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주 한 잔 합시다

   
유용주
ǻ
큰나
   
9000
2005�� 10��



■ 책 소개
MBC 〈느낌표〉 작가 유용주가 『그러나나는 살아가리라』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산문집. 밑바닥 삶을 부유하며 치열하게 살아온 저자가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제1부 "오래된 사랑" 외 3편, 17일간의 승선 일기로 구성된 제2부 "아름다운 것은 독한 벱이여", 제3부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제4부 "봄은 왔건만" 외 9편으로 총 16편의 산문을 만날 수 있다. 삶의 구석구석을 건강한 문체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낸책.

 


■ 저자 유용주 
1960년 전라북도 장수에서태어났다.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서 「목수」 외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제15회 신동엽창작기금을받았다. 시집으로 『가장 가벼운 짐』(1993), 『크나큰 침묵』(1996)이 있고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2000)와 자전적성장소설 『마린을 찾아서』(2001)가 있다.


■차례
제1부
오래된 사랑
쓰다듬는 나무가 세상을 키운다
아니 갈 수 없는길
실핏줄로 짠 필사의 그물


제2부
아름다운 것은 독한 벱이여


제3부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


제4부
봄은 왔건만
어머니 생각
남도여행
나쁜 사람들
누구를 위하여 목욕탕의 물이끼를 벗기나
나의 시 나의 삶
밑바닥으로 들어간 시
물 주름에 비친 도포한 자락
찰스 부코우스키 아저씨께
바닥에서 건져올린 소설


작가의 말




쏘주 한 잔 합시다


오래된 사랑
버스안은 한산했다. 도청 소재지에서 무진읍까지 가는 직행버스는 표정이 없었다. 나는 맨 뒤에서 앞쪽으로 세 번째 좌석 창쪽에 앉았다. 천지는 바야흐로 봄이 무르익어 여름으로 터져 나가고 있었다. 쓸쓸했다. 스물두 해를 꼬박 살고,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군대에 끌려가게 생겼으니, 군대란 얼마나 무식하고 살벌한 조직인가. 작은 형은 사고를 쳐 영창까지 살고 나오지 않았던가.


시 외곽을 벗어나자 앞쪽에서부터 검표가 시작되었다. 짙은 바다색 제복을 입은 안내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멀리 다가오는 운악산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흰 배를 뒤집어 거대한 초록바다를 만드는 숲, 그 숲 속에 얼마나 많은 나무 치어들어 살고 있을까. 해발 천 고지가 넘는 장엄한 산이었다. 저 산을 넘으면 사평읍이 나오고 거기에서 또 저만한 비행기재를 넘으면 부진읍에 다다를 것이다. 해가 남아 있을 때 집에 들어가기 싫어 일부러 도청 소재지에서 머뭇거렸지만 슬그머니 걱정이 앞선다. 읍내에서 20여 리나 들어간 골짜기, 금촌까지 가는 완행버스는 틀림없이 끊어졌을 터였다. 쳇, 될대로 되라지, 하고많은 시간 슬슬 걸어가지 뭐. 하긴 그랬다.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에도 토요일 오후가 되면 차비 15월을 아낀다고 선배들하고 걸어다닌 적이 많았으니까. 제법 으슥한 수풀 길에서 선배들 강압에 못 이겨 피우다나 콜록대고 눈물까지 흘리던 첫 담배에 대한 기억이 아련히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손님, 표 주세요.”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나는 만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창 밖을 보며 표를 내밀었다. 안내양은 반으로 잘린 표 중에 한쪽을 내 손에 넘겨주고 돌아섰다. 돌아서서 앞쪽으로 서너 걸음 가다 움찔, 나를 갸웃거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출입구 쪽에 서서 표를 정리한다. 왜 그랬을까, 새삼스레 뒷모습을 보니 키가 무척 크다. 구두를 신었는지는 모르지만 버스 천장에 닿을 듯도 싶다. 김생머리가 허리 근처까지 내려오는 보기 드문 몸매다. 침을 꿀꺽 삼켰다.


내 삶에 무슨 여자 복이 있다고, 군대 가기 전에 딱지나 떼고 가라고 공장 동료가 서울역 앞에서 창녀를 한 번 붙여준 게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벌벌 떨면서도 마약처럼 끊지 못해 식은땀을 흘리면 용을 쓰던 수음이, 여자에 대한 관심의 전부였다. 욕망이 크면 클수록 현실은 허무했다. 무엇보다 늘 그놈의 돈이 없었다.


버스가 굽이굽이, 아흔아홉 굽이라고 유명짜한 운악산 들머리에 마악 들어섰을 때는, 산 중턱에 해 그림자가 걸릴 무렵이었다. 해 그림자는 곡선으로 꿈틀대는 산골짜기에서도 곧은 수평으로 선명한 색깔의 대비를 이루었다. 곧 어두워지리라. 어두워지면 별이 뜨리라. 별이 뜨면 산짐승이 울고, 신작로를 따라 타박타박한 한 사내가 걷고 있으리라. 어서어서 나이가 들어 죽어야 할 텐테, 숨은 붙어 있고 세월은 늘 완행이었다.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닐 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저녁에 잠이 들면 다시는 깨어나지 말기를 기도하고 기도한 날들이 또한 얼마나 많았는가.


돌연, 앞만 바라보고 서 있던 안내양이 또각또각 걸어오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승객용 표를 꺼내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뭐가 잘못됐었나. 약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안내양을 올려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 혹시, 무진초등학교 나오지 않았나요?” 갸름한 얼굴에 피부가 참 곱다.


“아, 예….”


“그러면, 장안리에 사는 선자라고 아세요?” 서글서글한 눈썹 밑에 자수정 같은 눈이 반짝 빛난다.


“아, 예…, 제 동창인데요.”


“어머, 어머, 내 생각이 맞았네. 오빠, 나, 선자 동생 선숙이에요. 오빠 육한년 때 나, 삼학년이었는데, 기억 안 나지요? 나는 오빠 기억 다 나는데. 조회 설 때…, 음, 운동회 연습할 때도 맨 앞에서 구령을 넣었잖아.”


그랬나? 선자는 기억이 난다. 장안리뿐만 아니라 금촌, 송계를 포함한 삼동에서 선자 따라갈 억척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꺽정이’였으니 말이다. 얼마나 힘이 센지 말만한 머슴애들도 선자에겐 꼼짝 못했으니까. 언젠가 북치재에서 집채만한 나무를 이고 내려오는 선자를 본 적이 있었다. 거짓말 하나 보태고 머슴들이 지게로 져야 할 만큼이나 나뭇짐이 커 보였다. 그런 선자에게 이런 동생이 있었다니.


“근데……무슨일로…….”


“음, 병무청에 다녀오느라고.”


나는 짤막하게 이유를 말했다. 한여름에 입대하라는 현역 입영 통지서가 나왔는데, 그냥 육군 보병으로 끌려가기 싫어, 특수부대 시험을 봤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합격을 해서 가을에 입대하는데, 합격증을 가지고 병무청에 가서 현역 입영을 연기하고 오는 길이라고.


“그렇구나. 난, 오빠가 공부 잘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공부는…. 무슨….”


나는 어디 의자 속으로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전체 학생수 230명이 조금 넘는 시골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면 얼마나 했을까. 공부보다는 일하고 맞은 기억밖에 없다. 학교림 조성사업, 퇴비증산?상전 비배, 코스모스 꽃길 조성, 애향단 단원으로 마을 청소하기, 솔방울 따기, 장작 가져오기, 화장실 똥푸기에다 선생님들 술 심부름까지, 되돌아보니 학교라기보다는 농장에 고용된 머슴 같은 시절이었다.


“오빠, 나 오늘 막탕이거든. 읍내 가면 다방에 가서 조금만 기다려, 저녁 안 먹었지?”


미처 대답할 사이도 없이 고개를 잔뜩 숙이고 ‘나, 오늘 삥땅 많이 쳤거든’ 속삭이며 돌아서는 게 아닌가. 아찔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에는 뭐라고 꼬집을 수 없는 좋은 냄새가 났다. 그것은 하지감자 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서 품앗이로 산풀을 벨 때 산 속에서 나는 냄새였다. 땀범벅이 되어 그 냄새를 맡으면 숨이 턱턱 막혀 아랫도리에 힘이 빠진 적이 많았지. 그러고 보니 옆모습이나 목선이 선자를 닮기도 닮은 것 같다.


버스가 읍내에 도착했을 때에는 어스름이 깔리고 마악 집집마다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 불을 감싸듯 안개가 스멀스멀 몰려왔다. 이 고장의 안개는 유명했다. 고지대인데다 분지 형태여서 사시사철 안개가 끼었다. 그렇다고 끈적끈적하거나 불쾌한 느낌을 주는 안개는 아니었다. 꼭 무슨 잘 마른 풀에 불을 붙였을 때 나오는, 습기가 죄 빠져버린 연기 같은 안개, 구수하고 들큰한 나무 냄새가 나는 그런 안개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개 끝에는 늘 촉촉한 물방울 한두 개쯤은 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 자궁을 빠져나온 이래로 우리 모두 슬플 때나 기쁠 때 달고 다니는 눈물방울 비슷한 거였다.


“오빠, 저기, 저기 보이는 다방에 들어가 있어. 금방 갈게.”


종점에서는 나 이외에 두 사람이 더 내렸다. 다방은 차부(아, 그때는 터미널을 차부라고 불렀다) 건너편 이층에 있었다. 나는 차부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시켰다. 껌껌한 주차장에는 직행버스 두 대와 완행버스 세대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선숙이는 물통과 봉걸레를 들고 나타나더니 버스 앞 유리창에 물을 쫘악 뿌리고 봉걸레로 씩씩하게 문질러댔다. 키가 커서 그런지 별로 힘들지 않았다. 가루비누가 채 흘러내리기 전에 새 물을 퍼와서 뿌리기를 몇 번,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펄펄 나는 듯 했다. 나는 그저 봉걸레질할 때 제목 속으로 드러난 하얀 속옷을 생각했다. 마치 오래 전에 본 듯한 풍경이었다. 불현듯 목이 메어왔다. 학교 후배가 아니라 친누나 같은, 사촌 누이 같은 감정이 싸아하니 훑고 지나갔다.


“오래 기다렸지? 나가자.”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타난 선숙이가 팔을 끌었다.


“어떻게 나왔어?”


“으음, 종점에는 대부분 숙소가 있어. 근데, 오늘같이 고향 쪽으로 왔을 때는 기사한테 얘기해. 집에 가서 자고 오겠다고. 대부분 다 허락해. 깐깐하게 굴면 이로울 게 없거든. 돈은 내가 만지니까. 그건 그렇고 빨리 나가자. 커피 값? 내가 계산했어. 오빠는 돈 없잖아.”


슬쩍 한쪽 눈을 감았다 뜬다.


“우리, 오랜만에 고기 좀 먹자. 나 돈 많거든.”


선숙이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한 주먹 꺼내 보였다. ‘삥땅 친 거?’ 하고 물어보려다 지그시 눌러 막았다. 우리는 다정한 오누이처럼, 단칸방부터 시작한 신혼부부처럼 저녁을 먹었다. 삼겹살에는 소주가 최고지 하면서 연신 상추쌈을 만들어 입 속에 넣어주는 선숙이는 말 그대로 하느님이었다. 행복이라는 말에 그림이 있다면 바로 이런 풍경이 아닐까 떠올려보았다. 고백하자면 스물두 해 살아오면서 삼겹살 먹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공장에서 일할 때, 사장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안주가 남아서 가져왔다고 호일에 싸온 돼지갈비가 그나마 맡아본 고기에 관한 첫 추억이었으니까.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오자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아주 가늘게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소주만큼이나 젖어 있었다.


“오빠, 우리 어디 갈까?”


비에 젖어, 안개에 젖어 더없이 깊어진 눈망울이 물었다. 막차 마저 끊긴 읍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든 소리란 소리는 안개 바다가 다 들이마신 듯, 어둠 속에서 오직 우리 둘뿐이였다. 나는 깊이깊이 가라앉고 싶었다. 급히 들이마신 소주 탓이 컸다.


“좀 걷지, 뭐.”


“그럴까. 술도 깰 겸.”


선숙이는 스스럼없이 팔짱을 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피가 역류하는 내 몸을 들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북동 파출소에서 오른쪽으로 꺽어들자 우체국과 등기소와 산림조합이 나왔다. 거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읍내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가 나오고, 초등학교 가기 직전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교육청과 그리운 중?고등학교가 나온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따지고 보면 일 년밖에 다니지 못한 중학교에 무슨 애정이 있다고, 하지만 그 골목, 그 운동장, 그 교실, 소풍 갔을 때와 운동회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 겨울의 토끼 사냥, 강 하류를 따라 달리던 마라톤 대회, 누에를 키우기 위해 학교 농장에서 뽕을 따던 추억들…. 고등학교 형들은 각반을 차고 목검으로 집총 훈련을 받기도 했다. 교련 담당 선생은 현역 육군 중위였다.


“무슨 말 좀 해봐, 화난 사람처럼. 오빠, 노래 좀 불러줘. 오빠 목소리 끝내주잖아. 학교 다닐 때도 좋았는데….”


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행히 안개비와 어둠이 감싸주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고, 병원비에 논과 밭이 팔리고 학교를 그만두고, 빵 공장으로, 구두닦이, 신문 배달, 중국집 배달부로, 야학에서 검정고시 공부할 때 친구에게 배운 팝송을 불렀다. 발음은 촌스러웠지만 정성을 다해 불렀다. 〈The saddest thing〉〈Wednesday child〉〈God father〉 주제곡, 〈Love story〉를 연거푸 불렀다. 선숙이한테 들려주기보다는 안개에 위해, 어둠에 취해, 내가 내 노래에 취해 거듭 불렀다. 나는 내친김에 시 낭송도 했다. 야학에서 친한 친구 영석이가 단골로 암송하던 윤동주의 〈서시〉와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를 꼭 영석이가 하듯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 부르듯 낭송했다. 마음 같아선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몸이라도 팔 수 있다면 온 세상을 다 사서 안겨주고 싶었다.


선숙이가 팔짱을 풀고 내 손을 잡았다. 힘든 일을 하는데도 손은 부드러웠다. 미꾸라지를 맨손에 잡는 기분이었다. 미꾸라지는 꼭 잡으면 오히려 빠져나간다. 달걀 만지듯 섬세하게 다루어야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못하게 있는 힘껏 틀어쥐었다. 노래와 시 낭송을 듣는 동안 선숙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가끔씩 팔에 부딪치는 젖가슴 감촉 때문에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또다시 온몸의 피가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선숙이는 후배이기 전에 펄펄 살아 숨쉬는 성숙한 여자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숙이 고개가 살며시 내 어깨에 닫는 순간, 화들짝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우리를 비추었다. 깜짝 놀란 선숙이가 내 손을 골목 안으로 잡아끌더니 번개같이 입을 맞춘다. 아까 맡았던 산풀 냄새가 났다. 곧이어 물고기보다 미끄러운 혀가 쑤욱 들어왔다. 온몸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 우리는 상처 난 짐승처럼 오래오래 서로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그 다음부터는 말이 필요 없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손을 잡고 뛰었는지, 어떤 가게에서 맥주를 샀는지, 얼마나 급하게 무진여인숙에 뛰어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다만, 밤새도록 양철지붕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비에 젖은 머리칼을 말리지도 않고 우리는 그대로 한 몸이 되었다. 나이로는 3년 후배지만 몸으로 봤을 때 선숙이는 분명 나보다 훨씬 무르익어 노련하기까지 했다. 몇 번을 선숙이는 분명 나보다 휠씬 무르익어 노련하기까지 했다. 몇 번을 까무라쳤는지 모른다. 선숙이 몸에서는 싸리꽃 향기가 났다. 찔레꽃 향기가 났다. 물창포 내음이 났다. 산나리꽃 냄새가 났다. 오랜 가뭄 끝에 갑자기 소나기 내릴 때 맡아본 흙비린내가 났다. 물비린내가 났다. 안개 냄새가 났다.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깊은 바닷속, 바다 냄새가 났다.


나는 바닷속으로 침몰하지 않으려 눈을 부릅떴지만 매번 질 수 밖에 없었다. 가라앉으면 건져올리고, 가라앉으면 건져올리고, 숨을 가다듬기도 전에 또 엄청난 속력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맨땅이다. 낙하산을 펴야 하는데, 아래로 떨어지면 온 몸이 산산조각 날 텐데, 떨어지면 받아주고, 떨어지면 안아주면서 선숙이는 밤새도록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름모꼴 창문으로 훤히 날이 샌 뒤에야 까무룩히 나는 가라앉았다. 죽음보다 깊은 잠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새 비는 그치고 날은 환장할 만큼 밝았다. 타는 듯한 갈증에 일어서다 그대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양 무릎 안쪽 생살이 까져 맑은 이슬이 맺혔다. 뼛속까지 아려왔다. 나는 엉거주춤 기어 양은 물주전자를 들고 끝까지 들이마셨다. 아아, 저 햇빛이 나를 살렸구나. 저, 미루나무 잎사귀가 나를 살렸구나. 장안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소리가 나를 거듭 태어나게 했구나. 간밤에 나는 하느님 왼쪽 옆구리를 만졌다. 하느님 머리카락 냄새를 원 없이 맡았구나. 아니, 바람이었는지도 몰라. 바람의 뼈를 밤새 갉아먹었는지도 몰라. 이슬을 털고 정신을 차려보니 윗목에 작은 메모지와 돈 삼천 원이 수줍게 놓여 있었다.


“오빠, 나, 오늘 첫탕이거든. 먼저 갈게.”


‘첫탕’과 먼저 갈게‘ 글자 사이로 투둑 코피가 떨어졌다.


실핏줄로 짠 필사의 그물
삶은 이렇게 큰 현실이다. 시집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교정본을 백여 번 반복해서 읽다. 소금기둥의 여름과 벌거벗은 겨울을 건너온 남자에게 가을은 건너온 남자에게 가을은 너무 가볍다. 낙엽 하나만으로도 먹고살 만하구나.


“나는 여전히 나무다, 라고 목청껏 외치”는 시인이 있다. 성성한 나무에는 벌레가 잘 끼지 않는다. 그늘에서 더 밝게 트이는 눈, 지친 나무에 무수히 매달려 있는 열매들, 숨 넘어가기 직전 마지막 안간힘으로 뿌려놓은 새끼들, 벌레는 밑동부터 파먹기 시작한다.


저 캄캄한 땅속에서 몇 억 광년을 썩고 참고 출렁이면서 고여있던 나무들의 내장이 어떤 보일러공의 섬세한 용접 불빛을 쫓아, 그 관 속으로 스며들어 지상에 최초로 나왔을 때 맨 처음 본 것도 눈이 멀 것 같은 강력한 불꽃이었다. 시인은 전신으로 뛰어든다. 거듭 죽어 거듭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리라. 소신 공양이다. 나를 태워 너희들이 따스해지고, 나를 두드려 너희들이 산다면, 내 기꺼이 죽어주마. 녹아주마. “때가 되면 육신을 들어 네게 바치겠다.”


여기 불을 피워 삶을 녹이는 사람이 있다. 삶은 그 자체로 놓아두면 도대체 뻣뻣하고 딱딱해서 쓸모가 없을뿐더러 깎을 수도 다듬을 수도 휠 수도 없으며 볶거나 데치거나 삶거나 구워 먹을 수가 없는 아주 지독한 놈이다. 가만 놔두면 금방 곰팡이가 슬고 쉬어 빠져서 그냥 내다버릴 수밖에 없는 게 삶이라는 놈이어서, 요놈은 그저 아침저녁으로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린다. 커다란 도가니에 넣고 가스와 산소 불대를 최고조에 맞추어 불을 뿜으면 펄쩍 정신을 차리면서 몸을 뒤틀어 길길이 뛰다가 옆구리부터 녹아 살굿빛 액체 상태로 끓기 시작한다. 촛농처럼 부드러워진다. 적당히 붕사를 넣어 소독을 한 다음 틀에 부으면 엿가락처럼 다루기 좋아진다. 요놈을 평모루에다 올려놓고 망치로 조곤조곤 두들겨 대면 반지는 반지 비슷하게 귀걸이는 귀걸이 형태로 목걸이는 목걸이 모양대로 휘어지고 구부러지면서 서서히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한다. 삶은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질겨진다. 촘촘해진다. 깎으면 깍을수록 빛이 난다. 쪼면 쫄수록 엄정해진다. 닦으면 닦을수록 광채가 난다.


불을 피우는 사람이다. 가장의 책임에 대하여 끊임없이 돌아보고 자기 암시를 거듭하는 것이다. 거의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하긴 부인이나 자식들에게 기대어 피 빨아먹는 시인이 있다면, 그가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쓴다고 해도 허공에다 집 짓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삶은 문학보다 투철해야 하고 엄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좋은 삶에서 좋은 문학이 나온다. 투철하고 엄격한 삶은 자연에게서 배운 듯하다.


군불을 피운다. 태우면 고분고분해진다. 성깔 있는 거친 것들도 얌전해진다. 분노를 은근하게 굽는다. 불을 안으로 삼키고 구들장을 보라. 너희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위하여, 피둥피둥 살이 오른 너희들을 마약같이 부드럽게 죽이기 위하여, 불은 불 같은 생명을 무수하게 죽인다. 구족을 멸하여라. 하늘은 연기를 삼키고 굴뚝은 구들을 삼키고 구들은 불을 삼켜 독을 만든다. 극약처방이다. 따뜻하다고 방심하지 마라.


언제였더라?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대전에 사는 친구가 달필로 휘저은 A4용지 한 장 분량 편지와 빨간 겉표지가 유난히 촌스럽던 시집을 부쳐온 것은. 그편지 속에는 아파트 보일러실에서 일을 하는 한 평범한 사람이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으며 작품이 깜짝 놀랄 만하게 좋다고 한 번 읽어보라는 꽤나 들뜬 마음이 담겨있었다.


우리나라는 여러 수난을 겪어왔으면서도 겪은 만큼 축복 또한 많이 받아가는 곳마다 시인이 넘쳐나고 도처에 시집이 쌓여 있어, 버려진 시집위로 파리 떼들이 똥을 싸고 알을 슬어 썩은 침출수가 새로운 첨단공법으로도 정화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른 그즈음, 나는 시를 읽는 고통스러움에 넌덜머리가 나 있었다. 하물며 이름도 처음 듣는, 지방에 사는 그렇고 그런 시인으로 미리 짐작하여 어디 방구석으로 던져버리지 않았나 모르겠다. 좁은 땅에서, 그것도 문단이라고, 작품보다는 뿌리깊은 도제 의식과 파벌로 갈라져, 학연과 지연과 혈연과 술상 밑에서 맺은 끈끈한 인연으로 이리 쓸리고 저리 휩쓸리는 것을 경험한 눈으로 만사가 귀찮기도 했고, 우선 그 한 귀퉁이에 들지 못해 안달하는 내 자신이 싫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글 쓰는 일을 집어치우고 가능한 한 몸으로 부딪혀 먹고 살기를 바라던 시절이었다. 막노동과 우유 배달을 거쳐 술집을 하려다 실패했고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먹었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아 지친 마음으로 술을 벗삼아 취생몽사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주야장천 술자리 끝에 해장국 집도 문을 열지 않은 새벽에, 목은 타고 속은 쓰리고 이마는 불가마로 지끈거릴 때 거듭 비운 찬물 주전자 옆에 며칠 전 던져버린 시집을 무심코 뒤적거렸나 보다.


이면우의 시를 읽어보면 한 가장이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 이상 그 가족을 위해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다 나온다.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소박하게 자신의 몸뚱이를 바쳐 소신 공양해온 가장의 절절한 삶이, 복부비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천 년대의 약하디 약한 남자들을 등 서늘히 반성케 한다. 엄정한 삶에서 엄정한 작품이 나온다. 이면우의 이번 시집은 몸으로 사는 사내의 약진으로 가득하다. 몸으로 시를 쓰는 사내의 들큰한 땀 냄새로 가득하다. 본능에 가깝게 냉철한 삶에서 우러나온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뒤돌아볼 수 있다.


삼백예순다섯 날을 통틀어 강수량이 50밀리미터도 안 되는 사막에서 오래 견뎌온 동물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으려고, 주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무언가 나름대로 독 하나쯤은 몸 안에 숨겨두기 마련인데, 이면우 시인의 새 시집을 수십 번 반복해서 읽어보아도 잇똥 냄새나는 침 한 방울 찾을 수가 없었다. 왜 그럴까? 어디를 뒤적여봐도 깔끔하고 풍성하고 고맙고 감사하다. 그 흔한 모래 폭풍도 없고 가시로 무장한 덤불도 업고 전갈이나 도마뱀이나 신기루도 보이지 않는다. 풍성하다. 왜 그럴까?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아담한 체구에 음식을 먹을 때 무조건 곱빼기를 시키는 이면우 시인은 개성이 퍽 강한 사람인데, 지금은 널리 사용하고 있는 김치냉장고의 원조 격인 쉬지 않는 김장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특허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새삼 다시 이야기할 거리도 못되고, 가족의 안위를 위하여 자신이 잘못되면 안 되니까 대중교통 수단 중에서도 그 중 덩치 큰 것을 이용하고 아예 자전거를 타던지 걸어다니는 편을 택하는 성격 이외에도, 외부에 무슨 행사가 있어 바깥나들이라도 할라치면 꼭 칫솔을 챙겨들고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무엇을 먹으면 기어코 이를 닦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면서, 절대로 오입을 하지 않으며, 잘 꺼내지 않는 지갑 속에 지폐 대신 부인이 정성스레 적어준 참을 인((忍)자 석자를 가슴 깊이 넣고 다닌다. 최근에 휴대폰을 구입한 일 외엔, 그의 가벼운 지갑 속에는 수표도 없고, 흔한 카드도 없고 고액 지폐도 별로 안보이고 참을 인자를 세 번 적은 하얀 종이가 들어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 지갑을 열면 돈보다는 먼저 참을 인 자가 보인다. 돈을 참는 것이다. 여자를 참는 것이다. 술을 참는 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십 년이 넘게 술 담배를 끊고 그는 무엇을 했을까? 작은 집을 샀고, 아이를 키워왔으며 약간의 저축과 적선, 무엇보다도 시를 썼다. “낡아가며 새로워”졌다. 그게 무어든 이면우 앞에 가면 기어이 긍정의 큰 우물로 바뀌고 만다. “무릎 아프다는 말, 일터에서 입 밖에 내지 않고 견뎠다"할 정도로 그는 독한 사람이다. 사실 참을 인 자 이 세 글자가 이면우 시인의 모든  삶을 대신한다. 그의 삶이 그랬다. 옛날 우리 어머니께서도 늘 그러셨다. 참을 인 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말이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두말 할 것 없이 가족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나 1960년대 보릿고개를 넘어 1970년대의 산업화와 1980년대의 군사독재를 거쳐 1990년대의 가짜 고도성장을 고스란히 몸으로 감내하면서 학력 별무의 인생으로 그가 참아냈던 것은 무엇일까? 참을 수 없는 세월을 보내면서 참을 수밖에 없는 그의 내면은 얼마나 끓어올랐을까? 왜 그는 화를 낼 줄 모르나? 왜 분노를 밖으로 드러낼 줄은 모르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는 그냥 도처에 감시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왜 그럴까? 삶의 대긍정에 이르기까지 그가 겪어냈을 신산초고의 인생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도 남겠는데, 도무지 욕 한마디 할 줄을 모른다. 무엇 때문에 칼날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세 번 참아야 하는 것이며, 수염이 마디마디 끊어지는 고통을 세 번 이상 참아야 하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시시때때로 어려울 것이다. 흐트러진 삶에서는 엄정한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진지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하다. 쫀쫀하다고 비난하지 마라. 누군 우쭐대고 싶은 마음 없어 한 턱 쓰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무어든 한 움큼이라도 쥐고 들어가지 못하면 아내와 자식이 굶어죽는 처절한 생활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3,000원짜리 점심값이 부담이 되어 일터에서 제법 떨어진 대전시청 구내식당까지 가서 1,800원짜리 밥을 먹고 오는 쉰 넘은 가장의 마음을 요즈음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점심을 일부러 늦게 먹는다. 일찍 먹으면 저녁 퇴근할 때 버스 속에서부터 배가 고파오기 때문이다. 이게 2001년 연봉 1,380만 원짜리 계약직 보일러공의 현실이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내방으로 통하는 보일러 관을 막았다. 전화도 끊고 신문도 끊고 편지는 받기만 하고 답장은 피하고 우유도 끊고 일 년에 한번씩 올리던 세배도 걸렸더니 북향인 내방은 봄이 와도 냉골이다. 다 틀어막아도 마지막 끈인 가족은 버릴 수 없어 아내와 아이가 자는 안방은 열어줄 수밖에. 텅텅 툭툭 자그락자그락 둥근 관 속에서 다툼이 한창이다. 고여 있던 찬물 밀어내고 따뜻한 물 들어오니 밥상 위의 전등도 새벽까지 환하다. 밤참을 먹으려고 부엌문을 열자 문 밖이 세상 밖이다. 거실은 누가 덥히나. 저 문을 나서면 복도가 있고 마당이 있고 누군가 새벽 거리를 쓸고 짐을 나르고 봄을 퍼올리고 씨뿌리고 거름을 낼 것인데, 문 열고 손을 잡고 온기를 나누고 있을 텐데. 환하게 불 밝히고 첫 손님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나를 아낀다는 게 나를 버리는 일이었구나. 내 가족을 돌본다는 일이 더 많은 이웃을 떠나보냈구나. 열지 않으면 돌지 않고 않으면 고여 죽는다. 다 함께 죽는다. “누구라도 자기 안에 생의 북쪽을 지니고 간다.”


마흔, 귀신도 무섭지 않은 나이가 된 것이다. 그렇게 많이 포기하고 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나이다. 피도 삭고 뼈도 삭고 정신도 삭아 자꾸 무너지는 나이다.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나이다. 이 문장을 쓰는데 꼬박 사십 년이 넘게 걸렸다.


내 아니 마흔이 넘어서도 술, 담배를 끊지 못한다. 풍경이 운다. 바람이 불자 흔들리면서 운다. 깨어 있으라고, 자면서도 깨어 있으라고 흔드는 게 아니라, 마음속 바람이 일렁이기 시작하면, 엉뚱한 곳에서 바람이 꿈틀대면 각성하라고, 바람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말라고 불혹의 풍경이 운다.


세상 끝에서 세상 끝으로 기러기 날아간다. 춤꾼이 발가락 상처를 두려워하랴. 상처가 춤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손 공구 들고 악착같이 날아가야 할 저 아파트 숲 어디쯤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고 있겠다.


덤으로 사는 게 아닌가. 그때 그 자리에서 숨을 놓아버렸다면 누가 내 시신을 처리하고 나를 위해 울어줄 것인가. 거듭 태어난 것 아닌가. 봉사하라고, 죄지은 거,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까운 시간 낭비한 죄, 갚고 가라고 우선 가족에게 최선을 다해 책임을 다하라고 살려둔 게 아닌가. 주위 사람들에게는 원래 내 것이 아니던, 현재 내 것으로 등록된 모든 것을 다 퍼줄 것. 다시 사는 삶 아닌가. 복 받은 일은 또 글 쓰는 재주도 주시지 않았는가. 시까지 주시다니,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할 이런 엄청난 선물을 주시다니. “머나먼 저곳 스와니강을 부르며 / 꿈결처럼 다가오는 저 아이들.......”


- 그런디 말이여, 내가 말이여, 산골에서 살아봤고 호숫가에서도 살아봤고 도시에서도 살아봤거든, 내 소원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한 번 살아보는 게 소원이란 말이여. 해서 바다 가까운 곳에 일감이 있다길래 무조건 따라갔어. 잘 하면 한 번 뿌리내리고 살아보려고 말여. 근디 말이여, 아, 일주일을 못 버티고 마누라 옆으로 돌아오고 말았제. 참 내 그 좋은 직장을 그냥 버린 것이지. 월급도 괜찮고 대우도 좋았는디, 한 일주일 정도 혼자 있으니께, 다른 것을 모두 참아 내겠는디. 이게 일어서서 죽지를 않는 거라. 큰일이더구만, 달고 있는 게 그렇게 거추장스러운지 마누라랑 있을 때는 잘 몰랐는디. 창피해서 원. 용접이고 배관이고 통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있어야제. 야중에는 그게 그러니께 조청이나 깨죽처럼 끈적끈적해지다가 국수가닥처럼 딱딱해지는 거라, 큰일났대. 이러다가 막혀서 사리되는 거 아닌가 싶더만. 막히면 죽는 거잖아. 안그려?


겨울바다는 검푸러서 무슨 먹구렁이처럼 뒤채며 허연 배를 보여주고, 바람은 포장을 걷어내고 번개탄 불은 사위어간다. 몇 개 남은 조개구이는 거품을 뽀글거리다 잦아들고 숫제 피딱지처럼 졸아붙었다. 소주잔도 바람에 출렁거린다.


- 정말로 그렇게 쎄요?


- 그런디 말이여, 아까 점심때 나 먹는 거 못 봤는가? 아직까지 보통은 양에 안 차. 늘 곱빼기여. 내 체구에 그것이 어디로 가겄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날 이때껏 마누라가 볶는 것을 못 봤다구. 날마다 안 허면 뭔가 허전해서 잠이 안 온다니께. 최소 두 번, 최대 하여튼 지간이구. 그런디 말이여, 자네는 어뗘, 성생활은 문제가 없는가?


- 성님도 참, 벌써 반년간지로 내려앉어서 곧 연간지를 거쳐 폐간지가 될지 모르는 사람한테…, 부럽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계간지로 찍어냈는디. 모르것습니다. 신혼초에는 저도 신문 들어올 때 한 번, 주간지 나올 때 한 번, 참 좋은 시절도 있었는디….
- 어, 어 믿어지지 않네. 아,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는디? 큰일이시. 농담인 줄 알지만 말이여.


서족 바다로 넘어가는 검붉은 해를 바라보는 시인의 머리칼이 억새처럼 흔들린다. 시인은 어느덧 쉰이 넘었다.


여전히 냉골하고 동침이다. 나 아무리 뜨거운 남자라 해도 오직 체온으로만 덥힐 수 있는 구들장이 너무 넓다. 꼬질꼬질 땟국 정다운 이불 펴고 누우니 미적미적해진다. 그대 아직도 추운가? 견딜 만한가? 올 겨울에는 중국산 무쇠난로라도 들여놓고 나무하러 다녀야겠다.

닭이 울었다. 닭이 울었다는 사실은 귀신이 물러갔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나는 붙잡고 안달한다. 시의 귀신이여, 내게 더 오래 머물다 가거라. 늦잠을 자도 깨우지 않으마. 밥 주고 여자가지 붙여줄 테니 부디 이 집에서 오래 머물다 가거라. 닭은 단칼에 때려잡으마. 새벽은 단칼에 무릎꿇게 할 테니, 항복문서 받아올 테니, 제발 나가지 말아라. 박용래 시집을 겉표지 너덜거릴 때까지 끼고 일하러 다닌 시인에게는 일찌감치 수건을 던졌다. 인정하마, 내 잘못 살았다는 것을.


이면우의 시에는 이런 문장이 숨어 있다.


?건물 주변 보도블록 틈새 잡초제거 작업
?가스 정압실의 가스 누설 검지 작업(이상 없음)
?화단 살충제 살포작업
?소방 펌프 가동 시험
?식당 형광등 2개 교체
?주차장 진입로 중앙선 도색
?4층 금연실 출입문 강화 유리와 알루미늄 프레임 접촉
?지상 주차장 백선 도색작업
?3층 화장실 문짝 알루미늄 케이스 탈락(수리했음)
?2층 화장실 소변기 수리
?건물 주변 대청소


삶은 저렇게 큰 문학이다.


어머니 생각
세월이 빠르다. 월드컵도 끝나고 아시안게임도 끝나고 대통령 선거도 끝나고 새해를 맞은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내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막판까지 변수가 많았지만, 그래서 가슴 졸이면서 울기도 많이 했지만, 역사는 후퇴하는 법이 없다. 다행스런 일이다.


가까운 사람끼리 송년회를 하면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속으로 다짐도 많이 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술을 적게 마시는 일, 담배를 끊는 일, 가족들과 좋아하는 사람들을 더 깊게 사랑하는 일, 나보다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나누는 일, 또 글 쓰는 사람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여 좋은 작품을 많이 쓰는 일을 비롯하여 수많은 약속을 마음으로 되새김했다.


몇 번 눈이 내리고 녹는 동안, 얼었던 길이 녹아 질척거리는 동안, 세월은 쉼 없이 흘러 어느새 한 달이 흘렀다. 그 많은 다짐 속에 무엇을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겼는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숙취와 속쓰림과 후회와 반성으로 아침을 맞기를 또 얼마나 반복했는가? 이렇게 살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도 이삼 십대 열혈 청년처럼 몸이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다고 착각했는가. 아침 햇살은 청침이 되어 혈관을 찌르고 겨울 바람은 죽비가 되어 갈비뼈를 쓸고 지나간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가, 문득 눈을 뜨고 보니 마흔이 훨씬 넘은 초라한 사내가 주름 깊숙한 얼굴로 늙어 있다. 그렇게 혼줄이 나고도 헛살았구나. 곧 설날이 다가온다.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설날, 부모형제를 찾아, 고향 땅을 향해 수천만 사람들이 똑같은 시간에 길거리에 나서는 날, 나는 어디에 가서 부모님을 뵙고 인사드려야 할지 막막하다. 이미 오래 전에 두 분 다 돌아가셨고 고향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특히 무덤도 없이 화장을 해서 산에 뿌린 어머니를 생각하면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워진다. 아마 내가 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결코 잊지 못하리라.


나는 어머니 곁에서 오래 살지 못했다. 어렸을 때는 가족 모두 부산에서 살았는데, 그 시절 다 그랬겠지만 우리는 가난했다. 우선, 뚜렷한 직업이 없어 반거충이 생활을 한 아버지와 군대를 기피하고 변두리 도시에서 삼류 깡패짓을 전전하고 있던 큰형 덕분으로 가족의 생계는 온전히 어머니 혼자 꾸려갔다. 어머니는 먼지 많은 직물공장에서 삼교대 근무를 하셨는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누나 등에 업혀 젖을 먹으러 갈 때나 볼 수 있었다. 누나 등에 업혀 산동네 골목을 오르내리다 본 가난하고 누추한 사람들과 눈깔사탕과 문둥이빵과 멀리 보이던 부산항 제일부두와 전차와 서면 굴다리를 지나가던 증기기관차와 육군형무소 근무병들의 열병식 장면들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영화 필름처럼 토막토막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배고프고 가난하던 부산 추억도 그리 오래가지 못해 우리는 헤어졌다. 생활 형편은 나아지지 못하고 빚만 느는 것을 보다 못한 외할머니가 아버지를 고향으로 등 떠밀 듯 올려보냈기 때문이다. 소식도 없이 행방불명된 큰형과 남아서 빚 정리하는 어머니를 부산 땅에 남겨놓은 채, 나와 누나와 작은 형과 아버지는 하루 종일 하늘을 올려다봐도 작은 연못 같던 장수 땅으로 올라오고 말았다. 내 나이 일곱 살 때였다. 그때부터 초등학교 사학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는 부산에서 공장생활을 하면서 빚을 말끔히 갚았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이 정식으로 가족다운 생활을 한 것은 어머니가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올라오신 다음에 맞본 2,3년 간의 꿈같은 나날들에 불과했다. 누나와 작은 형은 초등학교 중퇴와 졸업으로 객지로 돈 벌러 나갔고 농사지을 땅뙈기 하나 변변치 않던 아버지는 허구한 날 주막집에서 외상 술로 자신도 알 수 없는 분노와 막막함을 품고 있던 탓이었다.


어떻게든 그래도 살아 있는 목숨 풀칠을 해야겠기에 아버지는 남의 농사를 짓기도 했다. 시사답이라고, 한 해 농사를 지어 도지 대신 가을에 푸짐한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물론 벌초를 해주는 것은 기본이었다. 추수가 끝난 그 해 가을에도 어머니는 어김없이 시제 때 쓸 음식 준비에 바빴다. 옆집 아줌마들과 함께 읍내 장에 가서 재료를 잔뜩 사 가지고 오던 날이었다. 그 속에는 제사 음식의 표징이라고 할 수 있는 떡도 들어 있었다. 양이 적당하면 집에서 준비했을 걸, 양이 많아 읍내 방앗간에서 해오던 길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지게와 바작을 짊어지고 주막에 나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뽀얀 먼지를 제트기 꼬리처럼 매달고 사태모랭이 돌아 완행버스가 주막에 닿았다. 몸빼 차림에 수건을 쓴 어머니가 함께 장보러 간 옆집 아줌마와 여러 보따리들을 내리고 난 뒤, 버스는 우당탕 떠나간 뒤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버스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물건을 내리다가 떡을 담아놓은 커다란 함지박을 그냥 두고 내린 것이다. 매정한 버스는 먼지와 자갈을 튀기면서 떠나가 머리고 백여 미터 남짓, 온 힘을 다해 달려간 어머니가 그만 신작로 한가운데 철퍼덕(맞다! 철퍼덕!) 주저앉더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고무신을 벗어 양손으로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아이고, 내 떡  다라이~ 내 떡 다라!” 하면서 서럽게, 서럽게 우셨다.


동네 사람들이 놀라 달려가고, 간신히 부축을 해서 달랜 다음에, 정신을 수습하여, 동네에 하나뿐인 이장집 전화기 통으로 뛰어가고, 번암 지서에서도 차를 잡지 못해 멀리 남원 요천 검문소에서 떡 함지박을 찾아오는 동안, 우리 식구들은, 아니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하루 종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철퍼덕! 신작로에 앉아서 마치 떼쓰는 아이처럼 우는 어머니를 본 순간, 어린 마음이었지만, 삶이란 순수하고 깨끗하고 한 번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싹 가셨다. 먼지 끼고, 비루 먹고, 속절없는 시간만이 남아 있을 거는 싸가지 없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으니까.

누가 볼세라, 살짝 숨어 지켜보던 내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 올랐다. 슬픔보다는, 화가 나기도 하고 창피한 기분이 더한 게 사실이었다. 오늘, 철퍼덕 앉아, 그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그때 어머니 마음으로 돌아가, 이 비루 먹고, 먼지 끼고, 비천한, 슬픔만이 꽉 들어찬 일상을,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어루만지고 살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하늘나라에서 어머니가 나를 늘 내려다보고 계실 거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