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강

   
홍남권
ǻ
온하루출판사
   
14500
2018�� 08��



 

■ 책 소개


홍남권의 역사소설 시리즈


온달산성과 온달동굴, 온달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까닭은 무엇일까? 온달의 이름이 현전하는 것은 평강 때문이었다. 스스로 궐문을 박차고 나온 평강은 백성들의 이웃이었다.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일일이 백성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훗날 그녀가 고구려의 어머니라고 불린 이유이다.

 

온달이 죽은 뒤 이야기가 끝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평강』은 제2막이 열린다. 역사소설이면서도 글은 쉽게 잘 읽힌다. 오래지않아 마지막 장을 덮는다. 재미도 있고 나름 감동도 있다. 일독을 권한다. 우리나라에 평강처럼, 고구려의 어머니라 불릴 만한 정치인이 등장하길 바라며.

 

■ 저자 홍남권
저자 홍남권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안시성 그녀 양만춘』 『평강 고구려의 어머니』 『계백 신을 만난 사나이』 등 장편소설과 『SE 스토리, 대지에 가치를 심는다』 『반석 스토리, 반석기초이앤씨 10년의 성장기』 등 기업스토리를 썼다.

 

■ 차례
제1장. 무지개 평강
1. 두 어머니
2. 고구려의 공주를 차지하라
3. 궁궐 밖 신세계로
4. 시집살이하는 공주

 

제2장.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다
5. 바보가 영웅이 되다
6. 평강과 온달의 갈등
7. 복수
8. 더는 울지 않았다

 

제3장. 소국과민
9. 백성들이 평강을 따라가다
10. 안시성
11. 어머니와 아들
12. 고구려의 어머니

 




평강


무지개 평강

두 어머니

평강공주가 아프다는 내관의 전언에 평원왕이 공주의 처소를 찾았다. 한눈에 봐도 이번에는 꾀병이 아니었다. 대왕의 행차에 방 밖으로 나가려는 유모를 평원왕이 불러 세웠다. 평언왕은 한숨부터 지었다.


“나라 안팎의 잘났다는 가문이 우리 평강일 며느리 삼고자 혈안이 돼 있소. 주나라 제나라, 저 돌궐까지 고구려의 부마국이 되겠다고 아우성이오. 하지만 나는 절대 우리 딸을 팔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평강이가 계속 온달을 고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도 장담할 수 없소. 내가 유모에게 하는 이 하소연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소.”


평원왕이 친히 유모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평원왕을 배웅하려고 평강이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누웠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평원왕이 평강을 달래었다.


“평강아, 온달의 아비가 전쟁에서 패해서, 온달이 물려받을 영지가 없어져서 온달을 내친 게 아니란다. 그깟 땅은 얼마든지 새로 마련해줄 수가 있느니라. 온달은 게으른 데다 뛰어난 구석이 없질 않느냐. 뛰어나지 못한 게 아니라 모자라 보이지 않느냐, 이 말이다.”


“아버님, 부디 그 사람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진정 큰 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 하더이다.”


평원왕이 방문을 향해 걸어가다 평강을 뒤돌아보았다. 평강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평원왕의 마음을 적시었다. 평강은 돌이 되기 전에 생모를 잃은 눈물이 많을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어머니가 이 세상의 전부인 그 행복의 시기를 평강은 누리지 못하였다. 평강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평원왕이 마음을 다잡았다.


“뚝 그치지 못하겠느냐! 아무리 울어도 나는 이제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이니라. 앞으론 그 눈물로 절대 네 뜻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남부출신인 온달이 궐에서 쫓겨난 뒤, 남부 막리지 온예는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온달을 외면하였다. 왕의 사위가 된 온달의 집안을 한때 시샘하기도 했지만 온예는 평강의 굳센 의지를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공주 평강의 뜻은 두 남녀의 사랑에만 있지 않았다. 평강의 말처럼 데릴사위 온달은 고구려대왕과 백성들 사이의 약조였다. 명분이 있는 그녀의 주장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쉬웠다. 게다가 자고로 딸을 이기는 아버지는 없다고 했다. 훗날 만에 하나라도 온달이 평강과 다시 결합한다면 온달은 다시 온씨 가문 아니, 고구려의 기린아로 부상할 거였다. 언젠가 남부가 북부나 동부처럼 곧잘 왕비를 배출하며 떵떵거리는 날이 올 수도 있음이었다.


온예가 손궤 서랍을 열고 온달모가 건네줬던 화살촉을 꺼내 바라보았다. 이날 저녁 남부 막리지 겸 대막리지 온예가 평원왕을 알현하겠다고 요청을 올렸다


온예의 입에서 온달이 나오자마자 평원왕이 말하였다.


“온달 얘기는 꺼내지 말라 하지 않았소.”

“온지추 이야기옵니다.”


온지추는 평원왕의 벗이었고 온달의 아비였다. 온예가 옷소매에서 물건을 꺼내 평원왕 앞에 바치었다.


“웬 화살촉인가?”

“온지추의 심장에 박혔던 화살촉입니다. 이것은 신라 따위가 감히 우리에게 내민 도전장 아니겠사옵니까. 그 비수가 아직도 우리 고구려의 심장에 박혀있사옵니다. 성상폐하, 신라를 견제할 수 있도록 남부의 힘을 키워주시옵소서.”


서서히 평원왕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온지추, 이 사람아, 목숨은 부지하지 그랬나.’


평원왕이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온지추는 패장이었다. 고구려는 패전한 장수는 물론 적에게 항복한 자도 사형에 처했다. 낭비성 성주였던 그가 패하는 바람에 신라에게 오백 리 땅을 빼앗겼다. 그 금쪽같은 영토를 잃었으니 온지추는 죽어 마땅했다. 그가 전사하지 않고 살아 돌아왔으면 평원왕은 오히려 더 난감했을 것이었다.


궁궐 밖 신세계로

새까맣던 밤하늘이 새벽닭 소리와 더불어 희붐해졌다. 575년 그 운명의 날은 여느 날과 달랐다. 새벽녘에도 활쏘기 시합을 준비하는 안학궁 내관과 시녀들의 손길과 발놀림이 분주했다. 이른 아침부터 활터에 구경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카사와 각 부의 대표들이 나타났고 막리지들과 왕족들이 자리했다. 마지막으로 평원왕과 왕후가 연단에 올라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임자가 없는 의자가 두 개가 있었다. 평강과 태자의 자리였다. 시작 시각이 지났는데도 시합을 하지 못하는 건 평강 탓이었다.


평원왕의 화가 극에 달할 무렵 몸단장을 마친 평강이 거동하기 시작했다. 평강은 훗날 온달과 혼례 때 입으려 직접 수놓은 예복 차림이었다. 내관이 부리나케 달려와 평원왕에게 평강공주가 오고 있다고 보고를 올렸다. 평원왕이 의자에서 일어나 평강의 처소 방향만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평원왕의 시선을 따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평강이 보이자마자 평원왕은 불편했던 심기가 말끔히 가셨다. 여기저기서 평강의 자태를 칭송하는 소리가 들려오니 평원왕이 표정이 더 밝아졌다.


곧 무카사와 서부출신 고탄의 최후의 승부가 펼쳐질 참이었다. 무카사가 고탄을 보고 짐짓 여유 있는 표정을 보이자 고탄도 무카사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팽팽하게 진행되던 시합은 한순간에 균형이 무너졌다. 고탄이 실수를 해서였다. 무카사가 이겼다는 확신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고탄이 질 거 같아지자 고구려인이 하나같이 안절부절못했다. 들썩거리는 거란 사신단과 달리 고구려인은 입술에 침을 발라야 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평원왕 또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둘째왕자 고건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종에게 다가가 그를 질책하였다.


“어찌 저리 멀쩡할 수 있단 말이냐? 이대로 무카사의 승리로 끝난다면, 부왕의 진노를 어찌 감당하란 말이냐.”

“송구합니다요. 약효가 늦게 나타나나봅니다요. 의원이 사물의 형체가 흔들릴 거라 하였사옵니다. 아, 저것 보십시오.”


마지막 화살만을 남겨둔 무카사가 멈칫하고 있었다. 과녁이 두 개로 보이고 기운도 점점 빠지는 거 같았다. 무카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기운이 더 빠지기 전에 화살을 날리는 게 나을 듯싶었다. 허공을 가른 화살은 과녁을 빗나가고 말았다. 이어 모든 이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고탄이 마지막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고탄의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호수가 화살이 관중했음을 알리는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고탄이 일약 고구려의 영웅으로 떠오른 순간 평원왕이 환하게 웃었다. 수심을 말끔히 지운 얼굴로 평원왕이 고탄을 쳐다보았다.


“고탄, 오늘 시합의 우승자는 서부의 고탄이다. 이로써 고탄이 공주 평강의 정혼자가 되었노라.”


고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평강이 평원왕 앞으로 나아갔다.


“지난날 대왕께서 온달의 아내가 되어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라고 하셨사옵니다. 이제 무슨 까닭으로 전날의 정혼자를 바꾸시옵니까? 필부도 거짓말을 안 하려 하는데 하물며 지존께서 어찌 실없는 소리를 하시옵니까. 지금 대왕의 명이 잘못되었으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사옵니다.”


그토록 평강이 행복하기만을 바랐건만, 평원왕의 고명딸에 대한 서운함은 분노로 바뀌었다.


“네 마음이 정 그렇다면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내 딸이 아니다. 궐 밖으로 나가 네 갈 길로 가거라. 이 궐 안의 그 어떤 물건도, 흙 한 줌도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할 것이니라.”


평원왕은 부녀지간의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다. 마침내 공주의 작위를 박탈하고 평강에게 출궁을 명하였다.


시집살이하는 공주

575년.


평강과 온달의 식속들이 모인 자리에서 평강과 온달이 헤어져있던 일곱 해 동안 겪은 일들이 실타래에서 실이 풀리듯 이어졌다. 이야기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지만 평강은 그간 궁궐 안의 자세한 사정을 다 얘기하지 못했다. 아버지 평원왕이 그녀에게 했던 이야기 몇 개는 빼고 터놓았다.


평강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평강이 그를 찾아 여기까지 왔는데도 온달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우물쭈물하는 아들대신 온달모가 나섰다.


“하지만 이제 내 자식은 지극히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작금의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하여 고귀한 공주님이 살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평강이 대답하였다.


“어머님, 옛 사람들이 한 말의 곡식만 가지고도 방아를 찧어 먹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바느질로 만들 게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꼭 부귀한 다음에라야 함께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부부는 우물물 한 그릇에 혼인을 맹세했다고 하니 저희도 그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입소문이 바람보다 빠른 듯하였다. 평양성이 일순간에 출궁을 감행한 평강공주 얘기로 술렁이었다. 온달 또한 화제의 정중앙에 있었는데 평강을 며느리로 삼지 않으려던 온달모도 화젯거리였다. 소문이 퍼져 고구려 전역이 공주 평강과 바보 온달의 혼인 얘기로 들썩이었다.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다

바보가 영웅이 되다

삼짇날 여자들은 푸른 들판에 나가 새 풀을 밟으며 꽃놀이를 하였다. 남자들은 낙랑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다. 이날 잡은 들짐승을 제물로 일월과 천지의 신령께 제사를 지내었다. 삼짇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다. 온달과 그 형제들 또한 삼짇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 사냥대회 입상자에게는 대왕이 친히 벼슬을 내려주기 때문이었다.


온달과 두치가 말을 타고 자주 낙랑의 들을 누비는 동안 해가 바뀌어 576년이 되었다.


그해 낙랑에서 열린 사냥대회는 싱거웠다. 다른 참가자들이 잡은 사냥감을 헤아릴 필요도 없이 저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일등이었다. 워낙 압도적이었으므로 평원왕이 직접 그 사람을 찾아 불렀다. 그가 대령하자 평원왕이 이름을 물어보았다.


“온달, 성은 온, 이름은 달이옵니다.”


평원왕은 기겁했다. 온달이라니, 같은 이름인 것인가. 평강의 남편 온달일 리가 없을 듯싶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평원왕이 온달의 얼굴을 한참 쳐다봤다. 평원왕은 온달의 얼굴에서 지난날 데릴사위의 얼굴과 그 아비 온지추의 얼굴을 보았다.이 얼굴을 보고 있기 싫어졌다. 온달에게 물러가라 하였을 뿐 평원왕은 지난해처럼 즉석에서 사냥대회 참가자들에게 벼슬을 내리지 않았다. 온달은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한결 매서워진 바람 끝에 창백한 달빛마저 따뜻하게 느껴지는 한겨울이었다. 평강이 온 힘을 다해 사내아이를 제 몸 밖 세상으로 밀어냈다. 사내아이의 울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아들을 얻은 온달에게 오늘은 즐거운 날이었다. 아기를 품에 안고 기뻐하는 온달에게 강이식이 아기의 이름을 지었냐고 물어보았다. 온달은 자식 이름을 아직 지어두지 않고 있었다. 강이식이 권후란 이름은 어떠냐고 하니 온달이 좋다며 그 아들을 온권후라 하였다.


577년 주나라 무제 우문옹이 마침내 제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무제는 제나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내친김에 고구려를 공격할 참이었다. 평원왕은 주나라의 기세를 꺾어야겠다고 판단했다.


평원왕은 고구려 전역에 출전을 알려 자원병을 모집하고 돌궐과 거란에게도 참전을 독려하였다.


사냥대회에서 일등을 차지하고도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 온달은 처음에는 참전할 뜻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두 손을 다 놓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평원왕이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나아갔다. 우문옹이 이끄는 주나라군의 행군 속도로 보아 전장은 배산 옆에 펼쳐진 너른 들이 될 것이었다.


돌격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홍이와 두치가 말릴 새도 없이 온달은 적진을 향하여 말을 몰았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을 뿐 출전을 선언한 순간 온달은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 지금처럼 한평생을 산다면 갓 태어난 아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을 길 또한 없었다. 어머니와 평강을 생각해서라도 무언가 반전의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온달이 휘두르는 창에 쓰러진 주나라군이 어느덧 수십 명을 헤아렸다. 고구려군과 주나라군은 물론 평원왕과 주무제도 온달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기였다. 생사를 초월한 인간만이 저렇게 미친 듯 용기를 낼 것이었다.


주무제가 다시 온달을 노려보았다. 온달이 활로 주무제가 있는 방향을 겨냥하고 있었다. 주무제는 온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화살의 사정거리는 주무제가 있는 곳에서 백 보쯤 앞이었다. 몇 차례 화살을 날린 뒤 슬금슬금 주나라군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온달은 고구려 진영으로 돌아왔다.


주력부대가 퇴각하는 순간 승부는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었다. 온달의 선전에 사기가 오른 고구려군이 주나라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단 한 차례의 결투로 고구려돌궐연합군은 만리장성 너머로 주나라군을 몰아냈다.


며칠 뒤 수레를 타고 장안으로 돌아가던 중, 일세의 영걸 주무제 우문옹이 36세로 생을 마쳤다. 온달은 그가 쏜 화살이 주무제에게 명중한 사실을 몰랐다.


우문옹이 별세했다는 소식에 평원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평원왕이 대군을 이끌고 몸소 출전해야 할 만큼 우문옹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바싹 긴장했던 평원왕이 오랜만에 호방하게 웃었다. 막리지들과 장군들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평원왕의 막사 앞으로 모여들었다. 전공을 논하라는 평원왕의 하명이 떨어지자 좌군대장군 연자유가 맨 먼저 입을 열었다.


“일등 공훈은 온달입니다.”


평원왕이 우군대장군 을산가를 바라보았다. 을산가도 온달의 공적이 제일이라 하였다. 온달의 전공이 최고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평원왕의 명으로 배산의 들에 제단이 마련되었다. 먼저 평원왕이 제단에 올랐다. 온달이 단 앞에 서자 평원왕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평원왕이 온달의 어깨를 한 번 부여잡은 뒤 그의 손을 그러쥐었다. 같이 단상에 올라 나란히 선 채로 평원왕이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이 사람이 나의 사위 온달이다.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겠노라.”


신하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대형이면 세 번째 관등이었다. 온달의 벼락출세에 막리지들과 귀족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꼬웠어도 평원왕의 결정에 토를 달지 못하였다. 온달은 사위로서 벼슬을 받은 게 아니라 공적으로 벼슬을 받았다. 그 전공은 온달이 전쟁영웅 자격을 갖추게 하고도 남았다.


평강과 온달의 갈등

어느 날 평원왕이 온달에게 그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물어보았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온달이 대답하였다.


“아버지의 철천지원수를 갚는 것이옵니다.”


신라에 복수할 수 있도록 군사를 내어달라는 온달의 주청에 평원왕이 고개를 저었다.


평강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 같았던 평원왕은 온달에게 군사는 내주지 않고 벼슬을 올려줬다. 온달은 위풍과 권세가 나날이 성하여졌다.


길을 오가다 마주치는 백성들은 평강과 온달 부부 앞에서 움츠러지지 않았다. 평강과 온달은 왠지 친근했다. 궐 안에 머물고 있을 때에도 그 부부는 제 이웃집에 사는 거 같았다. 반면 지난날 평강과 온달을 등한시했던 왕족과 귀족들은 이 부부 앞에서 설설 기었다. 평강과 온달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패전국 주나라는 물론 다른 나라들도 고구려조정의 실세 평강과 온달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으면서도 남벌우선책을 피력하는 온달에게 평강이 말했다.


“제 판단으론 서쪽 중원이 먼저입니다. 우리 고구려가 아니면 그 누가 있어 저들을 막아내겠습니까? 백제가요? 신라가 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온달이 쉽사리 수긍하지 않으니, 정색을 하고서 평강이 온달에게 물어보았다.


“낭비성과 그 일대는 누구의 땅입니까?”

“아버지의 땅이고, 내 땅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 땅은 낭군의 땅이 아닙니다. 그럼, 고구려 태왕의 땅이냐고요? 아닙니다. 백제왕과 신라왕의 땅 또한 아닙니다. 그 땅은 말입니다. 그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백성들이 진짜 주인입니다.”

“공주, 땅을 기반으로 해서 살아가는 건 백성들이 맞소. 하지만 백성들끼리 스스로 살 수는 없소. 누군가가 나서 외적을 막아줘야 하오. 또 누군가는 백성들이 지나치게 많은 세를 내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해줘야하오. 아니 그렇소? 백성들은 선정을 베푸는 임금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오. 두고 보시오. 내가, 이 바보 온달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오. 내가 그 땅을 되찾으려는 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오.”

“왜 그 땅이어야 합니까? 아버님의 그 땅이 아니더라도 땅은 있습니다. 다른 땅에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가꾸고 키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평강의 말이 틀리지 않아 온달은 더 고민이 깊었다. 어릴 적 평강은 평원왕의 무릎에서 정치를 배웠고 사서를 읽어 역사의 큰 흐름을 알았다. 그 식견을 존중하여 온달은 곧잘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따랐다. 결국 평강이 만류하는 바람에 온달은 한동안 신라 정벌을 추진하지 않았다.


복수

남부 막리지 온예가 죽자 세인들이 온달을 막리지로 천거하였다.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평강이 반대하고 나섰다. 평강이 차제에 온달에게 모든 벼슬을 사양하라 하였다. 평강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부귀와 영화는 누릴 만큼 누렸다. 하지만 온달은 평강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권력을 갖고 있어야 훗날 복수를 도모하기 쉬울 터였다. 제가회의에서 온달은 남부 막리지가 되었다.


온달이 막리지가 되었어도 고구려는 별다른 변화가 일지 않았다. 고구려조정 안은 여전히 남벌우선책과 서토안정책이 양립할 따름이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다른 막리지들과 달리 온달은 불만이었다. 남벌을 실현하기 위하여 온달은 호시탐탐 대막리지 자리를 노렸다.


평강은 고구려를 위해서 온달은 그의 복수를 위하여 제도를 개혁하려 하였다. 온달은 평민들에게 벼슬자리로 나아갈 등용문을 더 만들어주었다. 온달의 힘이 무예를 숭상하는 고구려인의 기질에서 비롯됐다면 평강의 힘은 백성들의 사랑에서 나왔다.


587년, 수문제가 양나라 군주에게 장안성에 입조하라 명했다. 수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던 양나라 군주는 이를 거부하고 강남의 진나라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수문제는 진나라의 구원병을 격파하고 양나라를 멸하였다. 589년 수문제가 진나라를 멸망시켜 무려 삼백 년 만에 중원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병문안을 자주 다녀온 까닭에 온달은 평원왕이 올해를 넘기지 못하리라 직감하였다. 태자 고대원을 찾아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속내를 터놓았다.


“남한강 유역의 땅을 신라가 군현으로 삼았으나, 그 백성들은 고구려를 완전히 잊진 않았습니다. 바라옵건대 단 한 번만 병사를 내주신다면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나이다. 단 한 번의 출정이면 족하옵니다.”


수나라와의 전쟁을 언제까지나 피할 순 없을 것이었다. 본격적인 대결에 앞서 남쪽을 안정시켜둘 필요는 있었다. 한강 물줄기를 이용하지 못하게 해두면 신라는 소백산맥 안에 갇히는 셈이었다. 태자가 온달을 쳐다보았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온달이 그토록 소망한 일이었다. 그 애타는 세월에 온달의 머리도 희끗희끗해졌다. 마침내 태자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590년 대초원에서 칼바람이 불어올 무렵 평원왕이 운명하였다. 태자는 즉시 수나라와 돌궐, 백제와 신라에 사자를 보내 평원왕의 부고를 알렸다. 평강이 평원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온달은 말을 몰아 남쪽으로 내달렸다.


겨울은 어지간해서는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의 계절이었다. 더구나 평원왕의 상중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신라군은 크게 당황하였다. 고구려군은 삼면에서 낭비성을 포위 공격하여 단숨에 함락시켰다. 아직 고구려를 잊지 않았다는 온달의 말마따나, 낭비성 백성들이 고구려군에 적극 대항하지 않은 게 대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낭비성이 고구려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그 일대의 몇몇 자그마한 성들이 항복을 알려왔다. 온달은 멈추지 않았다. 상류로 진격하며 항복을 받고 항복을 거부하는 성은 집중 공략해 함락시켰다.


평강이 오라버니 영양왕을 찾아가 온달에게 회군을 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양왕은 잠시만 기다리면 될 것이라 평강을 달래고 온달을 호위할 병사를 더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평강은 고민을 하였다. 평강은 온달이 연이은 승리에 도취될까 우려했다. 만족하면 탈이 없다는 옛말은 빈말이 아닐 것이었다. 더구나 온달은 지금 복수를 하는 중이었다. 조심한다고 해도 전쟁은 위태로운 순간이 있기 마련이니 어떻게든 보복을 하고야 말겠다는 욕망을 제어해야 마땅했다. 적의 심정을 이해하는 걸 넘어 그와 공감까지 가능해야 비로소 온달이 진정한 승자로 우뚝 설 터였다. 조바심이 난 평강은 집에서 발을 뻗고 있을 수 없었다.


오래지않아 평강을 태운 수레가 낭비성을 향하였다. 곡식을 가득 실은 수백여 대의 달구지가 평강을 뒤따랐다.


공주 평강과 거지 온달의 사랑얘기는 신라와 백제에도 소문이 나 있었다. 평강이 낭비성에 당도하자 할머니의 옛날얘기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왔다며 백성들이 그녀를 보려고 몰려들었다. 동화속 주인공과 실제 마주한 백성들은 신기한 듯 평강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그 가운데는 눈물을 글썽이는 여인들이 많았다. 평강은 손을 내밀어 백성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었다. 땅을 차지하는 것은 군사들이었지만 그 땅을 지키는 것은 애민이라 평강은 생각했다.


가난한 백성들을 모두 조사하라 하고 그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즉시 진대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아니었다. 그리하면 너무 늦을 것이었다. 평강은 먼저 그녀가 수레에 싣고 온 식량을 나눠주었다.


신라의 영토였던 낭비성을 이제 막 고구려가 점령했을 때였다. 백성들은 고구려군을 적대시하진 않았지만 그들의 약탈 또한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탈은커녕 고구려군 대장의 아내가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것이었다. 저 멀리 북쪽에서 공주가 아닌 선녀가 왔다며 백성들이 만세를 외쳤다.


일단 백성들의 굶주림을 없앤 다음 평강은 마을에 있는 경당을 새로이 단장했다. 다른 경당처럼 활쏘기도 가르쳤지만 평강은 활쏘기 외에도 백성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다양한 과목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림을 그리고픈 사람은 그림을, 글을 배우고 싶은 사람을 글을,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음악을 경당에서 가르쳤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고, 즐겁게 노래하고 흥겹게 춤을 추고,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게 공주로서의 보람임을 평강은 믿었다.

더는 울지 않았다

아침 일찍 온달은 신라군이 아단성을 기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신라군의 숫자는 일천 안팎이었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는 온달을 평강이 가지 말라 말리었다. 온달이 말하였다.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겠소.”


온달이 일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아단성으로 말을 몰았다. 성 주변에서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어지러이 흩어져서 싸우고 있었다. 온달이 군사를 나눠 신라군을 포위하고 산 아래서부터 신라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해가 서천으로 향할 무렵 신라군 진영에서 항복을 알리는 백기가 올라왔다. 일천 신라군이 왔는데 육백여 명밖에 남지 않았다. 무기를 내던진 신라군이 두 손을 든 채 하나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신라군을 이끌고 온 김비형이 온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온달이 김비형에게 말했다.


“투구를 벗어라.”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온달이 김비형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는 사이 화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낮은 신음을 토해낸 이는 온달이었다.


평강이 관에 안치된 온달을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온달의 얼굴을, 날이 새도록 그의 관을 쳐다보았다. 온달과 마음을 함께했을 때 평강은 해가 떠있을 때는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달이 떠있을 때엔 해가 떠오르기를 바라지 않았다.


평강이 홍이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평양성으로 떠나가는 날이었다. 평강이 아들의 손을 잡고 우마차에 올랐다. 평강은 아단성 쪽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남편 온달이 데릴사위로 걸어온 청운의 길은 이제 저 세상으로 가는 마지막 길이 되었다. 온달의 꿈과 소망을 그가 흘린 피와 땀을 저 땅 깊숙이 묻었다. 소백산 마루 너머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그의 욕망과 바람을 데려갈 것이었다. 쓰라린 가슴으로 평강이 온권후를 꼭 껴안았다. 그녀는 다시는 남녘을 쳐다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평강이 탄 우마차의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군사들과 백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홍이가 평강에게 달려왔다.


온달의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평강이 우마차에서 내렸다. 온달이 떠나기 싫은 것이었다. 이 땅을 죽어서도 떠나기 싫은 것이었다. 온달의 관으로 다가가 평강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관 뚜껑을 열어라.”


온달은 눈을 감고 있었다. 평강은 두 눈으로 온달을 보고 있는데 온달은 눈을 감고 평강을 보지 않고 있었다. 평강이 온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십시다.”


비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눈물이 땅을 적신 뒤 군사들이 온달의 관을 들 수 있었다.



소국과민

백성들이 평강을 따라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이 온달의 빈소를 다녀갔다. 영양왕도 두 번이나 들렀다. 영양왕은 평원왕처럼 온달의 출정을 말리지 못한 그 자신을 책망했고 하늘을 탓하였다. 온달에게 미안했고 고구려 백성들에게 미안했고 그 누구보다 평강에게 미안했다. 온달이 죽은 지 몇 달 뒤 평강이 유복자를 낳아서 더 미안했다. 이 둘째 아들은 평강의 뜻에 따라 온권명이라 이름 지었다.


장례를 마친 뒤 평강과 영양왕이 마주했다. 영양왕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평강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는 부왕인 평원왕이 온달에게 군사를 내어주지 않은 그 심정을 뒤늦게 헤아렸다. 평강이 영양왕에게 말하였다.


“평양성을 떠나려 하옵니다. 저를 따르는 백성들을 데리고 이주하겠사옵니다.”

“이주를 한다니? 어디로 말이냐?”


안시성으로 가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녀의 아들 온권후는 안시성 성주였다. 영양왕이 아직은 젊디젊은 평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쪽을 멀리하려는 평강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말린다고 들을 평강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부국강병을 이뤄보겠습니다. 아니, 안시성만의 소국과민이옵니다.”


부국강병, 고구려 군사력은 천하제일이라 칭할 만했다. 백성들을 골고루 부유하게 해주기만 하면 국방은 걱정 없다는 게 평강의 지론이었다. 단 내부 분열이 없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했다. 평강이 말하였다.


“이곳 평양성에서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 저는 관여치 않을 것입니다. 대왕의 뒤를 이어 그 누가 고구려의 대왕으로 즉위하든 말입니다. 그러하오니.”

“안시성에서 네가 그 어떤 일을 하든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오라버니, 저는 정치는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단 하나, 우리 고구려에 분열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 하나만은 드리고 싶습니다.”


영양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평강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안시성

안시성에 도착해 성의 현황을 파악한 평강은 충격을 받았다. 안시성이 삼천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름난 곳이어서가 아니었다. 넓고 비옥한 땅에, 이처럼 살기 좋은 땅에 인구가 그토록 적은지 몰라서였다. 백성들이 안시성까지 따라오지 않았으면 오히려 난감했을 상황이었다. 평강은 그녀를 믿고 따라와 준 백성들에게 마음속 깊이 다시금 고마워했다.


평강은 맨 먼저 혼인을 하지 못하는 처녀와 총각 없도록 조치했다. 특별한 사유 없이 스무 살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않는 처녀와 총각이 있으면 관원들을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관원들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하니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관청에서 미혼인 백성들을 먼저 찾아 나섰다. 진대법으로 끼니를 해결해주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니 가난해서 백성이 혼인을 올리지 못하는 일은 사라졌다.


그다음 평강은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넉넉하게 해주고자 했다. 생활의 기본은 아무래도 농사였다. 안시성의 풍토와 기후로 봤을 때 콩이 제일 적합할 것 같았다. 콩은 거름을 주지 않은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편이었다. 농기구 없이 맨손으로 경작이 가능할 만큼 농법도 쉬웠다. 쌀겨처럼 번거롭게 껍질을 벗길 필요 없이 도리깨질 몇 번에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평강이 덕망이 있다고 소문이 나자 인재들이 하나둘씩 찾아왔다. 그 인재들은 안시성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게 기여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시성으로 더 몰려들었다. 인구가 늘어나자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고구려의 어머니

세월은 평강에게서 사람들을 앗아갔다. 어릴 적부터 평강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오라버니 영양왕이 운명하고 이복아우 영류왕 고건무의 치세가 되었다. 남편 온달의 벗이자 전쟁영웅으로 추앙 받던 강이식과 을지문덕도 유명을 달리하였다.


평강의 비애는 끝나지 않았다. 평강 가족의 불상사는 그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았다. 둘째 아들 양권명이 갓 약관이 지난 나이에 요절하였다.

평강에게는 그녀를 의지하는 백성들이 있었고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둘째 며느리가 있었다. 그 한 조각 희망을 평강은 기다렸고 무지개가 뜬 날 손녀를 얻었다.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에 안시성 주민들이 평강보다 더 많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백성들이 나서서 손녀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하늘을 우러러 평강공주의 이 손녀만큼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염원하였다.


평강은 이 손녀아이가 기나긴 겨울을 끝내는 영원한 봄이었으면 싶었다. 눈 속에서 피어나는 강인한 꽃이기를 소원했다. 손자가 아닌 손녀였어도 평강은 개의치 않았다. 고구려에서 여자의 공간은 집안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여자는 애 낳고 살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때로는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일도 거침없이 행하는 게 고구려 여인이었다. 신모 상 앞에서 평강은 손녀의 이름을 만춘이라 지었다. 안시성의 전설 양만춘의 탄생이었다.


둘째 며늘아기가 출산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다. 평강이 그녀의 품안에서 꼬물거리는 손녀를 보았다. 지금 이 핏덩이에게는 그녀의 품이 이 세상의 전부일 것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갓난아기였을 때 그 어머니가 세상의 전부이듯. 평강이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듯 손녀 또한 그 어머니의 세계를 알지 못할 것이다.


시린 나날의 기억을 가슴에 화인처럼 박아두면서 평강은 낙담하지 않았다. 안시성이 먹고 살 만해졌다고는 하나 그녀의 선정과 은혜를 고대하는 백성들은 여전하였다. 그 백성들을 일일이 살피다보면 외로움은 느낄 겨를이 없을 것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녀가 고구려의 여자로 장성하는 것, 이것이 평강의 마지막 꿈이었다.


영류왕의 우려와 달리 평강은 평양성의 정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안시성 백성들만을 돌봤다. 그 은덕이 온 고구려에 퍼져 나갔고, 백성들은 평강을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라 불렀다. 어머니, 평강은 공주라기보다 어머니 같았다. 배가 부른데도 왜 밥을 안 먹느냐고 자꾸 물어보는, 맛난 반찬 하나 더 장만해주려는, 아플 때면 더 생각나는 어머니 같았다. 평강이 꽃이라면 그녀는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꽃이었다. 어머니의 젖처럼 어머니가 해준 밥같이. 평강이 풀이라면 그녀는 먹을 수 있는 나물이었고 평강이 나무라면 그녀는 달콤한 열매를 선사해주는 과일나무였다.


평민과 노비들의 삶이 안시성이라 해서 고단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보다 안시성은 벼슬아치들이 청렴했고 조세가 적었다. 백성들은 땀 흘린 대가를 제 손에 쥘 수 있었다. 백성들은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의 은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알았다. 주민들은 까마귀가 어미 새를 봉양하듯, 평강이 친어머니인 양 효도하고 보은했다. 아마 요임금과 순임금의 태평성대가 이러했을 것이었다. 백성들의 칭송은 그칠 줄 몰랐고 안시성은 그들에게 무릉도원 그 자체였다. 그 누구도 감히 이 성스러운 땅을 넘보지 못할 것이었다. 이것이 고구려의 어머니 평강이 걸어 온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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