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났을 때 그는 외삼촌 이가환李家煥, 9촌 숙부 이승훈李承薰, 인척정약용 형제 등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보냈고, 이학규는 경남 김해에서 24년 동안유배생활을 보냈다. 32세에 유배를 떠나 1825년 56세에 유배지에서 풀릴 때까지 황금 같은 인생의 시간대를 이학규는 김해 지방을 한 발자국도벗어나지 못한 채 보냈다.
이학규의 유배지였던 김해 지방은 문화적 환경이 열악하여 학문적 토론과 저술을 지속할 만한여건을 갖추지 못하였다. 정약용이 많은 저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진 지방에 거주하던 해남 윤씨 집안의 후원과 수많은 제자들의 도움이자리하고 있다.
경제적 궁핍과 열악한 문화적 환경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이학규는 학문적 연구를 체계적으로계속해 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학규는 답답하고 울울한 심사의 자기 고백, 삶에 대한 허무와 애상의 감정 노출, 한아한 정취에의추구 등을 빼어난 글을 통해 잘 형상화하였다.
형식적 파격과 기이함의 추구 및 해학미 등을 엿보기는 어렵지만, 불우한 심사 및 정신적고뇌에 대한 자기고백적 진정의 토로, 회상과 기억의 정조를 통한 삶의 애상과 우수감의 표출,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명징한 언어를 통한 한아한 삶의추구 등은 이학규의 산문 세계가 보여주는 독특한 면모다.
■ 저자 이학규
19세기 전반기의 실학파 문인, 학자. 자는 성수, 호는 낙하생洛下生이다. 이용휴, 이가환, 정약용 등 남인계 문인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경상도 김해 지방에서 2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문집으로 『인수옥집因樹屋集』 등의필사본이 다수 전하는데, 근래에 이들을 모아 전집으로 간행하였다. 그밖에 인삼의 재배 방법에 대해 기술한 『삼서蔘書』, 우리나라 역사상의 고사와용어를 풀이해 놓은 『동사일지東事日知』 등의 저술이 있다.
■ 역자 정우봉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 한문학, 한국미학사, 수사학 등에 관심을갖고 있다. 현재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 『우리 고전문학을 찾아서』(공저) 등이 있다.
■ 차례
- 일러두기
-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 버림받은 영혼의 절망과우수 / 이학규론
1. 만남과 이별
2. 유배지에서의 생활
3. 생활의 발견
4.글쓰기의 의미
5. 1부 원문
6. 2부 원문
7. 3부 원문
8. 4부 원문
아침은 언제 오는가
인생의 두 가지 양식
答某人
이 고장에는 읽을 서적이 없어 괴롭습니다. 구우瞿佑의 『전등신화剪燈新話』를 서가에 꽂아놓는 최고의 책으로 추켜세우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베개 속에 감추어두는 보물로 여긴답니다. 그들은 남에게 빌려줄 마음도 없으며, 나 또한 남에게 빌리고 싶지 않습니다.
작년 봄에 겪은 일이 생각나는군요. 나무 위에서 비둘기들이 울고 있는 걸 우연히 보다가 『예기禮記』의 「월령편月令篇」이 생각났습니다. 매가 비둘기로 변한 때가 음력 2월인지, 3월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이 고장에 『예기』 책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달력의 매달 아랫부분에 월령을 초록해 붙인다는 점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달력을 구하려 했는데, 그것마저도 쉽지 않더군요. 점치는 사람에게서 겨우 찾아내어 그것을 크게 유쾌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이 고장의 열악함을 가히 알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이곳은 큰 가문이나 대갓집이 없으며, 문장과 학술을 담당하며 이 고장에서 위세를 부리는 자들은 오직 고을 아전 중에서 조금 약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임금 제帝와 호랑이 호?를 구분하지 못하며, 돼지 시豕와 돼지 해亥를 헷갈려 하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이 어찌 돌이켜보고 거리끼는 것이 있어 조금이라도 묻고 배우려고 하겠습니까? 8, 9년 사이에 보고 들은 것이라고는 문서를 작성해 죄인을 기소하는 일이며, 묻고 따지는 것이라고는 범죄 기록을 살펴 형벌을 주는 일입니다. 때때로 궁궐 서고에 쌓여 있는 서적과 명문가의 서가에 진열된 서적을 떠올려 보지만, 하늘과 땅만큼이나 아득하기만 할 뿐이어서 그저 크게 탄식할 뿐이랍니다.
작년 가을에 백진伯津이 보낸 편지에 이르기를, “인생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네. 작은 사람은 채소와 고기를 먹으며, 큰 사람은 서적을 먹는다오. 이 두 가지 모두 없으니 거듭해서 슬퍼하네”라 하였다. 이 말은 내가 겪고 있는 괴로운 정황을 참으로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지난 8, 9년 사이에 지은 시문은 그날그날 소일거리로 지었거나, 아니면 남의 요구에 응해서 대충 지은 것들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교감과 논변 등을 다룬 글을 지어 박식한 이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스스로 경솔한 데로 빠지겠습니까? 어제 30여 조목에 대해 물으셨는데, 그 조목들은 모두 『예기』『의례儀禮』『주례周禮』『좌씨전左氏傳』『곡량전穀梁傳』『공양전公羊傳』 그리고 『이십일대사二十一代史』 등에 나오는 것들이더군요. 비록 기억나는 것이 있지만, 한 글자 한 구절도 종이에 쓰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일에 관련이 없고 의리에 해가 되지 않는 것들은 기억나는 바에 따라 빠짐없이 서술할 겁니다. 제가 쓴 것이 반드시 옳다고 확정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설문해자說文解字』『옥편玉篇』,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등의 서적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에 제 견해를 수용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양식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채소와 고기이며, 다른 하나는 책이다. 전자는 육체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후자는 정신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책을 양식 삼아 읽을 수 있다면 가난함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학규는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함을 실감하고 있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먹고 살아야 하는 육체적 고통도 힘겨웠겠지만, 문인과 학자로서 독서를 하고 관련 서적을 참고하고 더 나아가 저술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환경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더 답답한 현실이었다. 정약용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이학규는 다산이 유배지였던 강진과 자신의 유배지였던 김해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다산 정약용은 해남 윤씨가의 장서 등 수천 권의 도서를 열람하고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저술을 정리하였지만, 이학규는 학문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 서적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환경 속에 처해 있었다.
정해진 법은 없다
答鄭義錫
독서와 견해는 본래 정해진 법이 없지요. 짚신 삼는 사람에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짚신 날의 길고 짧음, 짚신 코의 성글고 조밀함은 오직 자신의 익숙한 눈과 손에 따라 눈대중으로 만드는데도 저절로 딱 들어맞는답니다. 만약 곁에서 온종일 지켜보고 손을 붙잡고 귀에다 대고 시끄러운 목소리로 “아무개 날은 길고, 아무개 날은 너무 짧다. 아무개 코는 성글고 아무개 코는 너무 조밀하다”라고 외친다고 합시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 손과 눈에 익숙해 있지 않으면 결국에는 맞지를 않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지요.
“빈말은 아무 쓸모가 없고, 스스로 터득하는 것만이 가장 좋다.”
독서와 견해는 자득이 최고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점을 그는 짚신 삼는 일에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다. 짚신 삼는 일은 이학규 자신이 익숙하게 보았던 것이며, 자신도 그 일을 도와주기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비유가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고 하겠다.
짚신을 삼는 방법은 이렇다. 짚으로 새끼를 한 발쯤 꼬아 네 줄로 날을 하고, 짚으로 엮어 발바닥 크기로 하여 바닥을 삼고, 양쪽 가장자리에 짚을 고아 총을 만들고 뒤는 날을 하나로 모으고, 다시 두 줄로 새끼를 꼬아 짚으로 감아 올려 울을 하고, 가는 새끼로 총을 꿰어 두르면 발에 신기에 알맞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짚신 코와 날을 일일이 재어보지 않아 눈대중과 손대중으로 만들어도 저절로 딱 들어맞는다는 언급이다. 책을 읽고 자신의 견해를 세우는 일 또한 평소의 경험이 축적된 바탕 위에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 무엇보다는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