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김홍신 외 31명
ǻ
21세기북스
   
10000
2004�� 07��



■ 책 소개
여전히 삶의 등대가 되어 걸어가는 길에힘과 용기를 주는 그때 그 시절의 칭찬 한마디. 읽는 이를 추억에 잠기게 하다가 어느새 나도 ‘영미 할머니’, ‘성묵 아버지’, ‘피아노할아버지’, ‘희망등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책이다. 자꾸만 글짓기 대회에서 떨어지는 어린 제자를 붙들고 “좋은 열매는 천천히피는 꽃에서 맺히는 거”라며 힘과 용기를 북돋아준 희망등 선생님(소설가 이순원). 남들은 그저 고성방가로, 소음으로 치부했던 한 우렁찬 목소리를아름다운 성악의 가능성으로 평가해준 음악 선생님(성악가 임웅균). 부상으로 의기소침해 스스로를 타박하며 탈의실에 앉아 있던 한 여린 선수에게아무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았던 선수 자신만의 장점을 들추어 기려준 감독 이야기(축구선수 박지성)…. 그래서 이 책은 현실의 사나움에 주눅 들어지내는 우리에게 아련한 추억 속에 묻어두었던 그때 그 희망을 끄집어내게 만든다. 힘들어서 미처 꺼내보지 못했던 희망 수첩을 다시금 꺼내들게 하는힘이 바로 이 책의 미덕이다 

 


■ 저자 김홍신 외 31명
강명순 - 사단법인부스러기사랑나눔회 상임이사. 빈곤 결식아동을 섬기는 청지기 30년 인생이다. 
강학중 - 전 (주)대교의 대표이사. 2000년‘가정경영연구소’를 개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고도원 - ‘고도원의 아침편지’ 주인장. 전 청와대 연설담당 비서관으로 일했다.
고정욱 - 소설가이자 동화작가. 저서로는 베스트셀러 『가방 들어주는 아이』 외 다수가 있다. 
공병호 - 공병호 경영연구소장.『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등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썼다. 
기새림 - 우리나라 최연소 만화가. 저서로는 『자장면을 먹는 꼬불이』가 있다.
김상복 - 현 인천 검단중학교 교사. 저서로는 『엄마, 힘들 땐 울어도 괜찮아』가 있다. 
김성묵 - 한국가정사역협회 부회장,온누리교회 장로, 두란노 아버지학교운동본부장. 
김수경 - (주)다움생식 회장. 최근에는 한국 대체의학연구소를 개소했다. 
김용택 -1985년 첫 시집 『섬진강』을 펴내면서 ‘섬진강 시인’이란 별명이 생겼다. 
김창기 - 소아정신과 전문의. 그룹 ‘동물원’의 멤버로도유명하다. 
김  행  - 전 중앙일보 전문위원. 현재 의류회사 (주)서령창작의 대표이사로 있다. 
김홍신 - 소설가.『인간시장』『바람바람바람』 외 다수를 썼다. 15, 16대 국회의원. 
박예랑 - 방송작가. 〈전원일기〉, 〈달수〉 시리즈,〈영웅반란〉〈여자만세〉〈천생연분〉 등을 썼다. 
박은경 - 환경시민연대 공동대표, 세계 YWCA연합회 부회장,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박지성 -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현재 네덜란드 아인트호벤팀 소속. 
신현대 - 경희대 한의학과 교수.노무현 대통령의 한방주치의도 맡고 있다. 
오상수 - (주)만도의 대표이사. 
유인경 -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편집장.라디오 방송프로도 진행하고 있다. 
유지나 - 영화평론가. 현재 동국대 영상영화학과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기영 - 호서대자연과학부 교수이자 환경음악가. 내셔널트러스트 교육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이명랑 - 소설가. 저서로는 『행복한 과일가게』『삼오식당』등이 있다. 
이선양 - 서울대학교 인문학부 학생. 21세기 우수인재상이라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순원 - 소설가. 1996년동인문학상, 2000년 이효석문학상 및 한무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영미 - 대구경북여정보고 교사. 저서로는 『기다리는 부모가 아이를변화시킨다』 등이 있다. 
이원국 - 국립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노 겸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임웅균 - 성악가. 국립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전춘식 - 한국피자헛(주) C&R팀 매니저. 칭찬 때문에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가는샐러리맨. 
정리태 - 동화작가. 월간 「샘터」 지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동화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청 화 - 춘천 청평사주지스님이자 시인. 
최불암 - TV 드라마 〈수사반장〉〈전원일기〉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중견 탤런트. 
홍은영 - 만화가.『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자로 유명하다.


■ 차례
1. 내 안의 진주를 일깨워준 칭찬 한마디

좋은 열매는 천천히 피는 꽃에서 맺히는 거란다 - 소설가 이순원 
불암아! 노역은 너 이상 할 사람 없다 - 탤런트 최불암
대통령의 칭찬법 - 전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 고도원 
고성방가와 성악의 차이 - 한국 예술종합학교 성악과 교수 임웅균
대통령 한방주치의 된 약전골목 삼수생 - 경희대 한의학과 교수 신현대 
행자에게는 바스러지지 않을 그 무언가가 있다네 - 청평사주지스님 청화 
칭찬받으면 기쁘잖아요 - 국내 최연소 만화가 기새림 
미역국보다 더 따뜻한 말 -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소속 축구선수박지성 


2.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이담에 쟤가 한자리 할애다 - 두란노 아버지학교운동본부장 김성묵 
예쁜 지렁이 글씨 -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상임이사 강명순 
가난한 대학생의 일본 연수 -(주)다움생식 회장 김수경 
세 분의 선생님 - 세계 YMCA 부회장 박은경 
영미의 칭찬일기 - 인천 검단중학교 교사 김상복
예약된 나의 일대기 - 서령창작 대표 김행 
사람 살리고 죽이는 말 - 방송작가 박예랑 
나의 가족, 나의 힘 - 공병호경영연구소장 공병호 


3. 유년의 낡은 사진을 환히 밝혀준 등불처럼 
칭찬아닌들 내 이만큼 왔을까 - 소설가 김홍신 
반장의 꿈 - 소설가, 동화작가 고정욱 
바슬리 선생님의 칭찬 같지 않은 칭찬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창기 
녀석아, 넌 특별하니까! - 소설가 이명랑 
학중이 학중이 우리 학중이 - 가정경영연구소장 강학중
대통령 귀도 우리 영미 귀만은 못한기라 - 대구경북여정보고 교사 이영미 
별을 주는 마음 - 동화작가 정리태 
우리 딸,못하는 게 없네! - 서울대 인문학부 학생 이선양 


4.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칭찬의 물을 길으며 
난자기 감동으로 산다 - 섬진강 시인 김용택 
고슴도치 어머니 - 뉴스메이커 편집장 유인경 
낯선 이의 한마디 - 호서대학교 자연과학부교수 이기영 
떠나간 것과 남은 것 - 국립발레단 수석 발레리노 이원국 
가슴에 남은 유산 - (주)만도 사장 오상수 
아버지,감사합니다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저자 홍은영 
난 행복한 샐러리맨 - 한국피자헛(주) C&R팀 매니저 전춘식
섬 할머니의 지혜 - 동국대 영상영화학과 교수 유지나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


내 안의 진주를 일깨워준 칭찬 한마디
좋은 열매는 천천히 피는 꽃에서 맺히는 거란다 - 소설가 이순원

사람들은 지금 내가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내 안에 문학적 소양 같은 것이 반짝반짝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 역시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할 때가 많다. 저 친구는, 혹은 저 후배는 아마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구석이 많았을 거라고.


그러나 겸손의 말이 아니라,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초등학교 시절대로 그랬고, 중학교 시절엔 중학교 시절대로 그랬다. 나는 언제나 그런 상으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아주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시골 초등학교의 작은 교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어쩌다 큰 대회에 나가서도 번번이 떨어지기만 하는 나를 믿어주던 한 선생님이 계셨다.


권영각 선생님. 지금은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을 앞두고 계시는 분이다. 나에게만 특별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분이 아니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3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언제나 그 선생님 얘기를 할 만큼 다른 친구들에게도 인상이 각별했던 분이다.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때의 일이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물론이고 군 대회같이 큰 백일장에 나가서도 매번 떨어지는 나는 그때 군 대회에 나가서도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참으로 큰 낙담을 했었다. 그런 나를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앉혀놓고 선생님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매화나무를 예로 들어보자. 같은 매화나무에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예.”
“그러면 그 나무에서 핀 꽃 중 어떤 꽃에서 열매가 맺을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물으셨다.


“매화나무는 나무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란다. 그런 매화나무 중에서도 다른 가지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다른 가지에서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는데 한 가지에서만 일찍 꽃이 핀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면서 선생님이 보기에 그 나무 중에서 제일 먼저 핀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이 준비를 하고 뒤에 피는 거란다.”


“나는 네가 그렇게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다음에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더 재주를 크게 보일 거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뭔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은 네가 이다음에 꼭 좋은 글을 쓰는 작가나 시인이 되고 싶다면, 그때 남들보다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도 지금 많은 책을 읽으라고 하셨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닥치는 대로 집과 학교에 있는 책을 읽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당시 ‘삼중당’에서 나온 『한국문학대계』 열두 권짜리 두꺼운 책들을 다 읽어냈던 것이다. 어른들이 읽는 『삼국지』도 초등학교 시절에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의 독서가 내 작가생활의 가장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멀리 떨어져 살아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우리들 마음 안에 그 선생님은 지금도 환하게 ‘희망등’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뵈었을 때, 선생님은 훌륭한 제자들을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하셨지만 정말 훌륭한 선생님을 마음속에 두고 있는 삶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가?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세 분의 선생님 - 세계 YMCA 부회장 박은경

요즈음 나의 시간은 국내외 회의에 참석하여 발제나 사회를 하는 일로 채워지고 있다. 수백 명 혹은 수천 명 앞에서 강연도 서슴지 않고 수락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된 나는 가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혼자 빙그레 웃곤 한다.


“박은경, 한 번 더 읽어봐.”


덕수초등학교 시절, 6학년 담임인 정남수 선생님은 국어시간마다 나에게 책읽기를 반복해서 시키셨다. 목소리뿐 아니라 온몸까지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겨우 읽고 안도의 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앉는 나에게 다시 읽으라는 선생님의 지시는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당시 나는 수줍음이 지나쳐 공부시간에 자진해서 발표하기는커녕 선생님이 시키면 겨우 일어나는 지극히 얌전한 학생이었다.


중학교의 국어선생님이셨던 박성원 선생님도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와 계신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은경아, 너는 어디 박씨니?” 하시며 관심을 보이시던 선생님인데 나는 멀리서 선생님이 보이기만 해도 다른 길로 돌아가거나 아이들 틈에 숨어버렸다. 선생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지지리도 수줍은 소녀였다.


하루는 수학시간에 앞에 나가 칠판에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장난기가 발동하여 ‘33’이었던 답의 밑부분을 크고 우스꽝스럽게 그려놓고 자리로 들어왔다. 선생님은 대노하셨고 나는 교무실로 불려갔다. 그때 옆에 계시던 박 선생님께서 “그럴 수도 있다.”며 교무실의 모든 선생님들 앞에서 내 평소 생활을 칭찬하셨고 나를 두둔해주셨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순간 박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후원의 손길은 지금까지도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까불이인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은 일이 있었다. 가까이 지내던 한 친구가 “너는 항상 즐거워서 화를 낼 줄 모를 거야!”라고 내뱉은 한마디가 나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사춘기 소녀였던 그 시절 나에게 그 말은 “너는 어린애 같다.”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고, 이 사건은 급기야 나 자신을 말 없고 웃음기 적은 사춘기 소녀로 탈바꿈해놓기에 충분한 계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갔다.


미국 유학은 한국의 대학생활 내내 내가 목표로 삼은 미래였다. 점점 유학이 실감나게 나의 삶의 일부로 다가오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영문학과장 선생님이 김옥길 총장님께 가보라고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총장실에 들어선 나는 특유의 미소를 머금은 채 던지신 총장님의 질문에 깜짝 놀랐다.


“총장실에 불려오기 전에 세웠던 졸업 후의 계획은 무엇이지?”, “형제들은 무엇을 하지?”


이 두 질문을 듣는 순간 나의 유학계획은 수정당했다. 결국 4학년 학기말 시험이 끝난 12월 초부터 나는 총장비서 생활을 시작했다. 김옥길 선생님과의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옥길 총장 비서로 일 년 반 동안 직장생활을 한 후 나는 드디어 미국의 미시간대학교에 전공을 인류학으로 바꿔 유학을 떠났다.


박사학위가 끝날 때는 선생님께서 총장직을 그만둔 상태였다. 이화여대에 나의 전공분야인 인류학과가 없어서 교수로서의 진로가 불투명할 때 선생님께서는 느닷없이 “네가 언젠가 국가를 위하여 일할 때가 올 것이니 너무 대학교수직에 매달리지 말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지난 10여 년간 항상 나를 휘감고 내 마음속에 메아리쳐오는 메시지로 자리잡고 있다. 선생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나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대학 강의를 버리고 환경과 문화 연구소를 시작하면서, 또한 지난 10여 년간 환경과 관련된 국제관계에 한국 정부 대표의 일원으로 UN회의와 지역회의에 참여하고, 각종 환경관련 위원회에서 정책 결정과정에 참여하면서 나는 김옥길 선생님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묻곤 한다. “이런 일들이 결국 선생님께서 저에게 대학교수직과 바꾸라고 한 국가를 위한 일입니까?”라고.


한 사람이 사회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참으로 귀한 인연과 순간들이 있다. 특정 지식을 배워서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깊숙이 입력된 선생님들과의 만남과 대화 그 자체가 인간의 신비스러운 성장과정에 실로 놀라운 힘으로 승화된다. 세 분 선생님의 가르침과 격려 그리고 사랑으로 영근 삶에 대한 자신감은 고된 인생길에 고귀한 동반자로 존재한다. 아마도 이 세상은 수많은 선생님들이 엮어가는 제자 사랑과 칭찬으로 만들어지고 있나보다.



유년의 낡은 사진을 환히 밝혀준 등불처럼
바슬리 선생님의 칭찬 같지 않은 칭찬 -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창기

때는 1970년대 중반이었고, 나는 외무관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캔버라에서 중학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감이 없던 나는 백인들 사이에서 더욱 기가 죽어지냈다. 축구와 음악만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나는 미친 듯이 공을 찼고 잠들 때까지 음악을 들었다.


풀 사이먼의 초기 노래 중 ‘소 롱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So Long Frank Lloyd Wright)’라는 단순하지만 몽롱하게 슬픈 노래가 있다. 나는 그 노래를 곱씹어 들으며 도대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라는 사람이 누구일까 궁금해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나의 영웅 폴 사이먼이 송가까지 만들어주었던 것일까?


알고 보니 그는 매우 유명한 미국의 건축가였다. 나는 그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감상했고, 그에 대한 글을 읽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과 업적을 하나둘 알아갈수록 건축에 갖는 관심이 커져갔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건축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학교에서 선택과목으로 건축의 기초가 될 제도(製圖)를 택했다.


제도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대머리에 은퇴를 얼마 남기지 않은, F를 잘 주기로 유명한 바슬리(Barsley) 선생님이었다. 제도를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중학교를 마치고 기술자가 되려는,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라 나는 곧 반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아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도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서 장난치다가 선생님에게 혼이 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무래도 네가 수업이 너무 쉬워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너를 따로 가르치겠다!”고 하셨고, 그때부터 선생님과 단 둘만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사람의 자존심을 짓밟는 핀잔을 주는 특기가 있었다. 예를 들어 “김창기, 네가 축구장에서 발휘하는 공간개념의 10분의 1이라도 보여준다면 이런 그림은 나오지 않을 것 같구나. 당장 다시 그려와!”라든지, “김창기, 도대체 내가 가르쳐주는 것 중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너의 그 작은 뇌에 입력이 되고 있는 거니?” 같은 얼굴 붉히기에 충분한 말들이 그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속이 많이 상했고, 인종차별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도 들었다. 하지만 나무랄 때는 좀 지나치다싶다가도 그 이외의 상황에서는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잘할 때는 격려도 해주었고, 설명도 이해하기 쉽게 잘 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을 존경하게 되었다. 오히려 나중에는 선생님의 질책이 나를 인정해주기 때문이라 여겨 야단맞는 것도 신이 나곤 했다.


바슬리 선생님께 2년 반을 배운 뒤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다. 졸업을 앞둔 나에게 선생님은 마지막 말씀을 남기셨다. “지금까지 네게 가르쳐준 것은 대학교 1학년 수준까지다. 너는 내가 가르친 아이들 중에서 가장 훌륭했어.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네가 원하는 것처럼 꼭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건축가가 되어라. 하지만 기억해. 그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너 또한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야. 중요한 것은 네가 너 자신을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는 거야.”


어린 마음에도 그 말씀은 깊이가 느껴졌고 쉽사리 잊혀질 것 같지 않았다. 선생님에게 그런 칭찬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으쓱하기도 했다.


그러나 꼬마 건축가였던 나는 어떻게 하다 보니 의대에 들어갔고, 지금은 정신과 의사가 되어 있다. 정신과 의사가 되고 나서 나는 사람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주는 누군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 그 누군가에게 더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더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갖고 노력한다.


잔뜩 주눅 들어 있던 내가 나 자신을 발전시키고 싶게 만들어준 바슬리 선생님은 바로 나의 그 ‘누군가’였다. 물론 바슬리 선생님의 칭찬 하나만으로는 형편없는 나의 자신감이 회복되기 힘들었기에 그후로도 나는 끊임없이 더 많은 ‘누군가’가 필요했고, 앞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칭찬의 물을 길으며
난 자기 감동으로 산다 - 섬진강 시인 김용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내 인생을 바꿀만한 칭찬을 받아본 경험이 없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내 인생을 바꿀만한 큰 꾸지람을 받아본 경험도 기억에 없다. 대단한 꾸지람과 칭찬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사는, 내 인생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시를 쓰는 일도, 교사를 하는 일도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내 인생의 길에 도움이 될 만한 칭찬과 꾸지람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는 말이다. 받은 상이 칭찬이라면 초등학교 때 개근상을 많이 받은 기억이 날 뿐 중?고등학교 때는 그 어떤 상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아무런 꿈이 없었다. 커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이 험난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본 경험도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는 그저 아무런 특징이 없는 사람으로 지냈다. 그저 맥없이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집에서 오리를 키웠지만 망했다. 서울 가서 한 달 동안 놀다가 다시 시골로 와서 놀고 있는데, 친구들이 초등학교 교사 시험을 보러가자고 했다. 1968년경 교사가 모자라자 당국은 고등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4개월간 강습시킨 뒤 교사로 내보냈다. 이름하여 초등교원 양성소가 그것이다. 나는 1970년 5월 선생이 되었다. 그게 내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는 느닷없이 시골 학교의 선생이 되었다.


아주 작은 분교였다. 어느 날 내가 근무하는 그 깊은 산중까지 월부 책을 파는 장사가 찾아왔다. 나는 책을 샀다. 그때 책을 사서 읽기 시작한 것이 내가 문학의 길에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나는 서서히 문학에 ‘병들어’갔다. 나도 몰랐다. 그 길이 나를 글 쓰는 사람의 길로 이끌게 되리라곤…….


나는 나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았다. 글을 쓸 때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내 글을 보여준 적이 없다. 늘 혼자 쓰고, 혼자 감동하고, 혼자 흥분하고, 혼자 절망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웃기는 놈 다 보겠다고 비웃겠지만, 단언컨대 자기 감동 없는 사람과 자기 감동 없는 예술은 다 거짓말이다. 자기가 감동하지 못하는 자기의 삶과 예술을 그 누가 감동하겠는가. 자기 감동이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살 수 있는 삶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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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나를 칭찬하고, 나에게 감동하며 살았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34년째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강이 있고, 마을이 있고, 산이 있고, 작은 들이 있고, 나무와 풀과 산에 들에 철철이 꽃들이 피고 지는 곳, 운동장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학교가 있는 곳, 그곳에 예술이 있는 것이다. 자연과 아이들과 예술이 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지금도 나의 삶에 감동하며 산다. 내가 나를 칭찬하는 마음이 아직은 메마르지 않았다. 그러면 되리라.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