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묘사를 통해 그 시대의 이면을 들춰내 보여줌으로서 중국인의 보편적인 심성을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그의 글에서는 점잖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은근한 풍취가 드러난다.
■ 저자 주자청(朱自淸,1898∼1948)
강소성(江蘇省) 동해현(東海縣) 출생으로 북경(北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여 중학교 교사를 역임하다청화(淸華)대학 중국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중국 현대문학사상 저명 작가이자 학자였던 주자청은 중국신문학 운동의 격변기에 등단하여 1948년작고하기까지 역사의 격변기를 살다 갔다. 대표작으로 「아버지의 뒷모습」「달밤의 연못」「여인」「봄」「야경에 노젓는 소리 들리는 진회하」「아하」등이 있다.
■ 역자 박하정
충북 옥천 출생으로 숙명여대 중문과를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 중문과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역서로는 『한 줄기 사랑의 빛을 찾아서』『삥얼』『여자는 꿈꾸지 않는다』『패도』 등이있다.
■ 차례
노래 소리
총총
야경에 노젓는 소리들리는 진회하
몽롱한 풍경화
푸른 빛
폭포
7천짜리 목숨
연락선 속의 문명
여인
백인종 - 하느님의귀염둥이
아버지의 뒷모습
표령
내 친구 백채
아하
달밤의 연못
편지 한 통
『매화』후기
위악청을그리며
유평백의 시집에 부쳐
백마호
"할 말이 없음"에 대하여
죽은 아내에게
침묵
봄
끽연에대하여
겨울
짝짓기
남경
송당유기
주인집 아줌마
북경이 함락되던 날
동란시대
아버지의 뒷모습
봄
春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바람이 불어온다. 봄의 발걸음이 다가선 것이다. 천지만물이 막 잠에서 깨어난 듯 혼연히 눈을 뜬다. 산은 따뜻함으로 윤기가 돌기 시작하고, 강물도 세차게 흐르기 시작하고, 태양의 얼굴 또한 빨갛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여리고 푸른 새싹들이 살며시 땅을 비집고 돋아나온다. 정원에도 들판에도 온통 갓 싹이 돋아난 풀들로 가득하다.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고, 뒹굴어도 보고, 공을 차기도 하고, 달려도 보고, 숨바꼭질도 해본다. 바람은 가볍게 찰랑거리고 풀은 솜털처럼 보드랍다.
복숭아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배나무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앞다투어 꽃을 피운다. 붉은 꽃은 불덩이 같고, 분홍 꽃은 노을 같고, 흰 꽃은 눈송이 같다. 향긋한 꽃내음을 느끼며 눈을 감으니 나뭇가지마다 벌써 복숭아?살구?배가 주렁주렁 열린 듯싶다. 가지마다 탐스럽게 핀 꽃을 찾아 모여든 수많은 벌꿀들이 윙윙거리고 크고 작은 나비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그 밖에 들꽃이 여기저기 만발하다. 이름 있는 것, 이름 없는 것 등 가지각색의 들꽃이 꽃더미 속에 흩어져 별처럼 반짝반짝 수놓고 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쳐도 차갑지 않네, 버드나무를 흔드는 봄바람이기에"라고 하였듯이 따뜻한 봄바람은 마치 어머니의 손길이 그대를 어루만지는 것과 같다. 바람 속에 묻혀 온 상쾌한 흙내음은 싱그런 풀내음과 온갖 풀향기가 뒤섞인 채 약간 축축한 공기 속에 온양(?釀)되고 있다. 새들은 꽃잎이 무성한 가지에 둥지를 틀고서 기뻐하기 시작한다. 친구며 짝꿍을 불러모으는 듯이 맑고 고운 목소리를 뽐내며 완만하게 노래를 불러댄다. 새들의 노랫소리는 봄바람과 봄여울과 한데 잘 어우러진다. 소 등에 타고서 불러대는 목동의 피리 소리도 온종일 아름답게 울려퍼진다.
비는 늘 내리는 것으로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2, 3일 계속해서 내린다. 그렇다고 짜증내지 마라. 가만히 보면 그것은 쇠털처럼, 자수바늘처럼, 혹은 가는 실처럼 촘촘하게 뿌려지고 있지 않은가. 인가의 지붕 위에는 옅은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다. 나뭇잎은 더욱 푸른 빛깔을 띠고, 새싹도 그대의 눈을 부시게 할 정도로 푸르다. 저녁 무렵 전등을 켜자 아스라한 노란 불빛이 고요하고 평화스럽기만 한 이 밤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시골에는 우산을 받쳐들고 조그만 길 돌다리를 천천히 거닐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친 채 일하는 농부도 있다. 그들의 초가집에도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가운데 적막함이 깊어간다.
하늘에는 점점 연이 많아지고, 지상에는 아이들이 많이 모여든다. 도시나 시골이나 집집마다 남녀노소 모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둘러 나온다. 각자 몸의 근육과 관절을 풀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이 할 일을 해나간다. ‘일년의 계획은 봄에 있다’고 했다. 이제 막 시작했으니 얼마든지 시간과 희망이 있는 것이다.
봄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선한 채 새롭게 성장해가는 것.
봄은 아리따운 처녀처럼 꽃단장을 하고서 미소지으며 걸어가는 것.
봄은 건장한 청년처럼 무쇠 같은 팔뚝과 허리와 다리로 우리를 인도해가는 것.
1933년 2월 21일
아버지의 뒷모습
背影
지난 2년여 동안 아버지를 뵙지 못했다. 그때 아버지의 뒷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해 겨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나는 북경(北京)을 떠나 서주(徐州)로 향했다. 아버지와 함께 조모상(祖母喪)을 치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서주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뵈었지만 가슴이 아팠다. 너저분하게 어지럽혀져 있는 세간을 바라보며 할머니를 떠올리니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푸념하듯 말씀하셨다. "기왕 당한 일을 어찌하겠냐? 너무 괴로워할 것 없다. 그래도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는 것 같구나."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아버지와 함께 팔 만한 것은 팔고 저당잡힐 것은 잡혔다.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아버지가 진 빚은 다 갚았다. 하지만 할머니 장례를 치르느라 진 빚은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해 닥쳐온 불행은 앞날을 캄캄하게만 했다.
장례식을 다 치른 뒤, 아버지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남경(南京)으로 떠날 채비를 하셨다. 나 역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해야 했다. 우리 부자는 남경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남경에서 친구의 권유로 시내를 구경하느라 하루를 머물렀다. 이튿날 오전에 강을 건너 포구(浦口)로 간 다음 오후에 북경행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버지는 볼 일이 많으셔서 역까지 나오지 않기로 하셨다. 대신 여관에 잘 아는 심부름꾼에게 나를 배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아버지는 몇 번이고 소상하게 알려주며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버지 당신 마음이 안 놓이시는지 주저하시는 기색이 역력했다. 심부름꾼이 생각처럼 잘 대해주지 않을 것 같았던 모양이다. 사실 당시 나는 20살이었고, 북경을 이미 두세 차례 다녀왔던 터라 그리 염려될 것은 없었다.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시더니 결국 당신이 직접 배웅해 주기로 결정하셨다. 나는 굳이 그러실 것 없다며 몇 번이나 말렸지만, 아버지는 단호하게 잘라 말씀하셨다. "애쓸 것 없다. 저 놈들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우리 부자(父子)는 강을 건너 기차역에 이르렀다. 나는 아버지께 짐을 지키고 계시라고 하고는 역사 안으로 들어가 차표를 샀다. 짐을 옮기려면 아무래도 짐이 많아서 짐꾼에게 웃돈을 얹어줘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네들과 한바탕 흥정을 벌이고 계셨다.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아버지는 역부족이었다. 내가 나서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당신이 품삯을 흥정하고야 말았다.
나는 기차에 올랐다. 찻간까지 따라 오신 아버지는 창가쪽에 자리를 잡아 주셨다. 나는 그 자리에 아버지가 주신 자주색 외투를 깔았다. 아버지는 작별인사를 하듯 이야기하셨다. "얘야, 조심해서 가거라. 밤에는 각별히 주의하고, 그리고 감기 들지 않도록 잘 해라."
아버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기차 안의 심부름꾼에게 나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버지의 어리숙함을 비웃었다. 돈만 아는 사람들한테 부탁은 무슨 부탁! 더군다나 나같이 이렇게 다 큰 청년을 맡기다니. 내가 스스로 알아서 어련히 잘 할라구.
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 당시 난 지나치게 똑똑하게 굴었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를 안심시키는 투로 말했다. "아버지, 이제 그만 가보세요."
아버지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차창 밖을 바라보시더니 이내 말씀하셨다. "내 나가서 귤 좀 사올 테니 너는 여기 가만히 있거라."
나는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저쪽 플랫폼 난간 밖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인들이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려면 철로를 건너야 했다. 그것도 이쪽 플랫폼에서 뛰어내린 다음 다시 저쪽 플랫폼으로 올라가야 했다. 몸이 뚱뚱하신 아버지로서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다. 마땅히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사코 당신이 가시겠다는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검은색 마고자에 남색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철로변을 약간 휘청거리면서도 천천히 살펴가고 계셨다. 이때의 아버지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이제 철로를 다 건너서 저쪽 플랫폼에 오르려고 할 때는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는 먼저 양손을 플랫폼 위 바닥에 댄 채 두 다리를 모으고는 위로 오르려고 한껏 뛰셨다. 순간 뚱뚱한 몸이 중심을 잃으며 왼쪽으로 기우뚱하였다. 몹시 힘겨워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얼른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훔쳤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였지만 무엇보다 아버지한테 눈물 자국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아버지는 주황색 귤 한 꾸러미를 안고서 이쪽을 향해 돌아서고 계셨다. 철로를 건너야 할 것 같자 아버지는 먼저 귤 꾸러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기어내려오셨다. 아버지는 다시 귤 꾸러미를 안고서 철로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쪽 가까이 오셨을 때 나는 지체없이 달려나가 아버지를 부축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기차에 올랐다. 아버지는 귤 꾸러미를 내 외투 위에 내려 놓으셨다. 이제야 당신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신 듯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셨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만 가 보련다. 도착하거든 편지하거라."
나는 아버지를 따라 내려가면서도 아무런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다. 다만 돌아서서 가시는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는 몇 발자국 못 가서 멈춰 섰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손짓하셨다. "어서 들어가거라. 차 안에 사람이 없을 때 들어가라니까……."
나는 잠자코 서 있었다. 오고 가는 사람들 사이로 역을 빠져나가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아버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나는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자리로 돌아와 앉은 나는 절제되어 있었던 감정이 솟구쳐 올라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요 몇 년 동안 아버지와 나는 나름대로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은 더 나아질 게 없었다. 아버지는 소년 시절에 이미 객지로 나가 먹고 살 궁리를 했던 분이다. 혼자 힘으로 살아가며 그 동안 큰 일을 많이 벌이셨다. 그러나 노년에 접어들어 이렇게 참담하게 되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현재 처지를 한탄하시며 상심해 하시는 것도 당신 스스로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당신 마음속에 응어리진 울분을 종종 표출하곤 하셨는데, 집안의 사소한 일에 괜한 분노를 터뜨리시는 것이었다. 나를 대하는 것도 예전 같지 않으셨다. 그러나 근 2년 동안 만나보지 못해서 그런지 나에 대한 불만은 아예 잊어버리신 듯했다.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시고 손자를 더욱 그리워하시는 눈치였다. 북경에 온 뒤로 아버지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 몸은 그런 대로 괜찮다. 단지 어깨가 자꾸 결리면서 통증이 점점 심해지는구나. 젓가락을 들거나 붓을 쥐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아마 갈 날도 멀지 않은 모양이다."
여기까지 읽어내려간 나는 편지를 잠시 접어 두었다. 눈가에 맺힌 눈물 방울 사이로 아버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검은색 마고자에 남색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의 뒷모습이었다. 아……. 아버지를 언제 다시 뵐 수 있을는지…….
1925년 10월 북경에서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