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아버지

   
고건외
ǻ
동아일보사
   
11000
2005�� 04��



■ 책 소개
고건, 김영현, 박근혜, 손숙, 장영희,조영남, 황병기 등 18명의 명사들이 2003년부터 2004년 말까지 시사월간지 「신동아」에 게재했던 글을 다시 엮은 것. 이 책에서 고건 전총리는 조화와 중용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큰 재산이라 꼽고, 소설가 김영현 씨는 흰머리 늙은 아버지가 문간에 지팡이 짚고 서서 끝없이내뱉으시던 기침소리를 추억한다. 연극인 손숙 씨는 아버지에 대한 지독한 그리움을 미움으로 표출했던 성장기를 아프게 떠올린다. 또 장영희 교수는신탁처럼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자신과 아버지 사이의 연을 애틋하게 털어놓는다. 
  
저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도다르고, 아버지와 얽힌 사연들도 다르지만, 그들은 한 목소리로 아버지의 크고 넓은 그늘 아래서 자신의 현재의 삶이 온전히 자랄 수 있었다고이야기한다. "아버지", 그 애틋한 이름을 입 속에서 천천히 되뇌게 하는 책이다.

 


■ 저자 고건 외 
고건 전 국무총리, 김명자국회의원, 김영현 소설가, 김우종 문학평론가, 김정원 세종대 석좌교수, 박근혜 국회의원, 손봉숙 국회의원, 손숙 연극인, 안강민 변호사, 유영구명지학원 이사장, 윤은기 IBS컨설팅그룹 회장, 이두호 만화가, 이이화 역사학자, 이인호 전 주 러시아 대사, 장영희 서강대 교수, 조영남가수, 채윤희 올댓시네마 대표, 황병기 국악인


■ 차례
참선과 모차르트_고건 
이것이 정말명문이구나!_김명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_김영현 
인색해서 성공한 장사꾼은 없다_김우종 
독재 위해 일하는 그날부터 내 아들이아니다_김정원 
아버지의 딸로서_박근혜 
나를 설득해봐라_손봉숙 
아버지 이름은 하라 에이사쿠_손 숙 
어느새닮아버렸습니다_안강민 
기도가 왜 그리 길어? 찌개 다 식을라_유영구 
내 삶의 연출자_윤은기 
아버지와 놋그릇_이두호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_이이화 
부모만한 자식 없다_이인호 
나 그대 믿고 떠나리_장영희 
놀멘 놀멘 하라우_조영남
안방에 걸린 윤정희 달력_채윤희 
아버지의 춤사위_황병기




나의 삶 나의 아버지


참선과 모차르트 - 고건, 전 국무총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모두들 호상이라고 했다. 아흔아홉이 백수를 누리면서 끝까지 맑은 정신을 간직하다 돌아가신 점이 그렇고, 철학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생활에서는 정치와 참선을 두루 경험한 남다른 인생경로를 놓고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맞는 말이다. 참으로 복 받으신 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여읜 자식의 서운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요즘도 늘상 아버지가 떠오른다. 시국이 어수선할 때,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면 더 그렇다.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판단하셨을까. 그만큼 아버지는 일생을 통해 나를 일깨워주던 분이었다.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조언을 해주시며 항상 버팀목이 되었던 최고의 자문역이자 의논상대였다.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철학 선생님이다. 내가 태어날 무렵 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이 기억은 대부분 연세대 부근에 머물러 있다. 한때는 서강 와우산 아래에서 살았고, 한때는 신촌 안산 아래에서 살았다. 내가 서울 신촌의 창천초등학교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무척 자상한 가정교사였다. "이게 뭐예요, 저게 뭐예요"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짜증 한번 내는 일 없이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때때로 "이게 뭘까, 너 아니?"하고 오히려 질문을 유도하기도 하셨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선생님께 질문한다는 것이, 손을 들고는 "아버지이~"하고 운을 떼는 바람에 반 아이들이 놀림감이 되었을까.


내가 고시에 합격해 내무부 지방국의 수습행정사무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1962년, 아버지는 군정반대의 선봉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르셨다. 그 다음 해 총선거에서 통합야당인 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셨다. 국회에서는 윤보선 야당 대통령부호 아래에서 당의 정책위원장과 사무총장 등의 요직을 맡았다. 군사정권을 상대로 가시밭을 걷는 듯한 야당 정치활동의 선봉장이 되셨던 셈이다.


아버지가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 나 역시 그 여파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고시 합격자들은 1년 반 후 자동으로 수습 딱지를 떼고 보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고시 동기들은 때가 되자 모두 중앙부처의 계장이나 지방의 군수로 발령이 났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나에게만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보직 없는 공무원 생활은 기약 없는 셋방살이와 같았다. 권한과 책임이 없으니 일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고 놀아도 노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가 강성 야당 정치인이라는 점말고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행정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마땅하건만 나라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상황에서 야당 정치가인 아버지와 행정가인 아들의 입지는 운명적으로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6대 국회의원 4년 임기를 마친 뒤 정치인의 뜻을 접고 다시 철학자의 자리로 돌아오셨다. 반면 나는 본격적으로 전문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나의 공직생활이 당신의 뜻을 펼치는 또 다른 방편이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내가 공직에 나아갈 때마다 친인척들에게 청탁금지령을 내리고, 항상 기성 정책의 건전한 비판자,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자임하시며 내가 관료적인 타성에 젖지 않도록 엄한 감독의 눈으로 지켜보셨다. 또, 내가 공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평생을 현실 속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지키며 공직자의 길을 걸어온 나와 달리, 아버지는 높은 정신세계 속에서 유유자적한 분이었다. 한평생 공직에 몸담고 절제하며 사느라 별 재미를 키우지 못한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멋을 아셨다. 우리 집안의 딸들과 며느리들은 집안 남자 가운데 제일 멋있는 남자로 아버지를 꼽는다. 하이데거를 읽으시던 서재의 벽은 은은한 옥색 한지로 도배를 하였고, 난초를 키우고 가야금과 창을 배우셨다. 불교철학을 연구하실 때에는 모차르트 음악에 심취하기도 하셨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멋을 잘 모른다. 베레모 같은 것을 쓸 엄두도 못 내봤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추구하신 멋의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와 불교철학, 참선과 모차르트. 아버지는 상반되어 보이는 것 속에서 조화를 얻으려고 하셨던 건 아닐까.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쏠리기 쉬운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중용과 평형을 찾아내고 화이부동하며 원융회통을 이루는 것, 이런 마음가짐 속에서 나와 만년의 아버지는 무언으로 통했다. 조화와 중용의 정신이야말로 큰 키, 남다른 건강, 뜻한 일은 이루어내는 의지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아버지는 가셨다. 멋있던 아버지, 어려서는 자상한 가정교사였고 자라서는 따뜻한 후원자였으며 장성해서는 공직생활의 든든한 자문역이었던 아버지는 떠나셨다. 아버지가 키우던 난초는 며느리들이, 남쪽 창 밑의 대나무는 내가 가꾸고 있다. 잘 자란다. 그러나 잘 자랄수록 떠나간 아버지의 흔적이 더 크게 느껴진다. 당시에는 벅찬 일정에 번거롭기도 했던 깨알같은 글씨의 가신이 너무도 그립다. 세상이 소란하고 앞이 안 보일수록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나는 더욱 허전하게 만든다.



어느새 닮아버렸습니다 - 안강민, 대검찰청 형사부장, 현 변호사
가끔씩 내 모습과 행동에 당신이 심어주신 것들이 남아 있음을 느끼며 나 홀로 있는 것 같지 않아 가슴 한 편이 든든하다. 그래서 일까 어려운 일이 생기면 꼭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를 떠올리곤 한다. 나는 30년 가까이 검사로 재직하며 나름대로 충실히 공직생활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 나름대로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어릴 때 아버지께서 몸에 배도록 물려주신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1913년 경남 울삼군 하상면 양정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리광을 피울 법한 막내였지만 여섯 살 때 천자문을 뗄 정도로 총명하셨다고 한다. 문화정책으로 일제의 위세가 심해지던 1930년대 초, 아버지는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마을에 야학을 만들어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치셨다. 그때 나이가 고작 열일곱, 여덟 살이었으니 젊어서부터 강직하고 소신 있는 성격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스물 한 살 때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하셨다. 해방 후에는 거창 군수로 부임하셨다. 당시는 우익을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지만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한 때였고, 특히 지리산이 걸쳐 있는 거창은 빨치산 활동이 대단했던 곳이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전해인 1949년 여름, 지리산 빨치산의 습격으로 거창 군청이 전부 불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정부는 빨치산 토벌을 위해 백두산 호랑이란 명성을 떨치던 김 모 대령을 급파했는데 김 대령은 공비와 접선한 주민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감정이 좋지 않던 주민들이 서로 밀고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섞여들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김 대령을 막아서며 항의했다. 김 대령은 권총을 뽑아 들고 협박했으나, 아버지는 "차리리 군수인 나를 쏘시오"하며 대항하셨다고 한다. 당시는 군수라고 해도 한 순간에 빨갱이로 몰릴 수 있는 시절이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입을 다물고 계서도 그 침묵을 향해 누구도 돌을 던질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김 대령은 그 결연한 의지에서 진실을 읽었는지 결국 상당수 주민들을 풀어주었다. 후일 거창군민들은 이에 대한 고마움으로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한사코 거절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행적으로 늦게 갈 수도 있지만 바른 길로 가는 방법을 보여주셨다. 초스피드 시대인 지금 그렇게 행동하면 둔한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나 또한 어쩌면 둔한 사람의 부류에 속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가슴 한 편이 뿌듯해지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볼 때, 아버지의 교육방식은 대단히 민주적이었다. 주눅이 들게 다그친 적도 없거니와 매를 든 적도 없었다. 잘못한 것이 있을 때는 불러서 알아듣도록 타일러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여 더욱 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런 아버지 앞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5학년 여름방학이 끝나 개학을 눈앞에 둔 날이었다. 나는 반에서 줄곧 1등을 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하는 개구쟁이였다. 그러한 나는 아버지께서 부르시더니 "숙제는 다 마쳤느냐?"고 물으셨다. 놀이에 빠져 있던 나는 엉겁결에 "다했습니다"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것이 발단이었다. 숙제를 하지 않은 사실이 곧 들통나 처음이나 마지막으로 아버지로부터 크게 매를 맞았다. 호되게 매를 드시고 난 아버지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일화를 이야기하시며 거짓말이 얼마나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지 일러주셨다. 그때 나는 아버지와 약속을 했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그 약속을 지켰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기자들이 쓴 책에서였다. 나는 대검 중수부장 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을 조사하게 되었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큰 사건이었던지라 그 사건 수사가 끝난 뒤 조선일보 법조출입기자 팀이 『각하, 찢어버립시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는 취재 뒷이야기를 기술한 부분이 있었는데 수사 총책임자인 나에 대한 평가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 책에서 기자들은 나는 거짓말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하였다. 사회의 목탁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했으니 나는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킨 셈이다.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는가. 수사에는 수사 기술상 미리 공개하지 못할 비밀이 많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약 2개월에 걸쳐 매일 기자회견을 하면서도 기자들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고 공개하지 못할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며 정면으로 대응했다. 물론 은유 등으로 농담도 섞어가면서….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훈계를 해 줄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기회가 있으면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을 후배나 자식들에게 들려주곤 한다. "실수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결코 그 실수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실수는 인간이기에 할 수 있지만 거짓말은 인간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정직만큼 훌륭한 재산은 없다는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그렇다. 정직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좋은 그릇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재산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정직과 성실을 아버지의 유산 중 가장 큰 재산으로 아끼며 이를 나의 두 아들에게도 물려주면서 살아가고 있다.



고집불통 선비가 그립다 -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내 이름 앞에는 어김없이 나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 내 아버지 야산 이달 선생의 행적이 주변에 많이 알려진 탓일 게다. 우선 당신의 제자들이 대구, 대전, 서울 등지에 퍼져 살면서 스승에게서 배운 주역을 강의했다. 그 가운데 한 분인 대산 김석진 옹이 아버지의 학문과 행적을 담은 『스승의 길, 주역의 길』이란 책을 펴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했고, 조용헌 교수는 아버지의 기행같은 행적을 담은 글을 신문에 연재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생애는 신비스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1889년 지례 원터(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에서 몰락한 향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한문을 배울 때부터 집안 어른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성장해서는 독학으로 주역을 독파했다 한다. 3?1운동 소식을 뒤늦게 듣고는 김천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 잡혀 취조를 받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를 둘러싸고 주역 읽다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탓인지 아버지는 이내 풀려났으나 그때부터 특별 감시 대상이 됐다. 아버지는 1930년대 이후 식민지 전시체제 아래에서는 일본이 강요하는 신사 참배나 동방요배(東方遙拜) 또는 묵도(?禱)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해방 무렵에는 가족을 전북 이리(지금의 익산)에 둔 채 전국을 분주하게 유랑했던 것 같다. 또, 해방 후에는 가족마저 대둔산 아래 수락리에 옮겨 두고 당신은 대둔산 석천암에 자리잡은 채 주역을 가르쳤다. 아버지를 찾는 사람은 점점 더 늘었다. 그 무렵 나도 산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나는 어른들 틈에서 호된 수업을 받으면서 야뇨증과 말더듬증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석천암에서 108명의 제자를 기르면서 정치를 해보라는 친구들의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현실정치만큼은 철저하게 외면하셨다. 경찰관, 사회주의자, 친일파, 순수한 한문쟁이 등 다양한 배경의 제자들은 서울 말씨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사투리를 뒤섞어가며 밤이면 밤마다 열띤 논쟁을 벌였다. 어린 나는 이런 논쟁에 늘 귀를 기울였다. 가끔 그들이 들고 오는 신문도 열심히 읽었다.


나는 이곳에서 3년을 지낸 뒤 6?25 전쟁 직전 아버지를 따라 서산 안면도로 이주했다. 좁은 안면도에 300여 호의 주역 패가 몰려들었으니 화젯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아버지가 3년간 살던 대둔산 수락리와 석찬암이 전쟁 말기에 빨치산의 손에 넘어가 모조리 불타버리고 안면도만 안전만 안전한 피난지가 되었으니 세상 사람들은 야산 선생을 신통한 예언자로 받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출할 무렵 어머니는 이리에서 부여읍내로 옮겨 와 살고 계셨다. 어머니에게만 가출의 결심을 밝히고 여비를 얻어냈다. 어머니는 외가로 가서 외삼촌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보라고 일렀다.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경북 성주에 있는 외가로 달려갔다. 외삼촌들은 나를 극진하게 맞아주긴 했으나 학교에 보내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무렵 나는 머무르는 곳의 주소를 쓰지 않은 채 아버지에게 가출의 뜻을 밝힌 한문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렇게 외가에서 1년쯤 빈둥거리다가 어릴 적부터 나를 무척 아껴주시던 고령의 이모부 댁으로 거처를 옮겼다. 트럭을 얻어 타고 낙동강을 건너 대구를 왕래하면서 이발소 같은 데로 일자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 야간학교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상계』 애독자였는데, 이는 한문 실력 덕분이었다. 인문과목의 선생님들만큼은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이 모든 것이 아버지 탓이 아닐까? 아버지는 나의 가출죄에 면죄부를 주셨다. 학교에 입학한 뒤 나는 큰마음을 먹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나를 한동안 멀거니 쳐다보시다가 "나가라"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것으로 용서를 받음 셈이었다.


당시 들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내가 가출한 뒤 어느 제자가 방문을 열어보니 아버지는 혼자 앉아서 눈물을 글썽이고 계셨다고 한다. 평소에 보지 못한 광경이어서 그 제자가 까닭을 물으니 "자식이 집을 나갔는데 어느 부모가 가슴이 아프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더란다. 또, 내가 가출하면서 적어 놓은 편지를 보고는 "편지 쓰는 법을 일러주지도 않았는데 제법 썼다"며 칭찬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버지로부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칭찬을 받은 사건이라면 사건이다.


내가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역사관을 형성하는 데에는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나는 처음부터 막연하게나마 민족사와 민중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역사는 무수한 외침에 시달린 끝에 식민 지배를 겪고 분단 구조 아래에 놓여졌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민족사를 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사관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 역시 아버지의 척사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으리라. 다음으로는 민중사적 접근이었다. 이는 곧 우리 역사에서 가난한 사람, 소외당한 사람, 차별 받은 사람들을 복권시키는 작업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경상도 사람들이 몹시 싫어하던 전라도로 가족들을 이사시켰으며 전라도 출신의 처자를 셋째 며느리로 맞았다. 당신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이면 평안도 출신이건 전라도 출신이건 지역을 따지지 않았고 사회주의자건 친일파건 백정이건 천민이건 가리지 않았다. 더욱이 당색 따위의 묵은 관념에 젖지도 않았다. 이것도 당시 부유의 통념을 깨는 일이었다. 나는 이런 아버지의 행동철학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혈연적 관계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나 인생관 형성에도 아버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갈등을 겪으며 아버지의 권위와 손아귀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아버지와 나는 긴장관계의 연속이었다. 이 양면의 의식 구조는 지금도 나에게 자유로움을 주지 못한다.


이 글을 쓰려고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며 옛일을 회상해보았다. 지금쯤 부자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면 아버지는 대꼬바리(어릴 적 담뱃대를 이르던 말)로 내 이마를 내리치시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실 것 같다. 내 이마엔 조그만 흉터가 남아 있다. 아버지가 내리치신 대꼬바리에 맞아 생긴 것이다. 지금도 희미하게 남은 흉터를 만져보며 빙긋이 웃는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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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