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말한다.
소설가는 소설을 씀으로써 독자에게 다가가고 대화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만나게 되는 보석 같은 순간, 섬광처럼 터지는 웃음과 함께 알게 되는 일상의 비의를 소설에 다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아까운 이야기, 모두 다 알고 있지만 나만 몰랐던 어떤 것, 보고 들으면 유쾌하고 흥미로우며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지는 생각과 느낌을 담으려고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돈을 벌게 해주거나 출세를 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의 삶을 흥미롭게, 일상을 즐겁게 만들고 사람 사이의관계를 윤택하게 해줄 것임을 확신한다.
책은 전체 4부로 나뉜다. 첫째 단락은 우리 삶의 비밀과 그것에의 문학적인 성찰을 담은이야기장, 둘째 단락은 우리의 상식 체계와 그 오류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겼다. 셋째 단락은 다양한 먹거리들을 되짚어 관찰했으며, 마지막 단락은우리가 잘못 알고 있거나 그릇되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 체계와 문자에 대한 생각을 담았다.
■ 저자 성석제
1960년 경북 상주에서태어났으며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문학사상」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1994년 짧은 소설 모음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산다』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7년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0년「홀림」으로 동서문학상을수상했으며, 2001년『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이효석 문학상과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2004년에는 『내 고운 벗님』으로 현대문학상을받았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재미나는 인생』『내 인생의 마지막4.5초』『조동관 약전』『호랑이를 봤다』『홀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번쩍하는 황홀한 순간』『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참말로 좋은 날』,장편소설 『왕을 찾아서』『아름다운 날들』『도망자 이치도』(『순정』의 개정판)『인간의 힘』산문집 『즐겁게 춤을 추다가』『소풍』『성석제의 이야기박물지, 유쾌한 발견』 등이 있다.
■ 차례
1부 이야기의 힘
길 위에서잠들다 / 경양식집에서 생긴 일 / 부모 노릇 / 엄한 아버지 / 무서운 사람 / 가까운 거리 / 어떤 시계의 전설 / 생존의 기술 / 불행 중다행 / 관우와 장수마 / 신분 / 완벽하고 신속한 일관 서비스 / 간단하고 기막힌 장사 / 토하다 / 미국이라는 거대한 양파에 관한, 생각의비늘 몇 가지 / 잘 생긴 의사가 있는 치과 / 만병통치약 / "그랬다 카더라"의 힘 / 정확한 용어 / 며느리도 모른다 / 신묘한 계산기 /세계 최고의 이빨꾼 / 전화를 걸었으면 / 토끼와 거북
2부 관점에 따라 다르다
기준이 다르다/ 관점에 따라 다르다 / 대어를 잡았는가 / 남과 여, 말과 글로 겨루다 / 사람과 송아지의 관계 / 벌도 임차료를 낸다 / 효도와 아부 /기본이 천 년 / 보리수에는 보리가 열리지 않는다 / 밥과 꽃 / 나무 할아버지의 장가 / 지팡이였던 나무 / 원가 / 장원과 꼴찌 / 한다고한다면 한다 / 두부가 최고의 음식 / 최고의 연가 / 물러남의 거장 / 인간에 대한 평가 / 모차르트가 살았다면 / 결혼행진곡 / 그 사람이먹는 것이 그 사람을 만든다 / 솥 적다 아니 크다 / 텃세와 망신 / 우리는 전사들이다 / 운동 중독 / 나도 한 번은 일등을 했다 / 네가최고다 / 인사하는 법
3부 오후의 국수 한 그릇
세상에서 가장맛있는 비빔밥 / 고락의 맛 / 가을산의 호랑이 울음 / 수양산 바라보며 / 무위를 공부하다 / 꿈틀 / 곰삭은, 깔끔한 기품의 맛 /대한민국에서 김치 안 되는 게 어디 있니? / 끓이고 끓이고 끓이고 나누고 나누고 나눈다 / 애색하구나, 아기돼지 / 오후의 국수 한 그릇 /밥이 김칫국을 만났을 때 / 솔깃한 제안 / 서해용왕이 동해부인을 만났을 때 / 목구멍까지 들어온 향긋한 손 / 쌀 한 섬 / 마라톤과 커피 /오늘의 명상 / 소풍의 과일술 / 암행어사 출두요! / 맛있는 말 / 무공해 배추 농사 / 달밤에 배 타고 / 네 머리가 둘로 보여! / 막걸리화약으로 쏘는 대폿집 대포 / 큰 술잔 /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맛 / 여름 음식의 호걸 / 진짜 알짜 곱빼기 / 좋은 재료가 뛰어난 맛을낸다
4부 문자의 예술
도무송은 소나무가 아니었다/ 내 이름을 돌려다오 / 산 산 산 뫼 뫼 뫼 /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는데? / 바다에 가서 우유를 찾으십니까 / 현대판 묵형 / 얘, 너우리집 집사 애 아니니? / 종로에서 성삼재까지 / 왜놈 왜국 왜소증 / 궁둥이 엉덩이 방둥이 /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 / 오늘도 해는떠오른다 /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 친구처럼 말해봐 / 척사대회? 윷놀이? / 강, 장강, 양자강 / 대를 이은 점포의 이름 / 그리운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 복 많은 군인 / 웃기는 짜장 / 순간에 대한 윤리 / 오늘의 수수께끼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 세상에나와서 한 첫 마디 말 / 가르치고 있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1부 이야기의 힘
잘생긴 의사가 있는 치과
-전문 분야
ㅇ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하고도 강남, 압구정동과 청담동 사이에 있는 직장에 다닌다. 예전에 치료했던 이가 말썽을 부리자 ㅇ은 집 근처 아파트 단지 상가의 치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어느 날 지하철이 고장된 바람에 예약된 저녁시간에 치과를 가지 못했다. 밤새 잠도 못 자고 앓던 그는 다음날 아침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회사 건물 10층에 있는 치과로 달려갔다.
치과에 들어서자 호텔 로비처럼 호화롭고 넓은 실내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어디서 나는지 모를 향기까지 났다. 접수대에 앉아 있던 아름답고 젊은 여성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고 상냥하게 물었다. 그는 예전에 돌팔이 의사에게 치료한 이가 다시 망가졌는데 살릴 가망성이 없는 것 같다, 뽑아버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여성은 난처한 듯 지금 의사가 출근하기 전이니 다른 곳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는 치과라고 간판을 달아났는데 이 하나 뽑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아름다운 여성은 그가 와 있는 치과는 임플란트와 미백, 교정을 전문으로 하는 치과이고 충치나 이를 뽑는 치료는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파서 당장 죽을 지경인데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하느냐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그 때 막 출근하던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의사가 무슨 일이냐고 했다. 그는 자신의 사정을 다시 설명했다. 의사는 사정이 급하니 할 수 없겠다고, 눈처럼 흰가운으로 갈아입고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이를 뽑는 동안 버둥거리는 그를 붙들기 위해 역시 영화배우처럼 아름다운 간호사 두 사람이 동원되었다. 고급 오디오에서는 클래식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으며 기다리는 사람들은 티백 녹차가 아닌, 유기농 커피를 마시며 이태리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의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삼십여 분 동안 힘을 쓴 끝에 이를 뽑아냈다. 그리고 탈진해서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들어가버렸다. 접수대에 간 그는 치료비가 얼마냐고 물었다. 아름다운 여성은 동네 치과와 같은 금액을 제시했다. 의료보험증을 꺼내면서 비로소 그는 약간 미안해졌다고 한다.
“아, 미안할 게 뭐 있어. 의사가 치료를 하는 건 당연하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ㅅ이 말하자, ㅇ은 “맞아, 네 말이”하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팔을 뻗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 의사 참 잘생겼더만.”
세계 최고의 이빨꾼
-말 잘하는 사람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 또는 말을 그럴싸하게 잘 늘어놓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에는 ‘구라’라는 게 있다. 모습을 감춘다. 속인다는 의미의 ‘晦ます(쿠라마스)’에서 온 말이다. 이 단어가 사전에까지 버젓이 오르게 된 데는 ‘구라’에 능통한 위대한 여러 ‘구루(인도에서 스승을 칭하는 말)’들의 공이 컸다고 짐작된다.
구라와 비슷한 말에 노가리가 있는데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구라보다 나은 점은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 ‘믿어주세요’라는 말을 유행시킨 노태우 전 대통령의 별명이 ‘보통 사람 아니다, 안 믿는다’는 것에 성에 결부되어서 노가리로 통했다. 그보다 더 오래 전에 나온 단어에 이빨, 썰, 뻥, 쌩 같은게 있었다.
이빨은 ‘깐다’는 동사와 결합되는데 ‘(까서)드러내 보인다’는 의미가 있는 듯하다. 전문가를 뜻하는 ‘꾼’과 결합하면 ‘말 잘하는 사람’이 된다. 썰은 풀고 쌩은 깐다. 뻥과 구라는 치기도 하고 까기도 하지만 대개는 치는 쪽이다. 지금은 보기 힘든 직업과 관련된 ‘약장수’,‘라지오(라디오)’도 말 잘하는 사람의 비유였다. ‘말 잘하면 공산당’이라는 표현도 있었다. 공산당원들이 토론에 능한 것을 빗댄 것으로 “그 친구 정말 공산당이네.”하는 식으로 쓰였다. 레드 콤플렉스가 있던 시절에는 쓰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다. 참고하자면, 진정한 세계 최고의 ‘이빨꾼’은 긴일각 고래다. 몸길이 4~6미터인 이 고래의 머리 앞에 뿔처럼 길게 뻗은 이빨은 길이가 2.5~2.9미터나 된다.
2부 관점에 따라 다르다
관점에 따라 다르다
-큰 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이다. 1846년 과학적인 측량이 시작됐는데, 현재 에베레스트의 공식 높이는 인도 정부가 1954년 발표한 해발 8,848.10미터. 1975년에는 네팔과 함께 에베레스트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는 중국 정부에서 8848,13미터라고 발표했다. 1993년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합동 산악팀이 레이저를 이용한 측정 장비로 조사한 결과로는 해발 8,846.10미터였고, 1999년 미국 산악팀이 직접 등정하여 측정한 결과는 해발 8,850미터였다. 2005년, 다시 중국 정부에서 등산 전문가 50명을 투입해서 새롭게 자체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에베레스트의 암석을 덮고 있는 빙설을 뺀 높이는 해발 8,844.43미터이며 오차 허용범위는 ±0.21m 정도”라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의 조사는 2005년 3월 정식으로 개시됐다.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수 있는 최적기인 5월에 티베트족 측량대원 4명이 영하 40도의 추위와 강풍을 무릅쓰고 정상에 올라 35분 동안 빙설 탐측 레이더를 비롯한 첨단 측정 장비를 가지고 암석 부분의 최고점을 찾아냈다. 또한 조사에는 인공위성자동위치측정시스템(GPS)통제망, 레이저 거리 측정기 등 각종 첨단 설비가 투입됐고 등산측량, 수평측량, 중력측량 등 다양한 측량 수단을 모두 사용했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컴퓨터로 처리하고 국가측량국은 물론 중국과학원, 우한(武漢)대 등에 소속된 전문가들의 검증을 받았다. 한마디로 죽을 둥 살 둥 엄청나게 고생해서 뽑아낸 수치다.
이 높이는 해수면에서의 높이를 측정한 것인데 해수면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수백만 년 동안 수백 미터씩 높아졌다 낮아졌다 해왔다. 변동폭이 없는 기준점은 지구의 중심점이다. 지구 중심점을 기준으로 측정하면 남미 안데스산맥의 침보라소산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 아니고 양극 쪽은 편평하다가 적도로 갈수록 불룩해지기 때문이다. 침보라산은 해발 기준으로는 6,267미터이지만, 지구 중심에서의 거리는 에베레스트보다 2,500미터나 더 멀다. 또 산 정상에서 해저 표면까지의 높이로 치면 하와이의 마우나로아산이 9,000미터로 세계 1위다. 높이가 아니라 실제 크기로 치면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가 1만세제곱킬로미터의 부피로 세계 어떤 산과도 비교될 수 없는 부동의 1위, ‘큰 산’이다.
기본이 천 년
-주목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수식어가 불곤 하는 주목은 나무 가운데세도 가장 오래 사는 종류 중 하나다. 3억 년 전에 지구상에 출현한 주목은 2백만년 전부터 한반도에 살기 시작했다. 주목은 단단하고 붉은 속살과 잘 썩지 않는 성질 때문에 죽어서도 널리 쓰였다. 낙랑시대 고분의 관이 주목으로 만들어졌고 임금을 알현할 때 쓰는 홀(忽)의 재질도 주목이었다. 주몽 지팡이는 가볍고 튼튼하고 휘어지지 않으며 귀신을 쫓아내고 무병장수하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주목은 생장이 몹시 느린 나무다. 칠팔십 년을 자라도 키가 10미터가 안 되고 줄기의 지름은 20센티미터 정도다. 그렇지만 주목에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기본이 천 년인 ‘천년대계’가 있다. 백 년 정도만 참고 있으면 빨리 자라서 설쳐대던 나무들이 늙어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생장이 빨라져서 마침내 주목은 산정의 제왕이 된다.
강원도 정선의 두위봉에는 계백 장군과 비슷한 나이의 주목이 한 그루 있다. 그 옆에 있는 두 그루의 나이도 1,100살, 1,200살이다. 은행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가 두위봉 주목의 막내와 비슷하다.
작년 여름, 나는 두위봉에 갔다. 정상부 높이가 해발 1,466미터나 되면서도 ‘봉’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산 스스로의 의사와 상관없이 겸손해 보이는 그 봉우리를 천천히 오르기를 한 시간 반쯤, 해발 1,280미터쯤에서 위풍당당하고 신령스럽게 서 있는 주목을 보았다. 높이 17미터, 가슴높이 둘레 4.3미터, 수령 1,400년의 주목에 다가가 두 팔을 한껏 펼치고 그 줄기에 가슴을 대었을 때 웬일인지 목이 메었다.
3부 오후의 국수 한 그릇
오후의 국수 한 그릇
-국수
내가 고은 시인을 만난 것은 1980년대 후반이었다. 서울 종로의 탑골공원 옆에 있는 어느 술집이었는데 그는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나를 그곳에 데리고 간 시인이 나를 소개하자 고은은 “아, 당신 제자요? 그럼 제자도 스승 같은 천리마인가? 그런데 그 천리마라는 것들은 이빨이 보통 말과 다르거든. 내가 또 말이빨을 전문으로 보는 사람이라고.” 하더니 느닷없이 나를 끌어당기고는 손가락으로 양쪽 뺨을 눌러 입을 벌리려 들었다.
90년대 중반에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맑은 정신인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당연히 내게 했던 행동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시인은 60년대 후반 자신이 환속을 했을 무렵의 흥미진진한 행적을 인심 좋게 들려주었다.
남아무개라는 당대 최고의 술꾼이 어느 일간지의 편집국장으로 재임 중이던 때였다. 고은은 서울 도심에서 술을 마실 때면 으레 남국장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탄탄하게 월급을 받고 있는데다 아는 술집이며 술꾼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술자리는 대부분 고기나 생선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에서 시작되기 마련이었다. 아직 승려 시절의 입맛이 남아 고기나 생선에 선뜻 젓가락을 댈 수 없었던 고은은 빈속에 술만 마시다가 일찍 취해버리곤 했다. 때로는 인사불성이 되거나 친구들에게 기억하기조차 싫은 행패를 부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창피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동안은 연락을 끊지만 때가 되면 또 같은 신세를 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가 신문사로 전화를 걸자 직원이 “국장님 외출하셨다.”고 했다. 신중하고 끈질긴 탐문 끝에 그는 ‘국장의 외출지’가 사람들이 복날에 잘 먹는 ‘특정 고기’전문음식점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술을 마시기로 한 날이면 국장이 영락없이 그 식당에 다녀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하, 이 인간들이 술 먹기 전에 그렇게 몸보신을 하고 오는구나. 그러니 내가 당할 재간이 없지.“
그렇게 생각한 고은은 종로 뒷골목에서 학원에 가는 입시생 사이에 섞여 앉아 국수를 마시는 일이 없어진 뒤로는 ‘사고를 치는’경우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저도 육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안주를 잘 안먹었어요. 그러다 보니 술자리에서 남보다 훨씬 빨리 취하길래 회사에서 회식이 있는 날이면 오후에 자장면을 미리 먹었습니다.”
내가 말하자 그는 나를 껴안기라도 할 듯하며 반가워했다. 절에서는 국수가 ‘승소(僧笑)’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스님들이 절로 웃음이 날 정도로 좋아한다는 듯이다. 어느 해 5월,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서 무료로 나눠주던 국수 생각이 난다. 시원하고 깨끗했다.
오늘의 명상
-햄버거
1987년, 25세의 젊은 시인 장정일이 <햄버거에 관한 명상>이라는 시를 발표한다. 부제는 흥미롭게도 ‘가정 요리서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진 시’라고 되어 있다.
옛날에 나는 금이나 꿈에 대하여 명상했다
아주 단단하거나 투명한 무엇들에 대하여
그러나 나는 이제 물렁물렁한 것들에 대해서도 명상하련다
이렇게 첫 연이 시작되어 햄버거를 만드는 데 드는 재료와 과정을 꼼꼼하고 친절하게 열거한 뒤 마지막 연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 얼마나 유익한 명상인가?
까다롭고 주의사항이 많은 명상 끝에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 만들어졌다
금이나 꿈, 단단하거나 투명한 것들에 대해서 시를 써왔던 기성 시인이나 그런 시로 알아왔던 독자들에게 ‘물렁물렁한 햄버거’를 가지고, 그것도 명상을 한다는 것이니 이 젊은 시인이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이 시를 기점으로 새로운 육체와 감각을 지닌 참신한 시들이 줄지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햄버거는 1987년에는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패스트푸드의 대표로, 비만과 성인병의 주원인으로 지목되며 커지는 원성에 비례하여 매출은 떨어지고 있다.
햄버거(Hamburger)의 기원에 관해서는 세계의 정복자인 몽골인이 먹던 육회, 곧 날것으로 먹는 타타르 스테이크가 함부르크(Hamburg)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북해 상권의 독일 상인에게 전파되고, 고기를 불에 굽는 요리법이 등장하여 함부르크 스테이크가 되었으며 타타르 소스가 첨가되면서 오늘날의 햄버거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 때 박람회장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자 한 요리사가 너무 바쁜 나머지 번즈(buns)라고 부르는 둥근 빵에 다진 고기를 구운 패티(patty)를 끼워 케첩, 겨자 등을 곁들여 먹도록 한 적이 있었다. 1949년 맥도널드 형제가 캘리포니아의 샌 버다니노에 처음 식당을 열고 햄버거를 선보이면서 본격적인 상품화가 시작되었다.
햄버거가 미국에서 인기를 끌게 된 데는 맛보다는 편의성과 질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미국의 음식문화가 큰 역할을 했다. 햄버거뿐만 아니라 도넛, 샌드위치, 핫도그, 콜라처럼 미국을 대표하는 패스트푸드는 규격화, 대량화를 지향하는 체인점이 제격일 수밖에 없다. 발효와 손맛이 결정적인 요소인 우리 음식문화에 언제부터인가 체인점이 등장하여 획일화, 패스트푸드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씁쓸, 쓸쓸한 ‘명상감’이다.
4부 문자의 예술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
-마음에 오래 남는 말
김춘수의 시 <꽃>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한강 다리를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게 있다. 신문이나 책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강을 안 보면 생각이 안 나고 지나가는데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가, 혹은 손에 아무것도 없이 멍하니 손잡이를 잡고 서 있다가 한강을 보게 되면 친구 생각이 난다. 한강변 아파트에 사는 어느 선생님 댁에 갔을 때 그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저는 매일 한강을 건너다니면서 출퇴근을 하는데요. 한강을 보지 않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보다 한강에 대해 훨씬 더 자주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강을 넘어 다니면서 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쌓이면 큰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의 말이 한강을 건너다닐 때마다 떠오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은 그때 그의 말을 들었던, 한강 이남에서 살며 한강 이북의 직장에 출퇴근을 하는 모든 사람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 때의 그 말 때문에라도 그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되었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그렇게 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아이구, 뭐 그렇게 오래 남아 있대, 징그럽게?”
내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했다. 그 사람 역시 남아 있다. 오래 남아 있는 걸 징그러워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와서 한 첫 마디 말
-말문
말을 늦게 배우는 아이들이 있다.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세상에 선포해버린 싯다르타도 있고 돌도 되기 전에 책을 읽는, 읽는다기보다는 읽어주는 엄마의 말을 외워버리는 천재 아이들이 있듯이 취미로 물구나무서기까지 하는데 엄마, 아빠도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아이가 말이 늦으면 부모는 걱정하기 마련이다. 특히 자신이 어릴 때 말문이 늦게 틔었다는 말을 들었던 사람이 부모가 되면 더욱 그렇다. 내 친구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아이가 지금 세 돌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엄마, 아빠라는 말도 하지 않아서, 못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는 걱정이 많다. 그렇다고 자신도 말문이 늦게 틔었다고 부인에게 이실직고하지도 못했다. 연애시절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 하나만 가지고 돈 많고 잘나고 성격까지 좋은 예닐곱 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결혼에 성공한 터라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런 말은 못하겠다는 것이다. 처가 쪽에 슬쩍 아기 엄마가 어린 시절 말을 늦게 배웠는지 탐문해 보았지만 보통 아이들처럼 때가 되니 저절로 말문이 틔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마침내 그는 아이를 병원에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을 하게 되었고 어느 술자리에서 심각하게 의논을 해왔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려 보라, 남자 애들이 상대적으로 늦는 편이라고 말해주었다. 나 역시 말문이 늦게 터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그런데 일주일 뒤쯤, 친구가 기쁨에 넘치는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우리 형우가, 덩치는 그맘때 내 두 배는 될 거야. 아, 이 놈이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쥐고는 쿵쿵 소리를 내면서 부엌으로 오더라고. 설거지를 하는 내 옆으로 와서 바짓가랑이를 꽉 잡고는 이러는 거야. 물 줘.”
“뭐라고 했다고?”
“아, 물 달라고, 처음부터 문장을 쓰더라니까. 것도 조용하게. 소름이 쫙 끼치는 거 있지.”
“세상에 대고 말한 첫 마디가 그거야? 그것도 반말로?”
“응. 이놈 큰 인물 되는 거 아닐까?”
“그러는 너는 다 컸냐?”
“아, 됐어. 그만 끊자고.”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