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
지하철에서 생긴 일 - 나이 듦을 지각하다
늙는다는 것은 너무도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느 날 우리가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늙어버린 후이기 십상이다. 인생의 황혼이 다가오고 있음을 우리가 애써 부정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이는 그 특유의 느긋한 태도로 소리도 없이 꾸준히 우리 뒤를 바짝 다가오다 따라잡고는 우리 속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결국 우리의 존재 가장 깊숙한 곳까지 잠식해서는 존재의 본질 그 자체가 되고 만다. 그제야 우리는 우리 안에 늙음이 존재함을 인지하게 되고, 한때 그곳에 살았고 여전히 그 자리를 탐내고 있는 혈기왕성한 젊음에 대해 아는 만큼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서도 점차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제 우리가 한 사람의 노인이 되었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 바꿀 수 없는 현실에 얼마나 많은 우리의 꿈을 양보해야만 하는지 깨달으면서, 우리는 그저 자신의 지평선이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이 시기가 예정대로 오차 없이 오게 해주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한계가 보일 때까지 지평선을 끌어당겨 그것들을 가능성이라는 범주 안에 한정시켜야 한다. 지평선에 다가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 즉 기대의 제한을 통해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인생의 앞날을 더 분명히, 더 확실히, 그리고 더 유한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늙음은 이제까지 한계를 별로 알지 못했던, 그리고 제한을 용납하지도 못했던 우리의 삶에 경계선을 세워주는 선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계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귀중해진다. 사랑, 배움, 가족, 일, 건강, 그리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까지도. 우리는 이 귀한 것들을 더 잘 사용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이들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된다. 새로이 알게 된 한계들은 쓰임새가 아주 많다. 우리가 자신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가치는 더해지고, 감사의 마음은 배가 되며, 삶을 음미하는 능력 또한 커진다. 그 결과 삶이 주는 즐거움이 늘어난다.
늙음은 마음을 집중시키는 힘뿐 아니라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힘도 있다. 왜냐하면 늙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제 더 이상 모든 것이 가능하지는 않음을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충분한 인생의 창고로부터 삶의 풍요로움을 좀 더 많이 끄집어내야만 한다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힘 중 의미 있는 몇몇 것들은 과거에 비해 그다지 약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년기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때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응집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노년기에는 일상생활 중 예기치 못한 사건에 부딪혔을 때, 이에 대처하기 위한 힘이 비축되어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망각할 때 초래될 수 있는 위험은 이러한 힘을 비축해놓지 못했을 때 극대화된다. 젊었을 때의 넘치는 활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겠지만, 신체적 건강과 자신감을 잘 유지하고 있다면 노년기에도 내적 자원들이 활짝 피어날 수 있다. 중년을 지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나이 든 사람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반드시 순응할 필요는 없다. 나 역시도 그런 순응자가 아니며, 그 점에 대해서는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물론 내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을 잊고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일도 몇 차례 겪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을 통해 조금은 혼란스러울 수 있는 경고와 충고를 동시에 하고자 한다.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아 일어날 수 있는 실수에 대한 경고, 갑작스런 위험에 처하거나 병이 들 때 같이 드물긴 하지만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꼭 필요한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충고가 그것이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위를 쳐다보는 것의 상대적 중요성에 대해 말하거나, 그 둘 사이에서 느끼는 양가감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왜냐하면 그 둘은 똑같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 우리는 모순뿐이 아니라 불확실성과도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활력을 유지하는 일과 기력이 상실되어가는 현실과의 적응 속에서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시계는 매우 불투명하다. 우리 인생의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다. 우리의 길은 불확실성으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 노인들은 예전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우리의 육체와 정신에 주의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노년기라고 부르는 발달 단계는 이전의 그 어느 단계와도 같지 않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더 세심히 자신을 돌보아야 하며, 때로는 생소하고 때로는 부담스런 방식에 자신을 조율해야 하는 시기와 장소에 도달한 것이다. 이 시기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집중력과 통찰력, 그리고 행동력을 요구한다. 우리 노인들은 모두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 긍정적인 삶의 자세
미래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은 역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역경에 반응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는 선택권을 쥐고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 신중하게 선택한다. 만약 건설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행동으로 옮길 때 앞으로 더 나은 삶이 보장될 경우, 우리는 천성이라고 알고 있던 모습과 반대되는 선택을 내리기도 한다. 특히 그 과정이 기존의 곤경에 대처하는 방식과 대치될 때에는, 전진하기가 처음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계속 앞을 보고 나아간다면 우리에게 돌아올 배당금이 굉장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몇 번의 싸움 속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게 되면 어려움은 점차 줄어든다. 체육관에 갈 때마다 망설임을 떨쳐내는 일, 군침이 도는 고 칼로리 음식을 매번 마다하는 일, 마음속의 적의와 독선이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바를 어렵게 떨쳐내는 일, 남들의 부탁에 언제나 작은 도움을 주는 일, 매시간 관계에 자양분을 주며 시간을 쓰는 일 등이 견고한 벽돌을 쌓아 올려 건물을 세우게 되고, 이는 결국 우리의 변화한 모습이 된다. 이렇게 하다보면 우리는 곧 우리가 이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여기엔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선’이라는 도리를 행하는 그 자체로 보상은 주어지고, 우리는 거기에 투영된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된다.
사려 깊고 신중하게 선을 행하는 것만큼 올바른 삶을 북돋는 것도 없다. 우리가 이 과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작은 승리가 계속해서 필요하다. 따라서 어디에 있든 할 수 있을 때마다 이러한 작은 승리를 만들어내야 하며, 스스로 엉덩이를 걷어차고 소리를 질러서라도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자신을 끌어내야 한다. 노년기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은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의 상당 부분은 하던 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보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능력을 써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늙어간다는 것의 진정한 교훈이다. 사실 이는 삶의 어느 단계에서나 필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것이 운동, 적절한 식단, 창의성, 호의에 관한 것이든, 혹은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사고방식이나 자기 이미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든 간에, 선택은 개개인을 위해 존재한다. 때론 그것이 우리가 일생동안 힘들게 쌓아온 성향을 극복해야 하거나,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경향을 띤다 할지라도. 몇몇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남들보다 좋은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훨씬 강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에 휘둘리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결정을 내리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역경이 무엇이든 간에, 인생의 후반기에는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는 충동과 본능을 억누르고 타인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선택을 내려야 한다. 일단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면, 아무리 어려워 보인다고 해도 반드시 행동에 옮겨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그 행동은 점점 익숙해져 결국 영예로운 습관이 될 것이다.
수명을 수백 년으로 늘인다는 것 - 영생불사는 가치 있는 일인가
지금까지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삶에 대해 다루었다. 삶에서 노화란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동반자이며,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에 속하기에 인생의 나날들은 주어진 자연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언젠가는 죽음이 닥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따라서 자기 보존의 본능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마치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이 진행 중인 조용한 공연을 방해하려고 무대 위로 뛰어들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언제나 우리 생각의 날개 속에 웅크리고 있다.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은 쇠약해짐에 대한 두려움보다 크다. 궁극적으로, 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세포에서부터 완벽하게 형성된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물 조직과 체계 안에는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갈망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자연선택’의 기저에 깔린 내용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리화학적 메커니즘이 모든 행성의 크고 작은 생명체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진화했다. 우리의 체계 및 생리학, 마음이라고 부르는 비범한 개념은 죽음에 대한 굴복을 저지한다. 그런데도 인류가 생명 연장과 영생이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것이 과연 놀랄 만한 일일까?
어떤 이들은 인간의 종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무언가가 계속 되리라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발전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신을 믿는 것은 초자연을 믿는 것이다. 만약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면, 특히 그것이 자애롭고 인정이 많은 힘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필멸의 모습을 초월하여 어떤 형태론가 생존하는 희망을 품을 수도 있다. 이런 체계 속에서 운명은 신앙에 의해 빗겨가고, 자기 보존의 본능은 갖가지 형태로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종교는 타고난 생물학적 충동의 역설적인 산물이 된다. 우리도, 신도 결코 죽어야 할 필요가 없다.
초기 문명의 기록은 영생의 방법으로서 내세에 집착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역사를 아우르며 우리의 조상들은 회춘이나 생명 연장의 방법을 상상했고, 이를 위해 지식과 기술을 사용해왔다.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과 임상 적용이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어지자, 노화로부터 회춘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노골적으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젊음과 영생을 향한 이 모든 분투는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고, 노쇠함과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만을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1953년 DNA 구조가 발견되면서, ‘나이 듦’이라는 오래된 게임의 법칙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제는 노화에 대한 유전자 성향을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들뜬 분자생물학자들의 머릿속에서는 달콤한 생각들이 춤추기 시작했고, 이들은 인간 게놈을 만지작거리며 250세 이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 미래에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들, 합리적인 과학자들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현재 노화와 싸울 수 있는 약은 없으며, 있다고 해도 그렇게 금방 만들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금전적인 이윤을 노리는 투자자들과 경영팀이 협심하여 영원한 젊음과 건강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럴싸한 이름을 내건 회사를 설립한다고 해도, 제아무리 낙관적인 연구원들이라도 실험실이 되었든 주식시장이 되었든, 그들의 목표가 임박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련한 생물노인학자들 몇몇은 ‘노화 유전자’를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몇몇 사람들은 텔로미어(DNA 각각의 분자 말단에 모자처럼 붙어 있는 부위. 세포가 분열할 때마다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진다)를 조작하는 것은 암의 발생 빈도나 고통을 수직 상승시키는 세포의 재생적 변화라는 통제 불능의 급류를 터트리는 무서운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보며, 또한 이러한 조작은, 본인 및 그 자녀들의 성장 및 발전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줄 수 있다고까지 지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수명을 넘겨서까지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분명히 해야겠다. 실용적?과학적?인구학적?경제적?정치적?사회적?감정적, 그리고 종교와 무관한 영적인 이유로 인해, 나는 다음의 개념에 충실하다. 지구상에 사는 생명체의 개인적인 만족감과 생태적 균형은 타고난 수명이 우리의 죽음을 정할 때 죽음으로써 가장 성실히 충족된다. 나는 현대 생의학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120세까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또한 노화에 수반되는 질환과 장애를 앓는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나는 이를 뛰어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는 물론, 지구상에 사는 다른 생명체에게도 결코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혜, 평정심, 배려 - 노년을 평화롭게 해주는 마음 수행법
나이 듦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에서 지혜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가치 있는 작업일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산 덕분에 수많은 혜택을 누리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지루한 설명을 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떨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꺼이 지혜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나이를 먹는다고 그저 지혜를 얻는 것도, 그리고 젊다고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문화는 지혜를 노인들과 연관시킨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인들은 절대로 지혜를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 많은 노인들은 어리석으며, 이들은 노년이 되기 훨씬 전부터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살아온 세월에서 지혜를 이끌어내고 싶다면, 일찍부터 지혜라는 품성과 익히 사귀어 우리가 되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들 속에 지혜를 빨아들여야 한다.
지혜를 얻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라, 끝나는 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벌떡 일어나 “이제 나는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는 정점(頂點)이란 없다. 그 과정은 어느 단계에서도 불완전하고, 그 결과 또한 모든 미덕이 그렇듯이 상대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구하는 지혜는 노력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거저 얻는 위안도 아니다. 오히려 지혜는 반성의 결과물이다. 나이를 먹으면 느긋한 판단의 가치를 알게 되고 장기적인 결과를 조심스레 따져보게 된다. 나이 들어가는 뇌를 잘 이용하면, 지식을 통합하여 고찰할 수 있는 성향과 기회가 늘어나듯, 지식 자체도 성장하게 된다.
성 바오로는 아가페, 즉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제일이라고 했다. 아가페는 경이로운 사랑의 한 종류를 말한다. 불가타 성서(4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성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옮긴이)의 저자는 이를 적절히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그것이 바로 ‘카리타스(caritas)’로, 이 말은 사사로운 사리사욕을 제쳐놓는 ‘돌보는 사랑’이라 정의된다. 성 바오로의 놀라운 말은 지금 이 장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caritas)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이 없는 곳에는 지혜도 있을 수 없다.
‘카리타스’란 다른 이의 눈과 감정을 통해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은 물론, 우리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며 상상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른 이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반추해보는 것 말이다. 이는 가장 가까운 이들의 높은 기대치에 부응하여 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카리타스와 성숙한 반성, 그리고 원칙을 지키는 생활에 더욱 다가가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롭기 위해서 인간은 우선 선해야 한다.
이런 복잡한 특성을 다룰 때는 평정심이 필요하다. 이것은 침착함이라는 후천적인 재능으로, 1889년 윌리엄 오슬러는 “어떤 상황에서도 태연한 것, 폭풍 속에서의 고요함, 심각한 위기의 순간에 번뜩이는 명쾌한 판단력”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또한 “단호함과 용기인 동시에 ‘우리가 따르며 사는 인간의 마음’을 무디게 하지 않는 것……이는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가, 또한 실패할 때에든 성공할 때에든 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라고 말했다.
진정한 평정심은 사실 너무나 얻기 힘들어서, 이는 우리 대부분의(아마 우리 모두의) 능력 밖에 있다. 게다가 이는 완벽하게 달성된다기보다, 정도의 문제로 존재하는 여러 자질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누구든 많든 적든 동요하게 된다.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으려면 인간은 초인적인 화신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침착함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스트레스를 다루는 법이라 하겠다. 우리가 불안한 존재하는 점을 인정하고,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덜하게 된다. 그 결과 불안감의 영향력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때로 명료한 사고에도 도움이 되어서 우리는 직면한 어려움을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지혜의 여러 특징들이 그렇듯이, 평정심 또한 나이가 들면 좀 더 쉽게 얻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노년층에 대한 수많은 연구를 보면, 정신 건강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감정적인 반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모습은 젊은이보다 노인에게서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한다. 노인들은 자신들의 아들딸보다 분노나 조바심, 억울함을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에 덜 휘둘리기 때문에, 조금 더 균형 잡힌 태도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뿐 아니라, 달갑지 않은 기분이 들더라도 노인들은 그러한 감정을 훨씬 능숙하게 다룬다. 성숙한 마음의 특징인 자제심은 성숙한 세월과 함께 자란다.
스스로에 대한 지속적인 재평가 없이는 지혜도 없다. 우리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우리가 누구인지, 나이에 관계없이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 하는 모든 것들은 지속적으로 재고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결여된 채 존재하는 지혜는 없다. 플라톤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우리에게 한 번 더 상기시켰던 것은 바로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라는 사실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오랜 삶은 우리가 밖을 내다볼 때 보이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열쇠가 된다.
성공적인 노화를 위한 피날레 - 나이 듦은 축복이다
우리가 할 일은 오늘 하루만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은 저 산 정상에 올라야만 보이는 파노라마 같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이다. 산 정상에 올라야만 우리가 그동안 초점을 맞추고 살아온 것들이 모두, 총체적으로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고, 현재 어떤 모습이며, 그리고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가 훤히 들어온다. 그러나 실제 작업이 이뤄지는 저 아래 평원이 아니라 산 정상에서 희박한 공기를 너무 자주 들이마시게 되면 현기증과 비현실적 감정이 피어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미래를 계획하기 위해 과거와 현재를 이용하고, 매일의 칸막이가 잘 사용되는지 확인하고, 모든 시냅스가 신경전달물질과 원활한 작용을 하도록 하려면, 역시 광활한 시야가 필요하다.
내가 이러한 은유를 통해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노년의 삶이 생산적이고 보상을 받도록 하려면 그저 미리 계획하는 일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인생의 모든 단계는 다음 단계, 혹은 그 너머를 위한 준비이다. 그러나 장기 요양 보험에 들거나 비상금을 마련해놓는 것을 빼고, 우리는 늙음에 대해 거의 준비하지 않는다. 사실 몇몇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가능하다는 듯, 은퇴란 그전까지 해왔던 모든 것들을 버릴 시기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기대에 가득 차 태양 가득한 곳으로 도피하지만, 결국 그곳에서 불만을 느끼며 권태감을 덜어낼 방법을 찾게 된다.
노년의 나이는 반드시 그보다 앞선 세월 동안 쌓인 기초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이미 세월이 우리를 덮치고 난 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자랄 때 어른에 대해 연구하고 우리의 마음을 훈육하고 몸을 단련함으로써 다가올 책임에 대비했던 것처럼, 중년부터는 반드시 늙어가는 법을 연구해야 한다. 늙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예술의 한 형태이며, 창의성의 전형이다.
노년은 앞선 세월보다 훨씬 더 많은 지혜를 요구한다. 젊었을 때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노년에도 반드시 창의적일 수 있다는 확신과 타인의 안녕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지혜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이해하며 준비하며 조율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나이든 우리의 자화상을 바꾸어주며, 우리를 우아함과 선량함으로 빛나게 한다. 우리는 몸에서 점차적으로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인지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현인들은 매일, 기회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를 해석하고자 했다. 현인들은 매일, 기회가 생길 때마다 스스로를 해석하고자 했다. 모든 예술 행위처럼, 이러한 일의 완성에는 부단한 각성과 선견지명, 조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두는 우리에게 성취감과 함께 방대한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준다.
이 책을 읽는 대다수의 독자들은 여든 살은 거뜬히 넘길 것이고, 몇몇은 그 이상도 훌쩍 넘길 것이다. 만약 그런 가능성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신중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면, 이제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나는 중년의 나이가 되면 으레 하는 경제적 준비나, 철저한 건강검진과 같은 실질적인 일들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세계관을 기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앞으로 다가올 세월을 그저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환영하는 시야를 가지라는 의미다.
그동안 내가 관찰해온 바에 따르면, 우리는 인생의 40~50년을 일 속에서, 또 사회 속에서 존경받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 존경하는 이들을 따라 하며, 또한 남들처럼 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퍼붓는다. 우리를 휘감고 있는 허영이나 거짓된 가치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 이런 일들은 상당 부분 유익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고, 세속적인 성공의 방식을 이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이는 지혜를 얻는 데 가장 중요한 지식과 경험을 한데 모으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지속적으로 관찰을 하면서 우리의 가치 체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부분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발견해나가며, 이를 흡수하게 된다. 열심히 커리어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그 일로 인해 그어진 경계선을 다소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일과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통해 성숙해지며 점차 자유로워지게 된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이는 해방자가 된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쏟으니 평생 열중해존 모든 것들은 이제 인생의 성취라는 절정에 닿게 해주는 고유함을 위한 수단이 된다. 삶을 잘 살아왔을수록,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축적된 지혜가 주는 보상은 더욱 커질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에 적은 대로, “노년이 풍요로운 삶을 위한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유념한다면, 당신은 젊었을 때부터 노력할 것이다. 그럼 당신의 노년은 그 자양분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본 정보는 도서의 일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은 반드시 책을 참조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