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글에서 주목되는 도선적(道仙的)인 경향을 통해 지금의 절망적이고 암흑 가득한 세계를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허균의 "혁명적 낭만성"을 포착할 수 있다.
■ 저자 허균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는단보, 호는 교산성소이다. 1585년 한성부 초시에 합격한 이래 여러 요직과 외직을 거쳐 병조판서까지 지냈으며, 역모를 했다는 혐의로처형당했다. 시 비평집 『학산초담』 『성수시화』를 엮었으며 시선집 『국조시산』, 중국의 문장에서 뽑은 선집 여러 권을 펴냈다. 그의 글은귀양지인 부안에서 스스로 엮은 문집 『성소부부고』로 남아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빼어난 감성으로 당시(唐詩)풍의 시를 썼을뿐만 아니라 상식을 뒤엎는 행동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소수자들에 대한 옹호를 분명히 하는 혁명적인 글을 다수 썼으며, 실제로 그러한사람들과 즐겨 어울렸다. 자신의 생각을 간결하고도 감성적으로 담아내는 소품문을 통해서 당대 문단에 새로운 분위기를 일으켰다.
■ 역자 김풍기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강원대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고 고려대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2006년 현재 강원대 국어교육과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조선전기 문학론 연구』『한국 고전시가교육의 역사적 지평』『옛시 읽기의 즐거움』『시마-저주 받은 시인들의벗』 등이 있다.
■ 차례
태학산문선을발간하며
일러두기
일상의 심미적 표현과 새로운 사유의 발견
제1부 척독
형님께 올리는 편지
대장부의삶
눈 녹인 물에 달인 햇차의 맛
책을 돌려주십시오
가난 때문에라도 하는 벼슬
그리운 벗 권필에게
타향에서 만난그대
자연의 법도와 인간의 법도
저만의 시를 쓰고 싶습니다
불우한 사람은 우리의 책임
술 한잔 하러 오시게
속절없이봄날은 간다
내가 그려보는 행복한 생활
달을 바라보며
오해를 푸시지요
제2부 앉아서 유목하기
누추한 내 방
먼저 간아내 김씨의 행장
나의 벗 금각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다시노라
묵죽도 진여의 바다
나의 벗 석주 권필
나의 스승 손곡선생
앎을 함께하는 기쁨
이태백 귀신 이야기
벼슬이 뭐길래
부귀영화의 허망함에 대하여
네 친구 이야기
화가이징
제3부 독서론(문장론)
글이란 무엇인가
시를모름지기 이렇게 써야 한다
구양수와 소동파의 글을 엮고 나서
허균의 독서노트
제4부 논설
배움이란 무엇인가
공정한 인재등용
소인배들의 행태
호민에 대하여
제5부 기타
잠을 경계하라
통곡에도 도가있나니
운명에 맡기는 점과 하늘을 믿는 점
꿈풀이
잉어가 이어준 사랑의 인연
성옹의 노래
원문 제1부
원문 제2부
원문 제3부
원문 제4부
원문제5부
누추한 내 방
일상의 심미적 표현과 새로운 사유의 발견
우리에게 ‘허균’이라는 인물은 아마도 혁명가의 모습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을 것이다. 그가 지었다고 하는 『홍길동전』은 최초의 한글소설로 통칭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 역시 소설에서 말하는 혁명적 의도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서얼로서의 울분을 토하는 홍길동의 묘사에서 우리는 허균이 서얼들과 친하게 교유하면서 시대의 변혁을 꿈꾸었다고 상상한다든지, 부패한 권력을 직접 나서서 정치하여 힘없는 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어떤 인물의 전모를 거론하면서 그의 생애 속에는 인간의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다양한 주름으로 가득한 삶의 곡절 속에서도 그 나름의 기준이 있는 것이고, 많은 굴곡 중에서 상당 부분은 그 기준에 의해 적절한 해석이 가능하다. 각각의 곡절은 시절 인연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거나 작동하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바로 그 곡절을 주목한다. 한 인물의 생애에서 짧은 순간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해도 그것을 주목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순간의 사건이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사유의 절정을, 혹은 세계의 변혁을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이 정확히 어떤 지점인지 알지 못한다. 누구는 그 인물의 삶에서 사랑과 증오를 읽고, 어떤 사람은 떠돌이 인생을 읽으며, 또 다른 사람은 끝없는 절망 저편의 새로운 희망을 읽기도 한다. 문제는 이전의 연구자들이 이미 결정해 놓은 선을 따라 나도 모르게 걷는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이름난 사람일수록 이전의 연구자들이 마련해 둔 큰 길을 따라 걷기 십상이다. 그 길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기 위한 길이었다 해도, 그 길밖에 다른 길은 없었는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만의 길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허균(1569~1618)만큼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는 작가도 드물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면모는, 역모죄로 몰려 사형을 당한 생애만큼이나 강렬한 빛을 던져주었다.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작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매우 의문스러운 면이 있지만, 여기서의 논의거리로 삼기에 적절치 못하므로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로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사회개혁가로서, 뛰어난 시인으로서, 훌륭한 시 비평가로서 허균의 면모는 끝모를 주름 사이에 굽이굽이 숨어 있다.
우리가 허균에게서 강렬한 사회 개혁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것은 그의 몇몇 논설들, 예컨대 「호민론」「소인론」「유재론」등의 글이 주는 힘 때문이다. 그동안 선학들에 의해 특히 주목되어 온 사회 개혁가(혹은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는, 그 과도한 해석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사실 16세기 말, 17세기 전반에 이처럼 과감한 글을 쓴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꼽아보면 허균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젊은 시절의 비극적인 역사 경험과 개인사적 사건들이 허균의 세계관을 이러한 방향으로 가게 했을지라도, 그 글들에서 느끼는 강렬도와 깊이는 삶의 고비마다 마주치는 부당한 사례들에 눈길을 회피하지 않고 면밀한 관찰과 사유를 펼쳐온 결과에서 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의 글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은 도선적 경향이다. 자유로운 상상력과 방달(放達, 마음이 너그러워 말이나 행동에 거리낌이 없는 것)함으로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이단처럼 여겨졌던 도선적인 소재와 내용을 글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었다면, 허균의 사유가 일단은 당대 주류적인 것에서는 벗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현실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기 위해 혁명의 길로 나서든, 이미 짜여진 틀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든, 그것은 세상을 건너는 자신만의 방식일 것이다. 허균은 그 방식으로 도선적인 것을 선택했다. 그의 글에서 유난히 이런 문제가 자주 언급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허균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변화무쌍하면서도 신선한 그의 사유를 날 것으로 맛볼 수 있어서 좋다. 피를 토하는 혁명가의 모습이 들어있는가 하면 어느새 다정다감한 남편의 웃음이 흐르기도 하며, 샌님의 말투가 배어 있는가 하면 벗을 불러 술을 마시는 풍류재자(風流才子)의 몸짓이 보이기도 한다. 허균의 글쓰기는 무수히 얽혀 있는 잔뿌리들의 집합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양분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잔뿌리를 뻗치는 것이다. 한 곳에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기회를 노리는 글, 언제나 촉수를 움직여 새로운 영토를 탐색하는 글, 이것이 바로 허균의 글쓰기 전략이다.
과거의 논의에 갇혀서 우리는 허균을 편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그의 글을 꼼꼼히 읽고 그의 다층적인 사유와 우리의 사유 사이에 소통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 그 소통이 굳어진 우리 사유 내부에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전에 읽었던 허균을 모두 버리고, 다시 허균의 글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제1부 척독(尺牘)
대장부의 삶(與崔汾陰 丁未九月)
벼슬살이하는 제 심정은 엷은 가을 구름 같아서, 서풍이 한 번 일면 고향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고을 자리를 하나 얻어 입에 풀칠을 하니 만호후[萬戶侯, 일만 호의 백성이 사는 영지(領地)를 가진 제후라는 뜻으로, 세력이 큰 제후를 이르는 말]에 봉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공은 어찌 인색하신지요. 공이 인재를 아끼는 한 마음이야 하늘에 알릴 만하겠습니다만 때를 알지 못한 허물을 면치 못하니, 사랑함이 지혜를 어둡게 한 것은 아닌지요. 공명은 손에 들어오지 않고, 젊은 시절의 뜻은 이미 쇠하였습니다. 힘이 없어 망설이는 망아지가 우리 안에서 서성거리듯 하니, 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곤궁함과 현달(顯達, 벼슬, 명성, 덕망이 높아서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함은 제 스스로 분수가 있는 법이나, 하늘도 또한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장부의 생애는 관 뚜껑을 덮어야 끝나는 겁니다. 공께서 보시기에 제 혀가 아직도 붙어 있는 것 같습니까? 큰 골짜기의 용을 고삐와 쇠사슬로 묶어 두려 하지 마십시오. 본성은 진실로 길들이기 어렵습니다.
* 삼척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13일만에 파직된 것이 바로 정미년(1607) 5월의 일이다. 7월에 다시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임명되기는 하지만, 벼슬살이하는 허균의 심정이 담담할 리 만무하다. 자유로운 정신을 구가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은 언제나 ‘벼슬’이라고 하는 거대한 굴레 속에 갇혀서 움치고 뛸 수 없는 신세였다. 허균의 심사는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어지럽다.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하려는 마음이 숨어 있는가 하면 여전히 대장부로서의 공명을 이루고 싶어하는 마음도 슬며시 드러난다.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편안히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보이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자유로운 정신을 본성대로 펼치고 싶어하는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운 벗 권필에게(與崔汝章 庚戌五月)
형이 강화도에 계실 때에는, 1년에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시면 곧 저희 집에 머무르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주고받았는데, 이는 인간 세상에 매우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오시고는 열흘도 한가롭게 어울린 적이 없어서 멀리 강화도에 계시던 때보다도 못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못의 물결은 바야흐로 넘치고 버드나무 그늘은 한창 짙습니다. 연꽃은 벌써 붉은 꽃잎을 반쯤 토해냈고, 푸른 나무는 비취빛 일산 속에 은은히 비칩니다. 때마침 우유술을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술둥이에 뚝뚝 떨어지니, 얼른 오셔서 맛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하마(‘벌써’의 방언) 쓸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 멀리 있어도 언제나 그리운 벗이 있다. 뜻을 함께 하는 벗도 소중한 벗이지만, 글과 정을 함께 하는 벗도 평생을 나눌 소중한 벗이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험한 세상에서, 권필은 허균을 이해해 주었던 벗이다. 허균에게만 그러했겠는가. 권필에게도 허균은 모든 것을 이해해 주었던 벗이었다. 한창 여름빛이 아름다운 시절, 문득 권필이 그리워서 편지를 보낸다. 그냥 술 한 잔하러 오라면서, 바람 서늘한 마루를 소제해 놓고 벗을 기다리는 마음이 눈에 선하다.
저만의 시를 쓰고 싶습니다(與李蓀谷 己酉四月)
어르신께서 저의 근체시[중국의 고체시(古體詩)에 맞서는 개념의 시체(詩體)]가 순수하고 노숙하며 법도가 엄정하고 촘촘하여 성당(盛唐, 중국 당시의 4시기 중 시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시와는 관계가 없다면서 배척하고는 돌보아 주지 않으시고 오직 고시만이 좋다고 하여 안연지(중국 육조시대 송나라의 문인)와 사령운(중국 남북조시대 송나라의 대표적 시인)의 풍격이 있다고 하시니, 이는 어르신께서 고집만 부리고 변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고시는 비록 예스러우나 이건 그대로 베껴서 진짜에 가까울 뿐입니다. 이는 집 아래 집을 또 짓는 격이니 어찌 귀하다 하겠습니까.
근체시는 비록 핍진(逼眞, 실물과 아주 비슷하다)하지는 않더라도 나름대로 저의 솜씨가 있습니다. 저는 저의 시가 당시나 송시와 비슷해질까 두렵습니다. 남들이 ‘허균의 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니, 너무 무람한 생각이 아닐는지요.
* 자신의 스승 이달에게 당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허균이 부럽다. 스승은 제자의 좋은 점과 고쳐야 할 점을 지적해서 편지를 보낸 듯하다. 이에 대해 제자의 당당한 목소리는 자신만의 시를 짓고 싶다는 독립선언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나는 이 편지에서 이달과 허균 두 사람의 허물없는 대화를 읽어낸다. 사제지간에 이토록 흉허물 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미 스승과 제자 사이를 넘어서 이제는 벗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술 한잔 하러 오시게(與李汝仁 戊申七月)
처마엔 빗물 쓸쓸히 떨어지고, 향로엔 가느다랗게 향기 풍기는데, 지금 친구 두엇과 함께 소매 걷고 맨발로 방석에 기대앉아서 하얀 연꽃 옆에서 참외를 쪼개 먹으며 번우(煩憂, 괴로워 근심스러운)한 생각들을 씻고 있네.
이런 때 우리 여인汝仁(허균의 지우 李再榮의 자)이 없어서는 안될 테지. 자네 집 사자 같은 늙은 아내가 반드시 고함을 지르면서 자네 얼굴을 고양이 면상으로 만들 테지만, 늙었다고 해서 두려워하거나 움츠려 들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중놈에게 우산을 가지고 대기하도록 해 놓았으니 가랑비쯤이야 족히 피할 수 있으리. 빨리 빨리 오시게나. 모이고 흩어짐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런 모임이 어찌 자주 있겠는가. 흩어진 뒤에는 후회해도 돌이킬 수 있겠는가.
* 친한 벗을 만날 때면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저 친구를 이승에서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앞날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벗을 만날 기약 역시 아득하다. 나이 들수록 함께 노닐 만한 벗은 찾기 어렵다. 점점 추억으로만 살아가는 나날들, 벗은 내 추억을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다. 작은 술자리도 점점 기약하기 어려운 시절, 빠져서는 안될 벗이 있다면 당연히 부를 일이다. 이런 편지를 받으면 아니 갈 도리가 없다. 사람의 정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제2부 앉아서 유목(遊牧)하기
누추한 내 방(陋室銘)
방의 넓이는 10홀, 남으로 외짝문 두 개 열렸다. 한낮의 해 쬐어, 밝고도 따사로워라. 집은 겨우 벽만 세웠지만, 온갖 책 갖추었다. 쇠코잠방이로 넉넉하니, 탁문군(卓文君)의 짝일세. 차 반 사발 따르고, 향 한 대 피운다. 한가롭게 숨어살며, 천지와 고금을 살핀다. 사람들은 누추한 방이라 말하면서, 누추하여 거처할 수 없다 하네.
내가 보기엔, 신선이 사는 곳이라, 마음 안온하고 편안하니, 누추하다 뉘 말하는가. 내가 누추하게 여기는 건, 몸과 명예 모두 썩는 것. 집이야 쑥대로 엮은 거지만, 도연명도 좁은 방에서 살았지. 군자가 산다면, 누추한 게 무슨 대수랴.
* 맹자는 ‘상우(尙友, 책을 통하여 옛사람을 벗으로 삼는 일)’를 말하면서 옛사람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허균 역시 자신의 시대에는 자기의 뛰어난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종국에는 옛날 위대한 인물들과 친구 할 도리밖에는 없노라고 자위했다. ‘앉아서 유목하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천하를 떠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사람들과 교유하고 천하의 학문을 익히지만 육체적으로는 자신의 방을 떠나본 적이 없다면, 이것이야말로 앉아서 유목하는 일이다. 내 방이 지저분하고 누추하면 어떤가. 나의 정신은 세상의 장애를 넘어서 온 천지에 가득한 것을.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다시노라(屠門大嚼引)
나의 집은 비록 가난했지만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 사방의 기이한 맛을 예물로 바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에는 날마다 산해진미를 갖추 맛볼 수 있었다. 자라서는 부호가에 장가들어서 또한 뭍과 바다의 진미를 모두 맛보았다. 난리로 북쪽에서 왜적을 피해 있다가 강릉 외갓집으로 돌아가서는 기이한 음식을 두루 맛보았는데, 벼슬길에 나아간 뒤 남북으로 벼슬살이를 하러 다니면서 더욱 입을 부쳤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나는 산물로 구운 고기를 맛보고 그 빼어난 것을 씹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식욕과 성욕은 본성이지만, 식욕은 더더욱 몸과 목숨에 관련된다. 선현들이 음식을 천하게 여긴 까닭은 그것을 탐하여 이로움을 따른 것을 지칭한 것이다. 어찌 일찍이 음식을 폐하고 이야기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여덟 가지 진미를 무엇 때문에 『예기』에 기록하였을 것이며, 맹자는 물고기와 곰 발바닥의 구분을 했겠는가?
나는 일찍이 진나라 하증[중국의 부호. 호사(豪奢)를 좋아하여 날마다 먹는 음식에 만전(萬錢)을 쓰고도, “젓가락 댈 데가 없다.”고 했다 한다]의 『식경』및 당나라 서공[원문에는 순공(?公)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서공(舒公)의 오자로 보인다. 이 글의 뒷부분에는 ‘하(何), 위(偉)’ 두 사람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서공은 당나라 때 위거원을 말하는데, 그는 『소미연식단』이라는 저술을 남겼다]의 『식단』을 본 적이 있다. 두 분은 모두 천하의 맛을 다하고 그 풍성함과 사치스러움을 극진히 하였으므로 음식의 종류가 매우 많아서 만 종류로 헤아릴 지경이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이름만을 서로 만들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도구로 삼았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비록 궁벽한 곳이지만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산으로 막혀 있기 때문에 물산 역시 풍부하고 요족하다. 만약 하증과 위거원 두 분의 예를 써서 이름을 바꾸어 그것들을 구분한다면 아마도 또한 수만 가지는 될 것이다.
내가 죄를 짓고 바닷가로 유배되었을 적에 쌀겨마저도 부족하여, 밥상에 오르는 것은 상한 뱀장어나 비린 생선, 쇠비름, 들미나리 등이었고 그것도 끼니를 걸러서 굶주린 배로 밤을 새웠다. 그럴 때면 매양 지난 날 먹던 산해진미도 물려서 물리치던 때를 생각하고 침을 흘리곤 하였다. 다시 맛보고 싶었지만 천상에 있는 서왕모(西王母,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녀의 이름)의 복숭아처럼 아득하니, 내가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동방삭(東方朔, 중국 전한의 문인)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훔쳐 먹을 수 있겠는가.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기록해 놓고 때때로 보면서 한 점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쓰기를 마치고 나서 『도문대작』이라 명명하였다. 이는 세속의 현달한 자들이 입에는 사치스러움을 다하고 함부로 낭비하여 절제할 줄 모르니, 부귀영화는 이처럼 무상할 뿐이라는 것을 경계하려는 것이다.
* 이 글은 허균이 함열에 귀양을 가서 쓴 것이다. 과거 진국의 산해진미를 맛보던 시절과 현재 제대로 먹을 것을 챙기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이 대조되면서 음식이 주는 풍성하면서도 아름다운 상상력을 만들어낸다. 허균의 『도문대작』은 분량이 그리 많지는 않은 책이지만 각 지역의 특산물과 맛있는 음식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음식 이름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그는 단순히 음식맛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외로운 유배지에서 그를 지탱해 주는 것은 과거의 음식과 함께 그리운 식욕이 아니었을까.
벼슬이 뭐길래(重修靜思菴記)
부안현 바닷가에 변산이 있는데, 산 남쪽에 골짜기가 있으니 우반이라고 한다. 그곳 출신 부사 김청택 공이 경치 좋은 곳을 가려 암자를 짓고 ‘정사’라고 이름하였다. 노년에 즐기면서 쉴 장소로 쓰려한 것이다. 나는 일찍이 공적인 일로 호남을 왕래한 적이 있었는데, 그 뛰어난 경치를 익히 들었으나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본디 세속의 영화나 이익을 즐겨하질 않아서 매양 은거하려는 뜻은 아니었으나 바라기만 할 뿐 아직 실현하질 못했다. 올해 공주목사에서 파직되고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이른바 우반이라는 곳에 살 터를 잡으려 하니 김공의 아들 진사 등(登)이 말했다. “제 선친의 보잘 것 없는 오두막이 있지만 제가 지킬 수가 없으니 원컨대 공께서 수리하셔서 지내십시오.”
내가 그 말을 듣고 즐거워하면서 마침내 고달부 군 및 두 사람의 이씨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살펴보았다.
갯가로는 작은 길이 있어서 구불구불 골짜기로 든다. 반달 모양 패옥(佩玉)이 쟁쟁거리는 듯한 시냇물 소리는 졸졸졸 풀숲에서 쏟아져 내린다. 계곡을 따라 몇 리 채 못가서 산이 열리며 넓은 땅이 나온다. 좌우로는 솟아오른 봉우리가 봉황과 난새(鸞鳥,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었고, 동쪽 산록으로 소나무와 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른다.
나와 세 사람은 곧바로 집터로 갔다. 동서로 세 개의 언덕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널찍하게 얽힌 곳은 수백 그루의 대나무가 빽빽하게 푸르러 있어서, 여전히 집터라는 것을 구분해준다. 남쪽으로는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한가운데에 금수도가 있다. 서편으로는 울창한 숲 속에 서림사가 있는데 스님 몇 사람이 살고 있다. 계곡 동쪽으로 걸어 올라가서 오래된 당산나무를 지나가면 이른바 정사암이라는 곳에 다다른다. 암자는 겨우 네 칸으로 벼랑 바위 가에 얽어놓았다.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을 벗고 못 가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갈꽃은 막 피어나고 단풍잎은 반쯤 붉다. 저녁볕은 산봉우리에 걸리고 하늘 그림자는 물에 거꾸로 비친다. 천지를 굽어보고 우러르면서 휘파람 불고 시를 읊조리니, 어느 새 속세를 떠난 흥취에 젖어 신선이 삼신산에서 노니는 듯한 마음이 든다. 마음 속으로 몰래 생각해보면, 건강한 때에 벼슬을 그만두고 오래된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되고, 또한 숨어서 깃들일 곳을 얻어 내 몸을 편안히 하는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기나, 하늘도 보답해 주는 것이 또한 풍성하다고 여겨진다.
벼슬이란 게 무엇이관대 감히 사람을 조종한단 말인가. 고을 원님인 심덕현 군이 암자가 피폐해졌는데도 관리하는 사람이 없다면서 세 사람의 스님을 모으고 쌀과 소금 약간 섬을 보내주었으며, 재목을 벌채하여 그것을 수리하게 해 주고는 부엌을 면제하는 조건으로 그곳에 살면서 관리하게 해 주었다. 암자는 이 때문에 복구되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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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이 암행어사의 장계에 의해 파직된 것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다. 허균으로서는 참담한 해였다. 과거 급제 동기생인 이이첨은 득세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은 파직되어 전라도 부안에 있는 정사암이라는 작은 암자로 은거하게 된 것이다. 바쁜 관료 생활에서 자의든 타의든 벗어나 보니 과거 자신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예나 지금이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용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유유자적하면서 ‘느림’의 미학을 느껴보는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주변을 한번쯤 돌아볼 일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