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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스키 점프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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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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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0��



>& ■ 책 소개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국가대표스키 점프 선수들의 삶은 실제로 어떠할까? 20대 후반인 젊은 그들을 대가 없는 열정을 불사르며 20년 가까이 날게 한 스키 점프의 매력은무엇일까? 이 책은 대가 없는 열정을 불사르며 스키 점프에 올인해 온 선수들과 코치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았다. 스키 점프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스키 점프에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국가대표 스키 점프 선수들의 인생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우리나라 스키 점프의 역사를 전한다. 특히1998년 국가대표가 처음으로 경험했던 나가노 동계 올림픽의 이야기와 전 스키 점프 국가대표 감독 최돈국의 인터뷰, 스키 점프의 유래와 경기종류, 심사 기준 등 스키 점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자료를 수록했다.


& 무주의 날다람쥐 같은 다섯 명의 산골 소년들. 이 다섯 명의 소년들은스키점프로 인생을 살아가며 청년이 되었고 현재, 네 명은 국가대표가, 한 명은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었다. IMF 이후, 후원사도 제대로 없고지원해 주는 기업도 없이 비인기 종목이라는 설움을 가슴에 안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연명하고 지낸 스키 점프 국가대표팀. 이들은 모두의 무관심속에서도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세계 8위의 기염을 토하며 세상에서 가장 멋진 비행을 하기 위해 오늘도 점프대에오른다.


■ 저자 국가대표 스키 점프 팀 
영화<국가대표&&를 통해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고 인식된 스키 점프. 우리나라 스키 점프 국가대표는 모두 네 명이다. 그리고 단한 명의 전직 국가대표 선수 출신 코치가 이 팀을 이끌고 있다. 본인이 선수였기에 누구보다 선수들을 잘 아는 김흥수 코치, 맏형이자 넉살좋고 끼많은 최흥철 선수, 조용한 카리스마를 지닌 최용직 선수, 핸섬하고 예의바른 김현기 선수, 팀의 막내이자 분위기 메이커인 강칠구 선수. 이들은오로지 스키 점프를 향한 열정과 20년 가까이 함께 해 온 팀워크, 그리고 국가대표라는 자부심으로 오늘도 하늘을 향해 비상하고 있다. 그들의비상이 날개를 단 새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그들은 맨 몸으로 땀을 흘리며 꿈을 향해 날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정리 박수경
13년 동안 방송작가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다수의 뮤지컬 공연과 책 등을 집필하며 활동하고 있다. 영화 <국가대표&&를 본 후, 실제 스키점프 국가대표선수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책을 정리하면서 가족 같은 정을 나누게 되었다. 스키 점프 국가대표 선수들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비행할 수 있기를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정리하였다. 


■ 차례
감사의 말
추천사 -김용화(<국가대표&& 감독)
배우들이 본 국가대표
프롤로그 - 영화 <국가대표&& 실제 주인공들의 영화 같은삶


1. 열정 하나로 꿈에도전하다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
우연에 "꿈"이 더해지면 운명이 된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계단씩쌓아올리다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은 "0"이 된다
끈기와 노력으로 꿈에 날개를 달다


2. 더 큰 꿈을 향하여
위기를두려워하지 마라 - 길잡이 새 기러기, 김흥수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믿음으로 깃발을 내린다


& 식지 않는 열정으로 도전하라 -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매, 최흥철
건강한 욕심이 나를 키운다
0.000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도전한다 


& 꿈은 나를 아름답게 만든다 - 가장 빨리 나는 군함조, 김현기
꼴찌도노력하면 1등이 될 수 있다
언제나 시작인 것처럼 노력하라


& 절박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없다 - 사막을 나는 검독수리, 최용직
나는 게으른 천재가 아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 가능성을 믿으면 꿈이 현실이 된다 - 희망의 파랑새, 강칠구 
재능만있는 사람은 좋아서 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가장 나를 믿어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 꿈은 진화한다 - 가장 멀리 나는 새, 앨버트로스
대한민국 국가대표,세계를 향해 날아라


3. 국가대표 스키 점프 팀, 영화 주인공이되다
소리 없이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인생의 선물
꿈은, 포기하지 않는 한 이루어진다 


& 부록 - 스키 점프에 대하여





비상


열정 하나로 꿈에 도전하다

우연에 꿈이 더해지면 운명이 된다

1991년, 겨울. 칼바람이 세차게 부는 어느 날.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로 보이는 산골 아이들 십여 명이 넓은 무주 리조트 스키장 안에 모여 있었다. 사실 나를 비롯한 이 아이들에겐 무주 리조트에 들어온 일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사건이긴 했다. 무주에서 태어나 무주에서만 자란 우리들은 오래전부터 마을에서 가장 큰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쭉 지켜봤다. 친구들과 나는 학교가 끝나면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다가도 꼭 한번씩은 무주 리조트에 들러 담 밖에서 서성이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담 밖이 아니라 별천지 같던 무주 리조트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내 이름은 김흥수. 설천 초등학교 5학년이다. 여기 모인 애들 대부분이 나처럼 눈과 관련된 놀이나 운동을 좋아하는 무주 산골 초등학교의 촌 녀석들이다. 우리들은 오늘, 잘 놀고 운동을 잘 한다는 이유로 체육 선생님께 뽑혀 이곳에 온 것이다. 눈만 떼굴떼굴 굴리고 서 있는 우리들을 향해 최돈국 감독님이 큰 소리로 외쳤다. 최돈국 감독님은 그 당시 무주 리조트 스키 코치였다. "헤쳐 모여!"


최 감독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눈 덮인 설원에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들은 무슨 일일까 궁금해 하며 감독님 주변으로 모여 섰다. 그런 우리들을 향해 감독님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대한민국 스키 점프 선수들이다!" 우리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하게 서 있자 감독님은 다시 우렁찬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는 너희들의 감독이다. 자, 그럼 오늘부터 훈련 시작이다!" 2001년, 그렇게 우리나라 스키 점프 팀이 결성되었다.


스키 점프 팀의 연습은 우리가 잘 타는 스키와는 아주 달랐다. 스키를 타고 쭉 내려와 안전하게 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키를 타고 내려오다가 붕 뛰어서 공중에 떠올랐다가 착지를 해야 한다. 이름 그대로 스키를 타고 하는 점프인 것이다. 처음엔 가장 낮은 5m의 점프대에서 시작해 15m, 30m, 60m, 90m 단계의 높이가 점점 올라간다.


1991년, 무주 리조트에는 5m와 15m 높이의 점프대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가장 낮은 높이 5m에서도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감독님은 5m 높이에서 뛰는 법과 안전하게 착지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후 계속 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훈련이 거듭될수록 나오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나 김흥수, 동생들인 최흥철, 김현기, 최용직이었다. 그리고 1994년에 강칠구가 팀에 들어왔다.


"너희들은 계속할 테냐?"

감독님이 물으셨다.

"네!"

"왜?"

감독님의 질문에 숫기 없는 우리는 모두 피식피식 웃기만 했다.

"그냥 스키 점프가 좋아서요."

"스키를 타고 뛰어내리는 게 재미있어요."

"그냥…… 좋아요."

우리들의 대답과 반응에 감독님이 웃으셨다.

"그거면 된다. 좋아하는 마음, 그거 하나면 돼!"


예기치 않게 다가와 삶의 전체가 되는 걸 운명이라고 한다.

스키 점프는 나에게, 우리들에게 바로 그 운명이었다.


체력 훈련이나 중심잡기 훈련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날들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마냥 놀고 싶은 날도 많았다.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스키 점프를 계속하려면 힘겨운 훈련들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멋지게 뛰어내리고 싶다면 이 모든 훈련들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장난꾸러기 소년에서 단단한 남자가 되어갔다. 또 진정한 스포츠맨, 점프 스키어로 성장해갔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한 계단씩 쌓아올리다

"너희들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스키 점프 선수들이다. 잘 연습해서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국가대표도 될 수 있다." 감독님이 훈련 도중 기합처럼 우리들에게 불어넣은 그 말이 나에게 꿈이 되어 다가왔다. 그것은 나의 꿈이자 우리 다섯 명 모두의 공통된 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우리들에게 누군가가 네 꿈이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우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국가대표요."


스키 점프를 시작한 지 4년 후, 우리 다섯 명은 모두 설천 중고등학교의 스키부가 되었다. 해만 바라보게 되어 있는 해바라기처럼 날마다 스키 점프만 생각하고 스키 점프만 하던 1995년 봄날, 감독님께서 나와 흥철이, 용직이를 부르셨다. "스키 점프 국가대표 팀이 창설되었다. 너희들이 바로 국가대표다." "네?"


초등학생 때, 스키 점프를 시작하면서부터 꿈꿔왔던 국가대표. 장래 희망으로 항상 노래를 부르던 국가대표. 그런데 지금 내가 그 꿈을 이뤘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서로 축하를 해줘야 하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꿈을 이루었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국가대표의 꿈이 이룬 그 순간이 바로 다시 시작이었다. 이제 우리 다섯 명은 대한민국에서 국가대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로 나가야 했다.



더 큰 꿈을 향하여

위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 길잡이 새 기러기, 김흥수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알파인 스키를 시작했다. 나는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고 운동을 무척 좋아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실력이 빨리빨리 늘었다.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니 재미있었고 늘 스키에 푹 빠져 살았다. 그러니 1년 뒤, 스키 점프 팀에 발탁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스키 점프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잘하고 싶었다. 연습도 제일 먼저 가서 하고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했다. 그렇게 스키 점프만 하면 지낸 지 4년 만에 나는 스키 점프 국가대표가 되었다.


2003년 한체대를 졸업할 무렵 소집영장이 나왔다. 그동안 슬럼프를 극복하기도 하고 다시 빠지기도 하며 오랜 세월 스키 점프 국가대표로 살아왔다. 숙명처럼 그 길을 걸어왔는데 이제 국가대표 유니폼과 스키 점프 복을 벗고 군복을 입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군 생활을 꽤 잘 해냈다. 한 가지만 열심히 파온 정신과 체력 덕분인지 무엇을 해도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했다. 그리고 늘 인정을 받았다. 그렇게 3년간의 군복무 후, 장교로 제대를 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제대 후의 또  다른 삶을 계획해야 했다.


믿음으로 깃발을 내린다

제대를 하기 직전, 스키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 제대를 하면 바로 스키 점프 국가대표 팀의 코치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코치요? 제가 왜요?" 그러자 협회의 대답은 간단했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하니?"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결론을 얻지 못한 채 제대를 했다. 그런데 마중나온 동생들을 보는 순간, 어느새 나의 길은 결정되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할까? 우리는 서로를 힘차게 끌어안았다. 마치 독수리 오형제처럼, 우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끌어안고 힘을 모았다. 이로써 우리 국가대표 5인방이 다시 뭉친 것이다. 나는 이렇게 대한민국 스키 점프 국가대표 팀의 코치가 되었다.


상상은 했지만 현실은 상상보다 더 가혹했다. 10년 전이나, 3년 전이나 변함없는 무관심과 후원 없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며 훈련에 매진, 세계 무대에 나가면 뼈저리게 느끼는 기술과 지원의 차이. 우리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우리가 선택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좌절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1년에 360만 원 버는 우리의 국가대표 선수들. 팀 운영도 어려웠지만 우리들은 하나같이 비슷비슷하게 어려운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나이가 들며 우리들은 부모님과 가족을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종종 좌절에 빠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입장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코치였다. 이들을 어떻게든 끌고 나가야 하는 게 나의 임무였다. "너희들이 지금 가슴에 달고 있는 태극 마크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떠나보니 알 수 있었어. 내가 있던 그 자리, 지금 너희들이 서 있는 자리는 정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자리고 명예로운 자리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태극 마크가 부끄럽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 해. 이 자리를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한다고. 너희가 아니면 지킬 수 없고 또 떠나면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자리야."


고맙게도 선수들은 나의 말을 이해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파이팅을 외치며 점프대를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돌쇠 정신으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경기가 시작되면 선수들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선수들보다 더 심하게 떤다. 선수일 때는 내가 점프대에 올라선 순간에만 긴장하고 떨면 되었다. 하지만 코치가 되고 나니 모든 선수들이 점프대에 올라설 때마다 다 떨리고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게다가 내가 할 일은 선수들이 뛰어내릴 순간을 포착하는 일.


눈이 오고 비가 내릴 때도 선수에게 뛰어내리라는 깃발을 내려야 한다. 이런 일은 선수들과의 신뢰와 유대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선수들은 내가 깃발을 내리면 나를 믿고 무조건 뛰어내린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침착과 집중이라는 좌우명을 갖게 되었다.


바람이 많이 불거나 중요한 경기일 때는 어느 순간에 깃발을 내려야 하나 고민이 많아진다. 나의 결정 하나에 선수들의 성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때다, 하고 감이 올 때가 있다. 지금 뛰어내려야 하는 순간의 타이밍,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의 감을 믿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힘차게 깃발을 내린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바람이 분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람을 가늠해본다.

자, 지금이다!


나는 오늘도 믿음으로 깃발을 내린다.


가능성을 믿으면 꿈이 현실이 된다 - 희망의 파랑새, 강칠구

가장 나를 믿어 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가 되었다. 국가대표가 된 뒤로 유럽 월드컵 등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을 했다. 성적은 늘 꼴찌였다. 부상도 많이 입고 성적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매번 꼴찌를 해도, 부상이 두려워도 나는 쉴 새 없이 점프대에 올랐다. 그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성격상, 꼴찌라고 해서 좌절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꼴찌이기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더 많다고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우리 스키 점프 팀 형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연습 벌레이고 노력을 중시한다. 겉으로 보기엔 잠이 많아 게으른 천재같이 보이는 용직이 형도 타고난 신체 조건과 운동 감각이 있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남몰래 노력을 한다. 나 역시도 형들과 마찬가지로 연습과 노력 없는 결과는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쉬지 않고 훈련에 임했다.


그러다 2003년 초,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타르비시오에서 열린 21회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였다. 그곳에서 나는 형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꼴찌가 드디어 일을 내고야 말았다. K-90 개인전 경기에서 1, 2차 시기 합계 254점을 얻어 금메달을 따낸 것이었다.


한국이 세계 규모의 동계 종합대회에서 쇼트트랙을 제외하고 금메달을 따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모두들 깜짝 놀랐고 엄청난 축하와 함께 신문에 기사도 많이 실렸다. 그렇게 타르비시오 동계 유니버시아드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는 내가 승승장구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슬럼프에 빠졌다. 당시에 나는 나만의 점프를 해야 한다는 의욕에 휩싸여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혼자 너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자 심하게 자책했다. 그러다보니 더더욱 잘 되지 않았고 의욕과 욕심만 넘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에서 대학시절로 바뀌는 전환기에 생활이 달라지면서 내가 초심을 잃었던 탓도 있는 것 같다. 열심히 훈련을 하면서도 집중을 하지 못했고 노력은 하는데 최선을 다하진 않은 것이다. 또한 스키 점프 팀이 열악한 환경에 놓이며 아르바이트를 하랴, 훈련을 하랴 정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경기에 나서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심하게 긴장을 하며 떨었다. 당연히 성적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포기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지금도 언젠가는 다시 정상에 오를 거라고 나 자신을 믿고 격려한다. 나를 가장 믿어주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오로지 한 가지만을 열망해왔고 한 가지만을 소망해왔다. 어린 시절엔 국가대표가 꿈이었고 중학교 땐 올림픽 3관왕이 꿈이었다. 그렇게 오로지 스키 점프만 소망했는데 언젠가는 그 소망을 이룰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소망과 꿈을 가지고 있기에 나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국가대표 스키 점프 팀, 영화 주인공이 되다

소리 없이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인생의 선물

우리는 국제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와 개봉일이 며칠 지나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어린애들처럼 눈물 콧물 다 흘렸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살아온 것과 꼭 같은 장면이 나오면 박수를 쳤고 선수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눈물이 쏟아졌다.


영화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다. 카메라가 선수를 따라가면서 비춰주는 장면 하나하나와 스키 점프를 나고 내려갈 때 들리는 소리들은 실제와 거의 비슷했다. 또 경기 장면은 정말 리얼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습 장면은 실제와 같은 부분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들 진짜 저렇게 살아왔니?" 특히 영화에서 실명으로 등장하는 칠구와 흥철이는 사람들에게 동생은 이제 괜찮냐?, 너 진짜 삐끼 했니?, 욕을 왜 이렇게 잘 하냐?, 진짜 양아치처럼 살았냐?는 질문을 무수히 받았다.


그리고 영화와 현실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 속 국가대표들은 아파트와 군대 면제를 위해 국가대표가 되었고, 국가대표에 삶을 걸지만 우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키 점프가 좋아서, 국가대표라는 자부심과 열정으로 하는 것이다. 영화가 나온 후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불쌍한 눈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열악한 환경, 불모지 같고 사막 같은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스키 점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동료들과 함께 즐겁게 훈련하면서 20년 가까이 스키 점프만 해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다르고 같고를 떠나 나는 영화 <국가대표>가 참 고맙고도 고맙다. 우리들 20년 스키 점프 인생과 10년이 넘은 국가대표 인생에서 이처럼 대중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예전엔 외국에서만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리에서 우리를 알아보는 한국팬들이 많아졌다. 고국에서 인정받는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감격스러웠다. 점프를 하지 않을 때도 늘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유니버시아드 대회,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도 이 정도의 관심과 응원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모두 영화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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