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이옥(역자: 심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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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사
   
7000
2001�� 06��



■ 책 소개
이옥李鈺은 연암 박지원과 더불어 산문문체의 모든 형식들을 이지러뜨리고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을 실험했던 18세기말의 인물이다. 교조적이거나 자족적인글쓰기를 했던 당시의 선비들과는 달리, 현대의 문인들처럼 참다운 개성과 진정한 마음을 담아내려고 했던 작가였다.

 


그는 과거에 대비해서 연습하던 "부賦"를 산문의 문체로 훌륭하게 부활시켰으며, 일반민중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지(장첩狀牒)도 인간관계의 실상을 반영하는 허구적 요소를 지닌 산문으로 멋지게 사용했다. 또한 불경의 어조를패러디하여 자신의 인생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생경하고 껄끄러운 글쓰기를 배격하고 자연스러운 행문行文을 추구했기에 방언과 속어를 글 속에사용하기도 하였고, 역사적 인식을 고의로 배제한 글쓰기를 통하여 세계의 인식에서 고정성·규범성을 탈피하려는 해체적 방법을 내세우기도하였다.("송광사"라는 글이 그러한 글이다.)


산문은 예리한 관찰력에서 나온다. 거기에는 관심이 있어야 한다. 관심은 사물에 대한 애정이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주변의 사물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게 하고, 번민하게 하고, 애정을 가지게 하고, 글을 쓰게한다. 가슴 속에서 타는 듯한 심정을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옥의 산문에서 이러한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이 책은 이옥의 산문 가운데서 몇몇 작품을 임의로 선별하여 번역한 것으로, 창작의 시기를고려하지 않고 주제나 글쓰기 방식이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것끼리 분류하였다. 자유로운 형식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토하듯 기이한생각과 감정을 토해낸 산문의 맛을 느낄 수 있다.


■ 저자 이옥
본관은 전주, 자字는 기상其相이다.1790년(정조 14)에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5년, 응제應製의 표문表文에 소설(소품) 문체를 썼다는 이유로충군充軍의 벌을 받았다. 1800년 2월에 완전히 사면되었으나, 관직에는 나아가지 못하고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사실적이면서 개인의 정감을중시하는 매우 개성적인 시와 산문을 남겼고, 희곡 「동상기東床記」도 지었다. 그의 산문은 친구 김려金 가 엮은 『담정총서 庭叢書』에 수록되어전한다.


■ 역자 심경호
1955년 충북 음성 출생으로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1989년 1월에 교토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사상』(1/3/4책) 『한시로 엮은 한국사기행』 『다산과 춘천』 『한문산문의 미학』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한국한시의 이해』 『한문산문의내면풍경』 등이 있다. 역서로는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일본한문학사』 『금오신화』 『한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당시개설』 『한자학』『당시 읽기』 『인간 사마천』 『무에서 유를 낳다:제갈공명평전』 등이 있다. 고孝田散稿』 58책(유배일기 20책 포함)을 남겼고, 야사총서『대동패림大東稗林』을 편찬했다.


■ 차례
1. 시대의 명인· 기인

가객송실솔
칼의 명인.벙어리 신씨
의협심 많은 고지기 장복선
글품팔이 유광억
무당을 혼내준 최생원


2. 혀가 달린 글
흰 봉선화야 너는 어이희어서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개구리 울음에도 감정이 들어있나
가을의 벌레소리
어리석은 벼룩아
죽은 벼룩이꿈에 나타나다
나비가 물에 빠져 파닥이는구나
거울에게 묻는다
족집게 선생


3. 미적취향과 세계의 인식
책에 취하다
바다를본 기억
신기루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
송광사
연초향기와 향연기
지방언어에 대한 소논문
시장


4. 내가 사는 세상은
물의나라
사당패이야기
시장의 간교한 놈들
오이에 대한 소논문
기생 가련이 한 밤에 통곡한 까닭
걸인의 행패를 물리친후덕한 성진사
이놈 고양이야


5. 아아, 조선의 여성이여
사도세자의 사랑을 받은여인
살아있는 열녀
다섯 아들의 어머니
필영은 억울하옵니다
심생의 사랑


원문 제1부
원문 제2부
원문 제3부
원문 제4부
원문제5부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일탈과 실험
산문散文이란 ‘흩어놓은 글’이다. 글자 수나 음악적 효과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돈되지 않고 흩어놓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형식 요건을 규범화하지 않는 것은 생각과 감정을 정해진 틀에 맞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산문에는 그 나름대로 글쓰기의 규칙이나 문체의 양식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비문의 문법이며, 서발의 문체며, 기록의 방식이며, 의론의 투라고 하는 문법, 문체, 방식, 투와 같은 것이 글쓰기에 앞서 존재하여, 그때그때의 글쓰기에서 그것들이 해체되어 새로 구축되고 새로운 ‘휴전’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흩어놓는다는 것은 결코 풀어버린다는 뜻이 아니다. 작가 스스로의 규율에 따라, 기왕의 글쓰기 규칙과 문체의 양식을 참고하고 또 극복하고자 하는 긴장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산문은 확산성과 통합성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산문 작가들은 사회나 역사에 대하여 의미 있는 관점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책임의식에 짓눌리기 일쑤였다. 그러한 책임의식이 강하다보니, 양식, 형식, 체, 투와 같은 형식요건에 따라서 자신의 경험을 재구성하고 감정과 신념을 엄격하게 조정하여야 하였다. 그렇기에 한문산문은 글을 써나가는 문법文法을 매우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18세기 말에 이르러 경험적 사실의 일회적 진실과 그 아름다움에 눈을 뜬 일군의 작가들이 돌연 역사상에 등장하였다. 물론 ‘돌연’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감정과 신념을 엄격하게 조정하다보면 결국 자신의 개성을 훼손시키는 것이란 사실을 자각한 작가들이 늘 존재하여 왔으며, 그들의 자각과 그에 따른 불만이 더 이상 은폐되거나 억눌려 있지 못할 지점에까지 이르렀을 때, 문학사에서 볼 때 돌연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문법, 문체, 방식, 투는 이지러지고 고통의 비명을 지르게 된다.


여기, 한 산문 작가가 있다. 산문 문체의 모든 형식들을 이지러뜨리고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방법을 실험한 사람이다. 과거에 대비해서 연습하던 ‘부賦’도 산문의 문체로 훌륭하게 부활시켰으며, 일반 민중들이 관청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지(장첩狀牒)도 인간관계의 실상을 반영하는 허구적 요소를 지닌 산문으로 멋지게 사용하였다. 불경의 어조를 패러디하여 자신의 인생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가 곧 이옥李鈺이다.


「개구리 울음(後蛙鳴賦)」이란 글에서 이옥은 이렇게 말한다. 개구리 울음에는 감정이 들어 있는가 없는가? 있다. 감동과 수심과 노여움과 교만함과 즐거움의 감정을 담고 있다. 글 속의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지만 손님은 이렇게 반문한다. 그들이 우는 것을 들으면 무언가 실행에 옮겨지는 것이 있는 듯 여겨지지만, 결국 그들은 진창이나 파고 구덩이에서 폴짝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울음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옥은, 표현되는 언사와 시문에 감정이 배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서글프게도 그것은 현실사회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과연 나의 글쓰기가 현실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의미 있는 행위로서? 이옥은 회의하였다.


이옥에게는 자기의 글쓰기가 곧 현실사회에 유효하다고 전제하는 교조적 태도가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만의 감정을 표출하고 그것으로 자족하고 마는 글쟁이의 사고방식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문인의 존재가 조선사회에 등장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옥(1760~1812), 그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풍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같은 시대의 문인이자 친구였던 김려金?가 말하였듯이, 그의 시문에서는 기이한 생각과 감정이 마치 누에고치가 실을 토하듯, 샘물구멍에서 물이 용솟음치듯 흘러나온다.


이옥은 천부적으로 글을 잘 지었다. 글을 신속하게 지었으며, 뜸 들여 구상하지도 않았고 다 지은 뒤 고치는 법이 없는데도 장편이든 단편이든 글자마다 권점圈點을 쳐야 할 판이다.


그는 또 방언과 속어를 글 속에 사용하였다. 남들은 그것을 두고 글의 병통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가 방언과 속어를 사용한 것은 생경하고 껄끄러운 글쓰기를 배격하고 자연스러운 행문行文을 추구한 결과다. 그는 글쓰기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실험하여, 규범적 세계로부터 벗어나고픈 지향의식을 담아내었다.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면서 디테일의 묘사와 섬세한 감정의 표출에 주력한 그는, “나는 지금 세상 사람이다. 나의 글을 한다”라고 외쳤다. 옛 글의 문체를 따른다면서 형식주의에 빠지거나 허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옥의 저술은 친구 김려가 교정하여 자신의 총서 『담정총서 ?庭叢書』에 11권으로 수록한 것이 고본孤本으로 전한다. 김려는 이옥의 산문을 『문무자문초文無子文?』『매화외사梅花外史』 『화석자문초花石子文?』『중흥유기重興遊記』『도화유수관소고桃花流水館小稿』『경금소부絅錦小賦』『석호별고石湖別稿』『묵토향초본墨吐香草本』『매사첨언梅史添言』『봉성문여鳳城文餘』『경금부초絅錦賦草』 등으로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각각의 뒤에 평어를 붙였다.


한편 『예림잡패藝林雜佩』에 이옥의 시 창작론과 창작시 「이언俚諺」이 전한다. 이옥은 시 창작이론을 「삼난三難」으로 설명하였고, 「이언俚諺」은 4조調 각 10여 편씩으로 구성하였다. 「이언」은 민요풍의 정서를 담고, 속어를 사용하여 남녀간의 정과 시집살이 애환을 그려내었다. 이밖에 가람본 『청구야담』에 따르면 그가 「동상기東廂記」를 지었다고 되어 있다.



이옥이란 인물
이옥의 자字는 기상其相이다. 호號는 문무자文無子?매사梅史?매암梅庵?경금자絅錦子?화석자花石子?청화외사靑華外史?화서외사花外史?매화외사梅花外史?도화유수관주인桃花流水館主人 등을 사용하였다. 본관은 전주다. 조부 이동윤李東胤은 서울에서 살았으며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부사과行龍?衛副司果를 지냈다. 부친 이상오李常五(字 士恒)는 1754년(영조 30)에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이옥의 본가는 경기도 남양南陽 매화산梅花山 아래에 있었다. 15세에 최종崔宗의 딸과 결혼하였고, 뒷날 아들 우태友泰를 낳았다.


이옥은 젊어서부터 문인 기질이 많았다. 24세가 되던 1783년(정조 7)에 학질에 걸렸을 때는 고통을 이기려고 「저학사詛?辭」를 지었다. 25세 때인 1784년(갑진년)에는 「제문신문祭文神文」을 지어 ‘글의 신’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옥은 1790년(정조 14), 31세로 생원시에 급제하고, 성균관 기재寄齋에서 생활하였다. 1792년 가을에는 김려와 함께 반촌의 김응일金應一의 사랑에서 공령문(과거시험의 문체)을 연습하였다. 그들은 틈나는 대로 짧은 부賦를 지어 자신들의 정감을 담아내었다. 이옥이 이 때 지은 부들은 『경금소부』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옥은 성균관 유생(상재생)으로 있던 36세(1795, 정조 19)에 응제應製의 표문表文에 소설(소품) 문체를 썼다는 이유로 정조의 견책을 받았다. 정조는 동지성균관사에게 명을 내려, 일과日課로 사육문四六文 50수를 채우도록 시켜서 그가 옛 문체를 완전히 바꾼 뒤에 과거에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이 일은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즉 정조가 동지정사冬至正使 박종악朴宗岳에게 중국서적의 수입을 금하는 대목에서 당시의 문풍을 우려하는 말이 실려 있고, 거기에 이옥의 일이 거론되어 있다. 정조는 패관소설을 열람하였다는 이유로 이상황李相璜을 서학교수의 직위에서 해임하였는데, 그가 함답緘答을 올리자 다시 전직을 맡기되, 남공철南公轍에게도 공초供招를 받아오게 전교하였다. 그 때에도 이옥의 일을 거론하였다.


정조는 처음에 이옥에게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곧 있을 경과慶科에 응시할 수 있도록 충군充軍의 벌로 바꾸었고, 이전처럼 응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옥은 그 해(정조 19년)에 충청도 정산현定山縣에 충군되었으나, 문서에 이름을 올리자마자 서울로 와서 그 해 9월에 다시 응제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조는 그의 문체가 아주 초쇄?殺(음조가 아주 낮고 구슬픔)하다는 이유로 엄하게 꾸짖고, 더욱 먼 곳으로 충군하게 하였다.


이옥은 1795년 9월 13일에 동작 나루를 건너 웅치熊峙를 넘어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에 이르렀다. 삼가현은 봉성鳳城?삼치三峙?가수현嘉樹縣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합천군에 속한다. 거기서 군적에 이름을 올리고 3일간 머문 이옥은, 삼가현을 떠나 10월 14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 전말은 이옥 스스로가 「남정南程」에서 밝혔다.


이옥은 소외감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사비추해士悲秋解」에서는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까닭을 음양의 이치로 해석하였다. 「북관기야곡론北關妓夜哭論」에서는 북관 기녀 가련可憐의 일화를 들어서, 선비의 우불우遇不遇 문제를 논하였다.


이옥은 다음해, 즉 1796년(정조 20) 2월에 별시別試 초시에 응시하여 일등을 하였다. 하지만 책문策文이 격식을 어겼다는 이유로, 정조는 그를 떨어뜨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국법國法에 따르면 충군된 자는 일해一解(과거 초시의 합격)하면 사면을 받게 되어 있는데, 그러려면 충군된 자가 소장訴狀을 올려야만 하였다. 하지만 이옥은 관례를 몰라 소장을 올리지 않고, 3월에 남양으로 돌아갔다. 5월에는 부친의 상을 만났다.


그런데 1797년(정조 21)에 홀연 삼가현에서 소환의 문서가 왔다. 이옥은 자신의 이름이 아직 군적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고서, 1798년에 삼년상을 마친 뒤 형조에 소장을 올렸다. 하지만 형조는 병조에, 병조는 예조에 떠넘겼으므로, 이옥은 예조에 소장을 올렸다. 예조는 사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1799년, 40세가 되던 해, 삼가현에서 소환의 독촉이 심해졌고, 예조, 경기관찰사, 남양군수도 모두 이옥에게 삼가현으로 돌아가라고 독촉하였다. 할 수 없이 그 해 10월, 삼가현으로 내려간 그는 점사店舍에서 방을 얻어 살면서 그곳의 풍물과 인물, 방언과 풍속을 관찰하여 필기류 산문집 『봉성문여鳳城文餘』를 엮었다. 그 소서小?에서 그는 자기의 글쓰기가 ‘근심의 전이 행위’였다고 말하였다.


내 친구 가운데 근심이 많아서 본시 술을 좋아하는 자가 있었다. …… “나는 근심스런 몸으로 근심스런 땅에 거처하고 근심스런 때를 만났다. 마음이 근심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마음이 몸에 있으면 몸을 근심하고, 마음이 처소에 있으면 처소를 근심하고, 마음이 상황에 있으면 상황을 근심하는 것이니, 마음이 있는 곳에 근심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근심은 따라 오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내가 술을 마시고 있는데, 술병을 들어 찰찰 따르면 마음이 술병에 있고, 잔을 잡고서 넘칠까 조심하면 마음이 잔에 있고, 안주를 집고서 목구멍에 넣으면 마음이 안주에 있고, 객에게 잔을 권하면서 나이를 고려하면 마음이 객에게 있다. 손을 뻗어 술병을 잡을 때부터 입술에 남은 술을 훔치는 때에 이르기까지, 잠깐 사이라도 근심이 없게 된다. 몸을 근심하는 근심도, 처지를 근심하는 근심도, 닥친 상황을 근심하는 근심도 없다. 바로 이것이 술을 마심으로써 근심을 잊는 방도요, 내가 술을 많이 마시는 까닭이다.” 나는 그의 말을 옳다고 여기되, 그의 실정을 슬퍼했다. 아아! 내가 봉성에서 글을 쓴 것도 또한 친구가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나 보다.


1800년 2월, 순조의 즉위를 경하하는 증광시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삼가현의 현령이 비로소 귀환을 허락하였다. 이옥은 2월 18일에 삼가현을 떠나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남원?전주를 거쳐 공산公山에 이르러, 사면령이 내렸음을 알았다.


서울로 돌아온 다음 해(1801년),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났다. 이옥은 그 해 여름에 장편의 부 「삼도부三都賦」를 지어, 정치적 견해를 문학적으로 토로하였다. 당국자의 인정을 받고자 하였던 듯하다.


하지만 이옥은 좌절을 겪었다. 그때의 퇴영적 심사는 1803년에 지은 「애호접哀蝴?」과 차운부次韻賦인 「차도정절한정부운次陶靖節閑情賦韻」 「효번안인한거부效潘安仁閑居賦」에 잘 나타나 있다. 52세 되던 1811년에는 명나라 반유룡潘遊龍의 『시여취詩餘醉』를 읽고 정감을 토로하는 사詞 문학에 매료되었다. 스스로도 전사塡詞(사보詞譜에 맞추어 평측과 압운을 조절해서 글자를 놓는 일)하여 『묵토향墨吐香』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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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은 53세를 일기로 불우한 삶을 마감하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