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봤는가가 아니라 언제 봤는가이다"라고 말한다.〈킹콩〉을 보러 가다가 눈밭에서 미끄러져 다치는 바람에 그것이 훗날 〈러브레터〉의 발단이 되었다는 고백에 이르면, 이 글은 단순한 영화 에세이를넘어 한 소년이 영화감독이 되기까지의 여정이 된다. 직접 그린 일러스트도 인상적.
■ 저자 이와이슈운지
이와이 슈운지는 일본의 TV드라마 프로듀서이자 영화감독, 작가이다. 1987년 요코하마 국립대학을 졸업하고,뮤직비디오와 CATV관련 일로 영상산업에 데뷔했다. 91년부터 본격적으로 드라마 각본, 연출활동을 시작하여 수십편의 단편드라마로 방송가에 화제를불러 일으켰다. 후지TV의 〈IF〉으로 일본영화감독협회 신인상을 받았고, 94년 山口智子, 豊川悅司 공동의 첫 단편 〈undo〉를 발표한다.95년 3월 발표한 〈Love Letter〉가 극장용 장편 데뷔작이다. 이 영화가 3개월간 장기상영을 기록하고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일약 일본을대표하는 신세대 영화감독으로 떠올랐다. 이후 〈4월 이야기〉, 〈언두〉〈피크닉〉〈스왈로테일 버터플라이〉〈하나와 앨리스〉 등의 작품을 연출했다.지은 책으로는 『쓰레기통 극장』『월리스의 인어』등이 있다.
■ 역자 남상욱
남상욱은 도쿄대 대학원에서일본 문학을 연구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월리스의 인어』『쓰레기통 극장』등이 있다.
■ 차례
드라큘라
환상의 시가전
시네마 천국
드림차일드
로렌조 오일
혹성탈출
생쥐와 인간
불가사리
우주전쟁
킹콩
위험한 정사
작은 사랑의멜로디
양들의 침묵
아버지 건재하시다
아크리
최종회
작가의 말
책을 읽고
쓰레기통 극장
시네마 천국
얼마 전, 신작 〈스왈로테일〉을 한창 촬영하고 있는데 숙부의 부음이 날아들었다. 숙부는 미야기현의 시가마이라는 항구에서 수입 목재 말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던 분이었다. 그 숙부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영화관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놀러가서 공짜로 영화를 보곤 했다. 영사실의 작은 창이 특등석이었는데, 거기서 훔쳐보듯이 영화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영화관은 화재로 소실돼 이젠 없다. 그런 유년기를 보낸 소년이 영화감독이 되어 바쁘게 촬영하고 있던 중, 그리운 옛 영화관 주인의 부음을 듣는다. 마치 〈시네마 천국〉같지 않은가. 너무나 비슷한 얘기지만 절대로 꾸며낸 얘기가 아니다. 게다가 내 경우는 그 영화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시네마 천국〉에서는 소년 토토가 유년기에 순수한 영화 체험을 한 뒤 영화감독의 길로 들어선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비슷한 경험이긴 해도, 영화관을 하는 숙부가 있어서 단순히 영화를 공짜로 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추억이란 게 없다. 숙부가 정육점을 해서 저녁 때 남은 크로켓을 공짜로 먹었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당시 나에겐 괴수 영화를 하지 않는 극장은 영업을 하지 않는 유원지와 같았고, 자막 달린 외화를 볼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다. 요컨대, 나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무렵에는 영화보다 자전거가 주요 관심사였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애들은 점점 많아지는데, 난 여전히 ‘두 발’ 이 전부였다. 자전거 패거리와 어울리려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가 부모님에게 사달라고 아무리 졸라도 “위험하니까” 아니면 “그 집은 그 집, 우리는 우리” 하며 들은 척도 안 했다.
왜 이해 못하는 거야, 분노에 이를 갈면서 읽은 책이 『사토루의 자전거』(오이시 마코토 글, 키타카 타카시)였다. 이야기의 주인공 사토루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이였다.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지만 계속 거절당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읽으면서 ‘녀석도 나랑 똑같군’ 하고 맘 깊숙이 공감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반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사토루는 어이없게 자전거를 손에 넣는다. 학교에 갔다 오니까 현관에 반짝거리는 자전거가 놓여 있었다. 부모님이 사토루가 끈질기게 조르는 데 질려 사주고 만 것이다. 아, 충격.
‘사토루, 이 배신자 놈!’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렸다. 『사토루의 자전거』를 읽은 탓인지 나는 자전거가 더 갖고 싶어졌다.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열면 반짝거리는 자전거가 기다리고 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자전거…. 매일같이 그런 꿈을 꿨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망상 그대로였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갖고 싶다! 아이들은 어째서 그렇게 물건을 탐내는 것일까? 하지만 그때는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갖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앞서 말했던 숙부님 댁에 놀러 갔을 때였다. 정원 뒤에 낡아빠진 자전거가 버려져 있었다. 나는 그걸 보기가 무섭게 숙부님에게 달라고 졸랐다. 숙부님은 이렇게 형편없는 자전거라도 괜찮다면 맘대로 하라며 선뜻 자전거를 주셨다. 황당할 정도로 낡은 자전거였다. 양 바퀴가 모두 펑크가 나 있어 자전거포에 가서 튜브를 교체하고, 녹투성이가 된 핸들을 닦아냈다. 그리고 애지중지 탔다. 아, 돌이켜 봐도 내 스스로가 기특할 정도다. 하지만 어느 날, 집 앞에 세워 두었던 자전거가 그만 트럭에 짓밟혀 엉망진창으로 찌부러지고 말았다. 울었다, 울었다. 억울해서 나는 소리를 지르며 막 울었다.
내게 자전거를 준 것을 숙부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4월 8일, 촬영이 없는 날을 택해 귀향했다. 토토처럼 유품 파일을 받진 않았지만, 숙부가 귀여워하던 손자들이 〈러브레터〉가 너무 좋다고 말해줘서 무척 기뻤다.
킹콩
중학교 때다. 어느 겨울 날 같은 반 친구 요우가와와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영화는 리메이크판 〈킹콩〉. 막 영화에 눈뜨기 시작해서 영화관에 가는 즐거움이 쏠쏠할 때였다. 당시엔 〈타워링〉이나 〈죠스〉같은 영화를 즐겨 봤는데, 지금으로 치면 〈인디펜던스 데이〉나 〈더 록〉정도 될 것이다. 영화가 취미라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극장에 간다는 행위만으로도 조금 어른스러운 기분이 들던 영화 팬 시절이었다.
우리 집에서 센다이 역 앞에 있는 극장까지는 버스로 약20분 정도 걸렸다. 내가 먼저 근처에 있는 키티야시키 버스 정류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출발하면 요우가와가 중간에 니시타카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 날 아침은 유난히 추워 노면이 얼어붙고, 지붕과 도로변에도 잔설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늘도 잔뜩 찌푸려 있어 곧 눈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런 날은 집에 콕 처박히는 게 상책이다. 버스 시간이 아슬아슬하도록 난로 옆에 붙어 있다가 어머니에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고서야 집을 나섰다. 미끄러운 길바닥을 쓱쓱 지치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달렸다.
키타쿠니(북부지방) 아이들은 노면이 아무리 미끄러워도 절대로 넘어지지 않고 잘도 달린다. 도쿄에선 눈이 내렸다 하면 눈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보행자가 태반인데, 북쪽 출신의 눈으로 보면 조심조심 천천히 걷는데도 어째서 저렇게 잘 넘어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곳 출신이라고 해도, 키타쿠니의 버스를 이길 순 없다. 아무리 노면이 얼어붙어도 키타쿠니의 버스는 결코 늦게 오는 법이 없다.
그 날은 어찌된 일인지 예정보다 버스가 빨리 왔다. 버스는 정류장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다시 출발했다. 그때 나는 거의 꽁무니에 있었고 버스 옆으로 단숨에 따라잡으며 “세워 주세요! 세워 주세요!” 하고 외쳤다. 버스는 날 알아차렸으면서도 세워주지 않았다. 처음엔 막 출발하는 버스보다 내 스피드가 빨랐기 때문에 문까지만 가면 마구 두들겨 세우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문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갑자기 버스가 붕~ 하고 속력을 냈고, 그와 동시에 나는 담장 옆으로 비스듬히 밀어놓은 눈 더미에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뒤돌아보자 뒷바퀴가 내 발을 맹렬한 기세로 밟고 있었다.
“쿵.” 일순 뒷바퀴가 하늘에 떠올랐다가 땅에 떨어지더니 멈췄다. 해냈어! 〈킹콩〉을 볼 수 있어! 나는 안심하고 버스에 올랐다. 당시 버스에는 아직 차장이 있었는데, 그 날 차장은 남자였다. 그때도 차장은 드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운전수가 뒷구멍으로 담배 값을 벌기 위해 차장을 하는 것일 거라고 수군거렸다.
발을 절뚝거리며 버스에 오른 나에게 차장은 “임마, 괜찮냐?” 하고 말하며 나의 발을 살폈다. 운전수도 걱정스러운 듯이 내 얼굴을 봤다. 나는 〈킹콩〉시간에 맞추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 괜찮아요” 라고 대답하고는, 걱정스러워 하는 다른 승객들의 얼굴은 뒤로 하고 제일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다리도 그렇게 아프지 않았고, 타이어에 발을 밟힌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예전에 한 동네에 살고 있는 고바야시 아저씨의 자동차에 발을 밟힌 적이 있었다. 좁은 길에서 친구들과 캐치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고바야시 아저씨의 차가 다가왔고, 우리는 골목가로 피했다. 고바야시 아저씨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창을 열고, “야아, 슈운지! 어쩌고저쩌고…” 라고 말했다. 그 ‘어쩌고저쩌고’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대답하고는 내심 이 아저씨가 빨리 가지 않는 거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아저씨 차의 타이어가 내 발 위에 있었다. 고바야시 아저씨가 간 후 발을 잡고 빙빙 돌았지만, 그냥 그 정도였다. 그러니까 타이어에 밟히면 어떻게 되는지 어느 정도 예비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시간이 좀 지나자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나는 쭈뼛쭈뼛 구두와 양말을 벗었다. 피부가 홀랑 벗겨지고 색깔도 푸르딩딩 했다. 그때 차장이 다가와서 “어, 이거 심하군” 하고 얼굴을 찡그렸고, 뒤이어 대소동이 벌어졌다. 버스는 도중에서 승객을 전부 내려주고, 노선을 바꿔 병원으로 직행했다. 바로 코앞의 니시타카 정류장에서 요우가와가 기다리는데…. 사정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일이 시험인데, 이것 때문에 산통 깨졌어, 빌어먹을!” 운전수는 반쯤 울상이 되어 커다란 핸들을 돌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뼈에는 이상이 없었다. 의사는 정말로 내가 버스에 밟혔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 “굴러서 지면에 긁히기만 한 거 아니야?” 의사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는 발이 완전히 깔린 순간도 봤고, 버스 타이어가 일순 허공에 떠 있는 것도 봤다. 그 때문에 버스가 멈춘 것 아닌가. 경위를 설명하자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에 타코도에서 트럭에 발을 밟힌 환자가 왔는데 말이지, 뼈가 완전히 부스러졌다고.” 이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저씨 차 건도 그렇고, 내 발은 통뼈인지도 모르겠다.
“뼈는 괜찮아도 피부가 완전히 손상됐기 때문에 일주일 정도 지나면 몽땅 떨어질 거다.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고.” 그때는 뭐가 몽땅 떨어지는지 상상도 할 수 없었지만, 계속 통원 치료를 했더니 거대한 딱지 같은 게 몽땅 떨어지긴 했다. 그동안은 학교에도 못 가고 집과 병원만 왔다 갔다 하며 지루하게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반, 같은 줄 친구들이 문병을 왔다. 반 전체가 쓴 위로카드를 들고 말이다. HR(학급회의)시간을 몽땅 카드 쓰는 데 할애했다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내가 사고를 당한 날, 사노라는 같은 반 친구도 충수염으로 입원했기 때문에 이런 대규모 위로 카드 이벤트를 벌였다는 것이다,
종이 봉지에 가득 담긴 위문카드는 그 후 서랍 속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 쓴 채 십여년을 묵었다. 그러다 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이걸 다시 열어볼 기회가 생겼다. 이 종이 상자를 떠올리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끄집어내 펼쳐봤다. 여자 애들이 쓴 ‘얼른 회복해야 해’ 하는 제법 진지한 편지와 장난꾸러기 친구들이 그린 시시껄렁한 그림을 바라보면서 추억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그 자리에서 ‘편지’라는 착상을 얻었다. 생각해 보면 〈러브레터〉의 발단은 〈킹콩〉이었다.
양들의 침묵
영화에는 두 종류가 있다. 악역이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그러나 인간을 좋은 인간과 나쁜 인간으로만 구별할 수 없듯이, 악역과 선한 역도 줄그은 듯 갈라놓을 수는 없다. 어떤 때는 악역이라고 해도 선한 역과 종이 한 장 차이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악역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정의하자면 평화를 파괴하는 자다.
예를 들면 〈멋진 마이 홈〉이라는 영화가 있다고 하자. 주인공은 타이라혼타(平凡太,평범 씨),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그런 그가 최근 마이 홈을 지었다. 어렵게 장만한 소중한 마이 홈 현관에 개똥을 방치해 두는 녀석이나 집 앞에 제멋대로 노상 주차한 녀석은 모두 타이라혼타의 입장에서 보면 악역이다. 분리수거를 하지 않고 몰래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데 이를 수상쩍게 여겨 큰소리로 야단치는 관리인 역시 타이라혼타의 평화스러운 일상을 파괴한다는 점에선 악역이다.
“이봐! 안돼요! 그거 타지 않는 쓰레기잖아요!” 이런 퉁명스러운 관리인도 타이라혼타의 입장에서 보면 아침부터 악역인 것이다. 그런데 그 관리인이 돌아가다 현관 앞에 있는 개똥을 밟는다면 개 주인은 타이라혼타에게 있어서 이미 악역이 아니게 된다. 그런 곳에 똥을 싸줘서 고맙군, 하고 마음속으로 감사하게 될 것이다. 관리인이 구두에 들러붙은 똥을 노상 주차하고 있던 차에 비벼대고 있는데 차 주인이 돌아온다. “어이! 당신! 뭐 하는 거야?” 차 주인이 관리인의 멱살을 움켜쥐는 순간 그는 노상 주차 같은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보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인간은 악한 사람도 되고 선한 사람도 된다.
집에 돌아온 타이라혼타는 가족에게 관리인 얘기를 해서 모두를 웃긴다. 아내는 “그 관리인, 전부터 기분 나빴다고요”라고 말하며 남편의 말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그러고 있는데 벨이 울려서 현관을 여니까 한참 도마 위에 올랐던 관리인이 서 있다. 관리인은 세타가야 청소국의 요일별 쓰레기 분리표를 타이라혼타에게 건네주며, “이거 부엌에 붙여두면 편해요”라고 얘기해주고 간다. 자세히 보니 그 종이 쪽지는 햇빛에 바래서 누렇게 변해 있었고, 압정 자국도 남아 있었다. 관리인이 자기 부엌에 있던 것을 일부러 떼서 가지고 온 게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타이라혼타는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했다. 끝
이야기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그 모양이 변하기 때문에 작가의 책임이 무겁다. 전에 현대에 되살아난 망나니(사형 집행인)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들은 밤이면 밤마다 모여서 모 기업가는 나쁜 녀석이다, 모 일류 기업의 중역은 음흉하다고 말하더니 결국 그들을 죽이러 간다. 왠지 주인공에게 망나니짓을 시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무리하게 악역이 만들어진 듯한 감이 들어,〈울트라 세븐〉이 아닌가 생각했다.
울트라 세븐은 자기도 우주인이면서 다른 우주인을 침략자라며 살해하는 황당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 대가로 인간에게 보수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좋아서 그런 짓을 하고 잇는 것이다. 게다가 세븐은 매주 악역을 하나씩 처치해야 하기 때문에, 작가는 악역을 만들어 내야 한다. 즉 세븐이 M78성운으로 돌아가면 우주인 같은 건 습격해오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해 반쯤 자학적인 결말도 많이 만들어냈다.
안전한 핵 관리가 필요한 오늘날, 우리처럼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악역 관리에 조심을 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역에 대한 관리 책임이 문제시돼 세간으로부터 규탄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 중에서 O. J. 심슨이 역전 승소(형사 재판)로 미국 전역을 술렁거리게 한 것만큼이나 충격저긴 영화가 〈양들의 침묵〉이다. 주인공인 클라리스 스털링은 FBI아카데미의 훈련생이다. 그녀는 최근 빈번해진 수수께끼의 엽기 살인 사건을 맡게 된다. 버펄로 빌이라고 불리는 살인범의 심리를 밝히기 위해 그녀는 정신병원 독방에 감금돼 있는 또 다른 엽기 살인마 렉터 박사에게 조사 협조를 의뢰한다. 클라리스는 만만치 않은 렉터로부터 얻은 정보를 단서 삼아 버펄로 빌을 멋지게 사살하고 표창까지 받는다. 영화가 헤피엔딩으로 돌진하는 순간, 렉터는 거꾸로 경찰을 따돌리고 도주해 몸을 숨기는데 성공한다.
결국 이 영화에는 버펄로 빌이라는 악역과 한니발 렉터라는 악역이 나오는데, 어느 쪽이 유해한가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닥터 렉터 쪽이다. 버펄로 빌도 밤중에 뚱뚱한 여성을 유괴해 집에 감금하고 굶긴 다음 물렁해진 피해자의 피부를 벗겨 그것으로 옷을 만드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지만, 약점은 있다. 실제로 학생인 클라리스에게 걸렸을 정도니까 그렇게 대단한 놈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렉터라는 남자는 국세 조사원을 먹고, 간호사를 먹고, 경비원의 배를 도려내 얼굴 껍질을 벗기고도 밀려드는 추격자들을 가뿐하게 따돌리니, 이 정도면 손을 쓸래야 쓸 수도 없을 지경이다. 버펄로 빌이 잡혀도 이 놈이 도망치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느낌이 들 때 이 영화는 끝난다. 죠스를 잡으려고 에이리언을 데리고 왔더니 정작 에이리언이 달아나더라, 이거다. 상투적인 판을 뒤엎는 스토리를 멋지게 전개해낸 것이 그야말로 아카데미상 감이었다. 엣셔(Mauritis Cornelius Escher,1898-1972, 네덜란드의 판화가로 독특한 기하학적인 방법론을 구사해서 환상적인 우주를 낳았다-역자 주)의 속임수 그림 같은 기묘한 뒷맛도 난다.
원래부터 악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역이라는 시점(視點)이 존재할 뿐이다. 이 관점을 빙빙 돌려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없게 만든 〈양들의 침묵〉은 실로 새로웠다. 그야말로 O. J. 심슨 케이스 같다. 경찰에게 쫓겨 도주하고 있는 모습이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는데도 무죄 판결을 받다니. 미국은 무서운 나라다.
이 치밀하고 정밀한 수법을 흉내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닥터 렉터의 캐릭터는 그 후 악역의 전형이 돼 영화 속에 계속 차용됐다. 그는 머리가 좋고 잔혹하다. 〈세븐〉의 범인 역시 그랬고, 다른 영화에도 이런 타입이 많았다. 그러나 현실로 눈을 돌리면, 요즘 범죄자들 중엔 의외로 이런 사람이 적다는 기분이 든다. 예를 들어 HIV공판에 나온 닥터 아베는 아무리 봐도 닥터 렉터 같은 인물은 아니다. 의사니까 머리가 좋을 것 같지만 에이즈 바이러스가 든 혈액 제정을 사람에게 투여했는지 여부는 자기 자신도 몰랐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자신이 체포될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같다. 토모베 핫쿠난 사건도 그렇다. 이 사람은 카드 깡으로 페라리를 사고 호화 생활을 한 유명한 불한당이다. 체포 직전 텔레비전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한 짓을 이렇게 정당화했다. “그건 불경기에 경기를 활성화시켜주기 위한 거였다고요.” 페라리를 산 게 어째서 경기를 활성화시켜준 것인지 모르겠다. 마키하라 교주(옴 진리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그 백치성. 마치 옛날 영화의 악역같다.
머리도 좋지 않은데 나쁘기까지 한 놈, 이것이 옛날 스타일의 악당이다. 그러다가 점차 렉터 같은 녀석이 늘어나면서 고전적인 악당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현실 세상을 본거지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 사기꾼도 정치가가 되어버리는 요즘, 이런 악역들은 영화 속으로 돌아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