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자본주의 세계에 편입된 이후 한반도에 살고 있는 지식인의 고뇌가 깊이 배어 있으며,인간의 삶에 대한 치열한 관찰과 생동하는 정신을 그 바탕으로 한다. 특히 인간 옹호의 정신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잘보여주었다.
■ 저자 이태준
호는 상허. 이광수, 염상섭 등을이어받은 1930년대 최대의 단편 소설 작가. 1904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태어나 망명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그후여러 곳을 전전하다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일본에서 집필한 "오몽녀(五夢女)"가 「조선문단」에발표되면서 등단, 귀국 후 「개벽」사에 입사하여 잡지 「어린이」에 동화와 수필을 발표했다. 미문으로 일제 하 하층민의 삶, 지식인들의 고뇌 등을그려냈으며 "구인회"동인의 한 사람으로 기자생활과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소설분과 위원장으로활약하다가 1946년 월북했으나 "부르주아 문학을 한다"는 이유로 숙청됐다. 지은 책으로 단편집 『달밤』『가마귀』『복덕방』『돌다리』『해방 전후』등과 수필집 『무서록』, 문장론 『문장강화『가 있다.
■ 차례
1.추억
중학시대
도보삼천리
나의 고아시대
용담 이야기
남행열차
그들의얼굴위에서
...
2.자연
물
밤
산
화단
파초
바다
가을 꽃
여명
수목
3. 삶과 사람 사는도리
죽음
발
벽
조숙무
성
고독
...
4. 왜 글을 쓰는가
소설의 맛
누구를 위해 쓸것인가
평론가
야간비행
책
필묵
...
5. 동화
쓸쓸한 밤길
눈물의 입학
물고기이야기
6. 기행문 기타
너
먼저 진상을알자
사쿠라
오호! 이윤재선생
정열과 지성
인민대표 대회와 나의 소감
크레믈린 궁
스흠의달밤
만주기행
남행열차
정열과 지성
동경학창시대에 나는 상하이에 가서 마침 손문 선생의 1주년기념식장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중국청년들의 대륙성이라기보다는 나약과 무정열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그 후 어떤 외국인의 중국기행 중 한 중국 지식청년과의 대화를 읽고는 나의 상하이에서의 감각이 과히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대는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중국에서보다 미국에 가 더 오래 교육받았소.”
“그대는 그럼 국민당에 가입하였는가?”
“아무 당에도 관계하지 않소.”
“당신 같은 유위한 청년이 조국혁명기에 있어 어째 아무 당에도 관계하지 않았는가?”
“우리 중국엔 호철好鐵은 불타정不打釘이란 말이 있소. 좋은 사람은 정활政活에 나서지 않소.”
“그러면 손일선이나 장개석은 나쁜 사람인가?”
그 질문에는 대답도 못하더란 기록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청년일 바엔 지성의 빈곤보다 정열의 빈곤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그 나라를 위해서나, 그 성장을 위해 한심한 것이다. 지금의 중국 청년은 결코 그렇지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중국 청년들은 일보다도 처세를 배우는 편으로, 나라거나, 민족이라거나, 사회라거나 하는 문제에 일부러 등한하려 한 것은 그들의 역사와 전통으로 보아 과히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조선 청년들은 제삼자들 눈에 어떻게 비칠 것인가? 여러 가지 ‘삐라’로, ‘데모’로, 결사로 나타나는 청년들의 움직임을 보고 그렇게 오랫동안 일제 밑에서 신경거세를 당해온 민족으로는 놀랄 만치 정력왕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외인의 감상이다. 그리고 그 외인이 한 가지 붙여 말하는 것은 이번 반탁운동을 보고 특히 학생층의 반탁운동에 대하여 조선 청년은 정열보다 지성의 빈곤이 아닌가 느낀다는 것이다.
우리 3천만에겐 최근 이삼 년 간 오직 환상생활이 있었을 뿐이다. 내 자신 『정감록』을 중요한 화제로 삼아왔다. 우리 손으로 직접 싸우지는 못하고 현실적 경론은 아무것도 못하고 오직 기다리는 일종 사행심으로 견디어 온 것이다. 오늘 우리의 해방은 우리의 실제와는 아무런 연락이 없이 온 것이라 국제적으로 아무런 현실적 지식이나 세련洗鍊이 전혀 없었다. 연합군이라 하면 단순히 우리들의 감상적 기대에 곧 영합될 줄 알았고, 일제를 우리에게서 축출하는 것으로만 생색을 내고 곧 물러가 줄줄만 알았다. 연합국은 다 한가지려니 했는데 서로 다르게 드러나고, 미소 양군은 서울서 만나 축배나 들고 헤어지려니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독립만 되면 그만이려니 했는데 당하고 보니 독립하도록 여러 가지 견해와 여러 가지 이해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어 준비 없던 민족에게 여러 가지로 당황하게 한다. 해외에서 들어온 이들이나 해내海內에 있은 이들이나 똑 같이 한 파 한 당만이 아니다. 3상회담을 반대하는데 지지도 한다. 갑은 국부라 동지라 하는데 을은 매국노라 반동자라 한다.
왜 그런가? 거기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비판하고 그리고 행동할 것이다. 격렬한 선동적 언사에 끌리어 흥분하는 것은 정열이기보다 망동이기 쉽다. 학병들과 반탁청년들의 충돌 같은 것은 우리 민족이 해방 이후 처음으로 세계에 폭로한 ‘지성의 빈곤’이다.
어느 외인이 위에서 지적한 지성의 빈곤이란 이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세계에서 사회주의의 대표국가인 소련은 그 의미에서 가장 실제적인 나라이며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대표국가인 미국은 역시 그 의미에서 가장 실제적인 국가다. 이 실제의 이 주반珠盤의 두 군대의 군정 혹은 반군정하半軍政下에 있는 우리가 비실제적이고서야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먼저 모든 환상을, 즉 국내 자체에서부터 인공人共에고 임정臨政에고, 우익에고 좌익에고 자편도취自偏陶醉의 환상, 감상, 이런 것을 깨끗이 청산하고 실제적인 견해와 행동을 하자. 여기에 일치되지 않고는 우리의 독립이란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민대표대회와 나의 소감
8월 15일도 이미 역사 속에 사라졌다. 우리의 해방이 우리 자력만에 의한 것이 아니었던 만치 우리에게는 자유의 열락悅樂을 만족할 겨를도 없이 너무나 비극적인 정치적 시련이 급박히 강요된 것이다. 민족은 하나이되 해방 즉각부터 전후처치戰後處置에는 통일된 한개의 구상이 아니었다. 억압되었던 민중의 생활과 사상은 다색다양으로 산기散起됨이 차라리 자연한 정세일 것이나 그 중에도 허턱 전설적인 독립몽獨立夢에서 자본주의 사회를 그대로 계승하려는 특권층의 요구와 이미 총독정치시대부터 부절히 싸워오던 노농층의 혁명적 요구는 안으로는 불상용의 대립이며 밖으로는 성격과 이해가 상반되는 미소의 대립이 우연이라기보다 이도 또한 자연한 정세로 우리 강토의 38도선상에서 그 선봉을 맛대이게 된 것이다.
어찌될 것인가? 아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우리 민족은 결단하지 않으면 안될 절실한 정치적 관심에 어느 한 사람 등한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이런 정세 하에서 오늘 12월 22일 우리 민족사상에 특기할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렸다. 나는 일개 예술가일 뿐 정치가나 어느 당원은 현재도 아니요 영원히 아닐 것이다. 민족문화 건설을 위해 총독정치를 적극으로 대항할 힘은 없고 민족문화를 도외시하던 그때의 좌익운동엔 가단할 필요가 없던 나는 서재 속에서 명맥을 지키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 선열들과 정의 연합군의 승리로 이제 우리 민족문화 건설에 자유를 얻은 이상 문화에 가장 진보적인 향도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정체의 수립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요망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런 정체의 수립과정에 있어서는 정치적 일익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은 나 일인뿐 아니라 모든 양심적인 문화인의 결속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로서 문화활동의 기본방책을 공언한 바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인의 이 대회에 대한 기대는 범상할 수 없는 것이다.
대회는 순조로 개회되었다. 결코 순조일 리 없는 것을 순조화시킨 데 먼저 진리 그것에와 강로제현當路諸賢의 열성을 감사한다. 칠백의 각도 각군 대표들, 수천의 옥내외의 방청자들, 빛나는 눈들과 붉은 얼굴들, 이지와 열의의 바다였다. 선출된 8명의 의장 이하 수십 명의 역원들 모두 귀에 익지 않은 이름들이다. 일본제국주의시대엔 무대를 못 가졌고 지하에, 옥리獄裏에 묻히었던 투사들인 때문이다. 헌신적인 투쟁의 과거를 가졌고, 민족의 경제적 운명에 가장 과학적인 신념을 가진 그들임으로써 민중은 신뢰하는 것이다. 이 대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민주주의인민대표대회로 충분한 것은 여운형 선생의 보고문으로 십분 긍정되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삼천만 민족의 다대수인 근로층 인민을 가졌다는 것이 절대한 이 대회의 힘인 것이다. 설사 명성은 더 높다치자. 수완은 더 노련하다 치자. 인민을 갖지 않은 정체, 인민과 이해를 달리하는 정책이라면, 더구나 민족의 경제적 운명에 과감하지 못한 정책이라면, 이것은 민족 전체가 지지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회 자체가 그렇거니와, 공산당대표의 축사에도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에 전폭적 협력을 공언한 것은 여기 새삼스레 지적할 필요도 없거니와 공산주의와 진보적 민주주의의 이론적 합치는 미정청에 대한 방사적 적응이 아니라 이야말로 조선민족의 역사적 필연의 귀결인 것이다. 그러므로 악질의 민족반역자 외에는 양심적 반성과 민족의 운명이 경제선상에서 결정된다는 냉철한 사고를 거친다면 누구나 적어도 진보적 민주주의에 협찬하며, 따라서 진보적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악수에 축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하한 인사나 정당을 물론하고 우리 인민전체의 진정한 행복을 생각하고 세계문화의 일환으로서 ○○○ 민족문화건설이 진실한 의도가 잇따라 ○○○ 간적 조망은 다를지언정 이 대회에서 추진되는 인민정체에 결국은 협력할 것을 믿는 바이다.
- 「자유신문」 1945. 11. 22.
크레믈린 궁
9월 1일, 나의 모스크바 첫 외출은 크레믈린 궁, 외객外客을 위한 복스의 전용버스 두 대에 실려 큰길에 나서니 곧 모스크바 대극장이 있는 광장이다. 이 광장을 자나면 좌측에 현대식 고층의 모스크바 호텔, 그 앞이 또 광장, 우측은 큰 책사冊肆가 많다는 고리키 거리, 이 둘째 번 광장은 벌써 한편이 크레믈린의 붉은 궁단宮壇이다. 궁단 밑 녹지대를 잠깐 지나면 단정한 복장의 파수병들이 서 있는 크레믈린의 측문側門이 된다. 차에 앉은 채로 문을 통과한다. 시가보다 지대가 훨씬 높아지며 푸시퀸의 동화 삽화 같은, 금색, 은색의 방울지붕들, 뾰족지붕들이 나온다. 차를 내리면 한편으로는 모스크바의 반쪽이 즐비하고, 문들은 높고 두터워 조심조심 열린다. 들어서면 집 속마다 따로 하늘을 가져 까맣게 높은 데서 보석 광주리 같은 샹들리에가 처처에 드리웠다.
우리가 첫 번 들어선 곳은 역대 무구武具 진열실, 그리고 페테르 대제 이후 금을 물 쓰듯 한 갖은 궁정 집기와 제왕 후빈들의 장신구들, 그 중에도 회중, 탁상, 괘종 등의 시계가 무려 수천 종이어서 전 구라파적으로 시계치장유행시대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었고, 동서 각국으로부터 러시아 제실帝室에 보내온 선사들이 각국의 공예가치로 볼 만한 것이 많은데, 조선서 간 것만은 어찌 빈약한 것인지 차라리 안 보니만 못하였다. 지금도 소련을 조선의 대부분이 모르는 것처럼 그때도 러시아 현실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1896년에 온 것으로 필운筆韻이 조금도 없는 화원식畵員式의 태백대취도太白大醉圖와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가 일대一對로 걸려 있고, 이것도 그 연대밖에 안된 빈약한 자개 의롱衣籠 한 짝이 놓여 있는 것이다. 보내는 사람들이 그 물건이 놓일 러시아의 궁전이나 그 물건을 감상할 안목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것이 사실이었을 것이다. 세계인의 안목이 빈번히 지나가는 이 자리에서, 저 촌스러운 한 짝 자개농과 한 화원의 득의작得意作도 아닌 것이 조선의 공예나 미술을 어떻게 선전하고 있을 것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어떤 일본 호고가好古家의 말이 생각났다. ‘일본정부와 인사들은 국보급의 공예나 미술품이 간상奸商들 때문에 해외로 흘러나가는 것을 통탄만 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지진 없고 방화에 안전한 외국미술관에서 영구히 일본문화를 선전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라’ 한. 고려자기의 명품이 일본이나 미국의 일류 박물관에서 왕좌와 같은 케이스를 차지하고 앉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소련이나 기타국에서는 그런 말을 듣지 못하였다. 차라리 국내에는 점수를 줄이더라도 상대국에서 환영만 한다면, 우리 민족의 공예품도 좀더 세계적 진열창에 널리 놓여져야 하겠다.
크레믈린 경내는 중세기 이후 건축전람회 같았다. 사원도 여러 가지가 있고, 궁실도 순 이탈리아식, 내부만 프랑스식인 것, 초기의 순 러시아식 궁실, 중엽의 궁실, 전등 사용 이후의 궁실,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바, 초기 것에서 재미있는 것은, 왕의 기도실祈禱室과 언제나 구차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편이었던 예수의 정신이 이 속에 머물러 있을까 싶지 않은, 일종 사치 비품 같은, 보석투성이의 성경책들과, 형식상으로라도 ‘백성의 창’이란 것이 설계되어 있은 것이다. 이층 위인 왕의 침소에서 내려다보는 창인데, 백성들은 그 밑에 와 엎디어 그들의 소장訴狀을 넣고 가는 궤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으나 소장을 받기만 할 뿐, 그 궤를 열어 처분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그 궤의 별명은 ‘똘기야시크’(오랜 궤짝)이며 지금도 무슨 긴급한 일을 맡고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을 “똘기야시크에 들어갔다” 한다는 것이다.
소련의 국회의사당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크레믈린 속에, 그전 궁실에서 그냥 복도로 연락되게 증축의 일부로 되어 있다. 장방형인 것과 직선이 많고 백색이 주조主調인 것은 이성理性과 과학정신의 상징 같았다. 후반은 이층으로 뒷자리에서는 연단까지 상당한 거리다. 그러나 어느 좌석에도 연사의 말이 그대로 오고 이쪽의 말도 그대로 연단에 가는 통화장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커버를 걷어 주는 의자에 잠시 기대어, 정면으로 레닌의 사자후獅子吼의 거상巨像을 바라보며 엄숙한 감정에 부딪쳤다.
생각하면 의미 깊은 전당이다. 단순히 소비에트연방의 의회장으로가 아니다. 인류가 가져본 사업 중에 가장 크고 옳은 사업의 기관실인 것이다.
우리 인류에게 혁명사나 건국사는 허다하되, 그 자유와 문화의 복리가 전인류에게 미치며 전 인류의 영구한 평화상태를 향해 나가는 ‘계획사회’의 출현은 여기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만강滿腔의 경의를 표해 옳은 것이다. 아직까지 인류가 경륜經綸하고 있는 국가나 사회 중에 여기처럼 근본적인 개혁에서, 이른바 ‘인간이 철저한 의식을 갖고 그의 역사를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 사회’는 다른 데 없으며 더욱 오늘 조선과 같은 민족이나 사회로서 옳은 국가 건설을 하자면 어느 용도로 비춰보나 운명적으로 결탁이 될 사회는 어디보다 여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크레믈린 구경이 아니라 이 최고 소비에트 의회실 구경이, 더욱 모스크바에 들어 첫날 이곳을 구경하는 것이 가장 감명 깊고 만족한 일이다. 이것은 소비에트에 대한 예의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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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의 양심’이라던 로망 롤랑이나 바르부스가 진작부터 소비에트를 지지한 것이나, 앙드레 지드가 바로 이 크레믈린 앞마당 붉은 광장에서 고리키의 영구靈柩 앞에서 “문화의 운명은 우리 정신 속에서 소비에트의 운명과 넌지시 결탁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소비에트를 옹호하는 것이다.”고 고백한 것은, 이 말만은 가장 진실한 바를 외치었던 것으로, 이 소비에트에서 자라나는 자유와 문화의 복리는 조선 같은 약소민족에게는 물론이요 나아가서는 전 인류의 그것과 이미 뚜렷하게 결탁되어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 여행기에서」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