 않고 오로지 여행 안내서만 연구한다면, 끝내 여행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선(善)을 따르는 것은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고, 악(惡)을 따르는 것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대는 내가 성취하지 못한 것을 거울삼아 더욱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는 내가 진보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아프게 질책해 주고, 이 부족한 벗을 채찍질하여 그대의 뒤를 따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중국의 벗 엄성에게 보낸 편지이다. 홍대용과 엄성은 나이도 비슷하고 꼿꼿한 성격도 비슷하여 가장 마음이 맞았던 친구였다.
중국의 세 벗
육비(陸飛)의 자는 기잠(起潛)이요, 호는 소음(篠飮)이다. 1719년에 출생하였고, 항주의 주아담에 거주하였다.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모습은 살지고 우람하다. 우스갯말과 해학을 잘한다. 술을 잘 마tu서 종일 마셔도 취해 넘어지지 않는다. 시문서화가 모두 뛰어난데, 오직 천진난만하게 자기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뿐이고 일부러 다듬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천성이 자잘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으니 순수 유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호탕하면서도 절제가 있어 방종하지 않고, 소탈하면서도 절도가 있어 방탕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나 해학을 할 때나 온화하면서도 간결하고 정중하여 귀인의 기상이 있다.
엄성(嚴誠)의 자는 역암(力闇)이요, 호는 철교(鐵橋)이다.1732년에 출생하였다. 항주 채시교에 거주했다. 엄성은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며, 붓 가는 대로 써도 문장이 이루어지고 글이 시원하고 빛나서 구술을 꿰어 놓은 것 같았다. 엄성은 양명학과 불학에 정통했는데 처음에 내가 왕양명과 육산성과 불학을 논박하는 것을 듣고서 자못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 당시에는 무엇을 물어봐도 잘 대답하려 하지 않았고, 세상을 조롱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말을 곧잘 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상이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한갓 남이 뭐라고 하면 따라서 떠드는 사람들을 미워해서가 아닌가 한다.
반정균(潘庭筠)의 자는 난공(蘭公)이요, 호는 추루(秋?)이다. 1742년에 출생했다. 항주 북쪽 수항구에 거주하였다. 사람이 산뜻하고 자태가 아름다우며 활발한 성격에 해학을 좋아한다. 문장에 뛰어나 붓을 들면 날아갈 듯이 글을 써낸다. 성격이 명랑하여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드러내며 성실함을 보였는데 차림새에는 무관심하니 그 사람됨이 사랑스럽다.
이 세 사람은 물론 타고난 성질이라든가 재주와 학문의 정도가 다르다. 그러나 겉과 속이 일치하고 마음과 하는 말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세 사람은 비록 만주인 복장을 해서 만주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실은 중국 한족의 내력 있는 집안 후손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넓은 소매의 옷을 입고 큰 갓을 쓰면서 그것이 자랑인 양 까불며 좋아하지만, 결국 바닷가 변방 사람이다. 그러니 그들과는 귀천의 차이가 크지 않은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습성으로 볼 때 그들과 처지가 바뀌었다면 분명히 비천하게 여기고 능멸하면서 하인 대하듯 할 정도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이 우리를 한두 번 만나보고는 바로 옛 벗을 만난 듯이 마음을 다해 호형호제하면서 가까이했던 것은 우리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일이다.
허자,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다 : 새로운 세계관의 모색
사람과 만물은 평등하다
실옹이 말했다. “자 이제 그대에게 묻겠소. 그대의 몸과 만물이 다른 점은 무엇인지 말해 보시오.”
허자가 대답했다. “사람의 몸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사람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하고, 발이 모난 것은 땅을 상징합니다. 피부와 머리카락은 산과 숲을 상징하고, 피는 강과 바다를 상징하지요. 또 두 눈은 해와 달을 상징하고, 호흡은 바람과 구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부모의 피가 사랑으로 엉겨 어머니 뱃속에서 태를 만들고, 그곳에서 열 달이 되면 태어납니다. 사람의 몸과 만물이 다른 점은 이런 게 아닌지요.”
실옹이 말했다. “어허, 그대의 말대로라면 사람이 만물과 다른 점이 없지 않소? 피부에 살갗이 있는 것도 식물도 사람과 다를 게 없소. 또 부모의 사랑과 피가 섞여서 자식을 낳게 되는 것도 식물과 사람 모두 같은 것 아니오? 하물며 짐승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허자가 말했다. “세상 생물 중에서 오직 사람만이 귀합니다. 동물은 지혜가 없고 식물은 감각이 없으니까요. 또 이들에게는 예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동물보다 귀하고, 식물은 동물보다 천한 존재지요.”
허자의 말에 실옹은 고개를 젖히고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대는 정말 사람이구려.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오. 그렇지만 동물에게도 예의가 있으니,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함께 먹이를 먹는 것이 그들의 예의라오. 식물에게도 예의가 있으니, 군락을 지어서 가지를 뻗어 나가는 것이 그들의 예의지요. 사람의 입장에서 만물을 보면 사람이 귀하고 만물이 천하지만, 만물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이 천할 것이오. 그러나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나 만물은 균등한 것이오. 지혜가 없는 존재는 남을 속이지 않고, 감각이 없는 존재는 하는 일도 없는 법이오. 그렇다면 만물이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이 아니겠소?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만물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뽐내는 마음 때문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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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편견을 없애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