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안 가면 후회하고 다녀오면 또 가고 싶은 맛있는 여행!
이 책에서는 알면 알수록 더 매력적인 우리나라의 각 지역의 제철 재료와 이를 토대로 만들어지는 밥상을 소개한다. 지역의 제철 밥상에는 소박한 인심과 따뜻한 밥상, 우리나라 제철 산지의 음식, 그리고 전통을 지켜나가는 장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알고 가면 여행이 더욱 깊어진다. 지은이가 여러 차례 맛보고 소개하는 음식 이야기를 듣다 보면 지역의 삶과 문화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다.
■ 저자 손현주
음식과 와인 칼럼니스트, 여행 작가, 사진가. 전 〈경향신문〉 기자. 20년간 잘 다니던 신문사에 홀연히 사표를 내고 2010년에 안면도로 귀향했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집에서 글을 쓰고 섬을 떠돌며 사진을 찍는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걸을 때 행복하다. 책 속에 묻혀 예술에서 역사, 인류학까지 뒤죽박죽 읽으며 영감을 얻는 새벽 2시 47분을 좋아한다. 앞으로도 꾸준히 책을 읽고 쓰고 사진을 찍는 삶을 꿈꾼다. 런던과 서울 등에서 사진 개인전을 열었다.
지은 책으로 《계절 밥상 여행》 《와인 그리고 쉼》 《태안 섬 감성 스토리》 《사랑이 파리를 맛있게 했다》 등이 있다.
페이스북 www.facebook.com/hyunjoo.sohn
■ 사진 김도태
하늘과 숲, 도시를 기록하며 꽃향기를 쫓는 사진가.
■ 차례
프롤로그
1월
베지근한 영혼의 국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_ 꿩메밀칼국수
뱃사람들이 고추장에 비벼 먹던 음식 경상북도 포항시 _ 물회
2월
바다 향 머금은 선홍빛 홍합 꽃 경상북도 울릉군 _ 홍합밥
수박 향 나는 새조개 초밥 한 점 충청남도 홍성군 _ 새조개초밥
3월
푸른 기운 동동 뜬 쑥과 도다리의 흰 살점 경상남도 통영시 _ 도다리쑥국
짭조름하면서도 달큰한 회 한 젓가락 충청남도 당진시 _ 실치회
4월
술 깨는 안주 ‘내 맘대로 계절 술상’ 광주광역시 _ 제철 백반
고집불통 맛의 비결 하나. 청주 경주집버섯찌개 임영수 씨 / 둘. 태안 화해당 김경례 씨
5월
꽃잎처럼 얇게 저민 아릿한 ‘낭만 독’ 한 점 경기도 파주시 _ 황복회
고집불통 맛의 비결 셋. 약이 되는 사찰음식 만드는 홍승스님 / 넷. 간월도 섬마을 어리굴젓 유명근 씨
6월
양은밥상에 내온 작은 우주 강원도 화천군 _ 병풍쌈
주문만 하면 다 내주는 밥집 전라남도 해남군 _ 닭 육회
7월
편육 얹어 뚝뚝 끊어 먹는 든든한 한 젓가락 강원도 춘천시 _ 메밀국수
삶이 허기질 때, 달큰한 한 뚝배기 경상북도 안동시 _ 선지해장국
8월
저수지 풍광을 보며 몸보신 한 그릇 충청남도 예산군 _ 어죽
진득한 애수 한 점, 보양식 중 최고봉 전라남도 목포시 _ 민어
9월
눈 질끈 감고 먹는 스테미너 요리 부산광역시 _ 곰장어
김 모락모락 나는 추억을 먹다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 _ 찐빵과 단팥죽
10월
팥잎무침과 콩잎 장아찌가 있는 토속 밥상 대구광역시 _ 한정식과 따로국밥
연포탕과 갈낙, 척척 앵기는 한 그릇 전라남도 영암군 _ 세발낙지
11월
1년 묵힌 게국에 갈배추를 버무린 음식 충청남도 태안군 _ 게국지
그리움으로 말아내는 존재의 밥 충청남도 예산군 _ 묵밥
12월
흐물흐물 못생겨도 속풀이엔 최고 강원도 동해시 _ 물메기탕
흰 눈 맞으며 타닥타닥, 맛있는 소리 충청남도 보령시 _ 굴 구이
고집불통 맛의 비결 다섯. 전주 가족회관 김년임 씨
열두 달 계절 밥상 여행
3월 경상남도 통영시
푸른 기운 동동 뜬 쑥과 도다리의 흰 살점 _ 도다리쑥국
통영 앞바다에 내려앉은 금속성 볕은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했다. 근육을 푼 흙, 툭툭 터져 오르는 기운들. 남녘은 완연한 봄이다.
이즈막 납작모자에 옷깃을 닭 벼슬처럼 세우고 통영 거리를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잠시 묻어놓았던 내면의 풍류와 객기를 끌어내는 것이며 가슴속에 낭만을 채우는 일이다.
"도다리쑥국 한 그릇 먹어야지."
언제부터인가 나의 봄은 통영 도다리쑥국에서 시작되었다. 된장을 살짝 푼 말간 국물에 통영의 푸른 기운처럼 동동 뜬 쑥과 도다리의 흰 살점. 국에서 파란 바다 냄새가 난다고 해두자. 딱 두 달이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하는 애타는 봄 국이다. 그래서 통영의 봄은 가게마다 폼 잡고 써 내려간 입춘대길, 도다리쑥국이 내걸리며 활기를 얻는다.
신새벽, 시장을 둘러보기로 한다. 시락국(시래기국) 집 문 틈으로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온다. 밤새 통영식 술집 다찌에서 술을 마셨거나 서호시장 4시 경매를 끝낸 사람들이 아린 속을 움켜잡고 몰려드는 해장 성지다. 서성대다 포장마차에서 콩국과 빼대기죽(고구마와 곡식을 넣어 끓인 죽)으로 허기를 때오는 모습도 흔히 만날 수 있다.
그 먹먹한 서민의 시간, 여기저기 쓸쓸하고 허출하게 다니다가 시장 입구로 나와 도다리쑥국과 멍게비빔밥을 시켜놓곤 객지의 아침을 맞는다. 내 감정과는 상관없이 주방의 노란 냄비에서는 국물이 새벽잠처럼 끓는다. 토막 친 도다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국물 속으로 던져넣는 주인의 손놀림은 익숙하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쑥을 넣고 재빨리 한소끔 끓여내 퍼내는 손놀림이 재봉틀 실 땀처럼 빈틈없다. 금세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도다리쑥국이 놓였다. 잠시 눈을 감아본다. 향긋한 해쑥 향이 멀미처럼 올라올 것 같기 때문이다.
쑥을 수저로 누르고 국물부터 떠먹는다. 입안 가득 향긋한 초록이 넘실댄다. 봄이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 담박함이 온몸을 편안하게 다스려준다. 여린 쑥은 씹히는가 싶더니 목젖으로 넘어가고 수저로 편편하게 뜬 도다리 살점은 그저 달다. 절로 시원하다는 소리가 나온다. 통영 사람들은 복이 많다. 종일 술독을 끼고 살아도 속 다스려 줄 해장국이 넘쳐나니까. 두부와 톳나물, 통멸치 젓갈, 간이 센 남도 김치가 그대로 남았다. 30년간 맑은 국을 끓여왔다는 주인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음식을 추억하기 바쁘다.
"도다리쑥국은 말 그대로 도다리와 쑥만 들어가야 합니다. 콩나물이나 묵은지를 씻어 넣기도 하는데 재료의 향긋한 맛을 즐기는 것이 봄 밥상의 핵심이잖아요? 쌀뜨물에 된장을 약간 풀기도 하지만 도다리가 비린 생선이 아닌 데다 향긋한 쑥이 들어가니 맹물에 끓여도 비리지 않아요. 바다와 육지의 오묘한 향이 어우러집니다."
말마따나 통영 도다리쑥국은 바다를 건너온다. 봄이 이른 욕지도나 한산도, 소매물도 등 섬에서 해쑥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격도 제법 나가서 한 그릇에 1만 원을 훌쩍 넘는다. 하지만 맛을 나는 토박이 미식가들은 "2월 쑥국은 이르다"고 말한다. 도다리 살이 얇기 때문이다. 먼 바다 살집 두터운 도다리로 끓여야 국물 맛이 깊은데 2월 도다리는 뼈째 썰어먹는 세꼬시 용이다. 육지에서 늦은 쑥이 나오는 3월 도다리가 더 깊은 맛이 나온다는 얘기다. "살갗이 거칠거칠한 옴도다리가 최고지요. 지금은 비싸기도 하거니와 구하기 힘들어요. 바닥부터 싹 쓸어 올리는 고대구리(코가 작은 그물을 이용해 생선을 잡는 방식) 배로 조업할 때는 도다리가 싸고 많았는데...... 이 돌도다리로 끓인 쑥국의 깊은 맛은 궁중 음식 부럽지 않습니다."
3월에 통영에 가야 하는 이유 중 또 하나는 멍게 때문이다. 이때쯤 멍게가 속이 차기 시작하니 도다리쑥국과 더불어 멍게비빔밥을 맛봐야 통영이 시리게 다가올 테니까. 대부분 멍게비빔밥의 멍게가 생물인 줄 알지만 제법 알려진 주방에선 속과 향이 그렁그렁한 봄 것만 쓴다. 봄에 잡아 숙성해놓고 1년을 사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특유의 향이 적다. 갓 건져낸 멍게는 미끌미끌하여 밥과 겉돌아 잘 비벼지지 않는다. 간을 하여 숙성시키면 참기름만 얹어 내도 그 향이 몇 시간 동안 입에 머문다.
도다리쑥국이 나오는 집은 어김없이 졸복을 낸다. 졸복은 크기가 작아 독을 손질하려면 애통터지는 생선이다. 한 마리가 한 입 크기다. 하지만 미나리를 넣고 시원하게 끓여낸 졸복국은 속 달래는 데 이만한 것이 없지 싶다. 또 통영의 대표 음식 시락국은 장어 머리를 푹 고아 시래기와 된장을 넣고 끓여낸 건강식이다. 방아잎이나 부추를 듬뿍 얹어 먹는다. 500원에서 시작한 시장 밥상이었으나 지금은 4,000원이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밥상이다.
배를 꺼트리기 위해 산책을 나서 보니 곳곳이 꽃 편지다. 통영의 바람은 너무나 달아서, 동백꽃처럼 붉어서 사랑도 피웠으니 먼저 간 풍류객들 동선을 따라 가는 것도 봄날의 애상이지 싶다.
6월 강원도 화천군
양은밥상에 내온 작은 우주 _ 병풍쌈
별빛이 길을 안내하던 산골짜기에도 전깃불이 들어오고 휴대전화가 펑펑 터지니 궁벽한 오지가 사라진 지 오래다. 하지만 깊은 산에 숨어들어 사나흘 세상을 잊고 싶을 때가 있다. 나룻배를 타고 들어가면 더 좋겠다. 걸어온 내 흔적을 지울 수 있으니까. 산이 가로막아 한나절은 걸어야 닿는 곳이면 좋겠다. 중간에 맘 바뀌어도 돌아오지 못하게.
구들에 장작을 밀어 넣어주고, 산 쪽 으슥하게 자리 잡은 화장실이 무서워 밤이면 풀숲에 실례를 하는 곳. 허나 아침이면 내 어머니를 닮은 촌부가 조물조물 12가지 나물을 무치고 된장찌개를 바글바글 끓여 한 상 가득 내오는 곳. 처음 보는 주인집 아저씨와 오래된 식구처럼 숟가락을 같이 담그며 된장 뚝배기를 헤집는 곳.
밥상을 물리기도 전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몰려와 서울 사람 인생에 참견을 하는 곳. 비 오는 날, 계곡의 돌 굴러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와르르와르르 요란한 곳. 들꽃이 흔들릴 때마다 두고 온 일상에 대해 내뇌가 삭제 버튼을 작동시키는 곳.
그렇게 산과 강이 가로막은 곳을 찾아, 치유의 밥상을 찾아 떠나온 곳은 화천의 오지 비수구미였다. 오죽하면 호랑이가 등장한 것 같다는 소동으로 마을이 알려졌을까. 화전을 일구고 나물을 뜯고 뱀을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자연이 전 재산인 동네인데 최근 트레킹 코스가 생기면서 제법 입소문이 났다. 7년 전 내려온 도회지 댁 혜자 씨만 빼면 나머지 세 가구는 토박이다. 그 덕에 난 여인들이 억척스럽게 따낸 산채로 만든 밥상 호강을 누린다.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해산(日山)의 발목, 비수구미.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최북단이면서 가장 길다는 해산터널(1,986미터)을 지나 구절양장 아흔아홉 구비를 내려가다 강 옆 비좁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20여분 갔을까. 길이 끊겼다. 강 건너에 매어놓은 빈 배로 보아 강을 건너야 마을로 들어서지 싶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걸 보니 심사가 예민해졌다. 차에 옷가지 다 놔두고 카메라 렌즈 가방만 달랑 메고는 산 위쪽으로 개통한 소위 올레길로 접어들었다. 산길을 20분 걸으니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숨을 내놓을 무렵 출렁다리가 보인다. 정면과 오른쪽에 달랑 두 집이 있는데 눈에 띈다. 다리 건너 첫 집이 이장님 댁이다.
간밤 비로 계곡물이 제법 불었다. 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약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작정 숨어든 것이다. 비가 와 길이 패어 난장인데 다 헤치고 산을 넘어 온 여인을 본 이장 부부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마루로 올라서며 밥을 주셔야 하고, 잠도 자야겠다고 생짜를 놨다. 일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난 안방에서 커피를 얻어 마신 것으로 하룻밤을 허락받았다고 간주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열목어가 노닌다는 계곡을, 물 흐르는 방향 따라 올라갔다. 개울은 제법 폭이 넓고 들꽃이 간간이 피어 있다. 바위에 부딪히는 포말이 한기를 느끼게 했다. 한 시간쯤 돌고 오니 부부는 각자의 산골 살림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불쑥 들이닥친 불청객이 추울까 봐 남편은 비워 둔 골방에 장작을 밀어넣고, 적당히 탄 나무는 불기를 재워 숯을 만들었다. 아내는 좁은 부엌에서 종종걸음이다. 가끔 장독대를 다녀오고 들기름병, 간장병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나물을 무치는 모양이다. 된장찌개가 바글바글 끓는다. 여섯 명은 앉을 것 같은 둥근 양은밥상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가운데 찌개가 놓이고 찬은 비린 것 한 토막 없는 나물뿐이다. 입이 떡 벌어진다.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숟가락을 들었다.
이게 무슨 나물이지? 데쳐 놓은 이파리 하나를 집어 손바닥에 펼치니 차고도 넘친다. 곁에서 쳐다만 보고 있던 아내가 씨익 웃는다. 깊은 산중에서만 딸 수 있는 귀한 병풍쌈이란다. 따질 것 없이 병풍쌈을 반 갈라 손에 얹고 밥 한 수저와 집고추장, 무장아찌를 얹었다. 둥글게 말아 볼이 미어지도록 입안에 넣었다. 오물오물 그 큰 입을 씹느라 머릿속 잡념이 모두 지워졌다. 꿀꺽 넘기니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 은은한 향과 매끄러운 식감이 역시 나물의 여왕이지 싶다.
유년 시절 밥상의 묵언을 강조하시던 아버지와 겸상한 것처럼, 난 이장 어르신과 수시로 수저를 부딪치며 말없이 한 뚝배기 속 된장찌개를 퍼냈다. 처음 만난 사람과 한 뚝배기를 나눠 먹는 이 묘한 풍경이라니, 이것도 한국식 정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참으로 애매하다. 그러나 여기서 앞접시를 달라거나 국자로 따로 퍼달라는 말은 도저히 못하겠더란 말이지. 먹어도 먹어도 나물은 줄지 않는데 고봉밥 한 그릇은 순식간에 비어버렸다. 건성으로 틀어놓은 텔레비전이야 세상 얘기를 떠들건 말건 치열하게 오감을 집중한 밥상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나물 찬과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위로가 참으로 크다.
"병풍쌈은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깊은 숲속에서 자생해요. 약간 습하고 그늘진 곳을 좋아해 쉽게 따기 힘듭니다. 각종 비타민과 섬유질이 많아 피부 미용에 좋다고 하죠. 따놓기 무섭게 팔려나가요. 밥상에 올라온 나물은 다 집 주변에서 채취한 거예요. 갓 딴 나물의 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지만 사실 정말 맛있는 것은 말린 묵나물이에요."
그러고 보니 환갑이 훌쩍 넘은 이장 김상준 씨 얼굴이 장판처럼 팽팽하다. 10살은 어려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부부는 "산나물만 먹어서 그렇다"고 활짝 웃는다.
약속 없이 들이닥친 손님이라 찬 걱정을 하더니만, 다음 날 아침 밥상에는 나물이 더 늘었다. 데쳐서 들기름에 무치고, 볶고, 조물조물 만든 나물 찬이 12가지다. 집에서 만든 두부를 숭덩숭덩 넣어 직접 발효시킨 청국장이 올라왔다. 20년간의 아침 단식이 한 방에 무너졌다. 나물 밥상을 보니 식탐이 생겼기 때문이다. 밥 두둑하게 먹고 마루에 앉아 건너편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으며 우체국 일을 겸하는 이장님을 따라 강가로 나왔다. 어제 물이 막혀 못 건넜던 맞은편에는 파로호 다른 언덕빼기로 가야 하는 할머니 두 분이 이장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는 나를 태워 건너편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있던 할머니를 태워 물안개처럼 사라졌다.
난 배가 물결을 일으키며 지나간 자리를 넋 놓고 쳐다봤다. 1박2일 꿈을 꾼 것일까. 방문은 몸을 굽혀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고 매캐한 연기가 방바닥에서 새어 나오며, 무서워서 형광등을 끌 수 없었던 밤. 유년 시절 쓰던 요강이 그리웠던 밤. 그럼에도 속 든든한 이 포만감은 뭘까.
밥이란, 밥상이란 이래야 한다. 산이 텃밭이다. 볕 좋은 날, 장을 담가 항아리에 다독거려놓고 깊은 산중 그윽한 산채를 따다 쌈을 싸 먹는 소박한 영혼의 음식을 놓치고 살았다, 우리는. 그러니 떠나야 한다. 도시의 독기를 빼기 위해 단 며칠만이라도 그 산중 밥상과 마주해보자. 비수구미도 오지로 불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8월 전라남도 목포시
진득한 애수 한 점, 보양식 중 최고봉 _ 민어
자고로 음식은 불편하더라도 현지에서 그곳 바람을 쏘이며 음식 잘 만지는 주인이 재빠르게 조리한 제철 재료를, 그 동네에서 생산된 막걸리에 곁들여 느리게 즐겨야 하는 법이다.
매년 한 번은 들르는 단골 민어집이 목포시 유달산 아래 있다. 여느 날처럼 알전구가 매달린 구석 골방으로 들어가 민어로 할 수 있는 요리를 모조리 시키고, 목포 막걸리도 한 병 주문했다. 2명이 먹기 딱 좋은 민어회 한 접시와 무침, 전, 탕이 차례로 나왔다. 신이 난 젓가락은 망둥이처럼 덤벙댄다.
바닷가 아니랄까봐 회 접시는 무디다. 민어살을 쑴벙쑴벙 투박하게 썰어 양배추 위에 산처럼 쌓았다. 올해는 민어가 안 잡혀 비싸다더니 값을 못 올리는 대신 양이 줄었다. 먹기 바빠 투정이 쑥 들어간다. 동행과 막걸리 잔을 부딪치고, 복숭아 꽃잎처럼 분홍색이 도는 살점을 막걸리 초장에 푹 담가 먹는다. 막걸리식초가 주는 감미롭고 풍부한 맛이 민어의 부드러운 살집과 어우러져 농밀하게 번진다. 어쩌면 이 초장이야말로 이 집에 사람들의 발길을 30년 이상 묶어 놓은 비결인지도 모른다.
민어는 살에 손대기 전 탐내야 할 부위들이 있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뒤 찬물에 헹궈 탱탱하게 내놓는 껍데기는 첫맛으로 일품이다. 껍데기는 참기름과 깨를 섞은 소금에 찍어 먹는다. 꼬들꼬들 낯설고도 고숩다(고소하다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 오죽하면 민어 껍질에 밥 싸먹다 논밭 다 팔아먹는다는 속담이 생겼을까. 두 번째는 부레다. 유일하게 부레를 회로 먹을 수 있는 생선이 민어다. 민어 부레는 고래 힘줄처럼 질겨서 질겅질겅 씹다 보면 담백하고 고소한 히말라야 야크 치즈가 떠오른다.
하지만 진짜로 먹을 줄 아는 어부들은 쫄깃하고 기름진 배진대기(뱃살)과 꼬릿살, 지느러미를 먼저 집어 먹는다. 이 집은 지느러미를 다져서 고추와 파를 넣고 무쳐 내놓는다. 막 기름에 부쳐낸 민어전을 묵은지에 싸 먹으면 별미다. 마지막으로 머리와 뼈를 넣고 끓인 싱건탕이나 매운탕을 먹는다. 살진 기름이 동동 뜬 진국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종횡무진 신나는 생선이 민어다.
민어는 커야 맛있다. 그래서 킬로그램당 가격 차이가 크다. 10킬로그램짜리는 떠야 민어 좀 먹었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그 정도면 두세 가족이 옴팡지게(넉넉하게) 먹는다. 아무래도 알을 품고 있는 암치는 살이 무르다. 해서 여름 회는 수치를 더 쳐준다.
덧붙이자면, 민어를 투박하지만 그럴듯하게 즐기는 방법이 있다. 전라남도 신안군 지도읍 송도위판장에 가는 것이다. 경매장 옆 회 뜨는 집에서 민어를 손질해 바닷가 파라솔 아래서 바로 먹거나 근처의 횟집을 이용하면 된다. 하지만 산지에서의 즉석 요리에도 허점은 있다. 여름 민어는 잡힌 후부터 상하기 시작해, 상인들은 팔기 전에 아가미 밑을 눌러 피부터 뺀다. 그리고 소위 잘한다는 식당들은 내장 등 부속물을 빼내고 냉장고에서 사나흘 숙성시킨다. 사후경직이 풀려 이노신산이 생겼을 때 살이 탄력 있고 감칠맛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번에 간 민어집의 냉장고에는 미리 만져놓은 민어가 여러 마리 보였다. 민어를 싱싱하다고 즉석에서 활어로 먹는 것은 한 수 아래라는 얘기다. 회 한 접시 뜨며 부위별로 이렇게 말 많은 생선도 드물지 싶다.
회 떠주는 곳 1호 남자는 날렵하게 살을 도려내면서 민어 예찬에 들어갔다. 내장이 적고 살이 두꺼워 금세 한 접시가 차고, 껍질이며 부레까지 전 부위의 식감과 맛이 여느 생선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맛있다는 부위가 다르제라. 하지만 난 운동량이 많은 꼬리가 쫄깃해 좋더라고요. 살에 묻혀 들어가기 쉬운 지느러미는 숨어서 먹는 부위랑께요. 꼬들꼬들하니 고소한 맛이 일품이제."
예로부터 기운이 없고 식욕이 떨어지는 복달임 때 찜이나 탕으로 몸을 다스리던 선조들의 보양식 민어, 기운 차리자는 핑계를 대며 먹는 음식이다.
12월 충청남도 보령시
흰 눈 맞으며 타닥타닥, 맛있는 소리 _ 굴 구이
가까운 사람과 약속을 하나 했다. 흰 눈이 펄펄 내리는 날 천북에 가자고. 바닷가 포장마차에 옹송그리고 앉아 탁탁 소리 나는 굴을 굽자고. 눈은 바닷속으로 투신을 할 것이니 우리들 이야기는 모락모락 연기 속에 태워보자고, 그러자고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했었다. 그리고 까맣게 잊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눈이 흩뿌린 날 갑자기 그 약속이 생각났다. 그래서 무작정 천북으로 내달렸다. 겨울 바람은 정신없이 몰아쳤다. 천북에 가는 사이, 눈은 그쳤지만 날은 여전히 사나웠다. 도착한 곳은 보령시 천북면 장은리 굴 단지다.
아, 그런데 추억의 옛 포장마차는 모두 사라지고 새 건물들이 일렬로 들어섰다. 입김을 훅훅 털어내며 머뭇거리니 이 집 저 집 아주머니들이 내다보고 호객을 한다. 인심 좋아 보이는 할머니를 따라 굴 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우리의 낭만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굽자고 왔으니 찜보다 구이를 먹자고 했다. 한 양동이 가득 조개가 담겨 왔다. 둘이 어찌 다 먹지 싶다. 타닥, 타닥……. 연탄불도 아니요, 숯불도 아닌, 통속 소설 같은 가스불이 호롱호롱 타올랐다. 굴 껍질이 달궈지면서 껍질이 이리저리 튀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눈에 튈까, 몸에 튈까 싶어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소란을 피우면서도 뚜껑을 확 벌린 오동통한 굴을 보니 군침이 가득 고인다.
왼손에 목장갑을 끼고 벌어진 굴 껍질을 벌려 나무젓가락으로 안을 빼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곁들여 나온 초고추장도 간장도 다 필요 없다. 굴은 그대로 간이 맞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상대방 입에 넣어주며 연방 호들갑을 떤다. 부드럽고 고소하며 짭조롬한 감칠맛 때문에 끊임없이 굴을 불 위에 올려놓는다. 충청도의 시원소주도 한 병 시켜 잔을 부딪혀본다. 이런 낭만이 있어 겨울구이는 불장난처럼 재밌다.
먹다가 남은 굴은 찜솥에 쪄달라고 했다. 한 솥(약 10킬로그램)에 3만 원이니 어부들의 노고에 비해 너무나 저렴하다. 4명이 한솥을 다 못 먹으니까. 불 맛은 없지만 찐 굴은 까먹기 편하고 소란스럽게 불을 피우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경제적이다.
굴을 넣고 담근 섞박지 맛이 빼어나 한 접시 더 주문하고, 할머니께 천북의 굴 구이 유래를 알려달라고 졸랐다. "유래랄 것이 있냐"며 수줍게 웃더니만 지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겨울이면 바닷가 사는 사람들은 굴 까는 것이 큰일이었지. 물때가 짧고 추우니까 굴뻑(껍질 굴)을 육지로 가져왔어. 사리(조수가 가장 높을 때)때 많이 가져다놨다가 조금(조수가 가장 낮은 때)에도 내내 굴뻑을 깠는데 힘드니까 여자들이 둘러 앉아 농담도 해가며 같이 일을 해. 어영부영 때를 거르기도 하는데 그럴 땐 춥기도 하고 배가 고프니 일단 불을 피웠어. 불이 이렁이렁 달아오르면 굴뻑을 그 안에 던져. 배고팠으니 얼마나 맛있겠어. 그렇게 구워먹던 굴 구이가 시작이지. 몸에도 좋고 겨울철에 이만한 음식이 어디 있어."
바다의 우유로 불리는 굴은 찬바람 불 때부터 이듬해 3월까지 살집이 좋다. 굴이야말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바다의 식재료다. 서양 사람들은 회는 안 먹어도 굴은 생으로 즐긴다. 레몬즙을 뿌려 화이트와인과 곁들이면 환호하며 즐기는 겨울 미식이다. 역사적으로도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과 독일 재상 비스마르크가 즐겨 먹었고, 고대 로마인들도 사랑의 묘약으로 간주했다. 무엇보다 겨울철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 철분, 칼슘 보충에 좋다. 소화가 잘되니 어린이나 노약자에게도 두루 좋다. 특히 빈혈이 있는 사람은 꼭 챙겨 먹는 것이 좋다. 난 굴의 아연 성분이 여드름을 낫게 한다며 여고생 딸아이를 홀려내 겨우내 먹이곤 했다.
굴 구이를 실컷 먹었어도 밥을 안 먹으면 한국 사람들은 섭섭하다. 대개 굴 구이집은 굴을 넣은 칼국수나 굴밥을 한다. 굴이 워낙 탱글탱글하고 싱싱하니 굴밥도 고소하여 참 맛있다. 적당히 시켜 나눠 먹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거센 바닷바람도 춥지 않다.
한 가족이 우르르 몰려 가도 실컷 먹을 수 있는 겨울 식도락의 정점은 역시 굴 아닐까. 어느 날 찬바람이 분다는 핑계로, 눈이 올 것 같다는 핑계로 가까운 사람과 천북으로 훌쩍 떠나보자. 운이 좋아 빨갛게 내려앉는 저녁놀을 볼 수 있으면 좋다. 매년 12월 말 천북굴축제가 천북면 장은리 1066번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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