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는 우리나라를 여행하며 쓴 글을 담았다. 남도, 하회마을, 섬진강 벚꽃길과 쌍계사,그리고 오대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쓴 글 속에는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경외와 그리움이 묻어난다.
제2부는 작가의 개인적 체험과 역사적 사연이 담긴 기행글들이 주로 실려 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 참석해 쓴 「그 자리에 있다는 감동 - 바티칸 기행」, 역사학자 이이화 송우혜와 함께 중국과 백두산의 독립운동 유적지를방문한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 - 중국 백두산 기행」 등이 실렸다.
제3부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기아와 가난으로 고통받고있는 에티오피아와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기록이다.
제4부 「해오의 여정」은 초자연적인 외경의 마력 앞에서 자기 존재를 되묻는 아픈해오(解悟) 속의 순례이다. 티베트와 네팔의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순연한 사람들을 통해 현대문명의 소용돌이에 빠진 우리들에게 삶의 본질적 조건을질문한다.
■ 저자 박완서
작가 박완서는 1931년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서 있는 여자』 『그해 겨울을 따뜻했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 있는 날의 소망』 『나는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두부』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이산문학상(1991), 현대문학상(1993),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등을 수상하였다.
■ 차례
1. 생각하면 그리운 땅
자연은 위대한 영혼을 낳고 | 남도 기행
타임머신을 타고 간 여행 | 하회 마을 기행
생각하면 그리운 땅 | 섬진강기행
만추 여행 | 오대산 기행
2. 잃어버린 여행가방
잃어버린여행가방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감동 | 바티칸 기행
아, 참 좋은 울음터로구나 | 중국·백두산 기행
상해와의 인연 | 상해기행
3.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숨 쉬지 않는땅 | 에티오피아 방문기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 인도네시아 방문기
4. 해오의 여정
모독(冒瀆) | 티베트기행
신들의 도시 | 카트만두 기행
잃어버린 여행가방
타임머신을 타고 간 여행_하회 마을 기행
몇 해 전 10월 연휴 때였다. 우리 식구와 두 딸네 식구가 함께 봉고차를 한 대 빌려서 경상북도 쪽을 여행한 일이 있다. 목적지는 안동군 내에 있는 하회 마을이었지만 세 가족 중에는 어린아이도 둘이나 있었고, 또 큰마음 먹고 차까지 빌렸기 때문에, 아무 데나 우리가 내리고 싶은 데서 내려서 점심을 지어먹거나 사진도 찍고 도중에 들를 만한 명승지나 고적지까지 잠깐씩 구경하면서 천천히 갔기에 새벽에 출발한 일행이 하회 마을에 도착한 건 깜깜해진 후였다.
요새는 어떤지 몰라도 그때만 해도 그 마을엔 여관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그 여관은 이미 졸업여행을 온 여대생들로 만원이어서 우리 일행을 받아주지 않았다. 봉고차 속에서 하룻밤을 지새울 궁리를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아무 데나 가서 재워달래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민박촌이 있나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고 아무 집이나 빈 방이 있으면 재워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열 명이 넘는 대식구인 걸 보더니 과수댁 혼자 사는 집을 소개해주었다.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집이었다.
자식들은 다 대처로 나가 혼자 살고 있지만 친척들이 한식구처럼 정이 많아 외로운 줄 모른다는 과수댁은 우리에게 아래윗방 둘 밖에 없는 방을 몽땅 내주고 친척집으로 자러 가버렸다. 졸지에 그 집 주인이 되어버린 우리들은 부엌에서 불을 때 밥해 먹고 실컷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 마음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밤중에 찾아와 나를 깨웠다.
나그네에게 집을 내주고 안심이 안 돼 찾아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기름이며 깨소금은 어디 있고 마늘 파는 어디 있다고 알려주러 온 거였다. 내일 아침밥 지을 때 마음대로 꺼내 먹으라는 거였다. 우리는 준비해간 것이 있는지라 다음날 그 댁 양념을 조금도 축내지 않았지만 그런 인심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청구한 숙박비도 너무 약소했다.
아침의 하회 마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누렇게 익은 벼이삭이 무겁게 고개 숙인 풍요한 들판을 지나 마을로 접어들면서 나는 서울에서 안동군 풍천면으로 봉고차를 타고 여행을 온 게 아니라 20세기에서 16~17세기경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을 온 게 아닌가하는 환각에 사로잡혔다.
양회(洋灰)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전한 토담, 토담 밑에 무리지어 핀 진보랏빛 들국화, 토담 안의 감나무에서 담 안이건 담 밖이건 나그네의 어깨건 가리지 않고 뚝뚝 떨어지는 농익은 연시, 품위 있고 늠름한 양반의 기와집과 하인들의 초가가 한데 어우러진 마을은 곧 어디서 벽제 소리가 들릴 것처럼 몇백 년 전의 반촌(班村)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마을엔 풍산 류씨의 종가 건물인 양진당,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종가 건물인 충효당 등 보물로 지정된 건물을 비롯해서 여러 채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돼 17세기의 건축미와 마을의 모습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 충효당은 아직도 류성룡가의 종부(宗婦)가 지키고 있고, 류성룡의 유물을 보관한 영모각은 예전이 아니라 근래에 지은 거지만, 그 안에는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전황을 객관성 있게 기록한 『징비록』을 비롯해서 『정원전교』, 『난후잡록』등의 보물과 류성룡이 전선에서 사용했다는 갑옷, 투구, 허리띠 등이 소장되어 있어볼 만하다.
하회(河回) 마을은 그 한자풀이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태극 모양으로 휘돌고 있다. 마을을 휘감고 있는 강을 나룻배를 타고 건너면 하회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이 있다. 언덕에서 하회 마을을 내려다보면 풍수지리설에 쥐뿔만큼도 아는 게 없는 주제에도 옛사람의 집터 잡는 안목에 감탄과 신비감을 느끼게 된다. 옛사람이 집터를 잡는다는 건 당장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앞으로 몇백 년을 두고 후손이 번창할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었다.
언덕에서 내려다본 하회 마을은 낙동강에 떠 있는 한 송이의 커다란 연꽃처럼 보였다.
류씨가는 그 마을에서 류성룡 같은 명재상을 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때도 전화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대개 난리 때 전화를 피할 수 있는 고장이란 깊은 산중에 있기 마련이다. 특히 이 마을은 기름지고 넓은 들을 끼고 있는데, 그것도 이 마을이 근대적인 각박함에 물들지 않은 넉넉함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잃어버린 여행가방
설 연휴 동안 받아만 놓고 미처 읽지 못한 문예지를 뒤적이다가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의 산문 중에서 매우 이색적인 경매 이야기를 보고 혼자서 웃은 일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는 온갖 것을 다 경매에 부쳐서 잊혀진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보는가 하면 이미 죽은 사람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도 한다.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왕년의 스타의 연애편지나 착용하던 신발, 속옷 등속이 고가로 팔렸다는 해외토픽을 접하면 그걸 그렇게 비싸게 사서 어디다 쓰려지는 걸까 공연한 걱정이 되기도 하고, 생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면이 드러난 편지가 공개되는 걸 보면 세속의 호기심은 저승길까지 마다 않고 쫓아다니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투르니에가 쓴 경매는 그런 큰 이익이나 세인의 호기심을 겨냥한 게 아니라 지극히 사소하고 유쾌한, 서민적인 축제 같은 경매에 대해서이다.
매년 1월이면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 여행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은 여행가방을 공개적으로 경매에 부친다고 한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굉장한 귀중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행을 해본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본인이나 항공사의 실수로 가방이 그 주인과 동시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해도, 가방에 붙어 있는 작은 단서나 분실인의 신고만 가지고도 단시일 안에 주인을 찾아가게 돼 있다. 주인을 찾을 수 없는 가방은 그런 작은 단서도 없을뿐더러 잃어버린 주인의 애착과 성의까지 없다는 증거니까 귀중품이 들어 있으리라는 기대는 안 해도 된다. 그러나 마약이나 무기 혹은 시체 같은 게 들어 있을 가능성은 주인 있는 가방보다 높다고도 볼 수 있다. 하여 경매하기 전에 경찰이 미리 개봉하고 그런 위험물이 들어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다음 다시 밀봉을 한 후 무게만을 공개하고 경매에 부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자기 앞으로 낙찰이 되면 가방은 즉시 관중들 앞에서 개봉되어 그 내용물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낙찰자나 구경꾼이나 같이 낄낄대며 즐거워하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숨은 욕망은 국적이나 개인의 인격 차에 상관없이 공통된 것인가 보다.
그러나 내가 그 글을 주의 깊게 읽고 이리저리 생각의 가지치기를 하게 된 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나도 여행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한 해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이 년 전이다. 전두환 정권 초기에 문인을 십여 명씩 일행으로 묶어서 공짜로 해외여행을 시켜준 적이 있었다. 이 주일 정도의 비교적 긴 여행이었고, 유럽의 몇 나라를 돌고 귀국길에는 인도를 거쳐서 오게 돼 있었다. 처음 나가본 해외여행인 데다가 인도를 마지막으로 들른 나라였기 때문에 그동안 짐이 배로 불어나 허름한 보조가방을 둘이나 새로 사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것은 역시 집 떠나 있는 동안 갈아입을 옷이랑 내복 등속을 넣어간 큰 여행가방이었다.
보조가방 한 개와 내 짐 중에서 메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큰 가방을 인도 뉴델리 공항에서 다른 문인들의 짐과 함께 단체로 부쳤는데 김포공항에 내리니 내 큰 가방 하나만 빠져 있었다. 단체로 짐을 부칠 때 무게 문제로 그쪽 공항에서 트집잡는 소리를 듣긴 했어도 곧 해결됐고, 내 짐의 무게가 초과한 게 아니라 단체로 초과할 뻔한 거였으니 내 짐만 빠진 게 납득이 안 됐다. 설사 초과했다고 해도 초과분에 운임을 더 먹이면 될 것이지 짐 하나를 빼앗는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신고를 받은 우리나라 공항당국에서 그런 일은 없다고, 곧 돌아올 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 잃어버린 내 여행가방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타고 온 비행기는 타이항공이었다. 석 달인가 지난 후 타이항공으로부터 2백 달러 정도의 보상금을 받았다. 짐 한 개당 무게를 이십 킬로그램으로 치고 일 킬로그램당 십 달러씩 계산한 거였다. 항공사 약관을 보니 적법한 거였다. 물론 그 석 달 동안 여러 번 공항에 드나들어야 했다. 내가 신고한 베이지색 가방과 치수가 비슷한 가방만 생기면 공항에서 확인하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주인 잃은 가방의 보관창고 구경만 실컷 하고 내 가방은 찾지 못했다.
다행이 선물이 든 가방 두 개는 무사해서 처음 외국 나간 엄마를 기다린 가족들을 크게 실망시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큰 가방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다. 다양한 기후의 나라를 여행해야 했기 때문에 갈아입을 겉옷뿐 아니라 내복을 많이 준비해가지고 다니면서 한 번도 빨래를 하지 않았다. 만일 누가 그 가방을 연다면 더러운 속옷과 양말이 꾸역꾸역, 마치 죽은 짐승의 내장처럼 냄새를 풍기며 쏟아져나올 것이다. 루프트한자 항공이 아니었으니 경매에 부처 개봉하지는 않았겠지만 만일 겉모양만 보고 꽤 괜찮은 게 든 줄 알고 슬쩍 빼돌린 속 검은 사람이 개봉을 했다고 해도 창피하긴 마찬가지였다. 속 검은 사람 앞에서일수록 반듯한 내용물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안에는 때 묻은 속옷말고 더 창피한 것도 들어 있었다. 파리에 들렀을 때에 슈퍼에서 봉지에 든 인스턴트 커피를 잔뜩 사서는 옷 사이사이에 끼워넣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선 커피가 비싼 귀물이었다. 외국 갔다 오는 사람이 커피 한 봉지만 선물로 주어도 고맙고 반갑고 그랬기 때문에 나도 친지들에게 그걸 선물할 작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궁상맞은 선물인가. 나의 그 큰 여행가방 안에는 1980년대 내 나라의 궁핍과 나의 나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내 여행가방을 연 속 검은 사람의 기대와 호기심은 단박 실망과 경멸로 변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우연히 가방을 주웠든 혹은 정말로 속이 검었든 간에 내 가방을 열어보고 실망하고 분노하고 경멸했을 생각을 하며 오랫동안 심한 수치감으로 괴로워했다. 그 후에는 여행을 떠날 때 절대로 양말이나 속옷을 많이 가져가지 않고 그날그날 빨아서 입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음력 설까지 쇠었으니 이제 확실하게 한 살을 더 먹었다. 이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니 장수의 복은 충분히 누렸다고 생각한다. 재물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내가 쓰고 살던 집과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가방이 아닐까. 내가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다. 구식의 낡은 생활필수품 아니면 왜 이런 것들을 끼고 살았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어린 물건들이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썼지만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눈가림도 안 통할 테니 도리어 걱정이 안 된다. 걱정이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궁리할 때 생기는 법이다.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 숨겨준 여행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감동_바티칸 기행
외교통상부로부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조문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로마에 가달라는 전화를 받았을 때, 너무 놀라서 그랬는지 천성이 미련하여 그랬는지 그 일이 영광이라든가 은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나이와 건강이 장시간 비행 후 쉴 틈 없이 의식에 참가하는 고된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내 몸 걱정부터 앞섰다. 그래서 그 일정 동안에 피치 못할 약속이 있는 것처럼 꾸며대면서 사양하려고 했다. 약속이 있긴 있었지만 가족이 모여 성묘 가기로 한 약속을 그렇게 과장되게 말하는 내가 문득 싫어지면서, 네, 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교황님의 선종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깊은 슬픔과 함께 기쁨에 가까운 안도감을 맛보았다. 하느님이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시선과 미소가 저러하시리라 믿어지던, 절대적으로 선한 교황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리라는 게 슬펐지만, 하느님의 대리자도 결코 비켜가지 않은 인간적인 온갖 병고에 시달리시면서도 하느님의 대리자로서의 고된 임무를 다하시는 모습이 뵙기에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마지막까지 존엄성을 잃지 않고 선종하셨다는 속보에 접했을 때 마침내 그 힘든 짐을 내려놓으셨구나 싶어 크게 안도의 한숨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
조문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로마에 가기로 마음을 정하고 떠나기까지 준비할 건 검정 옷 한 벌이면 충분했지만 나에게 왜 이런 분에 넘치는 일이 생겼을까 감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일행 중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혹시 여행 중 동행들한테 근심이나 폐를 끼치는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나이를 의식한 건강 걱정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런저런 일로 떠나는 날까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냈다. 아침 9시 45분 비행기로 떠났는데 로마에 도착한 시간은 그날 저녁 8시경이었다. 일곱 시간의 시차가 있으니까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느라 지체한 시간까지 합치면 장장 열일곱 시간이나 걸린 셈이었다. 그런데도 그다지 피곤하지 않았다.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공식 조문사절단이라 그런 점도 있었겠지만, 세계 각국에서 조문객이 쇄도하는 공항치고는 입국 수속이 신속하고 매끄럽게 진행돼 한결 덜 피곤했다.
그날 밤은 성염 주 교황청 대사 관저에서 이탈리아식으로 저녁을 먹고 곧 호텔에 들었다. 내일로 박두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각국의 수뇌, 왕족, 귀빈, 조문사절단, 몇백 만의 일반 조문객 등으로 로마가 얼마나 만원일까라는 생각을 미리 하고 있었던 터라 아무리 공식 조문사절단이라 해도 천막에서 자도 그만이라는 각오까지 했었는데 뜻밖에 좋은 호텔에 들게 되어 꿈만 같았다. 그러나 시차와 근심 걱정, 긴장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승용차로 간다 해도 내일 아침 그 많은 인파를 뚫고 과연 제시간에 바티칸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내가 걱정한다고 달라질 리 없는 걱정은 안 하는 게 수라는 걸 알 만한 나이가 됐건만도 그 모양이었다.
호텔은 바티칸에서 어느 정도 거리에 있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지만 ‘행사차량’이라는 표시를 단 승용차는 이해찬 총리가 탄 차를 선두로 정시에 출발했다. 인도는 매우 붐비고 있었지만 행사차량 외의 승용차는 통행이 금지되고 있어 차도가 서울의 차도보다 훨씬 좁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는 잘 빠졌다. 대표단은 바티칸 대성당을 통해 귀빈석이 마련된 광장으로 나가게 돼 있었다. 성염 교황청 대사가 우리를 인도했다.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장엄한 대성당을 지나 광장으로 통하는 문 앞에는 아름답고도 경건한 주교 복장을 한 주교님들이 도열해 서서 조문객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고 인사를 했다. 우리에게는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라고 했다.
그 친근한 한마디에 문득 선종하신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셨을 때 유창한 우리말로 ‘벗이 먼 데서 찾아오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시작하신 그 따뜻하고 정겨운 인사 말씀이 생각나면서 마치 친정아버지 장례에 온 것처럼 내가 꼭 와야 할 데를 왔다는 안도감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슬픔을 느꼈다.
2천여 석의 귀빈석은 조문사절단이 아직 입장 중이라 뒤에 빈자리가 남아 있었지만, 그 넒은 바티칸 광장은 이미 입추의 여지 없이 꽉 차 있었다. 4백만의 조문객이 로마에 모였다 하니 광장까지 못 들어온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각국을 대표하는 왕이나 대통령, 수상 등의 자리는 앞자리에 따로 마련돼 있어 이해찬 총리는 거기 앉고 우리는 뒤의 빈자리에 자유롭게 앉았다. 귀빈석에는 나라의 크고 작음이나 인구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다섯 석 정도의 자리를 배정 받았노라고 성염 교황청 대사가 일러주었다. 10시에 장례식이 시작되기까지 잠시 기다리는 동안이 나에게는 한눈팔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귀빈석에는 1백여 나라에서 온 조문사절단이 자유롭게 뒤섞여 앉을 수 있도록 돼 있었다. 피부색이 다양할 뿐 아니라 복장으로 봐서 가톨릭과 별로 친하지 않을 것 같은, 또는 적대 관계인 것처럼 알려진 종교의 지도자 복장도 많이 눈에 띄었다. 어느 나라인지 가슴에 여러 개의 훈장이 찬란하게 빛나는 조문객도 있었다. 우리 뒤쪽에는 영국 블레어 총리 부처의 모습도 보였다. 각국 수뇌 중엔 부시 미국 대통령이 가장 나중에 들어왔다가 제일 먼저 나갔다고 하는데 내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초강대국으로부터 종교가 다른 작은 나라 지도자까지, 왕족?귀족으로부터 침낭을 메고 걸어온 젊은이들까지 한결같이 애도하는 그는 누구인가. 유럽에서는 가난한 약소국에 속했던 작은 나라 폴란드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추기경에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낯선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프리카 사람 차례가 될 수 있었던 전통을 깨고 핍박받는 약소국에서 처음으로 선출된 교황은 위대했다. 일찍이 이 지구상에는 없었던, 가히 세계장(葬)이라 부를 만한 고별의식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교황청의 대외정책의 기조는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보편적 평화 추구라고 알려져 있다. 일찍이 교황 비오 12세는 교황청의 그런 이상을 이렇게 요약해 말한 바 있다.
“가장 고매하며 커다란 가치의 상징인 소국 바티칸의 전쟁 능력은 무에 가깝다. 그러나 평화에 대한 능력은 무한으로 크다.”
이렇게 짜릿하도록 아름답고 거룩한 이상에 몸 바친 게 바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일생이었다. 어찌 경배하지 않겠는가. 교황을 애도하는 몇백 만 조문객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비통하기만 한 것도, 경건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미사곡은 우리의 영혼을 속세에서 그가 남긴 업적을 낭독하는 동안 광장에서 터져나온 십여 차례의 박수와 환호성, 그때마다 물결치던 폴란드 국기를 비롯한 각국의 깃발, 그건 애도라기보다는 환호에 가까웠다. 슬픔과 환희가 이렇게도 잘 어울릴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해본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이른 그뿐이 아니었다. 우리의 김수환 추기경 님을 비롯해서 각국의 추기경님들이 참석한 추기경님 석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톨릭이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보수적이고 늙은 종교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는데, 교황 님에 대한 애도와 사랑과 긍지를 박수와 깃발을 통해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조문객들은 다들 폭발할 듯이 젊고 발랄해서 이런 젊은 피가 가톨릭을 끊임없이 쇄신케 하여 영원히 늙지 않는 종교로 만들리라는 뿌듯한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교황의 소박한 관을 지하에 안치하기 위해 베드로성당 죽음의 문을 통과할 때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나도 덩달아서 크게 박수를 쳤다. 그때 가슴속 저 밑바닥을 화끈하게 한 느낌은 슬픔도 기쁨도 아닌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감동이었다. 이 세기의 장례식은 보나마나 CNN으로 전 세계에 중계될 텐데 앉아서 편히 구경하지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어렵사리 걸어서까지 거기 오며 또는 오고 싶어하는가. 전통이 유구한 장엄한 종교의식에 직접 몸담아보고 싶은 인간 심리 중에는,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신분의 귀천, 인종이나 종족, 피부색이나 문화의 다름과는 상관없이 공통으로 내재하는 존재에 대한 존엄성을 확인 받고 싶은 것도 있는 게 아닐까.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 걸 크나큰 은총으로 알고 감사하는 마을을 오래도록 간직하겠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_인도네시아 방문기
지난달 하순경에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장 해일 피해가 엄청났던 반다아체 지역에 다녀왔다. 거기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명색이 유니세프 친선대사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가고 싶지 않았다. 젊어서 못 볼 것도 많이 봤으니까 남아 있는 날은 좋은 것만 보며 살고 싶다고 해도 과히 얌체짓은 안 되려니 했다. 내키지 않는데도 딱 부러지게 거절을 못한 것은 내가 앞으로 좋은 일을 하면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싶은 늙은이 특유의 엄살이 객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반다아체 주 정부 청사와 각종 관공서와 주택가가 있던 한 도시가 완전히 괴멸한 무인지경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거기 간 걸 후회했다. 훗날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면 내가 그곳에 뭐 하러 있었겠는가. 받아본 자료는 더 무서웠다. 방문한 날이 바로 해일이 있던 날로부터 한 달 되는 26일이었는데, 그날까지 그 지역에서만 행방불명을 포함한 인명 피해가 20만 명이 넘었다.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5천여 명의 희생자를 낸 9·11 생각이 났다. 매일매일 그만큼 죽는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한가.
20미터가 넘는 바다의 벽이 서너 번을 들어왔다 나갔다는 그 지역은 내가 보기에도 살아 있는 생명이 아직까지 묻혀 있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 그런지 폐허를 뒤지고 다니는 사람도 울부짖음도 없이 다만 괴괴하고 허허로웠다. 없어진 도시보다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떡하고 있을까, 그게 더 걱정이 되었다. 사람 나고 도시 났지 도시 나고 사람 난 건 아닐 테니까. 자식을 땅에 묻고도 그날 밥을 먹을 수 있는 독한 게 인간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부모와 자식이 사라지고 믿고 의지하던 친척이나 이웃이 온데간데없어지고 살아오면서 낯익혀온 모든 것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과연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경험해보지 않았어도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건 왜 인간이냐고 묻는 것과 같다.
그날 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번성했던 도시가 순식간에 사라진 자리는 세월이 어루만지고 지나간 폐허하고는 또 다르다. 자연도 그가 저지른 일을 보고 너무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떻게 물이 콘크리트와 철근을 그렇게 산산이 부술 수 있었을까. 믿기지 않는 마음은 내가 견고하다고 믿어온, 고국에 두고 온 나의 삶의 터전은 과연 안전한가, 거기 아직도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하는 공포감으로 이어졌다.
공포와 불안과 숙소의 무더위 때문에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루는데 새벽녘에 침대가 가볍게 네댓 번 흔들렸다. 말로만 듣던 여진이었다. 겁이 났지만 한 지붕 밑에 안성기(영화배우, 유니세프 친선대사)처럼 착한 사람이 같이 자고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구, 하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자연재해가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려서 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토록 확실히 본 뒤건만 착한 사람은 가까이만 있어도 그렇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우리도 재해를 당한 그 많은 이재민 특히 어린이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착한 나라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혹은 훗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퍼주는 나라말고 우리 각자의 착하고 따뜻한 마음을 참지 말고 표현해 살아남은 이들에게 힘이 되고 특히 어린이들에게 착한 나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다음날, 유니세프가 구호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현장을 방문했다. 그 지역은 주 정부의 기능 자체가 마비되어 긴급구호뿐 아니라 행정적인 일도 겸하고 있었다. 인명구조 다음으로 급한 일을 위생과 방역, 어린이의 건강?교육, 가족찾기 등에 두고 맹활약하는 유니세프와, 세계 도처에서 달려와서 그런 일에 발벗고 나선 우리의 젊은 의사들, 자원봉사자들을 보면서 우리나가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됐다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같은 날 난민캠프에서 막 태어난 신생아의 얼굴에서 천사의 웃음(배냇짓)을 보고 나도 처음으로 활짝 웃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건 놀랍고 아름다운 일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