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는 비평 안팎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한 글들을 수록하였다. 2부에는 민족문학의 갱신을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문학들을 대상으로 한 글들을 실었다. 3부에는 1990년대 이후 씌어진 민중시의 흐름과 지형을 종합적으로 탐색하고, 여러작가들의 소설론을 엮었다. 4부에는 고단한 삶의 상처를 감싸안는 우리 시대의 문학에 관심을 둔 글들을 묶었다.
■ 저자 박성래
1970년 제주에서태어났다. 성균관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8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 현기영의 소설세계"가 1999년 「문학과창작」 신인상에 "윤대녕론"이 당선되어 등단. 2005년 현재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사)민족문학작가회의 "젊은작가포럼" 위원장을 맡고 있다. 또 비평전문지 「비평과전망」 문예계간지 「리토피아」의 편집위원으로서 현장비평 활동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쓰다"의 정치학』 『비평의 잉걸불』 『1970년대의 유신체제를 넘는 민족문학론』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공저)『한국소설 읽기의 열두 가지 시각』(공저) 『한국현대시문학사』(공저) 『칼날 위에 서다』 등이 있다.
■ 차례
책머리에
[제1부 비판적 성찰, 그 매혹의 풍경들]
*추문과 풍문으로 얼룩진 비평상
*비평이여, 문학의 대지에 굳건히 발을 디뎌라
_최근 소설 비평에 대한비판적 성찰
*정념에 나포된 마성과 귀기
_전경린의 소설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개별화의 마성(魔性)은 공허하다
_김훈 소설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사회적 인프라"로서 "기초예술-문학"의 가치
*지역의 "문화적 진지"로 구축되어야 할문학기념관
[제2부 민족문학의 갱신을 위한 고투]
*민족문학 "운동"으로서의 실천적 비평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에 대해
*염무웅 비평의 매혹, 이론과 현실의밀착
_ "환(幻)"의 세계를 위반하는 진보적 문학
*지역의 탈중심성이 지닌 민족문학의 창조적 동력
*화마(火魔)의 섬에서평화의 섬으로 가는 길
_국가폭력 인정 이후의 4·3문학
*베트남전쟁 소설,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
_베트남전쟁 소설의 전개양상을 중심으로
*미국의 전횡적 힘의논리를 전복시키는 우리 소설
*박정희 시대의 아킬레스건을 겨냥한 필화작품
_남정현과양성우의 작품을 중심으로
*생동하는 문학적 화두, 민족문학의 갱신
[제3부 민중의 삶을 향한 저공비행]
*민중시의 강인한 생명, 그 잉걸불의 마력
_1990년대 이후 민중시의 지형도 탐색
*누가, 민족문학에 침을 뱉는가
_송기숙의「들국화 송이송이」
*속악한 세계를 위반하는 "누망(縷望)"
_정도상의「누망」
*비루함을 통해 비루함을넘는 시장통의 삶
_이명랑의「삼오식당」
*야만의 현실 너머에 출렁이는 황금이삭
_안재성의「황금이삭」
*삶의그루터기에 깊게 팬 상처
_박병례의「쑥 캐는 불장이 딸」
*늘 피곤한 인간들의 반란
_한성탁의「전화번호부」
[제4부 생의 칼날 위에서]
*근대의전횡적 질서를 내파하는 이야기꾼
_이기호론
*젊은 문학인들의 불교적 사유에 대한 밑그림
*생의 지독한 혹은 아름다운 상처들
*한 "깊이주의자"가 파놓은 비평의 구멍
_송상일의 비평세계
칼날 위에 서다
제1부 비판적 성찰, 그 매혹의 풍경들
개별화의 마성(魔性)은 공허하다_김훈 소설에 대한 비판적 성찰
1. 김훈 문학에 헌납된 호들갑스런 오마주들
"50대에 등단, 한국문화사상 최초로 단 한 편의 장편과 단 한 편의 단편만으로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우리 시대의 문장가 김훈"이란 홍보 문구에서 단적으로 읽을 수 있듯이, 그는 쾌속질주로 한국문학의 노른자위를 꿰차고 들어왔다. 하지만 도리어 김훈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찬사가 김훈 소설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 걸림돌이 될 뿐임을 알아야 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된 이른바 ‘문학권력 논쟁’ 속에서 ‘문언유착’의 타락성을 여실히 보여준 대표적 문학상이 이 두 개의 문학상이라는 사실은, ‘지금, 이곳’의 문학판의 구조와 제도에 대한 명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 문학인이라면 결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호흡을 가다듬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는 김훈이 오랫동안 언론에 종사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김훈은 이미 동종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그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존경받는’ 문장가로서 자리매김된 지 오래인 터에, 그의 책을 앞다투어 소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문제는 김훈 문학을 둘러싼 이와 같은 언론의 비호 아래 김훈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마케팅은 김훈에 대한 비평마저 마케팅 전략으로 흡수했다는 점이다. 이 구조화 속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이란 문학상 제도는 김훈의 소설을 명실 공히 스타 작가의 명단에 등재시키는 데 한몫을 다하였다.
물론 우리는 문학 권력 논쟁을 거치면서 이 두 개의 문학상에 대한 정체성을 비롯하여 심사 과정 및 수상작의 미적 성취에 대한 문제점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한 바, 오히려 이 상들을 수상한 작가의 경우 문학적 윤리와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의식이 빈곤하거나 부재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셈일 따름이다. 하여 이 두 상을 수상한 김훈도 이러한 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묵과할 수는 없다.
이 같은 비판적 성찰은, 그의 소설에 대한 각종 헌사들로 가려진 김훈 문학을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김훈 문학의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혹시 우리는 김훈 문학을 성급히 신화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김훈의 미적 취향에 대해 맹목적 오마주를 헌납하고 있지는 않은가. 김훈을 에워싼 문학상업주의에 너무 쉽게 나포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김훈 소설에 대해 정치권력자 - 노무현 대통령 - 가 감동한 맥락을 놓친 채 정치권력자의 독서 체험과 동일시되려는 욕망에 붙들려 있지는 않은가. 온갖 헌사들에 자신도 모르게 무임승차하고 싶은 욕망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가.
2. 고백의 마술적 문체, 개별적 진실의 맹목화
김훈 문학에 바쳐지는 극찬 중 두드러진 것 하나는 현란한 문체의 마술적 매혹을 든다. 독자는 무엇에 빙의(憑依)된 양 그의 소설을 정신 없이 먹어치운다. 그런데 우리가 김훈의 이 같은 문체의 마술에 매혹되는 가운데 정작 흘려버리는 게 있다. 김훈의 마술적 문체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소설 속 인물들이 고백조의 언어를 적극화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김훈 소설의 매혹이 고백조의 담론을 적극화하다 보니, 소설 속 인물들은 지극히 개별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물론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소설 속 인물의 개별적 진실에 천착하는 것은 작가의 특권이다. 하지만 개별적 진실을 탐구하는 것과 개별적 진실을 맹목화하는 것은 엄연히 구별되어야 한다. 다음의 『칼의 노래』중 일부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칼의 노래』 1권, 74쪽)
독자는 이순신의 이러한 죽음의 의지를 접하며, 김훈이 창조해낸 이순신이란 인물에 매료당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이순신은 중세의 역사적 한계를 초월하고 있는 근대적 개인으로서 조명되고 있기에, 중세의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임금을 부정하는 그의 개인적 풍모에 흠뻑 빠지게 된다. 어쩌면 이순신의 고백은 독자로 하여금 이 같은 반응을 끌어내는 데 성공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로지 이순신 개인의 개별적 성향에 초점을 둔 고백은 세계와 충돌하지 않는 단독자의 넋두리에 불과할 따름이다.
나 역시 김훈의 소설이 이른바 ‘성웅 이순신’을 ‘인간 이순신’으로 그 존재를 전이시킨 데 대해 이견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 이순실’을 지극히 고립된 개별자로 파악하고 있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타자와 충돌하지 않고, 타자와 소통하지 않은 채, 주체가 놓여있는 객관현실을 무화시킨 ‘인간 이순신’은 ‘성웅 이순신’과 또 다른 고착된 인물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 이순신’에게 본연의 자리를 돌려주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신화도 벗겨야 하겠지만, 객관현실을 도외시한 가운데 타자와의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것도 경계되어야 한다.
3. 개별적 죽음에 갇힌, 죽음의 물신화(物神化)
역사나 사회의 거대담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 그가 기댈 수 있는 서사는 개별적 인물이 감각할 수 있는 대상에 천착하는 것이다. 하여 그가 주목하는 것은 육체의 개별화된 감각이며, 이 감각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육체의 감각에 촉각을 곤두세우느냐 하는 문제다. 이 문제를 김훈은 죽음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죽음의 경계에 근접할 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생의 감각은 극대화되면서 동시에 소멸의 감각으로 전이한다. 죽음은 김훈에게 뭇 살아있는 존재들의 개별적 진실을 궁리하는 일환으로 주도면밀하게 선택된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주목하는 육체는 그것을 에워싼 현실의 맥락과 절연되었기에, 육체의 감각을 통해 획득한 개별자의 진실의 가치는 공허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의 노래』에서 가야국의 순장(殉葬) 풍속 중에서 악공의 연주와 그 연주에 맞추어 우륵이 춤을 추는 장면은 악공의 연주와 우륵의 춤사위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왕과 함께 묻힌 자들의 죽음은 이들 연주와 춤의 황홀경 속에 애도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미학적으로 완결된다. 여기서 김훈은 순장자들이 겪어야 할 생의 비참한 순간, 생을 마감해야 하는 순장 풍속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를 하지 않는다. 생의 감각이 소멸의 감각으로 전이되는 순간의 미를 체험토록 한다. 그것뿐이다.
김훈에게 유의미한 것은 객관현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개별자의 진실이기에, 이러한 개별자의 죽음 또한 같은 심급에서 파악되어야 할 성질의 문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는 가운데 죽음은 자연스레 마성(魔性)을 갖게 되며, 물신화(物神化)된다. 이럴 때에 염려스러운 것은 죽음 역시 개별화되고 고립된 위상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타자의 생사와 연동되지 않는 죽음이야말로 죽음의 고립화를 가속화시키며, 그것은 죽음의 물신화와 죽음의 마성에 특권을 부여한다.
4. ‘환(幻)’의 세계로부터 자기소외, 그 파시즘적 언어의 미혹
김훈의 소설에는 타자가 존재하되, 주체와 타자의 관계 맺기, 관계 맺기를 통한 서로의 존재 여부,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가치 판단에 대해서는 심드렁하다. 자신의 구체적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육체를 지닌 주체 이외의 모든 대상은 믿을 수 없다. 개별화된 육체의 감각을 중시하는 김훈에게 그 감각을 인지할 수 없는 대상은 있으나마나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여 타자의 타자성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체가 구체적으로 감각할 수 있을 때만이 주체에게 유의미한 가치를 부여받는다. 하지만 염두에 둘 것은, 이때의 타자의 존재 가치는 주체와 이러저러한 관계 맺기를 통해서 획득 가능한데, 김훈은 이러한 타자와 관계 맺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김훈에게 주체를 제외한 타자는 ‘환(幻)’이기 때문이다.
『현의 노래』에서 가야국의 대장장이 야로와 그의 아들 야적이 나누는 대화(113~114쪽)에서, 야적은 당연히 가야국을 위해 쇠가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야로는 쇠의 흐름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야로에게 가야국은 나라의 기운이 쇠진하여 신라에 복속될 운명으로 파악된다. 야로가 주목하는 것은 ‘쇠의 큰 흐름’인바, 이미 쇠의 흐름은 가야국에서 신라로 흐르고 있다는 게 야로의 판단이다. 여기서 가야국의 존립에 치명적인 야로의 행위는 대장장이 야로의 개별적 진실(‘쇠의 큰 흐름’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대장장이로서의 본래적 진실)에 의한 최선의 선택일지 모르지만, 그 개별적 진실에 의해 가야국의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은 신라군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소멸될 것이다.
이러한 야로의 입장에는 김훈의 정치적 입장이 스며들어 있다. 그는 엄혹한 유신체제를 통해 철권통치를 한 박정희와 5.18광주민주화항쟁을 무참히 짓밟은 전두환에 대한 정치적 옹호를 드러낸다. 심지어 전두환이 집권하자 김훈은 전두환을 찬양하는 이른바 ‘신용비어천가’를 「한국일보」(1980.8.23~25) 지면을 통해 발표하기도 했다. 어쩌면 이 일련의 김훈의 정치적 행위는 『현의 노래』의 야로처럼 ‘쇠의 큰 흐름’을 명민하게(?) 인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야로에게 오직 유의미한 개별적 진실의 쇠의 존재 가치이듯, 김훈에게 박정희 시절이나 전두환 시절의 암울함은 그다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김훈에게 세계는 ‘환’인바, 이 ‘환’의 세계에서 재별 존재 나름대로 갖는 개별적 진실이 중요할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개별 존재의 자기확실성이란 미명 아래 산출된 파시즘적 언어다. 파시즘 체제에서의 자기소외를 통한 자기구원과 개별 진실의 탐구는, 도리어 파시즘 체제를 적극 옹호하게 되는 정치성을 띤다. 왜냐하면 이 자기소외가 부정한 세계의 전복과 위반을 겨냥하지 않는 한, 자기소외는 지극히 개별적인 범주 안에 자족한 채 결국 부정한 세계의 악무한을 방치해 둠으로써 탈정치의 가면을 쓴 정치적 입장을 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훈의 소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다.
5. 비판의 첨병이 되어야 할 김훈 소설
출판업계의 사람들에게 김훈의 소설은 효자 상품이다. 대중 통속소설이 아닌 본격문학 작품으로서 국내 출판물의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질주하는 김훈의 작품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김훈의 작품에는 당대 독자의 독서 심리를 파고드는 김훈 특유의 미학이 있다. 변화무쌍한 세계의 위협 속에서 날로 동요되는 인간 개별자의 진실을 솔직히 보여주는 유려한 마술적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김훈 소설의 매혹에 빠지게 한다. 김훈 소설에서 보이듯이, 인간은 흔들리는 일회성의 불완전한 존재들이며, 자신의 개별화된 생의 감각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존재들이라는 점에 독자들은 쉽게 공감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되물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개별자의 진실이 개별자를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한, 고단한 삶에 순간의 위안을 받을지언정 또다시 세계의 위협은 개별자를 향해 엄습해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또다시 그 세계로부터 개별자를 고립시키는 자기소외의 방식을 택할 것인가. 그 과정 속에서 도달한 진실의 지경에서 자기구원의 참다운 가치를 보증 받을 수 있는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개별자가 추구하는 진실이 세계와 절연되었고, 타자들과 소통하지 않는 한, 그 진실은 허무의 허방에서 공소해지지 않겠는가. 그것보다 더 끔찍스럽고 경계해야 할 것은, 부정한 세계, ‘환’의 세계로부터 자기소외를 적극화할수록 이 세계의 악무한은 개별자의 자기소외를 부추길 것이며, 그로 인해 개별자는 개별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미명 아래 세계의 구조악(構造惡)과 행태악(行態惡)을 방치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동안 김훈 소설에 대해 비평가들은 김훈 문학을 우리 시대의 정전 반열에 올려놓는 데 이구동성이었지, 김훈 소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리 시대의 문학적 곤혹스러움과 대면하려는 노력은 드물었다. 나는 바란다. 김훈이, 아니 김훈 소설이 우리 시대의 문학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비평적 지혜를 모으는 비판의 첨병이 되었으면 한다. 김훈 소설이 더 이상 주례사 비평과 문학출판시장의 상업논리에 휘둘리도록 뒷짐질 수많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개별화의 미성은 공허하다!”
(「평화, 폭력 그리고 문학」한국평화문학 2집, 화남, 2005)
제2부 민족문학의 갱신을 위한 고투
베트남전쟁 소설, 기억과 망각의 변증법_베트남전쟁 소설의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1. 베트남전쟁 소설에 주목하는 이유
한국 근현대소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연구 과제 중에서 하필이면 베트남전쟁을 다룬 소설에 주목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의가 있는 것일까? 사실,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전쟁과 직간접 관련된 서사의 문제라면, 베트남전쟁보다 6.25전쟁에 대한 서사적 탐구가 긴요하면서도 중요한 연구 과제가 아닌가. 아직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베트남전쟁보다 6.25전쟁을 다룬 소설에 대한 연구가 시급한 문학적 탐구 과제로 인식되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가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자명함이다. 우리의 문학적 과제 중 하나인 분단의 서사를 탐구하는데 특정한 자명성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요인이다. 그것은 분단의 서사를 탐구하는데 지금까지 자연스레 통용화된, 6.25전쟁에만 착목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처럼 남과 북으로 분단된 민족의 비극을 경험한 바 있는 아시아의 다른 민족 현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베트남이다.
필자가 베트남전쟁을 형상화한 소설에 관심을 갖는 것은, 베트남의 분단에 대한 형상화에 삼투된 우리 민족의 분단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기 위한 문제들이 발견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그동안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다룬 우리 소설의 주류적 경향은 분단을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만 천착한 것들이다 보니 분단문제를 좀더 폭넓은 시야와 객관적인 관점에서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낳기도 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게, 분단문제뿐만 아니라 분단을 극복하는, 즉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의 삶을 동시에 성찰하는 문제의식이 동반된다. 따라서 필자는 이 글에서 197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씌어져온 베트남전쟁 소설에 투영된 작가의 문제의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베트남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빈곤
베트남전쟁의 소설화는 1970년대부터 작가들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다. 흔히 박영한의 장편 『머나먼 쏭바강』(1978)에 주목함으로써 1970년대에 생산된 베트남전쟁 소설의 성과를 밝히고자 하는데, 이미 전부터 베트남전쟁을 직간접으로 다룬 소설들이 발표되었다. 송영, 신상웅, 송기원, 황석영 등이 이들인데, 이들 작가의 작품들이 모두 동일한 심급에서 베트남전쟁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작가들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러한 역사적 인식을 가로막는 1970년대 유신체제의 정치적 억압에서 비롯되었다.
송영의 『선생과 황태자』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감옥 안에서 겪는 이야기로, 베트남전 자체를 주요한 소재로 다룬 작품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이 문제적인 것은, 두 명의 참전군인인 순열과 정철훈 하사를 통해 베트남전의 성격을 대단히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6.25이후 절대빈곤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베트남 파병을 자원한 정철훈 하사는 군의 작전명령에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양민을 학살했다는 혐의로 14년형을 선고받은 데 대한 불만을 토로한다. 그런가하면 순열은 자신이 “환자가 아닐까 하는 자각증세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인다. 말하자면 베트남전쟁은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실체인 셈이다.
신상웅의 장편 『심야의 정담』(1973)과 송기원의 단편 『경외성서』(1970) 역시 예외가 아니다. 신상웅의 소설은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한데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데, 이 문제의식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관념적일 뿐이다.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하여 살상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한 극도의 자기혐오와 그에 따른 자기부정은 용병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킨 것으로 볼 수 없다. 송기원의 『경외성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병이 적군을 죽이는 가운데 밀려드는 미적 체험을 통해 그동안 자신이 발견해내지 못한 실존적 삶의 가치를 깨닫는 소설이다. 이 역시 베트남전의 형상화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구태여 베트남전이 아니어도 무방하다.
그렇다고 1970년대에 씌어진 베트남전쟁 소설이 모두 이와 같은 문제점을 지녔다는 것은 아니다.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과 황석영의 세 단편 『탑』(1970), 『낙타누깔』(1972), 『몰개월의 새』(1976) 등에서 보이는 작가의 문제의식은 역사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들은 베트남전을 전쟁이란 일반적 속성으로 두루뭉실하게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베트남전을 삽화적 차원으로 다루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점은 제3세계문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머나먼 쏭바강』의 두 주인공 황 병장과 베트남 여인 빅 뚜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낭만적 사랑은 베트남의 일국적 차원의 문제를 더욱 부각시킬 따름이지, 베트남전에 응축돼 있는 서구제국주의의 패권의식과 그에 맞서는 제3세계의 저항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형상적 사유를 펼치고 있지 못하다.
3. 베트남전에 대한 제3세계적 인식의 두 양상
1980년대에 씌어진 베트남전쟁 소설은 1970년대의 시대적 한계에서 다루기 힘들었던 부분을 과감히 다룬다. 비록 작가들마다 세부적 형상화에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그들의 공통적 관심사는 베트남전쟁을 베트남만의 일국적 차원으로 국한시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병사들의 용병에 대한 역사적 자각이 뒷받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3세계적 문제의식을 보이는 대표적 작품은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상권1985, 하권1988)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그동안 씌어진 다른 베트남전쟁 소설들보다 두드러지게 다른 면이 있다면, 제목부터 상징되듯이 총부리를 겨눈 전장의 이면을 통해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문제를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의 최후방, 그것도 군수물자가 암거래되는 암시장을 주요한 공간으로 설정했다. 최전선에 정상적으로 보급되어야 할 군수물자가 암시장에서 미군과 한국군, 베트남 정부군,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등이 뒤엉킨 관계 속에서 암거래되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베트남전은 기실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ㆍ갈등보다 자본주의의 냉혹한 이해관계로 전도된 것이라는 작가의 독특한 문제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그러나 작중의 문제적 인물인 한국군 안영규가 논의했듯이 자본주의의 타락성이 베트남전의 실상임을 인식하는 과정 속에서 베트남 민족과 강한 연대감을 피력하거나, 민족해방전선의 정치적 투쟁의 목적을 격정적으로 진술하는 것 등은 작가의 제3세계적 인식을 성급히 드러내는 데 불과하다. 안영규는 베트남전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최적격의 인물이다. 그렇다면 안영규와 다른 인물과의 관계를 통해 작가의 제3세계적 인식에 대한 풍부한 형상적 사유를 펼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의 그늘』에서는 이러한 형상화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무기의 그늘』이 기존의 베트남전쟁 소설보다 탁월한 성과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1980년대의 배트남전쟁 소설에서 검토되어야 할 작품으로 안정효의 3부작 『하얀전쟁』(1989~1992)을 들 수 있다. 널리 알다시피 한국보다 미국에서 먼저 출간된 이 소설은 베트남전의 패배를 경험한 미국이 주목했던 작품이다. 이 소설은 참전 병사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면서 베트남전의 현대적 의미를 서사화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피해자가 겪은 전쟁의 참상이 부각됨으로써 결국 베트남전에 참전한 모든 병사는 피해자이고, 베트남전은 인류의 행복을 파괴시킨 숱한 전쟁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통념을 갖게 하는 선에서 멈출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베트남전에 대한 교묘한 제국주의적 시각이다. 베트남전의 역사적 책임을 누구보다도 통감해야 될 미국의 입장을 은폐시킬 수 있는 빌미를 쉽게 제공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용병에 대한 작가의 시각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4. 베트남전에 대한 한국사회의 타자적 입장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친 베트남전쟁 소설은 1990년대 이후 다양화된 시각을 보인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오현미의 장편 『붉은 아오자이』(1995)와 이대환의 장편 『슬로우불릿』(2001)을 들 수 있다. 이들 작품은 베트남전쟁을 직접 다루었다기보다 베트남전쟁의 후일담적 성격이 짙다. 두 작품은 최근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라이 따이한’과 ‘고엽제 환자’에 대한 내용을 각각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베트남전쟁의 현재적 의미를 새로운 서사적 시각에서 성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베트남전쟁의 가해자로서 혹은 피해자로서 베트남 민족에 대한 타자적 시선과 함께 한국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베트남전쟁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타자적 시선을 동시에 문제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형상화가 도식적이고 상투적인 틀에 얽매어 있다. 가령, 라이 따이한 송단홍과 그의 한국인 아버지 송기준의 가족구성원 사이에 놓여 있는 첨예한 갈등은 이들을 매개해주는 송단홍의 어머니 베트남 여인의 죽음을 계기로 급작스럽게 반전된다. 이는 갈등하는 인물의 관계를 죽음으로써 해소시켜주는데, 분명 그들의 관계는 작품 속에서도 천착되고 있듯 베트남전쟁으로 잉태된 복잡하게 뒤엉킨 여러 정치 경제학의 문제에 기인한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라이 따이한의 문제가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인 병사의 윤리적 책임으로 수렴될 수 있는데, 이 역시 좀더 정치한 서사적 탐구가 요구되는 사항이라 하겠다.
그런가 하면, 라이 따이한의 문제 못지 않게 심각히 대두되고 있는 게 고엽제 환자의 문제다. 『슬로우불릿』에서 가히 엽기적이랄 수 있을 정도로 형상화되고 있듯이, 고엽제 환자의 고통스런 현실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고통은 한 개인뿐 아니라, 유전적 질환이 되어 그 가족 구성원에게 똑같은 고통을 안겨다주는 베트남전이 잉태한 비극 중 비극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들 고엽제 환자(혹은 그 가족)를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이다. 여기서 작가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고엽제 환자의 비극적 현실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 전반의 시선이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는 베트남전쟁을 타자의 시선으로 보고 있는바, 따라서 베트남전쟁은 한국 사회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일부러 소외시키고 외면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5. 맺음말
2002년은 한국과 베트남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지 10주년이 되는 해였다. 베트남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한 한국은 베트남에는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다. 과거의 역사에서 두 나라 모두 제국주의의 식민화를 경험하였으며,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고, 또한 종족간의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리하여 과거의 역사가 보여주듯, 두 나라는 각각 탈식민성의 민족 과제를 지속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미 베트남의 경우 베트남전쟁을 통해 분단을 극복하였다는 점은, 이 글의 앞머리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우리에게는 성찰해야 할 과제를 제시해준다. 분단문학을 넘어선 통일문학을 향한 민족문학의 과제가 그것이다.
그동안 씌어진 베트남전쟁 소설에 대한 검토를 통해 도출되었듯이, 무엇보다 베트남전의 역사적 성격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그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한 우리의 경우 어떠한 인식을 가지느냐 하는 것은 베트남전쟁 소설을 두루 관통하고 있는 서사의 주요한 과제다. 여기서 부각되는 베트남전쟁에 대한 제3세계적 인식은,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한 파행적 근대성을 극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의 민족 현실과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을 모색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을 베트남 혹은 한국만의 일국적 차원으로 협소하게 인식할 게 아니라, 제2세계의 민족적 현실이란 거시적 관점 아래 탐구해야 할 과제가 제기된다. 이것은 베트남전쟁을 과거의 정태화된 역사적 경험의 산물로 귀착시키는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베트남전쟁의 현재적 의미를 되묻는 비평적 관심과도 깊은 관계를 맺는다.
(『한국소설 읽기의 열두 가지 시각』,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