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방

   
귀유광(역자: 박경란)
ǻ
태학사
   
6000
2002�� 08��



■ 책 소개
명대明代 중기 소품문의 선구자귀유광歸有光(1506∼1571)의 산문집 모음이다. 그는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조선후기 북학파 문인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정조 때문체반정의 대상이 되는 패사소품문의 원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짧은 편폭으로 평범한 인물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서정성이 뛰어난 문장을 썼다.특히 가족이나 친지들에 대해 쓴 글에는 자신의 희로애락의 감정이 꾸밈없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바로 그가 문장에서 "진정"의 토로를 가장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오장육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식 없는 감정을 그대로 노출시키고자 했다. 이때 그 "진정"은 이미 유학자귀유광의 "진정"이 아니라, 인간 귀유광의 "진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귀유광의 사상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바로 "인간 사랑"이다. 그는 정치적 견해를 펼때도, 복고론이나 문학론을 말할 때도, 항상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육체를 가진 "인간"은 천도天道와 맞을 수 없음을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성인聖人은 천도에 밝아 우리 인간들이 감정을 발산하며 즐겁게 살아가도록 도와줄 수 있으니, 우리는 단지 성인의 가르침에따라 서로를 사랑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근엄하기만 했던 유가儒家의 도道를 "사랑"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인간 위에 군림했던 성리학의 도덕규범을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삶의 이치로 바꾸었다.


그는 또 여성의 비참한 운명을 동정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인식했으며, 여성의 평범한 일상을 높이 평가하고 여성의 삶을 존중했다. 그는 남녀의 역할에 구분은 있을지언정, 그 의의에서는 차이가 없지만,단지 여자는 남자를 돕느라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여 가정 일상사만 남아 기록을 얻지 못한 것뿐이라고 했다. 


귀유광의 이같은 여성존중 사상은 인간 사랑이라는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그가 사랑했고 또 그리워했던 여성들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 귀유광은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문장을 통해 이를 실천함으로써 훌륭한 산문의걸작들을 남길 수 있었다. 그의 서정적인 문장은 대문장가인 서위徐渭나 원굉도袁宏道 등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명말 소품문 유행의 밑거름이되었다. 


■ 저자 귀유광
자字는 희보熙甫 또는 개보開甫이고,별호別號는 진천震川 또는 항척생項脊生이다. 명明 무종武宗 정덕正德 원년 12월 24일 소주부蘇州府 곤산현崑山縣 선화리宣化里에서 태어났다.60세에야 과거에 급제하였고, 5년 뒤 남경태복사사승南京太僕寺寺丞으로 발탁되어 『마정지馬政志』를 완성하고, 『세종실록世宗實錄』을 찬수하면서 생애가장 영예로운 때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일년이 채 안된 융경隆慶 5년 1월 13일에 향년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귀유광의산문은 매우 서정적이고, 내용 또한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다루고 있어 이전의 고문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죽은 아내와 자식에 대해쓴 글은 애절한 통곡과 그리움이 느껴져 절로 콧날이 시큰해진다.


■ 역자 박경란
1965년 전북 정읍 출생.한양대학교에서 「유하동柳河東 "서술지문著述之文"에 나타난 사상연구思想硏究」로 석사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에서 「귀유광歸有光 산문연구散文硏究」로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다시 중국 상해 復旦대학에서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사상思想과 문학文ㄴ學」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강의를 하고 있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인간 사랑이야기


제1부 그리움
그리운 어머니
오래된서재
한화를 묻으며
아내의 방
아들의 장례식
...


제2부 생활과 사색
『상서별해』 서문
집으로 오는길
서재 이야기
야학헌 절벽에서
성황당 신령 이야기
...


제3부 인간 사랑
친구의 아들에게
주현재 선생의80회 생신을 축하하며
설죽雪竹을 사랑한 사람
죽은 친구를 애도하며
가난한 지식인의 일생
...


원문 제1부
원문 제2부
원문제3부




아내의 방


단지이야기
?喩

어떤 사람이 단지를 길 옆에 세워 두었는데, 그만 옆으로 쓰러지며 땅에 떨어져 버렸다. 단지가 이미 깨져 못쓰게 되자, 그 사람은 그곳을 떠나려 했다. 그때 마침 단지를 들고 있는 자가 지나갔다. 그는 재빨리 그 자를 붙들고는 “당신 왜 내 단지를 깨었소?”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의 단지를 빼앗고 대신 깨진 단지를 그에게 주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먼저 단지를 깨먹은 자의 편을 들었다. 단지를 들고 지나가던 자는 결국 대항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아! 단지를 깬 자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그냥 그곳을 떠났을 것이다. 단지를 들고 지나가던 자가 운 나쁘게 그를 만난 것뿐이다. 이는 바로 온전한 단지로 깨진 단지와 맞바꾼 것이며, 깨진 단지로 온전한 단지와 맞바꾼 것이다. 일은 이와 같이 바뀌어 버렸고, 저 시장 사람들 역시 그 본심을 잃고 말았다.

 * * *

진실이 다수의 횡포, 조작된 여론에 의해 가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 글이다. 당시 귀유광은 자신의 학문이 공정하게 평가되지 않고 주류문단에 의해 왜곡되는 것을 보았다. 뿐만 아니라 과거시험장에서도 그는 모함 받아 낙방하게 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해혹解惑?과 같은 문장을 써서 자신에 대한 비난과 의혹을 벗겨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진실을 밝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는 우언이라는 수법으로 자신의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며, 이런 사회적 모순을 풍자한 것이다.



꽃과 역사
花史館記

자문子問은 장주長洲 보리甫里에 살고 있으며, 나의 매제가 된다. 나는 가끔 그곳으로 건너가 오송강에 배를 띄워 백련사白蓮寺를 둘러보거나 안은당安隱堂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보리甫里 선생이라 불렸던) 당말唐末의 은자 천수天隨 육귀몽陸龜蒙 선생의 고상한 풍도를 생각하며, 함께 가슴이 벅차올라 긴 한숨을 내쉬곤 했다. 자문은 항상 『사기』를 끼고 다녔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책을 좋아했는데, 반고班固 때부터 이미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오직 자문만은 내 말이 옳다고 여겼다.


한 1년간 자문을 보지 못하다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꼭 『사기』에 대해서만 물었으며, 다른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마침 그의 집이 부서져 새로 서재를 만들게 되자 서재 이름을 ‘화사관花史館’이라고 지었다. 정원에는 사계절의 꽃나무를 심어놓고, 방안에는 『사기』를 놓아두고서 날마다 그 안에서 글을 읊으며 말하길, 인생이 이와 같이 만족스러우니 마땅히 세상에서는 이익을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사계절의 꽃나무는 바로 천지자연의 변화 속에 있으며, 어제와 오늘이 교체되는 변천 속에 있는 것이니, 그 누적됨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인간만이 천지간에 존재하면서 만물 밖에 있을 수 없음을 걱정하며 멈출 줄을 모른다. 조용히 자신을 천지 밖에 두고, 천지간의 만사를 바라보면 마치 정원 속의 꽃이 내 앞에서 피었다 졌다 하는 것과 같다. 황제黃帝시대에서 한漢 무제武帝시대까지의 위아래 2천여 년이 어찌 사계절의 꽃과 같지 않으리요! 나와 자문이 함께 할 수 있는 세월은 많아야 백년뿐이다. 백년도 안 되는 시간은 2천여 년의 세월에 비추어 보면 단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을 자기 스스로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등바등 애쓰며 멈출 줄을 모른다면, 또 어찌 세상 보기를 『사기』와 같이 할 수 있으며, 『사기』 보기를 꽃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자문과 여기까지 말하다가 다시 『사기』에 대한 얘기로 나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이를 기록하여 「화사관기花史館記」를 쓴다.

* * *

나이가 들어갈수록 봄을 맞는 것이 서럽다. 봄마다 어김없이 화사한 망울을 터트리는 꽃들을 보고 있노라면, 점점 시들어가는 내 젊음이 초라해 보여 어느새 한숨을 내쉬고 만다. 그러나 귀유광은 꽃을 역사에 비교함으로써 이런 비관적인 사고를 극복하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마다 끊임없이 싱싱한 꽃을 피우는 꽃나무들에 비해, 인간의 젊은 날은 너무도 짧다. 그러나 영원히 되풀이 되는 우주의 순환운동에 비추어 보면, 그 꽃나무 역시 한순간을 살다 갈 뿐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천지자연과 잠시도 머물지 않는 시간의 변천 속에서 꽃나무들 역시 자연의 순리에 따라 꽃을 피우다 시들어가는 것뿐이다. 그 길고 짧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사기』 2천년 역사를 보면 각 시대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져갔다. 마치 정원의 꽃나무들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피고 진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이런 우주의 섭리에 따라 한 시대를 살다 갈 뿐인 것이다. 역사의 눈으로 세상사를 보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 우리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 꽃을 바라보듯 역사를 바라보면 우리 삶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보기를 『사기』와 같이 하고, 『사기』 보길 꽃과 같이 하라고 했던 것인가!



보계산 은거기
寶界山居記

태호太湖는 동남지역의 커다란 호수다. 폭이 5백 리나 되며, 물결 사이로 솟아있는 봉우리가 백여 개나 된다. 겹겹이 포개어진 호숫가에 불쑥 뻗어 나온 언덕과 깊은 골짜기를 휘어져 가는 물굽이, 어느 하나 신령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천하의 산은 물을 만나면 즐거워한다. 그러므로 물이 혹 좁고 가늘게 흐른다면 산의 기묘함을 다하기 부족하다. 천하의 물은 산을 만나면 머물게 된다. 그러므로 산이 혹 작고 초라하다면 물의 풍취를 다하기 부족하다. 태호는 아득히 넓고 한없이 깊어 뭇 산들을 잠기게 했다. 또 산이 많으니 산자락들이 호수의 물을 가득 담고 있다. 바다 밖에 깎아지른 듯 떠있는 섬은 참으로 뛰어난 경관일 것이다. 그러나 내륙에서는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호숫가에 울룩불룩 솟아나 늘어선 것들이, 모두 호수를 끼고 있으므로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석산錫山에서 오리호五里湖를 지나다 보면, 보계산寶界山을 만나게 된다. 보계산은 동정산洞庭山의 북쪽, 추산楸山과 추산湫山의 사이에 있는데, 왕중산王仲山 선생이 그곳에 살았다. 선생은 이른 나이에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아들 왕감王鑒 역시 급제하자마자 바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집안에서 날마다 홀로 시화를 즐겼다. 이로 인해 장주長洲에 사는 육군陸君이 나를 찾아와 산거기山居記 한편 써주기를 청한 것이다.


나는 아직 보계산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전에 만봉산萬峰山에서 독서한 적이 있으므로, 호숫가 산의 경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비록 그 방향이나 형세는 다르지만, 호수를 끼고 있으면서 아름답지 않은 풍경은 없다. 게다가 마적산馬迹山과 장흥長興에서는 잔 노을이 끼는 해질 무렵이 되면, 이른바 ‘보배로운 경계’라는 보계산이 거의 다 보인다. 옛 시인 왕유王維의 망천輞川 별장은 시와 그림이 뛰어나서, 오늘날에도 그곳을 상상해볼 수 있다. 뛰어난 경치라면, 왕중산의 거처가 어찌 망천 별장의 화자강華子岡과 의호?湖보다 못하겠는가! 천리에 이르는 호수와 산들을 어떻게 망천 별장이 가질 수 있겠는가! 왕유의 맑은 정신과 뛰어난 시는 세속의 티끌 밖에 있었지만, 천보天寶 말년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자결하지 못하고 적의 더러운 수중에 머물러 있었다. 이를 보면 사대부는 세상일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원칙이 있어야 하며, 한번 실족하면 결국 씻을 수 없게 됨을 알 수 있다. 왕유 같은 자는 사람들에게 천추의 한을 남겼지만, 지금 왕중산 부자는 태평시대에 아름다운 은퇴를 했으니, 왕유가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 * *

태호는 중국에서 3번째로 큰 호수로, 면적이 2,200㎢에 달한다. 드넓은 수평선 위에 수많은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태호의 장관은 마치 바다를 방불케 한다. 중국은 땅이 넓어 내륙에 있는 사람들은 평소 바다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더욱 그랬다. 중국인들이 가끔 우리나라 동해를 보고 무슨 호수냐고 묻는 일이 있는데, 이는 그들이 우리 동해를 작게 본 것이 아니라, 서해를 날아온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다시 동해를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 것이다. 바다보기가 쉽지 않았던 중국인들은 바로 태호같이 큰 호수를 바라보며 바다와 같은 감흥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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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리호五里湖 근처 보계산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는 왕중산 부자를 위해 쓴 글이다. 그는 보계산의 모습을 멀리 장흥에서 바라본 것이 전부이지만, 태호 서남쪽에 자리한 만봉산의 절경을 떠올리며 이 아름다운 글을 써내려갔다. 오리호는 태호의 북쪽에 있으며 태호와 서로 통해있다. 그러므로 태호의 만봉산으로 오리호의 보계산 풍취를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그는 태호의 특징을 산과 물의 행복한 만남으로 묘사했다. 광활한 태호가 웅장한 산을 만났으니, 산은 물에 잠겨 즐거워하고, 물은 산을 감돌며 잔잔히 머물렀다. 이런 충만한 곳에 아름다운 사람들이 깃들어 있으니, 그야말로 산과 물과 사람의 행복한 만남인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