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1435∼1493)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유 불 선 3교의 영역을 넘나든사상가요, 당대 정치의 폐해와 인민의 현실에 주목했던 비판적 지식인이다. 이 책은 그의 시와 산문, 그리고 걸작소설 『금오신화』를 번역한 것으로그의 다양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저자 김시습
자는 열경이고, 호는 매월당 또는청한자, 동봉산인이다. 1435년 태어난 그는 다섯 살 때 문리를 통하여 "오세"라 불렸다. 이색의 손자인 이계전, 권근의 문인인 김반, 그리고윤상에게서 유학을 배웠고, 기화선사의 제자인 홍준상인에게 불교를 공부했다. 또한 해동도학의 전승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선양받는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승려의 행각으로 방랑을 시작하였다. 그 뒤 일시 환속하여 안온한 생활을 꿈꾸었지만, 결국 세상의 그물을 벗어난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는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추구하였으며, 민중의 삶에 깊이 동정하였다. 1493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의 일기로 세상을마감한다. 현존하는 저술로는 『금오신화』 이외에 『매월당집』과 불교 관련 논저가 있다.
■ 역자 정길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졸업하였고,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저서로 『한국 고전장편 소설의 형성 과정』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17세기동아시아 소설의 편력구조 비교」, 「"천기론"(天機論)의 문제」 등이 있다.
■ 차례
간행사
책머리에
나는 누구인가
내 말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는누구인가
내가 나에게
비 오는 밤
이 몸 또한 꿈일지니
소나무 엮어 오두막 짓고
온종일 잠에 빠져
몸과 그림자 1 - 몸이 그림자에게
몸과 그림자 2 - 그림자가 몸에게
뱀
새벽에 일어나
내 밭엔 잡초무성하고
잔설
한 줄기 햇살 빌려다가
한잔 술에 취해 1
한잔 술에 취해 2
한잔 술에 취해 3
인간세상에 떨어져
홀로 부르는 여섯 노래
밤에 부르는 노래
나의 일생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
군자의 처신
군자와소인
인재가 없다는 걱정에 대하여
나라 살림을 넉넉하게 하는 법
최선의 정치
나라의 근본
인민을 사랑해야하는 이유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길
귀신이란 무엇인가
태극을 말한다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마음을 토로하여 올린 편지
금오신화
만복사에서 부처님과 내기하다
담장너머 사랑을 엿보다
남염부주에 가다
해설
김시습 연보
작품 원제
찾아보기
길 위의 노래
나는 누구인가
비 오는 밤
밤들어 산방에 오래 앉아 있으니
창밖에 빗소리 급하기도 해라.
방 안엔 쓸쓸히 아무도 없고
등불의 불꽃만 떨어지려 하네.
웅웅 파리 소리
한들한들 맑은 향 연기.
이런저런 책들 어지러이
내 앞에 흩어져 있네.
아이를 부르니 대답은 없고
코 고는 소리만 우레 같아라.
뜰의 오동나무에 바람이 이니
주렴(珠簾, 구슬 따위를 꿰어 만든 발)과 장막이 밀거니 당기거니.
문득 느낀 바 있어 잠 못 이루는데
풀벌레 울음소리 구슬프네.
십 년 세월 생각하니
비분강개한 마음에 흰 머리만 늘었네.
기쁜 건 내가 자연에서 늙어
세상의 시비 속에 떨어지지 않은 일.
흡사 구름 속에서
굳센 날개로 날아 새장을 벗어난 듯.
이런저런 생각에 밤 지새니
비 그쳐 처마엔 물 듣는 소리.
일어나 난간에 기대니
반짝반짝 반딧불이 눈에 드누나.
* 산방(山房)에 홀로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마음이 잘 느껴진다. 밤 지새고 나서 만난 반딧불이 하나가 세상에 대한 끝없는 절망 뒤에 남은 한 가닥 희망처럼 보인다.
길 위의 노래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온종일 짚신 신고 발길 닿는 대로 가노라니
산 하나 넘고 나면 또 산 하나 푸르네.
마음에 집착 없거늘 어찌 육체의 종이 되며
도는 본래 이름 할 수 없거늘 어찌 이름을 붙이리.
간밤의 안개 촉촉한데 산새들은 지저귀고
봄바람 살랑이니 들꽃이 환하네.
지팡이 짚고 돌아가는 길 일천 봉우리 고요하고
푸른 절벽에 어지런 안개 느지막이 개네.
* 김시습이 전라도 순천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승려 준(峻)에게 준 시이다.
산 하나 넘으면 또 산 하나, 가도 가도 끝없는 외로운 방랑길이지만 정다운 정취가 있다. 당대 제일의 비평적 감식안을 갖고 있던 허균(許筠)은 이 시를 두고 “진여(眞如,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우주 만유의 본체인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이르는 말)를 깨달은 경지”라고 평한 바 있다.
달
오늘 밤 고향 산의 달
스물네 번째 밝게 떠올랐겠지.
시시각각 공부방 휘장을 비추고
밤새도록 청동 꽃병에 쏟아질 테지.
뜨락 나무에 달그림자 지고
문 밖 기둥엔 빛이 잠겼으리.
오늘은 누구와 함께
여기 와 내 마음 위로해 줄까?
세상사 뒤집고 뒤집혀 예측할 수 없다지만
어찌 알았으리, 이 마을 왔다가
오래도록 바닷가의 나그네 되어
늙어 감에 눈물로 옷깃 적실 줄을.
객지 생활 오래라 술동이엔 술이 없고
설움이 많아 머리엔 서리가 내렸네.
오늘 밤 고향 산의 달
예전 그대로 소나무 집 비추고 있겠지.
* 멀리 고향 산의 달을 그리며 드는 서글픈 마음을 노래한 시이다. 반평생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될 줄 모르고 나섰던 길, 돌아보니 설움과 눈물뿐이다. 떠나온 지 오래건만 고향집 풍경은 언제나 눈앞에 생생하다.
하늘에 묻는다
옛사람 글 읽을 적에는
옛사람의 글을 읽을 적에는
먼 옛날 일이라고 생각지 마라.
이치를 따지는 말 내 스승 삼고
세상 보는 법을 옳게 배울 일.
천 년이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눈앞에 마주 앉아 얼굴 맞댄 듯.
캐묻고 따질 일 생각나거든
그때마다 문답 벌여 의심 풀게나.
한 구절 반 구절 기억한다면
있는 힘껏 실천하며 길 좇아야지.
꼼꼼한 공부가 가장 좋으니
밝은 길은 너를 속이지 않네.
* 김시습이 고전을 읽는 방법이다. 고전과 나 사이에는 시공간의 장벽이 없다. 천 년 전의 지성과 홀로 마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
군자와 소인
군자의 도는 자신의 몸에 뿌리를 두어 서민(庶民)에게서 효과를 드러낸다. 군자의 도는 옛날의 성인 군주들에 비추어 어긋남이 없고, 하늘과 땅에 세워 어그러짐이 없으며, 귀신에게 물어도 의혹될 것이 없고, 먼 훗날 성인이 나타난다 해도 흔들릴 것이 없다.
군자가 병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이 무능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군자는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하는 점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군자가 근심하는 것은 자신이 남을 알아주지 못할까 하는 점이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근심하지 않는다.
군자의 공부는 덕성을 기르며 인의(仁義)를 추구하는 것이다. 군자의 실천은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 군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최고의 덕행을 지닌 사람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군자는 의로운 일을 하는 데 조금도 지체함이 없기 때문에 곤궁한 상태를 편안히 여길 수 있다. 군자는 늘 마음이 넓고 편안하므로, 오연(傲然, 태도가 거만하거나 그렇게 보일 정도로 담담하다)하되 남과 다투지 않고, 조화롭게 더불어 살아가되 당파(黨派)를 이루지 않는다.
군자는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지 사사로이 편애하지 않는다. 남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되 아첨하며 똑같아지지는 않는다. 위엄 있는 모습이되 교만하지도 않다. 하지만 군자로서 어질지 못한 사람도 있다. 현인(賢人)에게 완전무결한 덕을 갖춘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소인(小人)은 홀로 있을 때에는 악행을 일삼아 하지 못하는 짓이 없다가도, 군자를 본 뒤에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악한 마음을 감추고 선한 마음을 내보인다. 이게 바로 소인의 습속이므로, 소인의 허물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이다. 소인이 병으로 여기는 것은 남의 것을 모두 빼앗기 전에는 만족을 모른다는 점이다. 소인이 근심하는 것은 오로지 이해득실에 관한 것뿐이다.
소인의 공부는 재산상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다. 소인의 실천은 스스로의 행실을 돌아보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소인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므로 두려워할 줄 모르고, 덕행을 지닌 사람을 가벼이 보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소인은 이익에 밝으므로 궁한 처지에 빠지면 못할 짓이 없게 된다. 소인은 늘 근심에 싸여 있으므로, 곤궁한 처지를 오래 견딜 수 없고, 방탕함에 이르지 않는 진정한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릴 수 없다.
소인은 사람을 사사로이 편애하지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한다. 남에게 아첨하며 그와 똑같아질 수는 있지만, 남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으며 조화를 이루지는 못한다. 교만하지만 위엄이 있지는 않다.
이상 공자(孔子)의 말씀을 대략 옮겨 보았는데, 그 내용은 의로움과 이로움, 공명정대함과 사사로움의 차이를 말한 것일 따름이다. 이로써 볼 때 임금이 신하를 등용하면서 그 사람됨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작게는 임금 자신의 몸이 위태롭고 크게는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한 사람의 군자를 얻으면 선한 사람이 연이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다. 한 사람의 소인을 가까이하면 악한 이들이 저희끼리 무리를 지어 당파를 이룬다. 사람을 잘 알아보는 사람은 그 시초를 보고, 사람됨을 잘 살피는 사람은 그 사람의 평소 모습을 살핀다. 마음을 진실하게 가진 이가 최상의 경지요, 몸가짐을 올바르게 지키는 이가 그 다음 경지요, 경험에 비추어 반성하고 교훈을 얻는 이가 또 그 다음 경지이다. 어떤 일을 겪든 반성하거나 교훈으로 삼을 줄 모르는 자라면 결국 악으로 귀결될 뿐이다. 따라서 정치를 잘하는 임금과 큰일을 감당할 만한 선비는 군자를 대우하기를 난초 사랑하듯이 하고, 소인을 피하기를 뱀을 피하듯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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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論語)를 중심으로 유가(儒家)의 경전에서 군자와 소인을 대비하여 논한 구절을 모은 뒤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글이다. 이 글에 나타난 군자의 덕목은 도달하기에 너무 멀어 공허해 보이기까지 할 수도 있겠지만, “궁한 처지에 빠지면 못할 짓이 없게 된다”는 등 소인의 특징으로 거론된 항목들은 한 번쯤 되새겨봄 직하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