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요일의 여행

   
김민철
ǻ
북라이프
   
13500
2016�� 07��



■ 책 소개

 

낯선 삶의 틈에서 ‘나’를 찾아가는 카피라이터의 여행법

 

여행만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는 게 또 있을까. ‘여행’이라는 빛 아래에서는 ‘애써 외면했던 게으름이, 난데없는 것에 폭발하곤 하는 성질머리가, 떨칠 수 없는 모범생적 습관’까지,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나답다’고 믿었던 것들로부터 더욱 벗어나보는 건 어떨까. 익숙한 공간과 익숙한 시간에서, 익숙한 생각과 익숙한 행동만 해왔다면 말이다.

 

전작《모든 요일의 기록》을 통해 일상에서 아이디어의 씨앗을 키워가는 카피라이터만의 시각을 담백하고 진실된 문장으로 보여준 저자 김민철은《모든 요일의 여행》에서 ‘기록하는 여행자’가 되어 자기만의 여행을 직조해가는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 저자 김민철
저자 김민철은 남자 이름이지만 엄연히 여자. 카피 한 줄 못 외우지만 엄연히 카피라이터. 그 흔한 공모전 한번 안 해보고 광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잡다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렴풋하게’ 안다는 이유로 2005년, 광고대행사 TBWA KOREA의 카피라이터가 됐다.

 

광고를 너무 몰라 회의 시간 치밀한 필기를 시작했고, 그 회의록을 바탕으로 《우리 회의나 할까?》라는 책을 냈다. 기억력이 너무 나빠 평소에 다양한 기록을 시작했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모든 요일의 기록》이라는 책도 냈다.

 

12년째 박웅현 CCO팀에서 일하며 SK텔레콤 ‘사람을 향합니다’, T ‘생각대로T’, e편한세상 ‘진심이 짓는다’, SK이노베이션 ‘혁신을 혁신하다’, 일룸 ‘가구를 만듭니다’ 등의 캠페인에 참여했다. 몇 초만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몇 달 동안 고민하는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고 있다.

 

■ 차례
프롤로그

일상을 떠나, 일상에 도착하는 여행
숙소와 여행
반성문을 쓰는 여행
고향을 찾는 여행
책을 따라 떠나는 여행
영원히 반복되는 여행
일요일이 있는 여행
단골집을 향해 떠나는 여행
마법의 질문을 가지는 여행
한 가지를 위해 떠나는 여행
사랑스러운 결점으로 가득 찬 여행
좋은 술을 영접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한 시간짜리 도시 마니아의 여행
유용한 여행 무용한 여행
나의 무능한 여행 짝꿍
달라진 나를 만나는 여행
대학로 그 밤의 여행
청춘에 답장을 보내는 여행
선입견을 내려놓고 떠나는 여행
희망을 고집하는 여행
주름살이 없는 여행
천사를 만나는 여행
망원동 여행

 




모든 요일의 여행

숙소와 여행

‘떠난다’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도착한다’라는 말에 도착한다.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는 유목민은 없는 것처럼, 끊임없이 떠나기만 하는 여행자도 없다. 우리는 떠난다. 그리고 반드시 어딘가에 도착한다. 그것이 여행자의 숙명이다. 문제는, 어디에 도착하느냐는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났지만 여행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일상에 도착하고 싶었다. 일상을 떠났으면서 다시 일상에 도착하고 싶다는 이 모순.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하는 숙제였다. 어느새 내 여행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방법부터 달라져야 했다.


가장 먼저 내가 바꾼 것은 숙소였다. 분명 호텔의 미덕이 있다. 하얀 시트와 깨끗하게 정리된 방과 푸짐하게 차려낸 아침. 일상에서는 만나기 힘든 말끔한 얼굴들. 누군가는 호텔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이 시작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것은 서울이나 파리나 도쿄나 다 같은 얼굴을 한 호텔방이 아니었다. 하얀 호텔방의 익명성이 아니었다. 멸균된 그 공간을 거치지 않고 속살로 직행하고 싶었다.


답은 집을 빌리는 것이었다. 단 며칠짜리 집이어도 우리 집이 필요했다. 비슷하지만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도시마다의 시장에 갔다가 돌아올 골목이 필요했다. 양손 가득 낯설고 궁금한 재료들을 사서 돌아올 대문이 필요했다. 서툰 실력을 뽐내며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부엌이 필요했다.


신기한 맛의 음식을 두고 술 한잔할 테이블이 필요했다. 그 음식보다 더 맛있을 창밖 풍경도 필요했다. 너무 비싼 집도 필요 없었다. 그런 집은 나의 일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깨끗했으면 했다. 남의 허물까지 치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아무리 일상을 꿈꾸어도 이건 여행이니까.


알랭 드 보통이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만약에 ‘좋은 식사와 나쁜 숙소’, ‘나쁜 식사와 좋은 숙소’중에 고르라면 뭘 고르겠는가?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 누군가 꺼낸 이 질문에 저마다 다른 선택을 했다. 곰곰이 선택해봤지만 나는 아무래도 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호텔 대신에 집을 택하고, 중심가의 비싼 숙소보다는 중심에서 비껴난 곳의 싼 숙소를 택하는 내 성향을 생각해봤을 때, 좋은 숙소에 대한 미련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후 여행을 떠날 때마다, 새로운 숙소에 도착할 때마다, 그 질문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나는 정말로 좋은 식사와 나쁜 숙소를 택하는 사람인가? 몇 개월 동안 고심해서 고른 이 평범한 숙소가 지금 내겐 이토록 완벽한데? 수십만 원짜리 호텔과 이 숙소중에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숙소를 택할 텐데? 그 질문이 나를 따라다닌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좋은 식사와 나쁜 숙소를 택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좋은 식사가 꼭 비싼 식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나에게 좋은 숙소의 기준이 그다지 높지 않고, 그다지 비싸지 않을 뿐인 것이다.


파리에서의 숙소가 떠올랐다.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머물러야 했기에 비싼 숙소는 곤란했다. 방학이라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한 유학생의 방을 빌렸다. 파리에서 가장 트렌디한 지역에 있는 숙소를 하루 3만 원 정도의 가격에 빌릴 수 있다니! 운이 좋다, 라고 생각했다. 이십대 초반의 그 남자는 입이 닳도록 청결을 말했다. “마지막에 떠나기 전에 이불 빨래를 한 번 해주시고요, 그리고 변기 청소는 옆에 있는 세제로 꼭...” 이토록 청결을 중요시하다니, 역시 나는 운이 좋다, 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깨끗하게 잘 쓰고 돌려드릴게요, 라고 말하면서 살짝 긴장도 했다. 하지만 그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이십 대 초반 남자의 청결 기준이란 삼십 대 주부의 청결 기준과 꽤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숙소는 엉망이었다. 매트리스가 너무 푹 꺼져 있어서 하루만 자도 허리가 아팠고, 제대로 된 의자 하나 없었다. 너무 낡은 이불은 보온도 잘 안된다는 걸 그 집에서 배웠다. 어느 밤엔 너무 추워서 남편을 난로 삼아 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숙소는 우리에게 완벽한 숙소였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창문을 활짝 열고 그 앞에 식탁을 차렸다. 노을이 지는 걸 보며 와인을 마시고, 1층에서 경비 아주머니가 화단에 물 주는 걸 보며 아침을 차렸다. 살살 걸어 공원에 가서 술을 마시다 돌아왔고, 그 좁은 집에서 빨래를 재주 좋게 널었다. 빛이 너무 좋았던 어느 일요일엔 집에서 오후 내내 뒹굴기도 했다. 늘 음악을 크게 틀었고, 늘 하늘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 숙소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갔다. 완벽한 파리는 그 집에서 완성되었다.


좋은 숙소는 중요하다. 좋은 식사만큼이나 여행에서 중요하다. 다만 좋은 숙소가 꼭 비싼 숙소는 아니다. 지금 내게 좋은 공간, 내가 편안해지는 공간, 샤워기는 좀 불편해도, 화장실이 좀 좁아도, 컵들은 하나같이 짝이 안 맞아도, 나무 바닥이 삐걱거려도, 매트리스가 좀 딱딱해도, 나에게 좋은 숙소란 나의 일상 같은 숙소였다. 완벽해 보이진 않지만, 내 몸을 구겨 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숙소. 긴 하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 편안하게 한숨을 내쉴 수 있는 숙소. 완벽하진 않더라도 내겐 완벽한 숙소. 수많은 집들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 집들에 도착하기 위해 다시 여행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일요일이 있는 여행

여행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동시에,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기 만들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그저 비가 오는 것뿐인데, 세상이 나를 등지는 기분이 든다. 그저 몇 개의 가게가 문을 닫았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향해 문을 닫는 느낌이다. 한 가게 주인이 나에게 불친절했을 뿐인데, 온 도시가 나에게 불친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저 길을 못 찾았을 뿐인데, 이 여행 전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마음이 과장법은 순식간에 여행자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버린다.


다름 아니라 포르투에서 내가 그랬다.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내렸고, 도무지 그칠 기미가 안 보였고, 거기에 일요일이라 모든 가게는 문을 닫았고, 용기를 내서 조금 움직여보아도 갈 곳은 없었다. 몸만 흠뻑 젖을 뿐이었다. 바로 어제, 해가 났을 때의 이 도시를 떠올려보니 불행의 강도는 더 크게만 느껴졌다. 어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나였는데,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내 마음이 과장법에 내가 넘어져버린 것이다.


서울이라면 이런 날씨에 가기 좋은 카페를 알고, 이런 날씨에 낮부터 술 마시기 좋은 술집도 알고,무엇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좋을 우리 집이 있는데, 낯선 도시의 이방인에겐 도대체 어떤 정보도 없었다. 거리에 아무도 없는 걸 보면 나를 뺀 모두가 어딘가에 모여 좋은 시간을 보내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지만, 그곳이 어딘지 나는 몰랐다. 가만히 서 있었는데 쫄딱 젖었다. 갑자기 내가 오랫동안 여행을 간다고 말했을 때 “힘들겠다”라고 말한 어떤 분의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어떻게 여행이 힘들 수 있단 말인가, 반항심까지 생겨났었지만 이제는 백 번 공감했다.


여행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모든 불행에 대처하는 방법은 아무도 모른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그때그때 답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브라운이 말했다. ‘인생이란 책에는 뒷면에 정답이 없’다고. 정확하게 같은 결론이다. 여행이란 책에도 정답은 없다. 그 순간, 그 장소에서 나의 선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쫄딱 젖은 남편이 말했다. 그래도 어딘가 우리를 구원할 곳이 있지 않을까 여행책을 뒤적이는 나에게 남편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행에도 일요일이 필요해.”


그 한마디에 욕심이 버려졌다. 평일만 있는 일상이 잔인한 것처럼, 열심히 여행하는 순간만이 가득한 여행도 잔인한 것이었다. 여행에도 일요일이 필요했다. 포르투의 비 오는 일요일, 우리의 선택은 그날을 ‘일요일답게’ 보내는 것이었다. 마트에 들어가서 볶음밥을 포장했다. 궁금했던 과자를 샀다. 할아버지가 장바구니에 담는 와인을 우리도 담았다. 이것저것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밥을 먹고, 침대에 누워 예능 프로그램을 다운 받아 봤다. 낮술을 마셨고, 낮잠을 잤다. 보란 듯이 시간을 낭비해버렸다. 우리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네, 라며 낄낄거렸다.


해가 저물자 어김없이 불안함이 밀려왔다. ‘정말 이래도 되나, 이럴 거면 왜 여기까지 왔나.’ 죄책감까지 뒤엉켰다. 애써 그런 생각들을 버리려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내가 또 나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해는 졌다. 기어이 죄책감을 버리고 그 자리에 ‘나는 여기까지 와서 배짱 있게 이러고 있다’라는 자부심을 채워 넣었다. ‘어차피 이 비에 어딜 간다고 제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합리화도 채워 넣었다. ‘이 비에 뭘 더 보겠다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다’라는 고집도 채워 넣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나한테 계속 말해주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라고. 일요일이 괴로운 이유는 월요일 때문이지만, 내일은 여행이 계속되는 월요일이라고. 그러니 일요일 밤의 이 괴로움은 집어치우자고. 여행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유용한 여행. 무용한 여행

이 세계에서 우리는 유용해야 한다. 지나치게. 유용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자야 하고, 유용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 먹어야 하고,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쉬는 데에도 유용함은 빠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휴가의 목적을 ‘리프레쉬’라고 말하겠는가. 리프레쉬. 단어가 프레쉬해 보인다고 속으면 안 된다. 실은 일하기 좋은 상태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평가의 기준은 언제나 우리의 유용함이다. 그러니 일상 속에서 꿈꾸는 사치는 이런 것이다. 햇빛 아래 맛있는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책을 읽거나 멍하니 먼 곳만 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만 구경하거나 그러니까 있는 대로 여유를 부리는 텅 빈 시간, 한껏 무용한 시간.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한껏 무용해지자 마음을 먹는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라며 짐짓 호탕하게 말해본다. 하지만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마음에는 다시 유용함이란 기준이 자리 잡는다. ‘언제 또 올 수 있겠어?’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것도 못 보면 아깝잖아.’ 등등 유용함은 각종 핑계를 달고 여행 한가운데에 뻔뻔하게 자리잡아버린다. 그리하여 ‘무용하자’라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로 여행자의 스케줄은 봐야 할 것, 가야 할 곳, 먹어야 할 것, 사야 할 것 등등 유용한 것들로만 빼곡히 들어차게 된다. 무용하고 싶지만 무용한 시간을 견딜 힘이 우리에겐 없는 것이다.


무용한 여행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프랑스 디종에 도착한 것이다. 디종에 간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가고 싶은 소도시로 가는 버스가 디종 터미널에 있었기 때문에. 디종에 3일이나 머물게 된 이유도 간단했다. 내가 가고 싶은 소도시로 가는 버스가 일요일 오전에만 있었기 때문에. 만약 디종에게 인격이 있었다면 이건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디종 머스터드를 맛보기 위해 그 도시를 일부러 찾는데, 우리는 디종을 순전히 중간기착지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디종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지도 한 장 손에 없었다.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정보는 전날 식당에서 옆자리에 앉은 미국인 부부가 꼭 가보라며 알려준 술집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디종에 도착한 우리는 집주인을 만나 열쇠를 받고, 예쁜 집 상태에 만족을 하고, 미국인 부부가 알려준 식당으로 걸어가 플랑쉐를 시키고, 감탄하고, 다 먹어치우고, 살살 걸어 장을 보고, 또 살살 걸어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디종에서의 우리는 한가했다. 그냥 집 앞 광자에 나가서 책을 읽고 시장에 들러 구경 좀 하고 또 광장에서 책을 읽고 술을 마시며 이 도시에 다시 올 일이 없겠구나, 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때 한 아저씨가 눈에 띄었다.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며 커다란 분수에 혼자 발을 담그고 있는 아저씨였다. 여름 한낮 디종은 그야말로 고요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렸고, 태양은 가공할 만한 위력으로 내리쬐고 있었고, 카페 차양 아래 사람들이 앉아 맥주를, 와인을,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아저씨가 앉아 있었다. 그 아저씨를 내가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목적도 없고, 방향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텅 빈 시간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아, 내가 이 순간을 정말 그리워하겠구나. 파리보다도, 남프랑스보다도, 더 그리워하겠구나. 유명한 관광지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이 광장은 그리워하겠구나. 특색 없는 이 맥주가 간절해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아무것도 아닌 이 카페가. 지금 이 기분이, 나른함이, 이 속도가, 저 멍한 시선이,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이 모든 무용한 시간이 그 무엇보다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겠구나.


예감은 정확했다. 바쁘게 회사 일을 하다가 문득, 밥을 먹다가 문득, 지하철 안에서 문득, 이상하게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그런 순간들이다. 너무 아무것도 아니라서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순간들. 그리하여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그리움들. 이런 그리움이 유난히 지독한 날에는, 약이 없다. 다시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다. 유용한 시간을 그만두고 무용한 시간을 찾아 길 위에 다시 설 수밖에 없다.


주름살이 없는 여행

남의 여행은 남의 떡이다. 언제나 더 커 보이고, 언제나 윤기가 흐른다. 흠집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고, 부러운 행운만 넘쳐 흐른다. 어쩜 그 여행의 풀밭은 그토록 푸르른지. 남의 여행을 직접 이야기로 듣는 시대를 지나, 이제 블로그에서, 각종 SNS에서 남의 여행을 보게 되면서 이 증상은 좀 더 심각해진다. 앞뒤 맥락 따위 존재할 수 없는 그 찰나의 사진 한 장을 보며 우리는 여행에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주름살을 제거해버린다. 저 여행은 모든 것이 풍족해. 저 여행은 커피 잔에 떨어지는 빛 하나까지 어쩜 저렇게 완벽할까. 저 사람은 내내 행복하기만 할 거야. 같이 간 사람이랑 싸우는 일도 없겠지. 돈이 왜 부족하겠어. 돈이 부족하다면 저런 걸 사지도 못하지. 여행은 왜 또 저렇게 자주 가. 시간도 넘쳐나나 봐. 명백히 세상은 엄친아들의 여행으로 넘쳐난다.


알고 있다. 나의 여행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보일 것이란 사실을. 내가 나의 SNS를 보고 있어도 이토록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여행이 없어 보인다. SNS에서는 내가 방금 버스를 놓쳤다는 사실도, 어마어마하게 바보짓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도, 엄청 비린 생선을 엄청 비싼 돈에 먹었다는 사실도 편집된다. 잘 재단된 사진과 함께 올라가니까 나조차도 내가 완벽한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착각을 하게 된다. 사진 밖의 나는, 현실의 나는, 언제나, 어김없이, 햇빛 알레르기와 싸우는 중인데 말이다.


햇빛 알레르기. 말 그대로 햇빛이 닿는 부분이 빨갛게 부어오르며 미치도록 가려운 증상. 증상은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는 1~2분만 햇빛에 노출이 되어도 부어오르고 미치도록 가렵다. 그리하여 대학교 때 첫 여행을 결심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원에 가는 일이었다. 혹시라도 서울 의사는 이 병을 고칠 수 있는가 하고. 이렇게 저렇게 진찰한 의사는 나에게 말했다.


“햇빛 알레르기네요.”

“네.(나도 알아 그건. 그러니까 병원에 왔잖아.)”

“햇빛 보시면 안 돼요.”

“(그딴 대답 들으려고 내가 진료비를 내는 게 아니야.) 근데 제가 이번 여름에 여행을 가는데 어떡하죠?”

“햇빛 보시면 안 돼요.”


저딴 걸 처방이라고 돈을 내고 나오며 나는 여름을 포기해버렸다. 동남아 리조트에 가서도 수영은 꿈도 못 꾼다. 긴팔 긴바지를 입고 그늘에 앉아 책이나 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여름 나라로 여행이라도 간다면 낮에 돌아다니는 건 꿈도 못 꾼다. 하루 종일 카페 같은 곳에 틀어박혀 있다가 해가 진 후에야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해변에 누워 선탠하는 사람들의 사진만 봐도 내 피부가 따끔따끔해지는데, 햇빛을 보기만 해도 온몸이 난사당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 햇빛 포탄이 땅 위로 떨어지고, 나는 그걸 피해 그늘로만 그늘로만 뛰어다니고, 그래서 누가 뒤에서 본다면 꼭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 텐데. 그렇게 조심하는데도 끝없이 피부는 간질간질한데.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내게 ‘여름 휴가’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여름엔 무조건 실내가 답이었다. 회사 혹은 집, 집 혹은 회사.


덕분에 나는 늘 겨울에 여행을 떠난다. 겨울에 여행을 가면, 당연히 날씨가 안 좋다. 당연히 잠이 늘어난다. 우산까지 매일 들고 다녀야 한다. 해는 일찍 진다. 당연히 여행 시간이 짧아진다. 크리스마스나 새해까지 겹치면 도대체 문을 여는 가게가 없다. 너무 추운 날엔 오돌오돌 떨다가 자꾸 실내만 찾게 된다. 물론 겨울 여행이라고 단점만 있는 건 아니다. 겨울이라서 사람이 없다. 겨울이라서 어디든 줄이 짧다. 겨울이라서 숙박비도 싸다. 겨울이라서 사람들 인심도 좋다. 비수기라 어딜 가든 관광객보다 현지인들이 많다. 덕분에 이야깃거리도 더 많이 생긴다.


결국 겨울 여행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햇빛 알레르기에 꼭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결론에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물론, 이 결론은 거짓이다. 햇빛 알레르기에 좋은 점이 뭐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좋은 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햇빛 알레르기의 좋은 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완벽한 여행이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여행은 오직 남의 SNS에만 존재할 뿐이다.


망원동 여행

나는 대구 출신이다. 대구에서 태어났고, 20년을 대구에서 살았다. 남편은 울산 출신이다. 울산에서 태어났고, 역시나 20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고 우리 둘은 서울 망원동을 고향이라 생각한다. 안다. 이 결론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망원동에 1년밖에 안 살았을 때 내린 결론이다. 우리의 고향은 망원동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몇 번의 이사를 감행하면서도 이 동네를 고집하고 있다. 떠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가 우리 고향이니까요. 망원동이 우리 고향이라니까요. 누가 함부로 고향을 떠나나요?


처음부터 이 동네를 잘 알았던 건 아니다. 아니 이런 동네가 있는 줄도 몰랐다. 신혼집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홍대에서 밀려 밀려 이 동네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부동산 아저씨의 차가 낯선 동네 커다란 운동장 옆을 지나는 순간 어디 외국에 온 건 줄 알았다. 무슨 잠실구장도 아니고, 저렇게 큰 운동장이 왜 동네에 있지? 이상하게 낭만적이었다. 운동장 끝에는 아파트 하나가 덜렁 서 있었다. 막연하게 저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부동산 아저씨는 그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어쩌자고 우리를 그 아파트로 안내했을까. 그 집 거실에 서서 운동장을 내려다보았다. 농구를 하는 사람들, 족구를 하는 사람들, 걷는 사람들로 운동장은 북적였다. 한켠에서 꼬마들은 똑같은 운동복을 입고 소리를 지르며 축구를 하고 있었다. 봄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오후 다섯 시의 햇살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순간 모든 판단을 중지했다. 그냥 그 집이었다. 나는 그 집이어야 했다. 현실과 꿈 사이에 그 집이 있는 것 같았다. 위험한 계약이었다. 문제가 복잡했다. 하지만 그 집에 살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그냥 전세 계약을 해버렸다. 그렇게 망원동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운동장이 단순히 운동장이 아니라는 건 이사 후에 알았다. 택시 기사님들마다 망원동에 가달라고 말하면 마치 짠 것처럼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 동네 요새도 물에 잠겨요?” 또는 “거기 여름만 되면 수해가 나서....” 심지어 한 기사님은 이런 말까지 했다. “거기가 옛날에 김일성한테 쌀 받은 동네잖아요.” “네? 김일성이요?” “80년대였나, 거기가 물난리가 나서...” 김일성이라니. 내가 모르는 망원동의 시간을 택시 기사님들이 드문드문 메꿔줬다. 비가 오면 어김없이 물에 잠기는 동네였다는 걸 동네 식당 사장님도 말해줬다.  “그냥 비만 오면 1층까지는 다 잠겼다고 보면 돼요. 근데 유수지가 생겨서 그다음부터는 안 그래요.” 사장님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건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날에 밝혀졌다.


억수 같은 비를 뚫고 운동장에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모두 유수지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차도 다 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나가고, 차들이 운동장을 비우자, 운동장 양 끝에 있는 수문이 열렸다.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수문이었다. 물이 콸콸콸콸 들어 왔다. 순식간에 그 큰 운동장이 물로 가득 찼다. 분명 운동장이 있는 풍경이었는데 호수가 있는 풍경이 완성되어버렸다. 그렇다. 운동장의 이름은 망원 유수지. 遊水池. 말 그대로 물이 노는 땅. 필요할 때 물들이 놀다 나가는 땅. 여름엔 비가 놀며 호수를 만들고, 겨울이면 눈이 놀며 하얀 벌판이 되는 땅. 그 땅 옆에 우리 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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