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지 않은 삶

   
진재교 편역
ǻ
태학사
   
12000
2005�� 06��



 책 소개
『알아주지 않은 삶』은 조선조 후기 문인이인물의 특이한 삶과 사건에 흥미를 가지고 그려낸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개인 문집에 수록된 "전"과 "기사" 중, 특히 시대상을 잘 포착한인물과 사건들을 가려 뽑았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의 행적과 사건의 전말은 그야말로 조선조 후기 사회의 내면 풍경이며자화상이다.『알아주지 않은 삶』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의 주체를 굳게 세워 세속적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하게 인생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대부분이다. 현실에서 그들의 참다운 삶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만의 인생관을 설정하여 이를 주저 없이 실현시켜 나갔다. 현실에서그들의 삶은 고단하고 참으로 지난한 것이었지만, 작가들은 애정 어린 시각으로 이들의 삶의 행적과 사건의 의미를 새롭게되새겼다.

 


■ 편역 진재교 - 부산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를졸업한 후 같은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경북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이계 홍양호문학연구』『이조 후기 한시의 사회사』『동아시아와 근대, 여성의 발견』등이 있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역사에 묻힌 참된삶의 보고서 


제1부 인생의 의미 
알아주지 않은 삶
천주교의 서민 지도자 
인정받은 기술자의 행복 
과학자로 살아가기란 
지식을 유통 시킨 책장수 
조선에서의 새로운인생 


제2부 바둑 인생 
조선 최고의 국수
바둑 인생 
뒤집기의 고수 


제3부 지식인의 풍경 
글을 팔아 세상을속이다 
유랑지식인의 존재방식 
산수에 미친 사람 
기이한 천민 지식인 
유랑시인 김삿갓 


제4부 참다운 의원의 길 
참된 의원의 길
몸 안에 약이 있다 
명의의 처방전 


제5부 내 삶의 주체 
더불어 사는 세상
여성 경학가 
여협의 미덕 


제6부 거침없는 삶 
여항인의 후원자
참다운 관리란 
불세출의 조선 무사 
거침없는 삶 
참다운 인생이란 


제7부 애인으로 살아가기 
시골의 무명 악사
악사의 내면 엿보기 
다시 못 볼 신필 
단원기 우일본 
그림에 미친 화가 


제1부 원문 
제2부 원문 
제3부 원문 
제4부 원문 
제5부 원문
제6부 원문 
제7부 원문





알아주지 않은 삶


인정받은 기술자의 행복
崔天若傳

최천약崔天若은 동래東萊 사람인데, 얼굴이 괴걸스럽고 수염이 많으며 키가 크다. 그는 쇠붙이와 돌, 나무 등에 조각을 잘하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어떤 사람은 "그는 환술幻術을 할 줄도 안다"고도 한다. 나라의 일에 공로가 많은 것으로 여러 번 은혜를 입어 무공武功 2품직에 발탁되었다.


나는 어려서 입동笠洞 이판서 댁에서 최천약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나는 본래 동래東萊에서 민가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둔하여 재주가 없었다. 열 살 무렵에 들판에 나갔다가 보니, 사람들이 논에 쌓인 복사를 제거하는데, 모래를 등에 지고는 밖으로 져내는 일이 힘은 많이 드는데 공은 적었다. 내가 긴 막대 두 개를 빈 섬에 묶게 하여 두 사람이 그것을 들고 모래를 운반하게 하니, 한 번에 거의 너 댓 짐을 나를 수 있었다. 어른들께서 모두 나를 칭찬하였다.


내가 스무 살 무렵에 서울에 올라와 무과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마침 신해년(辛亥年, 1731)의 큰 흉년을 만나서 노자는 떨어지고 오갈 데가 없이 곤란해서 어느 약국에서 쉬고 있었다. 약국 사람이 마침 좀 먹은 천궁을 버렸다. 나는 무심코 패도를 꺼내어 큰 천궁 하나에 산과 꽃, 새를 조각하는데 천궁 생김새대로 새겨 손이 가는 데 따라 모양이 이루어졌다. 또 다른 천궁에다가는 용 모양을 조각하였는데 진짜 용과 다름이 없었다. 나 자신도 마음속으로 놀랍고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약국 사람이 보고서 혀를 내두르면서 말하였다. "당신 여기 좀 앉아 있으시오. 제가 서평군西平君 대감께 가서 알리겠소."


약국 사람이 간 지 얼마 있다가 서평군이 불러서 가 보니, 부채에다가 천궁 두 개를 달아 놓고 부치면서 말하였다. "내가 중국의 조각품을 보았지만, 천연 그대로 새긴 것은 자네가 처음인 것 같네." 곧바로 호박琥珀을 꺼내어 사자를 새기도록 하면서 사자 그림 화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칼을 놀려 하나하나 꼭 같이 새기니, 서평군이 무릎을 치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야말로 공수반公輸般이로구나."


그를 집에 머물러 두고 등燈을 만들게 하였다. 그때는 4월 초파일 현등절懸燈節이 가까웠다. 내가 그 전에 있던 등들을 보고 본떠서 만드는데 그 솜씨가 절묘하였다. 서평군은 가장 잘된 것을 골라 대궐로 들여보냈다. 등을 다 만들자 서평군은 상으로 50냥을 주면서 집에 내려갔다가 곧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오라고 했다.


나는 그 분부대로 이내 올라왔다. 내가 돌아오기를 벌써 기다리면서 즉시 대궐에 나가 차비문에 대령하였다. 영조가 편전便殿으로 들어오게 하고 자명종을 꺼내는데, 바늘이 하나 떨어진 것이었다.


"서울의 장인들이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는데, 네가 이것을 고칠 수 있겠느냐?"


나는 그것을 한 번 보자 방안이 떠올라 바로 은을 다듬어 바늘을 만들어 꽂으니 부절符節을 맞춘 것 같았다. 영조가 찬찬히 보고서 말하였다.


"천하의 뛰어나고 교묘한 솜씨로다."


다시 하교하였다.


"너는 이 종을 본떠서 만들 수 있겠느냐?"


나는 자명종의 생김새를 두루 살펴보고 생각이 또한 잘 떠올라서 즉시 엎드려 아뢰었다.


"평생 처음 당해 보는 일이지만 구조를 훤히 알겠습니다."
"숯이 얼마나 들겠느냐?"
"20섬이면 족하겠습니다."


임금이 웃으며 40섬을 더해 주었다. 자명종을 다 만들자 "숯은 과연 거의 다 들었다."


이에 임금께서는 참으로 타고난 예지를 지닌 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자명종이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은 최천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그 후로 나무와 돌에 칼을 잡고 새기면 물이 콸콸 흐르듯 이루어졌다. 여러 번 북경 사행을 따라 가 중국 사람의 솜씨를 보았지만 자기보다 더 나은 솜씨는 보지 못했다 한다. 개성부開城府에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비를 세우는데, 이때 최천약이 각자刻字를 하였다. 영조가 그 탁본을 보고 말하였다.


"천약이 새긴 것이로구나."


최천약이 일찍이 산릉山陵의 역사役事에 가는데 폭우가 내려 냇물이 막히니, 그는 지게를 타고 건넜다. 지게[支架]란 나무꾼이 등에 지는 나무로 만든 기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가 일찍이 조관朝官을 따라 입대入待하였는데, 영조가 방판方板의 음식을 주라고 명하고 말하였다. "천약이 만약 한 사람의 손으로 음식을 들어 나갈 수 있다면, 방판의 그릇들을 모두 상으로 주겠다."


방판이란 장방형의 널판으로 만든 것의 속명인데, 음식물을 올려놓으면 무거워서 여러 사람이 들어야 한다. 최천약은 금방 의사를 내어 먼저 그릇 몇 개를 가지고서 술을 마시고 종종걸음으로 나가 밖에다 두고, 또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그릇 몇 개를 가지고 나갔다. 이러하기를 두세 차례 하니 방판의 그릇이 반이나 비었다. 임금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지혜가 보통 사람을 능가하는구나."


즉시 방판의 그릇을 내려주었는데, 은그릇 약간에다 나머지는 모두 유기그릇이었다고 한다.


또한 최천약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금석과 나무를 대하면, 의장意匠이 먼저 서고 비로소 손이 따라 내려간다. 붓을 잡으면 그림으로는 그려내지 못하지만, 칼을 잡으면 무슨 물건이든지 그대로 새기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해서 그러한지를 알지 못한다. 내가 능히 할 수 없는 것은 오직 송광사의 능견난사能見難思를 본뜰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목우유마木牛流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능견난사란 나무 바리때 다섯을 5층으로 쌓아 둔 것이다. 무릇 그릇을 층층이 포갤 때 위로 놓인 것은 아래로 놓이지 못하고, 아래로 놓인 것은 위로 놓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데 이 능견난사는 위아래로 놓이는 층을 바꾸어도 모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이 글은 이규상(李奎象, 1727~1799)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실려 있다. 『병세재언록』은 18세기 다양한 분야의 개성을 지닌 인물의 전기를 담은 책이다. 작자는 위에서 최천약을 당대 최고의 기술을 가진 인물로 그렸다. 이규상은 전해들은 것을 근거로 기술자 최천약의 삶을 조명하고 있는데, 몇 가지 일화를 통해 최천약의 전기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당시 민간에서 발신하여 오직 기술로 벼슬에 오른 사례는 흔한 일은 아니었다.


최천약이 기술자로 활약한 무렵의 조선 사회는 기술문명의 낙후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실사구시의 학문을 주장한 실학자의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기술자를 홀대하고, 다가오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기술을 중시하지 않은 것이 당시의 현주소였다.


동아시아 삼국 중, 조선만 기술문명에 어두웠다. 청나라는 강희제와 옹정제가 직접 서구 기술문명의 옹호자로 자처하면서 이들의 기술을 전향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의 경우, 이미 인체를 해부한 『해체신서解體新書』를 통해 과학의 경이로움과 가치를 새롭게 이식하였다. 그들은 이른바 난학蘭學과 난화蘭畵 등으로 규정하면서 네덜란드(사실은 서구를 의미한다)의 기술문명을 적극 유입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조선은 기술문명을 도외시하였다. 국가의 시책이 그랬고 사회적 인식 역시 그러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결국 기술자를 홀대하고 기술문명을 매우 제한적으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나아갔다.


박제가가 기술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풍토를 비판하면서 기술자는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선비라는 점을 역설한 것도 바로 이러한 기술을 무시하는 풍토에 대한 강한 경고였다. 그는 자신의 벗 이길대李吉大를 기술자로 천거하면서


"그 사람을 마땅히 선비로 대우해야지 기술자로 대우해서는 안됩니다. …… 저 사람을 쓰고자 한다면 우선 그의 마음부터 감복시키고 그가 가진 기술은 요구하시지 마십시오. 그가 마음으로 감복한다면 선비는 본래 자기를 인정해 준 지기知己를 위해 목숨까지 바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법이니, 기술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기술만을 가지고 저 사람을 부리려고 한다면 기술마저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라고 강력하게 기술자를 우대해 줄 것을 행정 책임자에게 요구하였다. 박제가는 한갓 기술자로만 대우하려는 사회풍토와 정부시책의 전환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사실 이 발언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수직적 신분질서를 해체하려는 발상이 숨어 있다.


기술을 중시하는 사회. 그것은 조선조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었다. 이 점에서 이규상이 최천약이라는 기술자의 삶을 입전立傳한 것은 그 시각이 썩 참신하다. 작품은 시종 기술자로 성장한 일화를 통해 최천약의 인생역정을 제시하였다.


최천약의 빼어난 손재주와 사물을 파악하는 남다른 안목, 그의 기술을 알아보고 인정해 준 서평군과 국왕 영조의 배려. 그는 기술을 인정한 인물들과의 행복한 만남을 통해 벼슬에 오르고 자신의 기술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사실 최천약의 경우는 특수한 사례다. 18세기 조선 사회는 최천약과 같이 기술을 가진 인물이 자신의 능력을 펼 수도 사회적 대우도 받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일부 개명한 지식인들이 뛰어난 기술을 지닌 이들 인물들을 존중하였을 뿐, 기술자들은 여전히 천대받고, 그들의 빼어난 기술은 여전히 방치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기술자 최천약의 삶을 조명한 작자의 인식은 정녕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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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박제가가 언급한 기술자를 선비로 대우하라는 문제제기는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현실화되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난제 중의 하나임은 현실이 대변해 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