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내용에 따라 문학성이 짙은 것, 사상성이 짙은 것, 서간문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각각 "나만의 정원", "시대의 종소리", "편지"라는 제목을 붙였다. 글로써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에 관해 쓴 "연애 편지 쓰는 법", 형과의절한 후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난 주작인이 국민적 작가가 된 형의 따뜻한 일면을 조명한 「노신의 미소」", 좋아하던 소녀가 커서 기생이 되리라는어른들의 악담을 듣고 소녀를 구하겠다는 착하고 소심한 소년의 심리가 잘 묘사된 「첫사랑」 등이 실렸다.
■ 저자 주작인
중국 절강성 소흥에서 출생하여강남수사학당을 거쳐 일본 입교대학에서 문학 수업을 하면서 미국과 유럽 및 러시아 문학을 번역 소개하였다. 귀국 후에는 북경대학 교수로 취임하여형 노신과 5.4신문학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평가되었다. 저서로 『담호집談虎執』 『지당문집知堂汶集』 『草木衷漁』『苦茶隨筆』 등이 있다.
■ 역자 방철환
충남 대전 출생. 충남대학교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 중문과 대학원에서 「老殘遊記硏究」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강사를 역임하였으며, 방송작가협회회원이다. 역서로 『북경 이야기』(전2권)가 있다.
■ 차례
태백산문선을발간하며
일러두기
대륙의 위대한 유산-周作人
제1부 나만의 정원
첫사랑
연애 편지 쓰는법
배부른 굶주림
구더기의 효용
어떤 촌민의 죽음
...
제2부 시대의 종소리
상하이풍
십삼을꺼리다
반춘화
포독곡 통신
저주
...
제3부 편지
부의군에게 보내는 글
산사에서 보내는편지
지겨운 북경의 비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일러두기
대륙의 위대한 유산 -주작인
연애 편지 쓰는 법
노신魯迅의 미소
노신이 세상을 떠난 지도 이미 이십 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사후에도 계속 사람들의 지속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그 동안 그를 위해 발표된 문장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림이나 조각상도 사진에서 본 대로 이미 적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물론 무척 훌륭한 기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어떤 부분은 아직도 충분히 표현되지 못해서, 노신의 모습 전부를 나타낼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점은 방패에 비유할 수 있다. 양면이 있는 방패는, 비록 양면이 서로 무척 다르지만, 양면이 함께 사용되며,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노신은 나와 적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사람이다. 그는 적에 대해서는 일말의 인정도 베풀지 않는다. 만약에 사람을 무는 발바리라면, 놈이 아무리 물에 빠졌더라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때릴 것이다. 소설에서 여러 가지 잡문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적 집필 과정은 대부분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문학작품 속에 표현한 것들은, 모두 투쟁하는 분노의 형상이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마귀가 내린 불상의 모습처럼, 엄격하고도 무서운 형상이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따뜻하게 대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 바로 방패의 안쪽 면과 같은 모습이다. 요철로 덮인 바깥쪽 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이다. 아마도 사용하기 편하도록 안쪽에 고대의 백조 털을 한 층 덧댄 모양이다.
노신의 투쟁은 목적이 분명하다. 그의 투쟁은 단순히 적을 죽이기 위해 죽이는 투쟁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가까운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하는 싸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분투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도 마귀가 내린 불상이 머리를 돌려 중생을 바라볼 때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한 금빛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다.
노신은 반혁명 세력을 섬멸하기 위하여 투쟁하였다. 우리는 그의 위대한 노력과 그 과정에서 생긴 분노에 찬 모습을 존중하여야 한다. 동시에 그의 다른 한 모습을 잊어서도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특히 청년들과 어린이들을 향한 그 미소 띤 얼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전에 노신의 초상화들을 본 적이 있다. 그림 속에 묘사된 노신의 모습은 거의 다 지나치게 엄숙하고 부드러움이 적었다. 아마도 노신의 사진 때문인 것 같다. 사진 속의 노신은 사진을 찍을 때 신중하게 하느라고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두번째 원인은, 노신과 가까이 지내 본 적이 없는 화가가 노신의 문학작품에서 얻은 인상을 가지고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느낀 것은 투쟁적인 분위기가 많았을 터이니, 그렇게 그려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가끔은 눈썹을 치켜 뜬 성난 눈을 하고, 막 반격하는 문장을 쓰려고 할 때와 같은 모습을 그린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엄숙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라면, 한 면으로만 치우치는 단점이 있다.
노신의 생전에 그와 잘 알고 지냈던 가까운 사람들이나, 학교에서 그의 강의를 들어 본 학생들, 또는 그와 함께 일을 했거나 문예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라도 그의 따뜻한 일면을 한 번쯤 체험해 보았을 것이다. 북경대학에서 노신의 소설사 강의를 들었던 어떤 사람이, 과거에 이런 이야기를 기술한 적이 있었다. 노신이 『홍루몽』을 강의하면서, 아마 본문 중 임대옥林黛玉에 관한 어떤 구절을 인용할 때였나 보다. 노신이 문득 “여러분은 임대옥을 좋아하는가?” 하고 물으니, 모두들 대부분 좋아한다고 대답하였던 모양이다. 그때 학생 중 한 명이 갑자기 노신에게 “주선생님은 임대옥을 좋아하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노신이 웃으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그 학생이 왜 좋아하지 않느냐고 다시 물었다. 노신이 대답하길, 임대옥은 항상 울고 짜기 때문이라고 하였단다. 당시 노신은 분명히 무척 정중하게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또한 틀림없이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무한한 친근감을 주는 그런 미소 말이다.
노신의 문장도 다분히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요소가 많다. 노신의 해학은 그것이 적의 몸에 닿으면 일종의 채찍이 되고, 친근한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약간의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여기서 굳이 노신의 부드러운 점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점도 있다는 사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는 것뿐이다. 원래 노신의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이 평균적이지는 않다. 평소 보여진 노신의 모습은 역시 엄숙한 면이 많았다. 나는 미술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노신 생전에 도원경陶元慶이 그에게 그려주었던 초상화 한 폭이 무척 훌륭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노신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였다. 마치 노신의 정신세계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은 그림이었다.
십자로의 탑
구리야가와 하쿠손(廚川白村, 1880~1923)의 저서 중에 두 권의 논문집이 있는데, 한 권은 제목이 『상아탑을 나와서』이고, 다른 한 권의 제목은 『십자로로 향하다』이다. 그 뜻인즉, 그가 순수한 예술의 세계를 떠나서 사회의 일들에 관여하겠다는 자세다. 지금 그의 말을 모방한다면, 나는 십자로의 탑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바로 사거리에 살았던 사람이다. 나의 고향은 화동華東 지방의 서붕西朋 마을 입구였다. 십자로의 모퉁이에는 네 개의 점포가 있었다. 하나는 꽈배기 가게였고, 한 쪽은 키 작은 외지인이 경영하던 태산당泰山堂 약방이었다. 또 한 집은 덕흥德興 주점이었고, 나머지 한 곳은 과일 가게였다. 우리들은 이 가게 주인을 화타華陀라고 불렀다. 그의 과일이 선단仙丹처럼 신기하고 희귀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이사 다니면서 거리의 공기를 마음껏 마셨다. 모자란 것이 있다면, 단지 재상의 궁전에서 밤을 보낸 적이 없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는 비록 진정한 ‘거리의 아들’이라 불릴 수는 없지만, 역시 거리와 인연이 많은 사람이다. 귀 가리개로 귀를 덮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신사의 모습이 부족한 점은 대체로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예전에 조부님께서도 이것은 천한 모습이라고 나를 나무라셨다.
나는 비록 이처럼 스스로를 수레 끌며 간장을 파는 부류라고 자인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공상을 즐기는 부류이기도 하다. 어떤 때는 등받이 없는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서 잠시 조용히 생각에 잠기고 싶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날 등불 구경 나온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길가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거처를 부득이 십자로의 탑 안으로 정한 것이다.
탑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제일 먼저 고향에 있는 괴산怪山 위의 응천탑應天塔이 생각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야군?郡에 있던 동무산東武山이 하루저녁에 날아와서,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기여 괴산이라고 불렀다 한다. 후에 이 산이 또 다시 날아갈까 두려워서, 마을 사람들이 곧 산 위에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앞채의 창을 열고 바라보면, 동남쪽으로 드리워진 탑 그림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중원中元 전후에는 노마님들이 좋은 뜻으로 영혼들에게 부조를 하러 가서 지옥을 비추는 등불을 밝힌다. 그래서 밤에 쳐다보면 더욱 아름다운데, 뜻밖에도 선통宣統 연간에 이로 인하여 애석하게도 탑이 불타버렸다. 그 후 빈 껍질만 남았으니, 다시는 노마님들이 올라가 등불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 10년 전에 나는 한 친구와 그 탑 아래를 배회하다가 깨진 벽돌 한 조각을 주운 적이 있다. 벽돌의 끝머리에 해서체楷書體로 ‘호국선사 월강護國禪師月江’이라는 여섯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는데, 결국은 이 스님이 누구인지 찾아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탑은, 산스크리트의 ‘수투파’나 혹은 ‘한 명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7층 불탑을 짓는 일보다 낫다’는 그런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높이 솟은 망루 같은 것으로, 바로 서구의 나라에서 만든 ‘타워’를 의미한다. 이단의 탑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탑이다. 탑 안에 조용히 앉아서 묵념에 잠기는 것은 원래 제격이다. 또 지금은 마침 무엇이든 불교화되고 있는 추세이니, 탑 안에 거주하는 것도 상당히 유행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나의 묵념은 태반이 구실에 불과하다. 사실 나는 복잡한 가운데서 안전한 곳을 얻고 싶은 것이다. 마치 앞문이 있는 금은방이 예비로 철문을 만들듯이, 비록 비바람을 막아줄 처마가 있는 제일의 빌딩이라도 별도로 재앙을 막는 상징물을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나는 오래도록 십자로에서 살아왔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조직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붐비는 시민들 가운데에 끼어 있자니, 다소 불편하고 위험하기도 하다. 혹시 그들에게 밀쳐서 안경이 깨질까 봐 겁난다. 그러니 역시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이 제일 좋다. 황주黃酒 두 근을 마신 후, 대로를 바라보고 몇 마디 고함을 지르면서, 답답한 심사를 풀어낸다. 기분이 울적하면 창문을 닫고서 나만의 ‘구성궁九成宮’으로 쓴다면 얼마나 자유롭고 운치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쓰다보니, 문득 중세 유럽의 민간설화가 생각난다. 나무 판화 위에 합다哈多 주교가 쥐로 변한 원귀를 피하려고 황폐한 섬에 있는 굴뚝처럼 보이는 벽돌 탑 안에 숨어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다. 머리에 승려 모자를 쓴 그는 상반신을 밖으로 내민 채 다급해 하고 있었다. 수많은 쥐들이 떼지어 물을 건너오고 있었으며, 몇 마리 큰 쥐들은 이미 탑 꼭대기로 올라와 있었다. 나중에 그 주교는 결국 쥐들에게 잡혀 먹혔다고 한다. 생각해 보시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러고 보면 그런 종류의 망루도 그다지 믿을 만한 곳은 못된다. 그러나 쥐는 들어올 수 있어도 사람은 못 들어올 것이고, 어찌되었든 내가 쥐들과 원한을 맺지 않는 바에야, 별로 걱정할 일도 아니다. 나는 다시 앞문 외에 철책문의 안전성에 대한 생각이 났는데, 나의 이 탑에도 걸맞을 것 같다. 만약에 옹도雍濤 선생의 격언정格言亭처럼 그렇게 지으면, 당연히 더욱 견고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상아탑을 떠나 십자로로 가는데, 나는 오히려 십자로에 탑을 세워 살려고 하니, 거의 기회주의자처럼 보이겠지? 나는 원래 어떤 종류의 예술가도 아니다. 상아탑이든 소뿔 탑이든 없으니, 자연히 거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또 피곤하고 복잡한 것은 싫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길가의 탑 속에 사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중국은 이러한 태도를 가장 거슬려 한다. 일반 대중들이 탑을 보면, 곧 이것은 지식계급이라고 말한다(바로 죄가 되는 것이다). 지역 유지나 상인들은 탑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면, 곧 당원이라고 말한다(물론 금지 대상이다). 그러나 이것도 무슨 방해될 일은 아니다. 역시 수죽촌인水竹村人이 말했듯이 ‘순리대로 따를 뿐’, 상관할 바 아니다. 아무튼 이런 잡담들은 모두 신뢰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또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탑과 거리는 서로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세상사에 무관심한 채로 탑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원칙상 거리에 대한 반동이다. 거리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그들의 탑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도 대중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상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오로지 거리의 군중을 따라갈 준비만 할 뿐, 아무렇게나 맹목적으로 살면서, 자신의 의견에 근거한 한두 마디조차 할 생각을 안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그의 탑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 탑도 나 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그들을 대신해서 그 이름만 지었을 뿐이다.
길 찾는 사람
서옥낙徐玉諾군에게 바치는 글
나는 길 찾는 사람이다. 나는 매일매일 걸으면서 길을 찾지만, 결국은 아직까지도 이 길의 방향을 알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야 알겠다. 슬픔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연계의 길이라는 것을. 이것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공통된 길이지만, 우리는 그저 의식하고만 있을 뿐이다.
이 길의 끝은 죽음이다. 설령 그럴지라도 우리는 몸부림치면서 그곳을 향하여 간다. 또한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발버둥치지 않을 수도 없다.
나는 전에 서사西四 빌딩에서 어떤 강도를 자동차에 싣고 천교天橋로 가서 처형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마음속으로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관례대로 무개차에 태우지 않았을까? 왜 그로 하여금 길가의 풍경을 천천히 보도록 해주지 못하였을까? 사람들의 담론을 들으면서, 가야만 할 노정을 지나서, 다시 당도해야만 할 곳으로 가도록 못하였을까? 어째서 한 줄기 바람처럼 그를 그렇게 보내야만 하였을까? 진실로 너무나 잔인하다.
우리들 중 누가 무개차를 타지 않고 가겠는가?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향한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웃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지금 울고 있다. 어떤 이는 취하였고, 어떤 이는 잠들었다. 우리는 다만 천천히 가면서, 길가의 풍경도 보고, 사람들의 담론도 듣고, 그러면서 마땅히 겪어야 할 이러한 고통과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싶을 뿐이다. 노선이 어떠한가, 혹은 서사 빌딩에서 남쪽으로 가든, 동단東單 빌딩에서 북쪽으로 가든, 그런 것들이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
옥낙玉諾은 슬픔을 깊게 겪어온 사람이다. 이번에 그의 마을이 산적들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오직 그의 부친만이 외부에 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들 아직 소식이 없다. 그는 지금은 눈물이 말라버렸다고 말하였다.-그대도 이미 그대의 길을 찾았겠지요?
마치 웃는 것 같던 그의 얼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진정 영원한 나그네의 얼굴이었다. 우리는 당연히 최고의 낙천가들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의 비관과 실망은 없을 터이니까.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