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랑 산티아고

   
서정균
ǻ
문예춘추사
   
15000
2014�� 08��



■ 책 소개
만남과 이별이 공존하는 800킬로미터의 길 위에서 아들과 아빠가 만드는 행복한 순례여행
“800킬로미터? 성민이가 힘들어서 걸을 수 있겠어? 학교는 어떻게 하고?”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 있는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여행. 어느 날 아빠는 9살 난 아들과 함께 800킬로미터를 도보로 이동하는 산티아고 순례여행을 떠난다. 아빠는 순례여행의 여러 가지 루트 중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택한다. 산티아고까지 가는 800킬로미터 길 위에 선 두 사람은 따뜻한 햇살이 주는 평온함과, 거센 비바람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피로함과, 비온 뒤 만나는 무지개를 향한 경이로움까지 모든 감정을 공유하며 서로를 더욱 의지하게 된다. ‘우리가 언제 또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물론 쉽지만은 않다. 돌발상황이 벌어지지만 그만큼 추억도 쌓인다. 아빠와 아들은 낯선 길을 걸으며 낯선 외국인들과도 친구가 되고 그렇게 만난 인연과 헤어지고, 다시 만나며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서로를 이해하고, 성장한다.
 
■ 저자 서정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둔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빠. 아홉 살짜리 아들 성민이와 함께 산티아고를 걷기 위해 오랫동안 조금씩 준비했을 만큼 세심한 아빠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호기심 많고 사람 좋아하는 성민이가 산티아고 여행을 통해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자연을 맛보며, 사람 사이의 정을 느끼는 아이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으며 나중에 대안학교를 꾸려 아이들에게 행복한 삶을 일깨워 주고 싶은 소박한 꿈이 있다. 성민이와 함께 걸으며 만든 36일간의 800킬로미터. 평생을 추억할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에 감사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며 앞으로 성민이와 또 어디를 같이 걸을까 고민 중이다.
 
■ 차례
프롤로그

 

01. 함께 도전해 보는 거야
02. 기다려, 산티아고. 우리가 간다
03. 800킬로미터를 향한 소중한 첫 발걸음
04. 아빠가 든든한 기둥이 되어 줄게
05. 간절히 바랐던 아이
06.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용서하는 것이다
07. 다리야, 어깨야, 고생이 많다
08. 성민이의 모습에서 여유를 되새긴다
09. 꿈을 가져라. 아빠도 가질게
10. 내 인생의 0.15퍼센트
11. 바람이 분다. 내 뒤를 따르렴
12. 기부를 한다는 것
13.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
14. 인사는 인상을 바꾼다
15. 눈송이가 벚꽃이 날리듯
16. 함께 누워 하늘을 보다
17.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칭찬과 박수를
18. 나이도 국경도 초월한다. 우린 친구다
19. 넓은 들판에 우뚝 선 나무가 되어 다오
20. 목적 없는 달리기에 행복은 사라져 간다
21. 비를 맞고 싶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22. 베풂의 이어달리기
23. 아빠도 그땐 그랬어
24. 나에겐 소중한 것이 너에겐 아닐 수도 있겠다
25. 지덕체智德體? 체덕지體德智!
26. 선생님, 우리 선생님
27. 삶에는 화살표가 없다. 네가 직접 그려야 해
28. 목표를 세워 봐. 넌 할 수 있어
29. 일곱 번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나라
30. 열심히 일하기 vs 과감하게 쉬기
31. 그래, 믿어야지
32. 고마운 친구들
33. 참았어야 했는데…….
34. 성민아, 고맙다. 사랑해!
35. 안녕, 클리머. 언젠가 다시 만나길
36. 스페인의 땅 끝에 서다
37. 아, 속상하다
38. 머리는 깨닫지 못했지만, 마음은 깨달았을 거야

 

에필로그
Camino de Santiago
 

 




아빠랑 산티아고


프롤로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10년 가까이 되었다. 우연히 접한 사진 한 장을 보고 막연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40일 가까운 시간을 내어 여행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어서 내 머릿속 한편에 겨자씨만한 크기로 자리만 잡고 있었다. 40일이 넘는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선 아내의 동의가 필요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나 혼자 여행을 가겠다고 하는 것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을 데리고 간다고 하는 게 아내를 설득하는 데 훨씬 수월할 것 같았다.


아들에게 넓은 대자연을 보여 주고, 외국에서 새로운 문화도 접해 보고, 800킬로미터라는 먼 길을 걸으면서 생각과 몸을 키우게 하려고 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냥 관광 삼아 떠나는 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가 전도를 위해 걸었던 순례길이니 명분도 좋다. 아내는 내 생각에 지지를 표했다. 아직 초등학교 4학년인 성민이가 800킬로미터를 걷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내와 순례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길을 우리가 걷게 된다면 정말로 멋진 경험과 추억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함께 도전해 보는 거야

결심을 했지만 장기 여행을 떠나려니 걸림돌이 너무 많다. 일단 40일가량 시간을 내야 하니 일은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하고, 금전적인 것도 문제다. 체력도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나와 성민이가 과연 800킬로미터를 걸을 수 있을지 자신감이 생겼다가도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게다가 성민이의 학교 수업도 한 달 반을 빠져야 한다. 결국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과감한 결단과 용기일 터. 가장 중요한 것을 이루기 위해, 두 번째 세 번째 중요한 것들은 포기하거나 미루기로 하면서 나는 아들과의 여행을 선택했다. 성민이의 학교 공부도 중요하고 일과 돈도 중요하지만 성민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나머지 것들보다 중요해. 이번이 기회야. 기회가 되었을 때 가야지 지금 아니면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잖아.


진짜 마지막 관문 하나가 더 남았다. 성민이가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면 지금까지 내가 계획하고 고민했던 것은 전부 물거품이 된다. 그냥 외국에 놀러 간다고 하면 좋다고 선뜻 따라나설 텐데 30일 이상 매일 걷기만 하는 여행이라고 하면 같이 가겠다고 할지 모르겠다.


"성민아, 아빠랑 여행 갈래?"

"여행이요? 어디로요?"

"스페인."

"스페인이요? 왜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야고보라는 분이 있잖아? 이분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걸었던 길이 스페인에 있는데, 성민이랑 같이 걸어 보고 싶어서."

"아,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할 때 나오는 야고보요? 얼마나 걸어야 되는데요?"

"800킬로미터인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리야."

"우와, 그렇게 멀어요? 그럼 며칠 동안 걸어야 돼요?"

"한 35일?"

"그렇게 오래요? 못 할 것 같아요."

"그래, 쉽지 않을 거야. 800킬로미터면 엄청 먼 거리니까."


일단 이 정도로 해둔다. 처음부터 너무 세게 나가면 거부감도 커질 수 있으니까. 성민이에게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우리 부자가 걷게 될지도 모르는 순례길에 관련된 책들을 읽는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 성민이에게 불쑥불쑥 스페인 이야기를 꺼냈고, 스페인 관련 책들을 일부러 성민이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두었다.


"아빠, 프랑스 책은 왜 있어요?"

"응,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려면 먼저 프랑스 파리에 가야 되거든."


산티아고 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 길이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st. jean Pied de Port)에서 출발하는 프랑스 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테제베(TGV) 고속열차를 타고 5시간을 이동한 후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생장에 도착해서 이곳에서 시작하는 루트인데, 만약 우리가 여행을 떠나게 되면 이왕 프랑스까지 간 김에 파리에서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 등을 구경할 생각이다.


"에펠탑이요? 아빠! 나 갈래요."

"800킬로미터 걸어야 되는데?"

"아, 맞다. 800미터 걸어야 되지."


"아빠, 한번 도전해 볼게요. 우리 같이 가요." 드디어 성민이가 결심을 했다. 사실 나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떠나지 않았었는데 생각보다 성민이 결심이 확고해 수월하게 여행 준비를 시작한다. 그렇게 파리로 가는 항공권을 예약하고 결제를 하면서 우리의 산티아고 순례길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기다려, 산티아고. 우리가 간다

봄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3월의 어느 날, 호기심 많은 성민이와 함께 인천공항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3일간 런던을 둘러보고 파리로 이동하는 여정이다. 여행의 첫 도시인 런던에 도착해서 3박 4일간 대영박물관, 내셔널갤러리, 옥스퍼드대학 등을 둘러보고 파리로 넘어와 2박 3일 동안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등의 주요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고 에펠탑과 베르사유궁전 등 유명 관광지에도 다녀왔다.


프랑스에서 맞이하는 셋째날인 3월 23일 아침, 이번 여행의 본래 목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시작하기 위해 몽파르나스(Montparnasse) 역에서 테제베 고속열차를 타고 5시간을 달려 바욘(bayonne) 역에 도착했다. 프랑스길을 시작하는 생장피에드포르로 가기 위해서다. 바욘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타기 위해 대기실에 있다가 한국에서 온 남녀 대학생들을 만났다. 여학생은 대학 4학년 휴학 중이라고 했고, 남학생은 5월에 군대를 가기 전에 이곳을 와 보고 싶었다고 했다. 아마도 이렇게 4명에서 내일 긴 여정의 시작을 함께 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열차를 타야 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전광판 어디에도 열차를 타라는 안내가 나오지 않는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답답해하던 찰나, 남학생이 누구에게 물어보고 왔는지 열차 대신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단다. 열차가 없거나 다니지 못하는 상황일 때 버스를 타고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오늘처럼 날씨가 맑은 날에 우리가 버스를 타게 될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오지도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기차역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할 뻔했다.


성민이와 함께 부랴부랴 버스에 올랐다. 승객 대부분은 생장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이다. 시골로 향하는 길이라 그런지 도로는 구불구불하고 과속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인지 중간중간 계속 나오는 로터리에서 둘러 가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어쩌지 못해 그리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푸른 초원을 보니 알퐁스 도데가 『별』이라는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이유가 충분히 이해될 정도로 아름답다.


생장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넘었고 이미 주변은 어둑어둑하다. 사람들을 따라 순례자 여권(Credential)을 받기 위해 30분 넘게 줄을 서서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등록을 해 주시는 할아버지가 영어를 전혀 못하시고 프랑스어로만 안내를 하신다. 순례자 여권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가는 길)를 걷는 순례자임을 증명해 주는 증서로,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에서 잘 수 있게 해주고, 마을마다 비치된 스탬프를 찍으면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그동안 내가 이렇게 걸어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순례자 여권을 받고 사무실을 나오면서 순례자의 상징인 가리비 껍데기를 가방에 매달았다.



# 1일째 800킬로미터를 향한 소중한 첫 발걸음

생장에 오기 전 런던과 파리에서 보낸 6일 동안 시차적응이 어느 정도는 되었는지 중간에 한 번만 깨고는 잘 잤다. 마룻바닥 삐걱대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에 눈을 떠 시계를 보니 7시가 다 되어 가고 우리 방 사람들도 서서히 일어나 순례길의 첫날을 준비한다.


오늘은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27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 보통 평지를 걷는 속도가 1시간에 4킬로미터 정도 된다고 볼 때 쉬는 시간 빼고 약 7시간을 가야 한다. 하지만 첫날이고, 오르막이 많은 길이니 아마도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면 좋지 않을 것 같아 나와 성민이가 수월하게 순례 여행을 시작할 수 있도록 택시를 불러 내 배낭은 오늘 묵을 알베르게로 보냈다. 그리고 내가 성민이 배낭을 메고 성민이는 배낭 없이 출발한다.


이제 성민이와 나는 아빠와 아들이기도 하면서, 함께 길을 걸으며 동고동락해야 하는 동반자가 된다. 산길과 차도를 넘나들지만 시골이라 그런지 차도에 차는 거의 다니지 않고 주변 풍경은 평화롭기만 하다. 기온은 약간 높고 주변에는 꽃이 예쁘게 피어 있어 한국의 늦봄 같은 풍경이다. 약 3시간 정도를 걸어서 한 마을에 도착해 작은 바(Bar)에 들어갔다.


식사를 마치고 계속 길을 걷다 드디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데 여기는 국경의 개념이 없는지 검문소는커녕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경찰서와 순찰차, 그리고 경찰서에 걸린 스페인 국기가 여기서부터 스페인입니다 하고 알려주는 게 전부이다.


오후가 되어 화창하던 해가 구름에 가려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니 걷기가 한결 수월하긴 한데,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고 아무래도 첫날이라 그런지 힘이 적잖이 든다. 오늘 목적지인 론세스바예스를 얼마 앞두고 나온 길. 독수리 한 마리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찍고 있는데, 독수리 뒤쪽으로 옅은 먹구름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비를 뿌린다.


비가 그친 후 우리는 차도를 따라 조금 내려와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했다. 총 8시간 30분 정도 걸려 도착한 론세스바예스의 공립 알베르게는 최근에 보수공사를 하여 시설이 좋다. "안녕?" 성민이는 1층 침대에 눕고 나는 그 위에 자리를 잡고 짐을 풀고 있는데 누군가 어색한 한국말로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옆에 있는 미국인이 우리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 인사를 한 것이다. "내 이름은 제이야. 부산 광안리에서 몇 달 동안 학원 강사를 했어." 낯선 미국인이 한국말을 하자 성민이의 재빠른 질문 공세가 이어졌지만 이 순례자는 한국말을 몇 마디밖에 할 줄 모른단다. 성민이는 영어를 못하고 제이는 한국말을 못하니 둘의 대화는 영양가 없이 끊어지고 만다. 식사를 하고 한국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침대로 돌아와 자려고 자리에 누웠는데 또박또박 발음하는 인사말이 들린다. "잘 자."



# 3일째 간절히 바랐던 아이

이렇게 길을 걷다 만나는 현지 주민들이 성민이를 보면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내가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리 만무하지만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 느낌은 있다. 순례자(peregrino)라는 단어가 나오면 너희는 순례 중이니?라는 말이고, 산티아고(santiago)라는 단어가 나오면 얘도 산티아고까지 가냐? 하는 질문이며 성민이를 가리키며 물을 때에는 얘는 몇 살이냐? 하는 질문일 것이다. 이곳 나이로 치면 성민이는 아직 9살이다.


"Nueve(아홉 살이요)."

역시나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또 뭐라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대단하다, 여행 잘해라라는 이야기겠지.

"Gracias(감사합니다)."

이렇게 대화가 마무리된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물어봤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질문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더 이상의 대화는 서로를 힘들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성민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 아마 현지인들도 이렇게 어린 순례자는 볼 기회가 많이 없었던 것일 테니 나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내가 멘 배낭의 무게는 첫째 날 3킬로그램, 둘째 날 11킬로그램, 오늘은 14킬로그램이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업어 달라고 하지 않는 게 어디냐고 생각하며 그나마 편한 길이 나오면 성민이한테 배낭을 주었다가 힘들어 하면 다시 받아서 메고 걸었더니 오늘 걸은 21킬로미터 중 15킬로미터 정도는 배낭 두 개를 다 메고 온 셈이 됐다. 어깨가 뻐근하다. 그렇게 6시간 정도 걸려 빰플로냐(Pamplona)에 도착했다. 이곳은 가끔 한국 TV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인데, 소떼를 골목에 풀어 놓고 사람들이 소들 앞으로 달리다가 피하는 산페르민 축제로 유명한 도시이다.  

 

아침에 빵 한 조각, 점심에 초콜릿 조금 먹고 지금까지 걸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시간이 어중간해져서 알베르게에 도착해 제대로 먹자고 했던 것이다. 오래 걸으려면 체력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잘 먹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해 성민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취사가 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쌀부터 사러 갔다.

외운 문장으로 질문을 하면 열에 아홉은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지만 물론 내가 알아들을 리 없다. 단지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서 그쪽으로 따라가니 큰 슈퍼마켓이 있어 쌀과 계란과 소시지를 사고 한국에서 가져온 즉석 육개장과 제육덮밥으로 늦은 점심 식사를 했다. 소시지에 계란만 묻혀서 부쳤을 뿐인데 어찌나 맛이 있던지!


아이가 생기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아이를 위해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그렇게 기뻐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아이를 보며 화를 내고, 속상한 일을 만드는 아이를 보고 실망을 한다. "엄마! 아빠!" 그 한마디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던 적도 있는데 이제는 내가 듣기 싫은 말을 반복하는 아이를 보며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아이도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본인의 생각과 뜻이 있는데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내게 이번 여행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번 여행 동안만이라도 성민이에게 잔소리 하지 않고 따뜻한 마음을 많이 나누며, 아빠에게 네가 얼마나 기쁨을 주는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 주고 싶다.



# 22일째 아빠에겐 소중한 것이 너에겐 아닐 수도 있겠다

살다 보면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선택을 해야 할 일들이 생긴다. 점심 식사로 무엇을 먹을까 하는 단순한 선택도 있지만 학교, 직장, 결혼, 자녀 문제처럼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이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어디까지 걸을 것이며, 어느 알베르게에서 묵을 것인지, 저녁 식사 때에는 무엇을 먹을 것인지 같은 사소한 것들은 물론이고, 길을 걷다가 갈림길을 만났을 때에는 거리나 환경, 몸 상태 등을 고려해서 방향을 정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알베르게에서 아침을 먹고 출발하여 6킬로미터 정도 가니 두 개의 화살표가 나온다. 직진을 하면 주로 차도 옆으로 걸어가게 되고, 오른쪽으로 가면 차도와 떨어진 시골길을 걷는 대신 1킬로미터를 더 걸어가야 한다. 2~3일 동안 차도 옆으로 많이 다니다 보니 멀어도 조용하고 좋은 풍경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성민아, 직진하면 차도 옆을 걸어야 하고, 오른쪽으로 가면 예쁜 시골길을 걸을 수 있는 대신 여긴 1킬로미터를 더 가야 해. 그래도 오늘은 시골길로 가자."

"저는 직진하고 싶어요."

"직진하면 차도 옆으로 또 가야 되니 시끄럽고 위험해."

"오른쪽으로 가면 1킬로미터 더 가야 되잖아요."

"1킬로미터라고 해 봤자 15분밖에 안 돼. 이쪽으로 가자. 먼저 갔다 온 사람이 그쪽 길이 별로였대."

"누가요? 차도로 가도 풍경이 좋은데."


쉽게 따라올 줄 알았는데 한참을 설득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대니까 짜증이 났다.

"그러면 너 혼자 그 길로 가. 아빠는 이쪽으로 갈 테니."


결국 성민이와 마음을 맞추지 못해 나는 내 선택을 아이에게 강요하며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걸어갔고 성민이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왔다. 내가 화가 났다는 걸 알아서 조심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도 못마땅하다는 것을 표현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찌감치 걸어오는 바람에 오늘 머무를 곳인 아스트로가(Astroga)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 몇 마디 하지 않았다.


화도 나고 좀 참고 아이에게 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너무 잘 아는데 몸으로는 실천이 잘 안 된다. 성민이가 "아빠가 가고 싶은 길로만 가고 있잖아요"라고 했던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나에겐 1킬로미터를 더 걷더라도 좋은 풍경이 우선이지만 성민이에게는 좋은 풍경은 별로 의미가 없고 조금이라도 적게 걷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이곳에 오기 몇 달 전부터 꼼꼼히 조사하고 계획을 세웠고, 현지 기상상황이나 주변 여건들을 살펴서 정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내린 결정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성민이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성민이에게 목소리를 높였던 건 결국 내 욕심과 자만 때문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래, 그럼 오늘은 성민이 가고 싶은 길로 가자"라고 했으면 서로 마음 상할 일 없이 오순도순 이야기도 하며 즐겁게 길을 걸었을 텐데 내가 만든 틀 안에 성민이가 들어와 주기를 바라기만 했으니 아이는 아이대로, 나는 나대로 상처만 받고 끝났다.


그런데 성민이와 거리를 두고 걸으니 마음은 불편하지만 의도치 않게 혼자 생각하며 걷는 시간이 생겼다. 앞에 펼쳐진 자연 속에 나 혼자 오롯이 서 있는 것 같다. 성민이와 나란히 걸을 땐 성민이를 살피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어느 정도 제약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모든 것을 혼자 대면하니 자유롭게 느껴진다. 성민이는 지금 혼자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면 좋으련만. 성민이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을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본다.


낮은 언덕을 올라가는데 벌써 햇볕이 따갑고 뜨거워 첫날 이후 두 번째로 점퍼를 벗고 걸었다. 중간에 들른 바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시원한 음료를 주문하며 정면을 바라보니 산 꼭대기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 있는 게 보인다. 더위를 식혀 주는 고마운 바람이 저곳에서 오는 걸까. 하늘은 푸르고 경치는 아름답다.


오늘 목적지인 아스트로가를 몇 킬로미터 앞두고 언덕을 올라가니 조그만 가판대에 음료수와 과일 등을 준비해서 순례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분이 있다. 원래 집은 바르셀로나에 있는데 순례자들을 만나며 나누는 것이 좋아서 이 일을 4년째 하고 있다고 한다. 전혀 부담 갖지 말고 원하는 것을 먹으라기에 성민이는 핫초코와 바나나 한 개를 먹었는데 떠날 때에는 잘 가라며 포옹까지 해 준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한 법인데 그저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섬기며 봉사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는 분인 것 같다. 저분이 나누는 사랑으로 인해 많은 순례자들이 조금 더 힘을 내 꼭 산티아고에 닿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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