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이지 - 1527∼1602. 원래 이름은재지(載贄), 호는 탁오(卓吾)이다. 26세 때 거인(擧人)에 합격해 하남, 남경, 북경 등지에서 하급 관료생활을 하다가 54세 되던 해 운남의요안지부로 퇴직했다. 62세에 출가했으며 『장서』『사서평』등을 집필했다.
원굉도 - 1568∼1610. 만력 20년 진사를 거쳐 예부주사 이부낭중을지냈다.
장대 - 1597∼1676.
대명세 - 1653∼1713.
■ 역자 이종주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한국학대학원을졸업. 현재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저서로는 『북학파의 인식과 문학』『왜 우리 신화인가』등이 있다.
■ 차례
태학 산문선을 발간하며
절대 고독과지독한 울분의 소품문
제1부 이지 소품문
제2부 원굉도 소품문
제3부 원종도 소품문
제4부 장대소품문
제5부 대명세 소품문
제1부 원문
제2부 원문
제3부 원문
제4부 원문
제5부원문
연꽃 속에 잠들다
동심이 진심이다
童心說
용동산농(龍洞山農)은 『서상기(西廂記)』 서문 말미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직 동심童心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동심이란 진심(眞心)이다. 만약 동심을 그르다고 한다면 이는 진심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다. 동심이란 거짓을 버린 순진함으로, 최초의 순수한 본심이다. 만약 동심을 잃으면 이는 진심을 잃은 것이니, 진심을 잃으면 바로 참된 인간성을 잃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진실하지 않다면 그 최초의 본심을 회복할 수 없다.
어린아이는 인생의 시작이고, 동심은 마음의 시작이다. 마음의 시작을 어찌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심을 어떻게 그리 빨리 상실하게 되는가? 바야흐로 어린아이가 자라기 시작할 때, 듣고 보는 식견(識見)이 눈과 귀로 들어와 그 마음에 주인으로 자리잡으면서 동심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보고들은 식견으로부터 도리(道理)가 들어와, 마음의 주인이 되어 동심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면 도리문견(道理聞見)은 나날이 더 쌓여서, 알게 되고 느끼는 것이 날로 더 확장된다. 이렇게 되면 칭찬하는 소리를 달게 여기게 되어 더욱 그것을 떨치려고 하니, 마침내 동심을 잃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좋지 않다는 소리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면, 그것을 가리고 덮으려 힘쓰게 되니, 동심을 상실하는 것이다.
도리문견이라는 것은 모두 독서(讀書)를 많이 하고 의리(義理)를 알게 되면서 오는 것이다. 옛날 성인(聖人)이 어찌 독서를 하지 않으셨겠는가. 독서를 하지 않으셨다면 당연히 동심을 보존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독서를 많이 하고서도 이 동심을 유지하고 잃어버리지 않으셨으니, 보통의 학자들이 독서를 많이 하고 의리를 알게 되면서 동심을 가로막은 것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무릇 학자들은 독서를 많이 하고 의리를 알게 되면 그 동심을 가로막게 되는데, 성인은 어떻게 하여 저서(著書)와 논리(論理)를 많이 세우면서도 학자들처럼 되지 않으셨을까?
동심이 막히면 언어를 토설하여도 그 말이 충심(衷心)에서 나오지 않는다. 눈대중으로 보아서 정사(政事)를 하게 되니 그 하는 일이 근거가 없게 된다. 저술을 하고 문장을 다듬어내도 그 글이 달통한 의미를 담지 못한다. 내심에 진실이 없으니 겉으로 문장이 아름답게 다듬어지지 않는 것이고, 독실함이 없으니 빛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말을 한 마디 만들려고 하여도 끝내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가? 동심이 이미 막혀 버려서, 밖으로부터 들어온 도리문견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이 도리문견으로 채워졌다면, 말하는 것은 모두 도리문견의 언어다. 동심에서 절로 나온 언어가 아니다. 그런 언어가 비록 교묘하다 하더라도, 말하는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거짓 인간이 거짓말을 하고, 거짓 일을 하고, 거짓 문장을 쓴 것이 아니겠는가? 그 사람이 이미 거짓 인간이라면 그가 한 것은 거짓 아닌 것이 없게 된다. 그러니 거짓언어를 가지고 거짓사람[假人]들과 말을 하면 거짓사람이 기뻐하고, 거짓 일로 거짓사람과 이야기하면 거짓사람이 기뻐하고, 거짓문장으로 거짓사람과 담화하게 되면 거짓사람이 기뻐하게 된다. 세상이 거짓 아닌 것이 없고, 기뻐하지 않을 일이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온 세상 마당이 모두 거짓이니, 키가 작은 구경꾼이 어떻게 제대로 분별을 할 수 있겠는가. 천하의 훌륭한 문장으로서, 거짓인간들에게 인멸되어서 후세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적다고 할 수 없다. 어째서 그런가? 천하의 좋은 문장이란 동심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동심을 간직하고 있으면 도리가 힘을 쓰지 못하고 문견이 설 땅을 잃게 되어, 쓰는 문장마다 잘되지 않는 때가 없고, 누구라도 좋은 문장을 쓰게 되며, 그 문장은 모두 나름의 체격과 문자를 창출하게 된다.
시가 어째서 고체(古體)여야 하고, 문장이 어째서 선진(先秦)시대의 것이어야 하는가? 시는, 아래시대로 내려와 육조(六朝)시대 시가 되고, 변해서는 다시 당나라 시대의 근체시가 되었다. 또 문장은 변하여 당송(唐宋)의 전기(傳奇)가 되었고, 또 변하여 금나라?원나라 시대의 연극 대본이 되고, 잡극이 되고, 『서상곡』이 되고, 『수호전』이 되고, 오늘날의 과거시험 문장이 되었다. 이런 문장들은 모두 고금에 통하는 지극히 훌륭한 문장이어서 시대의 선후로써 우열을 논할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는 동심을 가진 사람의 자연스런 문장에 감동되었으니, 다시 육경(六經)과, 『논어』와 『맹자』에 대하여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육경과 『논어』『맹자』 같은 글은, 사관(史觀)들이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면, 그 제자들이 과도하게 극도로 찬미한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매한 문도들과 어리석은 제자들이 스승의 학설을 자기 소견에 따라 앞뒤를 꿰 맞추어서 서책으로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후학들이 이런 사정을 살피지 않고 바로 성인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생각하고 경전으로 간주해 버린 것이다. 그 태반은 성인의 말씀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가 알겠는가? 만일 성인으로부터 나온 말이라 하더라도, 그 핵심은 특별한 사정에 따라 말씀하신 것이다. 즉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처럼 그 상황에 따라 처방을 한 것으로서, 가장 이해력이 떨어지는 어리석은 제자와 문도들을 깨우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약과 치료는 병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처방이 고정불변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 하나만을 만세에 통하는 훌륭한 이론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육경과 『논어』『맹자』야말로 도학자의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거짓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바탕이라고 하겠다. 그것을 동심의 언어에 비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안타깝다. 내가 언제, 동심을 잃지 않아, 함께 문장을 이야기할 만한 진정한 대성인을 만나볼 수 있을지.
현실에서 동떨어진 사상체계가 석고상처럼 굳은 이념이 되어 인간을 억누를 때, 순진한 동심의 시각이 강조되는 것은 동서고금 역사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독교적 도그마가 서양을 억압하고 있을 때 이에 대한 반발의 출발점도 동심에 기초한 인간의 본심이었다. 과도한 성리학적 예교주의가 지배하던 조선후기 박지원, 이덕무 같은 실학자들도 모두 동심을 강조하면서 현실에 바탕을 둔 실학이라는 사상체계를 이끌어 갔다. 이 글의 작자 이지가 살았던 명말청초의 어두운 상황과 영?정조 시대의 분위기가 상통하였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우리 민담에는 박문수조차 구원할 방도를 못 찾아 위기에 빠진 사람을 어린아이가 구했다는 등 동심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도 동심이 필요했다는 의미다. 동심으로 돌아가자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이런 구호는 오늘날에도 살아있다. 그러나 동심이 이렇게 강조되는 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동심은 없다. 자기 안에 동심을 기르지는 못하고, 남에게 동심이 없다는 지적만 즐기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빗소리로 속은 냇물소리
初至天目雙淸莊記
며칠을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려 고생이 심했다. 쌍청장雙淸莊에 이르니 하늘이 조금 개었다. 산장은 산자락에 자리하여 산승들이 머물고 있는데, 승방이 아주 정갈하다. 시냇물이 바위에 부딪치며 소리를 내어 밤새도록 베갯머리까지 들린다. 석궤는 꿈결에 비가 온다고 생각하고 수심에 싸여 급기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산승이 차와 죽을 공양하려고 석궤를 깨웠다. 석궤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폭우가 이렇게 쏟아지니 어디를 가겠나? 그냥 누워지낼 수밖에." 스님이 말하였다. "날이 개어 바람과 햇살이 참 좋습니다. 들리는 소리는 냇물 소리이지 빗소리가 아닙니다." 석궤가 크게 웃으며 급히 의관을 챙겨 일어나, 차 몇 잔을 마시고 바로 함께 움직였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