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의 아름다움

   
남공철(역자 : 안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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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사
   
9000
2006�� 09��



 책 소개
조선시대의 문장가 남공철의 산문을 추려옮긴 산문집이다. 그는 특히 소외된 인물을 대상으로 한 글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가 지은 전(傳)이나 묘지명(墓誌銘)에는 빛이 감돌 때가잦다. 물론 의례적인 글도 지었다. 관직과 명성 탓에 어쩔 수 없이 붓을 들어야 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남공철은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눈매, 깨끗하게 차려입은 관복, 길거리를 걸어가면 지나가는사람들이 모두 한 번쯤은 되돌아보게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모나지 않음 때문에 그와 사귄 이들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고 한다.그들 중에는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김조순, 최북 같은 이들이 있다.


■ 저자 남공철
자는 원평元平, 호는 금릉金陵, 본관은의령宜寧이다. 부친은 영조 때 양관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이다. 정조에게 총애를 받아 홍문관 벼슬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선발되기도 하였다. 문체 문제 때문에 정조에게 잠시 배척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순조대에는 영의정에까지 이르는 등, 74세까지 순탄한 벼슬길을걸었다. 문집으로는 『금릉집金陵集』『영옹속고潁翁續藁』『영옹재속고潁翁再續藁』『귀은당집歸恩堂集』등이 있다. 


■ 역자 안순태
충남 청양 출생으로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홍익대, 서경대 등에 출강하고 있으며, 방송대조교로 재직중이다. 


■ 차례
일러두기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붓끝으로 사람 끌어안기-남공철론


제1부 기이한 사람들이 숨쉬는 집 
술좋아하는 화가 이야기 
종이 밖이 모두 물이잖소 
마당발 시인 이단전 
거짓된 세상에 하는 거짓말 
참된 즐거움 51
궁핍해질수록 시는 더 공교로워지고 
선비가 절개를 지킬 수 없으면 
부디 살아계시기를 
어느 것이 시 소리고 어느 것이거문고 소리인가 
좋은 벗 사귀기의 어려움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하라 


제2부 작은 것의 아름다움 
잡목과복숭아나무가 함께 자라는 정원 
청산은 약이 될 만하고 
책 사 모으기 
허영심의 끝 
벗이 귀한 이유 
글자도얼굴처럼 
나라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 
이익을 보면 두려워할 줄 알아야지 
20년 뒤에 짓는 그림 감상문 
이름을 고친정군丁君에게 주는 글 
상자 속 옥류동 
스승과 벗 사이 


제3부 그리움 달래는 법 
이별의 순간
아내의 빈 자리 
조카의 죽음에 부치는 글 
여름날의 시험 공부 
죽은 친구의 편지 
벗?술?눈물 
가보지않고 그린 화원 
제대로 유람하는 법 
문장으로 그린 진주담 
만년 요새의 은둔지 
구양수를 그리워하는 마음
옥경산장에 붙인 기문 
그림으로 달래는 그리움 




작은 것의 아름다움


술 좋아하는 화가 이야기 
答崔北

아침나절 남대문 거리에서 돌아왔는데, 그대가 우리 집에 헛걸음했었다는 말을 듣고 무척 섭섭했다오. 종들이 모두 말하기를, ‘최생이 왔을 때 술에 취해서 책상 위의 책들을 마구 뽑아다가 앞에 잔뜩 늘어놓고는 소리를 지르며 술을 토해서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나갔다’고 하던데, 길거리에 쓰러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소.


조자앙趙子昻의 <만마축萬馬軸> 그림은 참으로 명품이오. 이단전이 말하기를, 비단이 아직도 깨끗하니 분명 칠칠七七이 자기가 그려 놓고는 일부러 남을 속이려 한 것이라고 하더이다. 그러나 비록 칠칠의 손에서 나왔더라도 그림이 이처럼 좋다면 자앙이 그린 것이라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으니 꼭 진짜인지 가짜인지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런데 이 그림은 다른 사람한테서 구한 것이라고 하니, 이는 모두 그대가 평소 술을 좋아하기 때문인지라 배를 움켜잡고 웃었다오. 마침 술 한 병이 있으니 내게 다시 들러 주시오.


화가 최북에게 보낸 두 편의 척독이다. 척독은 짧은 편지로, 서書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체로 서보다 길이가 짧고 격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며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절친한 경우에 애용되었다. 그래서 내용도 자유롭다. 벗을 꾸짖는 내용, 돈이나 담배를 빌려달라는 내용 등 흥미로운 내용의 척독이 많다. 이 글도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간단히 얘기함으로써 여운을 남기고 있다.


남공철은 체질 탓에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대단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자못 귀한 신분이라 할 만한데도, 잘 곳조차 마땅치 않았고 신분도 미천하였던 최북을 언제나 반갑게 맞이하였다. 최북이 가진 재주라곤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지만, 남공철이 최북과 사귄 것은 단지 최북의 그림 재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공철은 최북의 강렬한 자의식과 재능을 부러워하고 사랑했기 때문에 그와 가까이 지냈으리라.


술을 진탕 마시고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고 갔는데도, 남공철은 화를 내기는커녕 혹시나 최북이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다치지나 않았나, 길바닥에서 잠든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다. 집안의 종들도 남공철이 최북을 예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남공철이 집에 없는데도 난동을 부리는 최북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만마축>이라는 그림에 원나라의 화가 조맹부趙孟?의 낙관이 찍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그림은 최북이 그려놓고 낙관만 조맹부의 것을 찍어놓은 것이었다. 그 그림은 술을 좋아하던 최북이 술값 때문에 다른 이에게 팔았고, 그 그림이 다시 남공철의 손에 들어왔기에 참으로 배를 잡고 웃을 일이라고 하였다. 최북이 술을 얼마나 좋아했으며 그림을 잘 알지 못하던 이들을 조롱하기 위해 어떤 장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최북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돈이 생기는 대로 밥을 사 먹고 술을 사 마셨다. 다음은 신광수申光洙가 최북의 그림을 두고 지은 시 가운데 일부다. 최북의 평소 생활이 얼마나 곤궁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최북은 서울에서 그림을 파는데
평생 살던 초가는 사방이 텅 비었지.
문 닫고 온종일 산수를 그리고 있으니
유리 안경 하나에 나무 필통 하나뿐이구나.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 사 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 사 먹네.
추운 겨울 해진 담요 위에 손님 앉히니
문 앞 조그만 다리엔 눈이 세 치나 쌓였네.
崔北賣畵長安中 生涯草屋四壁空
閉門終日畵山水 琉璃眼境木筆?
朝賣一幅得朝飯 暮賣一幅得暮飯
天寒坐客破氈上 門前小橋雪三寸
-?崔北雪江圖歌?


최북은 애꾸였다. 어느 세도가가 그림을 그려 달라고 그를 위협하자, 그 누구도 자신을 해할 수 없다면서 스스로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됐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림을 그릴 때 외알의 안경을 썼다. 다음 글에서 최북 이야기가 계속된다.



종이 밖이 모두 물이잖소 
崔七七傳

세상 사람들은 최북崔北 칠칠七七이라는 자의 집안이나 본관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파자破字하여 자字로 삼아 불렀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한쪽 눈이 애꾸였는데 늘 외알 안경을 끼고 그림을 베꼈다. 본성이 술을 좋아하고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였다. 어느 날 금강산 구룡연九龍淵에 들어가서는 기분이 너무 좋아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울다 웃다 하다가 “천하 명인 최북崔北은 마땅히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지!” 하고 소리 지르고는 마침내 몸을 날려 연못으로 달려갔다. 때마침 곁에 말리는 자가 있어서 연못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최북을 떠메고 산 아래 너럭바위에 이르렀다. 숨을 헐떡이며 누워있던 최북이 갑자기 일어나서 휘-하고 휘파람을 불었는데 그 소리가 숲을 진동하여 둥지에 있던 새매들이 모두 푸드득 날아가 버렸다.


칠칠은 하루에 대여섯 되의 술을 마셨다. 저자에서 술 파는 아이들이 술병을 들고 칠칠을 찾아올 때마다 번번이 집에 있던 책이며 돈을 다 주어 술과 바꿨다. 살림이 더욱 궁색해져서 마침내 나그네가 되어 평양과 동래東萊를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팔았는데 두 고을에서 비단을 들고 찾아오는 자가 줄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 칠칠에게 산수화山水畵를 그려줄 것을 요구하자 칠칠은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며 그것을 트집 잡았다. 그러자 칠칠이 붓을 던지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 종이 밖이 모두 물이잖소!”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드는데도 돈을 적게 쳐 줄 때마다 칠칠은 번번이 화를 버럭 내면서 꾸짖으며 그림을 찢어버리고 떠나곤 했다. 혹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값을 과분하게 쳐 주면 주먹질을 하며 껄껄 웃었다. 그 사람이 그림을 짊어지고 문을 나가면 또 손가락질하고 웃으며 “저 바보 같은 놈, 그림값도 모르는군” 하였다.


그리고 이에 스스로 호를 ‘호생자毫生子’라 하였다. 칠칠은 성격이 뻣뻣하여 남에게 순종적이지 않았다. 하루는 서평공자西平公子와 함께 백금百金 내기 바둑을 둔 적이 있다. 최북이 막 이기려고 할 때 서평공자가 한 수 물릴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최북이 갑자기 바둑돌을 흩어버리고는 팔짱을 끼고 앉아 말했다. “바둑이란 본디 재미로 두는 것이오. 만약 물리기를 계속한다면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판도 끝낼 수 없을 것이오.” 그 후로 다시는 서평공자와 바둑을 두지 않았다.


한번은 높은 벼슬을 하던 사람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지기가 들어가서는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고 “최직장님께서 오셨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최북이 화를 내며 말했다. “어째서 정승이라고 하지 않고 직장이라고 하느냐!” 문지기가 말했다. “정승은 언제 지내셨습니까요?” 최북이 말했다. “그럼 내 언제 직장直長을 지냈더란 말이냐? 만약 관직 이름을 빌려서 나를 높이고자 한다면 어찌 정승이라고 하지 않고 직장이라고 하느냐?” 하고는 주인도 만나지 않고 가 버렸다.


칠칠의 그림은 갈수록 세상에 유명해져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렀다. 그러나 최북은 화훼花卉나 동물, 기이한 돌, 고목枯木 따위를 더 잘 그렸다. 장난삼아 휘갈겨 쓴 초서도 여느 필묵가들이 투식적인 기법으로 쓴 것보다 나았다. 처음에 나는 이단전李亶佃을 통해 최북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최북과 산방山房에서 만나 밤을 새면서 대나무 그림을 여러 폭 그렸다. 그때 최북이 내게 말했다. “나라에서 수군水軍을 몇만 명이나 두고 장차 왜적倭賊에 대비하려 합니다. 왜적은 수전水戰에 잘 훈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로부터 수전에는 능숙하지 못합니다. 왜적이 오더라도 우리가 대응하지 않고 육지에서 막기만 하면 저절로 빠져죽게 될 텐데 왜 삼남三南의 백성들을 괴롭혀 소란스럽게 만든답니까?”


하고는 다시 술을 마시며 날이 샐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세상 사람들은 최북을 술꾼이라고도 하고 환쟁이라고도 하며 심지어는 그를 가리켜 미친놈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때때로 묘한 깨달음을 주거나 쓸 만한 것도 있었으니 위와 같은 것이 그렇다. 이단전은, 최북이 『서상기西廂記』나 『수호전水滸傳』 등 여러 책을 읽었으며 지은 시도 기이하고 고풍스러워 읊조릴 만했지만 그것들을 감춰두고는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고 했다. 최북은 서울의 여관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른다.


최북崔北(?~?)을 대상으로 지은 전傳이다. 전이란 어떤 인물의 행적이 사라져버려 세상에서 그가 잊혀질 것에 대비해 짓는 글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기인이자 화가인 최북의 면모에 대해 가장 자세하고 특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조희룡의 『호산외기』에는 최북이 49세에 죽었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그의 자字가 ‘칠칠七七’이었기 때문에 그때 죽은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최북이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금강산 구룡연에 들어가서는 그곳의 장관이 최북의 감성을 주체할 수 없도록 자극하여 급기야 연못에 뛰어들어 죽으려고까지 했다. 천하의 명인은 적어도 금강산 같은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결국 그곳에서 죽지 못하고 서울의 허름한 여관에서 죽었다. 삶이 고되어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는 이들이 많은 요즈음, 우리 시대의 투신이 그 옛날 최북이 하려 했던 것과 여러 면에서 얼마나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지 새삼 실감하게 한다. 결행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런 천하 명산에서 투신하려 했던 천하 명인의 기개가 부러울 따름이다.


최북은 스스로의 호를 ‘호생자毫生子’라고 하였듯이 그림을 팔아서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산수화를 잘 그려서 ‘최산수崔山水’라고 불리기도 하고 메추라기를 잘 그려서 ‘최메추리崔?’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지 그림 사려는 이의 구미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없었다. 먹고 사는 데에 바빠 남들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사회적 체면을 지키려 애쓰고 자신의 내면은 내팽개쳐두는 현대인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최북과 내기 바둑을 두다가 물리기를 거부당하고 된통 혼쭐이 난 서평공자西平公子는 당시 이름난 패트런(후원자)인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1684~?)다. 이요는 선조의 현손으로 상당한 재력을 기반으로 가객歌客 송실솔 등을 후원하던 이로 유명하다. 일부러라도 바둑을 져주면서까지 패트런의 비위를 맞추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법도 한데, 최북은 고집스럽게도 원칙을 굽히지 않는다. 구차하게 굴면서까지 끼니나 잇는 삶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

높은 벼슬을 하는 이를 찾아갔다가 문지기가 나름대로 최북을 높여 준다고 “최칠칠이 왔습니다요” 하지 않고 “최직장님께서 오셨습니다요” 하고 전했다. 벼슬을 지냈을 턱이 없는 칠칠을 7품 직장으로 높인 것이었다. 그림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하거나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갈 수 있는 일인데 최북은 이런 일에도 결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문지기와 한바탕하고는 집주인도 만나보지 않고 돌아서는 모습이라니. 이규상李奎象은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서 최북을 두고 ‘성질이 칼끝이나 불꽃과 같아 자기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욕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유별난 성품을 핵심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