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에는 사물을 보는 관찰력과 사유의 경지 및 화론을 엿볼 수 있는 글과 생활의 일화들을수록하였다. 2부에는 그가 교유한 사람들을 정겹게 묘사한 글을, 마지막 3부에는 스스로 눈을 찌른 화가 최북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임희지,김영면 등 여항인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 저자
조희룡 -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활동한 중서층 서화가. 1851년에는 김정희의 측근으로 지목되어 2년간 유배되었고, 문예성향 또한 추사와 흡사한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문서화는 중인 처지에서 南宗畵論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석우망년록』, 『호산외기』 등의 저술을 남겼다.
한영규 -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국문과를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연구교수이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일러두기
조희룡론 - "완당바람"의 중인적재해석
1. 단평 - 화제
나만의 길, 서화가로사는 삶
재미삼아 쓴다는 것
소동파를 선망하는 이유
매화 유토피아
우열의 구분을 넘어 外
2. 교유 인물
벼루를 내려 준헌종
스승 완당공
사십 년 친구 오창렬
선배 이기복
벽오사 주인 유산초 外
3. 여항인 이야기
스스로 눈을 찌른최북
쾌남 김홍도
쌀뜨물로 연못을 만든 임희지
달 뜨면 떠오르는 김영면
매화시 매니아 김석손外
4. 원문 제1부
나만의 길, 서화가로 사는삶
재미삼아 쓴다는 것
소동파를 선망하는 이유
매화 유토피아
우열의 구분을 넘어 外
5. 원문 제2부
벼루를 내려 준헌종
스승 완당공
사십 년 친구 오창렬
선배 이기복
벽오사 주인 유산초 外
6. 원문 제3부
스스로 눈을 찌른최북
쾌남 김홍도
쌀뜨물로 연못을 만든 임희지
달 뜨면 떠오르는 김영면
매화시 매니아 김석손外
매화삼매경
벼루를 내려 준 헌종
집에 오래된 먹 반 조각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이는 임금(헌종)께서 하사한 먹이다. 연경燕京에서 비싼 값에 구입해 온 것으로 원래부터 온전한 먹이 아니었다. 크기는 칠 팔촌寸 쯤의 벼루만 하고 두께가 사四촌 남짓 되니, 그 전체의 크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신小臣에게 보여주고는 그 반을 쪼개서 하사한 것인데, 때때로 다시 시험해 보니 단단하기가 금석과 같아 일반 벼루에서 갈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상자에 보관해서 자손들의 미관美觀으로 삼았다.
『석우망년록』 <172>
어제 낮에는 더위가 심하여 참외를 몇 개 먹었는데, 온 인후咽喉가 시원해졌다. 선왕조先王朝 때의 일을 추억하건대, 무신년(1848, 헌종14) 여름에 중희당重熙堂의 동쪽에 작은 누각을 지었는데, 나에게 ‘문향실聞香室’이라는 편액의 글자를 쓰라고 명하였다. 때는 무더위를 당하여 제호醍? 한 잔을 내려주셔서 고개 숙여 엎드린 채 마셨는데, 한더위의 독기를 한번 씻어내어 양 겨드랑이가 서늘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비가 조금 내려 먼지를 가시게 하였다. 처음에서 끝까지 하늘이 내린 은총이시니 비에 젖는다하여 무엇을 꺼리겠는가! 이에 지은 시가 있다.
연꽃 소식 듣고 부용당에 임하려 하였는데
어찌 생각했으랴, 몸소 백옥당 보게될 줄을.
천장天漿을 한번 마시고 귀가길 또한 늦어졌는데
오래된 등나무 처마 끝에 빗소리는 맑아라.
『석우망년록』 <70>
추사 문하의 여항인들 중에는 임금으로부터 지우를 입은 이들이 적지 않다. 이상적, 오창렬, 이기복, 조희룡, 허련 등이 그러하다. 이는 당시 정계, 문화계의 거장이었던 추사의 영향 아래 있었던 결과일 것이다. 특히 이들은 헌종憲宗 대에 궁정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었다. 헌종과 추사 문하 여항인 사이에 어떤 특수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조희룡은 그 중에서도 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된다. 1848 (헌종 14)년에는 왕명으로 중희당重熙堂 동쪽 문향실聞香室이라는 전각의 편액을 썼고, 1849년 회갑 때에는 벼루를 하사받았다. 이를 기념하여 조희룡은 자신의 당호를 ‘사연당賜硯堂’이라고 이름하기도 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조희룡은 헌종을 보좌하는 문한文翰 관련의 직임을 잠시 맡은 적이 있었고, 젊은 헌종이 타계할 때까지 매우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스승 완당공
1.
완당학사阮堂學士는 수壽를 누리기를 칠십일 세이니 오백 년 만에 다시 온 분이라네. 천상에서 일찍 반야般若의 업을 닦다가 인간세에 잠시 재관宰官의 몸으로 나타났네. 하악河嶽의 기운 쏟은 바 없지만 팔뚝 아래 금강필金剛筆은 신기神氣가 있었네. 무고무금無古無今의 경지로 별스런 길을 열었으니 정신과 재능의 지극함이요 모두 종정운뢰鍾鼎雲雷의 문장이라네.
글씨 때문에 문장이 가리운 왕내사王內史(왕희지王羲之), 그와 천고千古에 같은 경우라네. 그 글씨의 흉중胸中의 구파九派와 교룡蛟龍의 노숙함은 주옥 같은 전분典墳과 진한秦漢 문장의 온축이라네. 승평昇平의 시대를 문채나게 함은 응당 이유가 있었던 터, 어찌하여 삿갓에 나막신 차림으로 비바람 맞으며 바다 밖의 문자를 증명했는가?
공公이여, 공이여! 고래를 타고 떠나갔으니, 아아! 만 가지 인연 이제 끝이 났네. 글씨의 향기 땅으로 들어가 매화로 피어날 것이요, 이지러진 달 공산空山에서 빛을 가리리. 침향나무로 상像을 새기는 것은 원래 한만閑漫한 일, 백옥白玉에 마음을 새기고 황금黃金으로 눈물을 주조하려니 이는 우리네 궁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네. 조희룡은 재배再拜하고 삼가 만장을 올린다.
「완당공만阮堂公挽」
1856년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희룡이 지은 만사輓詞다. 스승의 문장과 글씨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였다. “팔뚝 아래 금강필金剛筆은 신기神氣가 있었네” “무고무금無古無今의 경지로 별스런 길을 열었네” “글씨가 뛰어났기에 문장이 가리웠는데, 이는 왕희지王羲之와 닮았네”라고 읊었다.
글의 마지막에 스승을 기리기 위해 상像을 만드는 일은 한만閑漫한 일이므로 “백옥白玉으로 마음을 새기고 황금黃金으로 눈물을 주조하듯” 애도를 표한다고 하였다. 거창한 추모사업을 벌이기보다는 마음으로 아파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은 “우리네 궁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 바, 여기서 ‘우리네 궁한 사람吾?人’이란 자신을 비롯한 중서층을 말함일 것이다. 이 글은 김정희 문하 중인층을 대표하는 입장에서 스승의 서세逝世를 곡진하게 애도한 것이다.
2.
완당阮堂의 소년시절 작품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두 전하여 외울만 한 것이지만, 모두 태워져 거두어 지지 않았다. 늘그막에 지어진 시들 역시 많지 않으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몰래 거두어진 것이 약간 수가 있다. (…) 위와 같은 시들은 장난삼아 지어진 시들에 지나지 않으나 모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이를 수 없는 경지에 있다.
『석우망년록』 <53>
일찍이 장다농張茶農(장심張深)이 완당阮堂에게 부친 편지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서화는 소기小技이지만 모름지기 죽백竹帛 기상?常으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해외에 이름난 인물이 있어 제가 더불어 빛이 납니다.” 이 말은 사람으로 하여금 깨우쳐주어 조심하게 한다. 장다농은 만리 밖의 정신적 교우로서 이 말로써 서로 권면하였다. 군자는 남을 사랑함에 덕德으로써 한다 하니 바로 이런 것이리라.
『석우망년록』 <142>
완당阮堂과 함께 한 자리에서 원元나라 사람이 그린 「전촉도全蜀圖」 한 폭을 보게 되었다. 그림을 벽면에 걸어 두었는데도 겹쳐져 펴지지 않는 부분이 한 자 남짓 되었다. 내가 그 족자가 너무 긴 것을 마땅찮게 여기니 완당이 웃으며 말하였다.
“중국 사람들의 처소는 초가로 된 조그만 집에 이 족자를 걸어두어도 공간이 남는데, 하물며 고관대작과 부호들의 높다란 마루과 거대한 벽에 있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진운백陳雲伯의 『화림신영?林新詠』을 보았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서장西藏에서 그린 불상은 매우 커서 수십 발이나 되는 것이 있는데, 산꼭대기까지 메고 가서 절벽 아래로 드리워 놓고 감상한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방궁阿房宮과 미앙궁未央宮의 높이로도 이 그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그림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한번 웃는다.
『석우망년록』 <11>
초정楚亭 박제가의 「회인절구懷人截句」 시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담계학사覃溪學士(옹방강翁方綱)는 소동파에 벽癖이 있어,
평상시 처소에 「동파입극도東坡笠?圖」를 항상 걸어놓았네.
온종일 사람들이 금석金石속을 다니는 것이
흡사 개미가 구곡주九曲珠를 뚫는 듯하네.
나는 일찍이 그 과장됨을 미심쩍어했다. 완당께서 스물네 살 때 연경에 들어가 담계覃溪와 교분을 맺던 처음에 담계는 그 아들 옹수곤翁樹崑으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정원을 두루 보게 하였다. 회랑廻廊과 복각複閣이 교착되고 서로 비추는 가운데 어떤 한 곳에 큰 누각이 있고, 그 편액에 ‘석묵서루石墨書樓’라 되어 있었다. 그 모양은 아주 웅장하고 화려했다.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니 층으로 된 서가가 둘러있는 사이에 칠만 축이나 되는 금석서화의 진귀한 것들이 이리저리 마구 쌓여 있었다. 흡사 뒤얽힌 산봉우리와 겹겹의 멧부리 같아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었다. 그곳에서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사람이 그 사이를 다니는 것이 과연 개미와 같았다.
담계는 지위가 시랑侍郞에 불과했고, 집안 또한 부유하지 못했는데도 서화와 금석문을 거두어간직한 것이 이같이 많았다. 층층의 누樓와 큰 각閣이 이처럼 사치스럽고 화려하여 우리나라 사람의 안목과 역량으로는 헤아릴 수 없었다. 하물며 고관대작高官大爵으로 금석서화를 수장한 집에 있어서랴! 옹수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의 집은 작은 건축물입니다. 강남사람 황아무개의 집에는 금석서화가 수십만 권이나 된다고 하니 그것을 보관해 둔 방을 상상해 볼 만하지요. 매양 한번 가보고 싶었으나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완당께서 나를 위해 말씀해 주신 것이 이와 같다.
『석우망년록』 <48>
추사 김정희와 우봉 조희룡의 문예 성향은 남종문인화론을 종지로 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한 듯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상당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조희룡은 시문 서화의 표현을 정경正經 정각正覺에 국한시키지 않고 더욱 새롭고 기이한(愈新愈奇)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그에 반하여 김정희는 어떤 경우에도 정도正道를 잃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즉 정正으로 표상되는 이념성의 견지 여부가 다르다는 점이다. 추사의 글씨가 기奇의 특색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역대 서가들의 정正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조희룡은 추사의 남종화 지상주의에 일정 정도 동조하면서도, 그 이념성은 약화시키면서 보다 새롭고 기이한 정감의 포착에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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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사대부 입장에서 문기文氣의 순정성을 고수하였고, 조희룡은 중인적 처지에서 이를 보다 소프트하게 변주하여 정감을 살리려 하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