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알아주랴

   
유득공(역자 : 김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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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학사
   
11000
2005�� 05��



 책 소개
18세기 문인 유득공의 산문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규장각 검서관 등 관리를 역임했던 유득공은 시집, 기행문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 그 중 시, 가족, 나라, 문화 등에 대한다양한 단상을 담은 산문을 엮었다. 

 


■ 저자 유득공
자는 혜풍 또는 혜보이고, 호는영재이다. 1748년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나 1807년 세상을 떠났다. 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시작으로 20여 년간의 관직생활을 거쳐 만년에정3품까지 올랐다.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과 교유하였고, 중국 이외에 많은 나라에 관심을 기울이며 폭넓은 역사인식을가졌다. 특히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고자 북방의 역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발해고』와』를 역술하였고, 이외에도『영재집』『이십일도회고시』『동시맹』『난양록』『경도잡지』 등의 저술이 있다.


■ 역자 김윤조 
경상남도 창원 출생, 계명대학교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상임연구부를 수료하고 현재 계명대학교 사범대학한문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역주과정록』이 있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 발간하며 
만주벌판을 꿈꾼 역사의 시인


제1부 독서와 사색의 편린 
우리나라사람들의 저서 
우리나라의 벼루 
우리나라의 서예가 
일본에 전해진 우리나라 책 
「일성록」 
잡보구 
왜를예라 부름 
건륭제의 글씨 
꿀맛 


제2부 풍속과 민속 
세시풍속
우리나라의 예속 
우리나라 사람들의 말타기 
수레 사용 
풍월 
양호의 풍속 
광대 
호랑이 사냥
곰 이야기 
사나운 새 
초목 충어 
짚 
인삼 
담배 
귀마개 
북어 
평양 사람들은대동강물을 마심 
다식과 약과 


제3부 시문에 대한 생각과 그 실천 
우리시의 맹아 
시는 그림 
시와 농사일 
의약과 시작 
시를 쓰려는 젊은이에게 
변일민의 시집에 붙임 
시로 쓴우리 역사 
시로 남은 열하 기행 
「열하일기」 
검서체 
시 땜장이 
꽃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곳
유우춘 
북관으로 가는 홍첨사를 전송하며 
「청비록」서문 
우리말에 옛 한자음이 남아 있음 
속자


제4부 우리 역사와 우리 땅 
한국 고대사인식의 시각 
우리 고대사 이해의 방법 
한사군에 대한 인식 
가락국 
평양의 수혈 
만주 벌판의 형세 
양대박
박의 
여진평 
서북 지역의 목재 
서해의 여러 섬 


제5부 동아시아에서 서양으로 
같은 시대를사는 중국 시인들 
일본 시의 동향 
일본에 대한 이해 
일본말과 일본 문자 
류쿠 ? 베트남 ? 미얀마의 사신
만주어 
몽고어 
만주 ? 몽고 ? 왜 
영국 


부록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 
나의 숙부 기하선생 
역사로서의시




누가 알아주랴


우리말에 옛 한자음이 남아 있음
東方有古音

한자 발음 가운데는 우리 발음이 옳고 중국 쪽이 틀린 것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읽는 한자 발음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애초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 가서 배우지 않았으면 중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르친 것이다. 배웠건 가르쳤건, 요컨대 한漢나라 이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골짝이나 바닷가 외진 곳에 살며 그 글자와 발음을 알고 나서는 그대로 따라 지켜서 지금까지 잃지 않았고, 중국은 육조六朝?오계五季 이래로 이민족과 한족漢族이 서로 뒤섞였으니 자음字音이 어찌 변화가 없었겠는가. 이것은 증명할 수가 있다.


『공양전公羊傳』에 “공公은 어찌 친히 멀리까지 가서 물고기의 이익을 보려고 하십니까? 얻어 오게 하소서”의 주에, “제齊나라 사람들은 구득求得을 득래得來라고 한다. 그런데 ‘등래登來’라고 한 것은 그 말이 크고 급한데다 입으로 불러준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또 『관자管子』에 “동곽우東郭郵가 환공桓公에게 대답하기를 ‘일전에 제가 두 분 군주께서 대臺 위에 계신 것을 보았는데 입이 열린 채 다물리지 않았으니, 이것은 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지금 우리나라 한자음으로 ‘등登’과 ‘득得’을 읽으면 서로 가깝지만 중국 발음으로 읽으면 서로 가깝지 않고, 우리 한자음으로 ‘거?’를 읽으면 입이 열리지만 중국 발음으로 읽으면 입이 열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에 오히려 옛 한자음이 남아 있고, 중국은 점점 변하여 차츰 옛 발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고영인顧寧人(고염무顧炎武)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분에게 질정質正할 수가 없는 것이 아쉽다.

(『고운당필기』 권4)


유득공은 언어에 특히 관심이 깊었고, 중국어를 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을까? 한사군 설치 이전의 일이었을 것이라는 유득공의 주장은 논증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우 세 시기에 걸쳐 한자음이 정착되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듯하다.



속자
俗字

임자년(1792) 가을, 『규장전운』 교정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인 원임原任 직각直閣 윤행임尹行任, 검교 직각 서영보徐榮輔, 직각 남공철南公轍, 승지 이가환李家煥, 전 승지 이○○, 교서校書 교리校理 성대중成大中, 겸 검서관 이덕무와 유득공, 검서관 박제가 등 9인에게 상이 책문을 내어 「육서六書」를 물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대對를 지어 올리자 대신大臣과 문○文○이 각각 청?황?녹색 먹으로 비평을 한 뒤에 상이 주묵朱墨으로 비점을 찍었으니, 거룩한 일이었다. 내가 대를 올린 ‘우리나라 속자俗字의 폐단’에는,


“수전水田을 답畓이라 하고 대두大豆를 태太라 하여 받들기를 『삼창三倉』과 같이 하고, 배를 갉아먹는 좀을 소?라 하고 소의 위장을 양?이라 하는 따위는, 『이아爾雅』에 나오는 양 여겨, 그것이 속자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공령문功令文과 표전表箋에서는 ‘하도何圖’를 ‘하비何?’라 써서, 이렇게 쓰지 않는 것은 규식規式에 어긋난다 여깁니다. ‘비?’란 ‘비루하다[鄙]’는 뜻입니다. ‘하비何鄙’라니, 이 무슨 말이겠습니까?”


하였으니, 대책이란 근엄한 글이므로 대개 자세하게 거론하지는 못하였을 뿐, 우리나라의 속자가 비단 이 다섯 글자만은 아니다.


이를테면 ‘탈을 잡는다’고 할 때의 ‘탈?’은 그 의미가 ‘흔?(허물)’과 같고 ‘찌를 뽑는다’고 할 때의 ‘생?’은 그 뜻이 ‘첨籤(제비)’과 같은데, 공사公私 문서에서 가장 즐겨 사용된다. 또 서독書牘을 보냈는지를 물으면서 ‘소주燒酒 몇 선鐥’이라 하는데 ‘선鐥’이란 ‘주전자[?]’이고, 여자의 남자 형제를 ‘남?’이라 하는데 곧잘 ‘남매?妹’니 ‘처남妻?’이니 부른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조曹’와 ‘조曺’를 달리 사용하여, 성씨일 때는 ‘조曹’를 쓰고 관청 이름에는 ‘조曺’를 쓰는 것이다. 심지어는 담비[貂]를 ‘돈?’이라 하고 족제비[黃鼠]를 ‘광?’이라 한다. 이런 종류가 매우 많으니, 소학小學(문자학)을 공부하는 자는 몰라서는 안 된다.

(『고운당필기』 권3)



한국 고대사 인식의 시각
渤海考序

고려가 『발해사渤海史』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고려가 떨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高氏가 북쪽에 자리를 잡았으니 고구려이고, 부여씨扶餘氏가 서남쪽에 자리를 잡았으니 백제이며, 박朴?석昔?김金 씨氏가 동남쪽에 자리를 잡았으니 신라다. 이를 삼국이라 부른다. 당연히 『삼국사三國史』가 있어야만 되고, 고려가 편찬한 것은 옳은 일이다.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김씨는 남쪽을 차지하고, 대씨大氏는 북쪽을 차지하였으니 발해다. 이를 남북국南北國이라 부른다. 당연히 『남북국사』가 있어야만 하는데 고려는 이를 편찬하지 않았다. 잘못이었다.


저 대씨는 어떤 사람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들이 차지한 영토는 어떤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인데, 동으로 넓히고 서로 넓히며 북으로 넓혀서 더 크게 만들었을 뿐이다.


무릇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함에 왕씨王氏가 통합하여 차지했으니 고려다. 한데 남쪽 김씨의 영토를 차지한 것은 온전했지만 북쪽 대씨의 영토는 완전히 차지하지 못하여, 혹은 여진으로 들어가고 혹은 거란으로 편입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고려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는 자는 시급히 『발해사』를 편찬하여, 이를 가지고 여진에게 따졌어야 했다.


“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돌려주지 않느냐. 발해 영토는 바로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리고서 한 사람 장군을 시켜 가서 수복하게 하였더라면 토문강土門江 이북을 차지할 수 있었을 터이다. 또 『발해사』를 가지고 거란에게도 따졌어야 했다.


“왜 우리에게 발해 영토를 돌려주지 않느냐. 발해 영토는 바로 고구려의 영토였다.”


그리고서 한 사람 장군을 시켜 가서 수복하게 하였더라면 압록강 서쪽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끝내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서 토문강 이북?압록강 이서의 땅이 누구의 영토인지 알 수 없게 하여, 여진에게 따지려 해도 말발이 서지 않고 거란에게 따지자 해도 내세울 말이 없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소국이 되고 만 것은 발해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탄식을 금치 못할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발해는 요遼나라에게 멸망되었으니, 고려가 무슨 수로 그 역사를 편찬하겠는가?”


하지만 이 말은 옳지 않다. 발해는 중국을 본보기로 삼았으니 필시 사관史官을 두었을 것이다. 홀한성忽汗城이 격파된 다음 세자를 비롯, 고려로 망명한 사람이 십여만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사관이 없었을지라도 틀림없이 사서史書는 있었을 것이다. 사관도 사서도 없었을지라도 세자에게 물어보았더라면 그들의 세계世系를 알 수 있었을 터이고, 대부大夫인 은계종隱繼宗에게 물어보았더라면 그 제도를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십여만 명 인민에게 물어보았더라면 알지 못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장건장張建章은 당나라 사람임에도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지었다. 그런데 고려 사람으로서 유독 발해사를 편찬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아하! 문헌이 흩어져 없어진 지 몇백 년이 지난 뒤에 비록 편찬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나는 규장각에 있으면서 비장秘藏된 서적들을 쉽게 읽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발해의 일을 엮어 순서를 갖추어 군君?신臣?지리地理?직관職官?의장儀章?물산物産?국어國語?국서國書?속국屬國의 아홉 조목 ‘고考’를 지었다. 세가世家나 전傳?지志라 하지 않고 ‘고’라고 한 것은 완전하게 갖추어진 사서史書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감히 나 개인이 쓴 책을 역사서로 자처할 수가 없어서이다. 갑진년(정조 8, 1784) 윤삼월 이십오 일.

(『영재집』 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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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는 유득공 36세 때의 저작이다. 이 서문은 조선 후기 사학사史學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논문으로, 문장 표현 역시 쉽고 간명하면서도 격조가 높다. 이 글은 이우성李佑成 선생의 논문 「남북국시대와 최치원」(『한국의 역사상』, 창작과비평사, 1982)과 같이 읽지 않을 수 없다. 『발해고』는 두 종류의 국역본이 간행되어 있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